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소녀 2

사냥꾼은 셰퍼드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아이가 그를 두고 떠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냥꾼은 황급히 일어나 더러운 담요를 밀어내며 침대 밖으로 기어나왔다.

함께 사냥을 나설 때마다 그의 셰퍼드를 질시섞인 눈으로 들여다보던 사냥꾼들이 의심스러웠으나 그가 불시에 들어닥쳤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빌어먹을 무고한 눈으로 고개를 젓곤 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가 그의 아이를 납치했다는 사실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길이 잘 든 셰퍼드, 주인을 물지 않는 셰퍼드, 사냥의 귀재인 셰퍼드를 바라는 이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그의 아이는 유달리 털이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던 고귀한 종이었다. 유달리 긴 주둥이에 빼곡히 들어찬 날카로운 흰 이빨은 그가 유서깊은 가문에서 철저하게 관리되어 온 선별적인 번식으로 태어난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냥꾼은 사냥 때마다 뽐내듯 그의 셰퍼드를 데리고 나갔으며 그의 셰퍼드가 유일무이한 셰퍼드, 진짜 셰퍼드라는 의미에서 다른 하잘 것 없고 유치한 별명도 지어주지 않았다. 함께 사냥을 나가는 이들의 눈부시고 과중한 수확물에 비하여 그가 잡은 한두 마리의 참새가 과히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줄도 없이 그를 순종적으로 따라오는 셰퍼드만큼 찬란한 성과는 어디에도 없다는 데에 그뿐만 아니라 동료들 모두가 동의하였다.

셰퍼드는 그의 몸집보다 두세 배는 더 큰 산돼지도 용맹하게 물리쳐 잡아오고는 하였으며 그의 성과는 고스란히 사냥꾼의 수확이 되었기에, 또 셰퍼드와 사냥꾼 둘 다 그 사실을 의심치 않았기에 그의 행운은 더욱 크게 보였을 것이다.

사냥꾼은 옷도 챙겨입지 않고 슬리퍼에 발을 우겨넣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셰퍼드의 울음소리를 알고 있었다. 길고 애처로운 웅웅소리, 겨울바람과 유사하지만 질적으로 전혀 다른 소리, 다른 옥타브의 두 E flat처럼, 전혀 다른 소릿길을 따라 울려퍼지는 소리, 사냥꾼은 눈밭에 고개를 수그린 채 킁킁거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셰퍼드는 사냥꾼을 발견하고 놀란 듯 낑낑거리며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입가는 새빨간 핏물로 젖어 있었으며 목에는 그가 한 번도 건 적이 없는 목줄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이는 끔찍하게 말랐고 윤기가 돌던 털은 말라죽은 짚처럼 퍼석퍼석했다. 사냥꾼은 셰퍼드의 턱을 쓰다듬고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아이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흥분에 발기한 성기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자 셰퍼드는 미친 듯이 떨던 몸을 조금씩 이완시키며 얌전히 눈밭 위에 엎드렸다.

그는 잠옷차림으로 셰퍼드 옆에 주저앉아 잔뜩 엉킨 더러운 털을 조심스레 매만져주었다. 아이는 눈을 감고 쭈글쭈글하게 말라버린 더러운 코, 붉게 물든 코로 숨을 몰아쉬었다. 눈꺼풀 아래쪽에는 눈물이 흥건하게 맺혀 있었다. 사내는 꽁꽁 언 손으로 셰퍼드의 눈물을 훔쳐내었다.

사내가 바지에 묻은 눈을 털어내는 사이 셰퍼드는 사내를 이끌듯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내는 셰퍼드가 여느때와 같이 자신의 사냥감을 확인시키고 그에게 바치려는 줄 알고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나섰다. 그리고 처참하게 배가 뜯겨나간 여자, 눈과 피에 뒤덮인 눈부신 나신, 디오니소스의 향연에 바쳐진 암소처럼 아름다운 몸.

