거울과 소녀 1

소녀는 눈처럼 희었다. 여자는 눈 위에 다리를 벌리고 하혈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여느 아이처럼 핏빛의 붉은 아이가 아닌, 눈처럼 흰 아이, 마치 한 줄기의 더러운 피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희고 깨끗한 아이를 여자는 원했다.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는 얼음과도 같은.

여자는 눈이 뒤덮인 앞마당에 드러누워 홀로 출산하였다. 신음도 비명도 없이.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전조 없이 암매장된 생처럼, 불법으로 도축된 고기처럼.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처음 생리가 멎었을 때 그녀는 안개마을에 사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임신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속삭였으나 엄마는 장난스레 웃으며 그저 흔한 생리불순일 뿐이라고 말했다. 아니면 혹시, 관계를 가진 적이 있냐는 물음에 여자는 고개를 젓다가 흠칫 놀라 아니, 하고 소리쳤다.

그래, 그러면 괜찮아.

다음 달 여자는 여느 때와 같이 피를 흘렸다, 손가락을 찍어 맛본 피는 평소와 다름없이 짰다. 그러나 여자는 제 안에 무언가 불순하고 이질적이며 불연속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남몰래 산부인과에 찾아가 보았으나 의사는 그녀의 배를 보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강경한 부탁에 초음파 검사까지 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다는 말만을 의사는 조심스럽게 반복하였다.

그녀의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이면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그녀가 섹스도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에 현존하는 부조리들을 이해 없이 감내하는 방법을 익히며 살아왔고 정육점에 걸려 있지 않은 그녀, 물 속에 빠지지 않은 그녀, 느티나무에 매달려 있지 않은 그녀, 불타지 않는 그녀, 사형을 선고받지 않는 그녀, 감금되어 있지 않은 그녀, 낯선 손길에 도륙당하지 않는 그녀, 조각조각 해체되지 않는 그녀, 찢겨나가지 않는 그녀, 그녀를 믿는다고 중얼거리는 그 모든 부조리들. 세계는 언제나 그녀와 달랐고 그녀는 언제나 세계와 달랐는데, 어째서 세계는 모두 현상되는 것이라고 현상되는 것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현상 바깥의 세계가 정말 실재한다는 말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으니, 세계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부조리했고 지나치게 얕았으며 충분히 멀리 가지 못하였고, 무수한 사유와 고민, 혼란 끝에 그녀가 도출해낸 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흔한 결론뿐이었으니, 그녀는 설명하려는 자들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고, 대체 사물에 내재한 진리란 무엇인지, 표층으로 뚫고 나오는 진리에서 나온다는 현존의 아우라는 어떻게 발현되는 것인지,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는데,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그 진실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세계는 거짓일 뿐인데 무엇이 거짓이고 거짓이 아닌지. 진실의 판가름 게임에 그녀는 초대받은 적조차 없는데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그녀는 무엇을 홀로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누구나 쬐는 빛 속에서 성자를 잉태하였다는 성모의 전설을 믿을 수 없었고 자폐적인 세계 내에서의 정반합을 통해 한없이 고양되며 상승하는 세계의 종말조차도 믿을 수 없었으니, 있음과 있음 아님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녀는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는데, 어째서 누군가에게는 사유가 실존한다는 것인지. 그녀는 사유하지 않는데도, 사유는 그녀를 기억하지 않는데도, 그녀는 사유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는데도. 달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몽상하는 배춧잎과 개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안개, 버리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포장지, 찢어지기 위하여, 망가지기 위하여 생산된 모든 종이들. 나무들을 베어내는 목수의 도끼소리는 흥겹고 그의 옆에서 나무의 피냄새에 취한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자애로운 어머니들은 숲의 비린내에 도취되어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고 곧 무참하게 죽어버릴 것들 원목가구 옆에서 하염없이 자라나는 산세베리아.

모든 이미지를 발생시키는 가상의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유포되고 소멸되는 사실들. 정신과 세계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저마다의 매혹적이고 촘촘한 이론체계를 만들어내는 철학자들. 그러나 정신은 세계의 효과들일 뿐, 정신은 실로 세계에 속해있지도 않고 실재하지도 않고 세계를 조직하지도 않고 재현하지도 않는 그 무언가일 뿐, 여자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계의 감각들이 현현해내는 가상에 불과한 그림자에 잠겨 신음하였고 그녀의 배를 찢어내고 음문을 찢어내고 숨통을 찢어내고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핏덩어리.