허공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했으며 그녀의 찢겨나간 배, 그 아래로 이어진 꽃잎들은 늦여름의 장미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사냥꾼은 유리관에 갇혀 있는 동화 속 여인처럼 차가운 그녀의 입술에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순결한 죽음에는 파리 한 마리 꼬여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사냥꾼은 그녀가 신의 아이를 잉태한 암소만큼이나 아름다우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냥꾼은 죽을 때까지 그의 머리 위를 떠돌 매혹적인 악몽의 생김새를 심부에 밀어넣어 인박으려는 듯 여자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는 별자리에 골몰하는 목자들처럼, 수열에 몰두하는 수학자나 항성 간의 거리에 매혹당한 하프 연주가처럼 그렇게 여자에게 몰두하였다.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제 속에서 흘러넘친 붉은 꽃잎을 그의 목 안으로 넘겨줄 것만 같은 차가운 입술. 그는 여자의 입속에 두툼한 혀를 밀어넣고 그녀의 내부를 맛보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와 한 몸이었던 것처럼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여자의 찢어진 몸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물과 내장이 사내의 잠옷에, 드러난 팔뚝과 발목에 엉겨붙었다.

그녀의 내부는 아직 따뜻했다.

셰퍼드는 그들의 밀회 옆에 차분히 주저앉아 있었다. 두 눈을 계속해서 파고드는 겨울바람의 날카로운 칼날에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흘리며. 눈덩이처럼 새하얀 살이 사냥꾼의 품속으로 파고들 때까지 그는 그렇게 여자의 입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여자의 눈처럼, 한없이 검고 투명한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사내는 마법과도 같은 모든 상황을 일시에 깨달았다. 그는 여자의 죽음 속에서 태어난 삶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미소지었다.

셰퍼드는 사내의 의중을 파악한 듯 죽은 여자의 곁에 얌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여자의 시신을 파헤치지도 찢어발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제 사내에게 양도된 사내의 포획물이었기에, 셰퍼드는 언제나 그렇듯 목줄 없이도 사내의 뜻에 굴종하였다.

사냥꾼이 눈처럼 새하얀 여자, 칼날처럼 아린 눈속에서도 살아남은 여자를 끌어안고 집으로 달려가 그가 가진 가장 부드러운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내고 담요를 덮어준 뒤 매혹적인 붉은 불, 무수한 나무들을 홀려들었던 그 불가에 내려놓고서 죽은 여자, 최초의 여자의 자리로 재빨리 뛰어나갈 때까지 셰퍼드는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사내는 셰퍼드의 입가에 말라붙은 피, 이제는 바스라진 가루로 변해버린 붉은 균열을 살펴본 뒤, 그가 사내의 사냥감을 탐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그의 충성을 치하하듯 턱과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사내는 여자의 몸을 들쳐 업고 인가 바깥쪽에 둘러싸인 산 깊은 곳, 얼음강까지 걸어갔다.

그녀의 새하얀 갈비뼈가 사내의 등을 압박하였고 풀어헤쳐진 가죽주머니에서는 새빨간 꽃들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넘실거렸지만 냉동고 같은 겨울밤에 꽁꽁 얼어붙은 시신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사냥꾼은 푸른 심장처럼 깊이 얼어붙은 강을 깨어내고 그 속에 여자를 조심스럽게 밀어넣었다. 그녀가 영원과도 같은 한 철의 얼음 관 속에 갇히도록. 사내의 비밀로 침잠하도록. 누구도 그녀의 비극을 함부로 꺼내보지 못하도록. 새까맣게 얼어붙은 물길 속으로 떠내려간 그녀의 익사체를 아무도 겁탈하고 입맞추고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냥꾼이 작고 아늑한 주택으로 돌아왔을 때, 전기적인 신호를 양식삼아 불타오르는 가상의 모닥불 이미지는 어두운 방 안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듯 새빨갛게 번져가고 있었으며 실체 없는 붉은 이미지 앞에서 피처럼 붉고 따스하게 물든 투명한 눈은 당장이라도 평평한 벽난로의 가상 속에 뛰어들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사냥꾼은 어느덧 따끈하게 달아오른, 아니 불덩이처럼 뜨거운 아이의 흰 몸을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그녀를 기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냥꾼은 3개월 무렵에 셰퍼드를 데려다 키웠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녀를 길렀다. 사냥용 총과 트랩, 쥐약과 가재도구들을 마구잡이로 적재하여 보관하던 창고를 말끔하게 정리하였고 그 속에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법한 작고 부드러운 공과 우유맛이 나는 개껌, 급수대와 사료통을 놓아두었다. 사료통에는 영아용 분유를 뜨거운 물에 풀어넣어 언제든지 아이가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사내는 셰퍼드와 사람 아이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것, 늑대들과 함께 살아남은 갓난아기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하루종일 끌어안고 어르고 달래지 않아도, 모체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신선한 젖을 빨지 않아도 여자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도, 어미의 죽음 곁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아이였다.

불덩이 같던 아이의 열은 하루 사이에 금세 가라앉았다. 여자를 제 투명한 추억의 관속에 가라앉힌 밤이 지나자마자 사냥꾼은 남몰래 아이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갓난아기를 데려왔다고 해서 그를 특별히 의심하는 이는 없을 테지만-그의 아이를 낳아줄 창부들은 산 곳곳, 도시 곳곳에 있었기에, 실제로 이름도 모르는 어미로부터 아이를 데려와 양육하는 동료 사냥꾼들도 몇 명 있었다- 그는 오롯이 제 것인 여자의 죽음과 그로부터 기적적으로 태어난 그녀의 삶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누설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 악몽만은 온전히 그의 비밀로 삼고 싶었기에 누구에게도 어린 여자에 대하여 발설하지 않았다.

아이는 놀랄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여자의 죽음과 삶에 엉킨 비밀에 대하여 밤의 정령으로부터 신성한 침묵을 언도받은 것처럼,

아이는 하루도 채 지나기 전에 무릎과 양손으로 기어가는 법을 터득했다. 사냥꾼이 붉은 전기 모닥불 앞에 앉아 여자의 죽음에 몰두하는 동안 아이는 게걸스레 먹고 마시고 기저귀 속에 변을 싸놓았다. 사냥꾼이 저녁 식사 전에 그녀의 기저귀를 갈고 급수대와 사료통을 다시 채워주기 위해 창고로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투명한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길게 구부려 왜곡시키고는 했다.

그녀의 무릎은 하루종일 지칠 줄 모르고 기어다닌 탓에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내가 손을 뻗자 그녀는 주춤거리다가 사내의 품 속으로 기어들었다. 사내의 가슴팍이 뜨끈하게 젖어들었다. 사냥꾼은 처음으로 그녀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겨울에는 사냥을 할 수 없기에 그에겐 특별히 할 일이 없었음에도 사내는 아침과 저녁 시간이 아니면 어린 그녀를 살피러 가지 않았다. 그녀가 사냥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의 투명한 검은 눈이 그가 사랑하는 여인, 그의 투명한 유리관 속으로 파묻은 죽은 여인의 눈과 같은 재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어쩐 일인지 물처럼 일렁이는 붉은 불로부터 헤어날 수 없었다.

그는 상실되어 버린 그녀, 다시는 어루만질 수도 입맞출 수도 없는 그녀, 처음부터 죽음에서 태어나고 죽음으로 멀어져간 것만 같은 그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숨 쉰 적이 없고 경련한 적이 없는 것만 같은, 죽음과 분리할 수 없는 그녀, 선명한 죽음의 이미지에 하루에 열댓 시간 가까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살아 있는 그녀는 멱을 끊고 속을 찢어낼, 억지로 펼쳐낼 사냥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 셰퍼드는 사내가 불 속에 침잠하여 있는 동안 그녀와 어울려 놀곤 했다. 어린 그녀는 셰퍼드의 행위와 울음소리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요구할 것이 있으면 개처럼 낑낑거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악몽과 변이 몸을 흠뻑 적시고 기저귀 바깥까지 흘러나가기 시작하면 그녀는 개처럼 캉캉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서재 한구석에서 발견한, 누렇게 변해버린 옛날 동화책을 그녀의 옆에 펼쳐놓고 사내가 여인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소리로 읽어내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기적처럼 그의 입술 모양을, 그의 목소리를, 그의 발성을 더듬더듬 따라하기 시작했다.

거울아 가여운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말해다오, 거울은 생긋이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눈처럼 아름다운 여자지요. 눈처럼 새하얗고 눈처럼 시꺼멓고 눈처럼 차가운 여자, 죽은 여자만큼 아름다운 건 세상에 없어요.

소녀는 눈처럼 새하얀 공주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유독 좋아했다. 사냥꾼은 아마 그녀가 새하얀 눈의 이미지, 눈처럼 매혹적인 죽음의 이미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의 대상이 눈과 여자와 죽음이기 때문에 유독 그 이야기에 천착하는 것이리라고 짐작하였다.