그녀는 역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대었으나 겨울밤 그녀의 미약한 신음소리는 어디로도 전해지질 않았고 오직 받아들이는 자극들로만 용해되는 몸, 그녀의 몸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아무도, 심지어 그녀마저도 그녀의 몸을 그녀의 잉태를 그녀의 현상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 투명한 유리안구와도 같이 굴절된 하늘 너머로 비추어지는 별들을 그녀는 하나도 셀 수가 없었고 돌덩어리와도 같은 잔혹한 물질이 그녀의 내부를 찢어내며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잠자코 숨어있었던 기생생물, 그녀는 그것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숨을 쉬었으니, 마치 암을 부양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은둔자처럼, 제 몸이 오염된 유전의 코드로 잠식될 때까지 하염없는 고통을 감내하는 이교도처럼, 그녀는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으나 아이는 울지 않았고 해부대 위에서 아이들의 기만적인 손가락 아래 너덜거리는 쥐의 창자처럼, 그녀는 깔끔하게 뜯겨나가지 않는, 엉망진창으로 흡착되어 맞붙어있는 쥐의 창자를 세밀하게 분해해낼 참을성이 없어 어처구니 없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뭉툭한 메스 날로 창자를 갈기갈기 찢었으며 백지에 칸칸이 나누어진 명찰, 쥐의 허파의 자리와 쥐의 대장의 자리와 쥐의 심장의 자리, 그녀는 끔찍하게 뭉개져버린 창자를 보았고 그 창자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엉망진창으로 맞붙어버린 창자, 선생은 기관을 효용에 맞게 어여쁘게 분리해낸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플라스틱 구슬로 목걸이를 꿰어내듯 섬세하게 쥐의 장기를 분절해낸 어린 도살자들에게 만점을 주었으나 여자는 차마 절망적으로 난잡한 그녀의 종이를 내밀 수가 없었고 그녀가 본 것은 해부도가 아닌 살해의 현장이었으니, 그녀는 살해의 의학적 과학적 가치를 발견해낼 수 없었고 복잡한 행복에 부풀어오른 아이들의 불그스름한 얼굴 채점을 마친 종이를, 쥐의 육체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해부도를 선생은 미련 없이 거대한 박스에 밀어넣었으니, 잘 잘린 창자와 못 잘린 창자는 서로 엉겨붙었고 이제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들은 곧 버려질 것임을 여자는 알고 있었으니, 그녀는 살아 있는 쥐 한 마리를 몰래 훔쳐내던 사내아이들을 보았고 찍찍거리는 소리도 없이 죽음을 피하여 얌전히 숨어 있던 하얀 쥐를, 주머니 속에 두툼하게 삐져나와 숨을 몰아쉬던 쥐의 빨간 눈, 피처럼 붉고 흔들림 없이 명료하던 눈 그녀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였고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는 그 눈처럼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한없이 맑은 붉은색이 끔찍하게 두려워 출산을 전조하던 찢김을 모두 취소해버리고 싶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고 눈 위에 멍하게 드러누워 있는 그녀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엉금엉금 기어나가는 아이, 신음도 없이 비명도 없이 잠자코 새어나가는 아이, 아이의 머리는 쥐의 내장처럼 쥐의 눈처럼 새빨갰고 사실의 발생을 유예하고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무감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겨울밤, 더 섬세하고 치밀하며 비정한 절단이어야 했다.

새하얗고 고결한 꽃잎 속에 파묻힌 죽음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녀는 메스를 내팽개치고 다른 누군가에게 죽음의 집도를, 생의 폐기를 미루어둘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거북한 사람, 너무 거북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손을 들어요. 다른 평가로 대체해 줄 테니. 작년에도 여학생 하나가 구토를 하고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얼마나.

여자는 손을 들지 않았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연약한 생명을 얼마든지 해부하리라 다짐하였고 꼬마 의사들의 실험, 죽음을 벗겨내기 위한 개복이 아닌 죽음을 양산하기 위한 개복,

쥐들은 미친 듯이 유리판을 긁어대었고 절망적인 찍찍거림, 아이들은 숨죽여 낄낄거렸고 쥐들은 발톱이 다 뜯겨나갈 때까지 유리판을 긁어대었고 선생은 서른세 마리의 쥐들이 우글거리는 유리 케이지에 두툼한 담요를 덮었으니 순식간에 내려앉는 정적.

쥐들은 불이 꺼지면 이불 속에 들어가 눈을 감는 아이들처럼 얌전하게 잠에 들었고 침묵에 굴종하였으니, 더 이상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끽끽거리지 않았고 아무도 비명하지 않았고 발작적으로 흐느끼던 소리도 잦아들었고 여자는 제 배 위에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핏덩이를 경악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으니, 그녀의 배는 흥건한 붉은 물로 젖어들었고 아이는 점점 깨끗해졌으니, 여자는 아이가 그녀의 텅 빈 젖을 하릴없이 깨물고 빨아내는 것을 감내하였고 땀에 절은 가슴에서 미끄러진 아이가 눈밭을 기어다니는 모습을, 쥐처럼 새하얘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눈처럼 희었다.

소녀가 하얘지는 만큼 눈밭은 새빨갛게 젖어들었다. 밤을 찢어발기던 개들이 피냄새를 맡고 몰려들었을 때 여자는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으나 소년의 주머니에서 꿈틀거리며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붉은 눈, 여자의 손에서는 쥐의 창자 비린내가 가시질 않았고 오물과 피가 뒤섞여 진동하던 독특한 냄새, 여자는 쥐의 감은 눈을 떠올렸고 붉은 눈알을 손 안에서 뭉그러뜨리며 낄낄거리던 소리를 떠올렸고 더 많은 쥐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의 메스 아래에서 죽어나간 쥐들, 울타리 너머에서 서성거리던 개 한 마리가 낑낑거리며 머리를 들이밀었고 울타리를 넘어 달려오는 검은 개, 케이지 안으로 밀려드는 하얗고 작은 손들, 한없이 검기만 한 하늘은 두툼한 담요에 뒤덮인 케이지처럼 아득하기만 하였으니,

여자가 마지막 순간 생각한 것은 방금 낳은 아이도 아이의 미래도 부풀지 않던 뱃속에 은닉하던 아이의 애처로운 과거도 아닌, 실험용 쥐새끼의 새빨간 두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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