사냥꾼은 그녀에게 거울이라는 울림이 지시하는 바, 거울의 이미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여자의 몸집만 한 화장용 거울을 사 창고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셰퍼드는 거울상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비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의 눈에는 거울에 비추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어린 여자는 눈에 띌 정도로 거울에 매혹되었다. 한동안 그녀는 사료를 먹고 물을 마시는 일도, 셰퍼드를 장난스럽게 깨물고 그의 꼬리를 어루만지는 일도 잊고 거울만 바라보곤 했다. 마치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무수한 세계의 이야기를, 세상 곳곳에 산재된 거울 속에 비추어지는 비밀들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냥꾼은 그녀가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영상이 그가 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울 속에서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새하얀 얼굴이 눈의 여왕, 죽음의 이미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사냥꾼은 창고에 들르는 시간마다 소녀의 곁에 앉아 단단한 수면 아래에서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죽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곤 하였다. 차고 매끄러운 거울 아래에 비추어진 얼굴은 영락없이 그녀였다. 얼음 속에 가라앉은 투명한 얼굴, 수초처럼 그를 옭아맨 죽음의 매혹적인 이미지.

소녀는 거울 속에 있는 심연과도 같은 신비로운 얼굴, 눈부시게 하얀 얼굴이 그녀의 엄마이며 그녀라는 사실을 배웠다. 사내는 저녁마다 소녀의 곁에 앉아 동화책, 철학책, 사상서와 역사책, 가전제품 설명서와 연극론, 미술비평서와 소설, 시를 가리지 않고 읽어 주었고 소녀는 경험한 적 없는 세계의 언어를 기적처럼 순식간에 익혀나갔다. 그녀는 자연과학과 실용서, 법체계와 경제서적을 읽을 때에는 간신히 사내의 입모양과 글자의 모양 사이의 연관관계만 파악하여 더듬더듬 사내를 따라 읽어가는 수준에 그쳤지만, 철학서적을 읽을 때에는, 특히 극단적으로 현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문구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한 이해력을 드러내었다. 소녀는 헤겔의 관념론과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을 단숨에 파악하였으며 그녀의 이해는 순전한 직관에 따른 것임을 시인하였다. 세계에 대한, 외부 현상에 대한 기만적인 믿음에 현혹되지 않은 그녀, 철저히 자폐적인 세계 속에서만 생활한 그녀는 오히려 관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사고에 능숙한 것처럼 보였다. 순수한 정신, 절대정신을 사유하는 데에 있어 물질적인 타자는 필요치 않음을 증명하듯 그녀는 스스로 거울 속에서 현상해낸 관념적인 타자와의 긴장과 화합을 통해, 사내가 들려준 순전히 추상적이며 불가해하기까지 한 관념들의 울림들을 그녀 나름의 규칙에 따라 융합하고 견주어보는 철학적인 작업을 통하여 정신적인 지양과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냥꾼은 유리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소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언어를 익혀나가고 있었다. 사냥꾼이 한 일은 저녁시간, 그녀의 사료와 급수대를 보충하고 배변패드-아기용 기저귀를 벗기고 중형 배변패드로 바꾼 지 한 달쯤 되었다-를 갈기 위해 방문하는 김에 그녀의 곁에서 책을 한 시간 정도 읽어준 것이 다인데도, 그녀는 그가 한 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문자들을 읽어내렸다. 시험삼아 그녀에게 프랑스어로 된 책을 건네주었을 때에도 소녀는 막힘없이 술술 읽어내렸다.

사냥꾼은 학교에 다닐 때 일주일에 한두 시간 프랑스어 교과서를 읽은 것이 다이므로 그녀가 유창하게 내뱉는 언어를 경이에 차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사냥꾼은 소녀가 그의 이해범위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 그녀의 새하얀 피부 속에서 그가 짐작도 할 수 없는 불쾌한 상념의 덩어리들이 들끓며 흘러나오는 것, 그래서 그녀가 나날이 아름답게, 매혹적으로, 불쾌하게 변모해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내는 소녀의 창고에 서재를 옮겨 주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천장의 어둑한 전구도 새로 갈았고 노트와 펜도 구해다 주었다. 소녀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책의 내용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글자들을 모사하였다. 그러나 필사의 방식은 놀랍도록 효율적이며 간단하였으므로 소녀에게 일반적인 필기체를 가르쳐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사내는 죽음의 이면을 보듯 여자의 삶에 매혹적으로 빨려들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해 골몰하는 것, 죽음과 몰락을 숭배하는 것은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그의 우주였다.

검은 물과도 같은 전기 불의 울렁거림 속에서 사내는 여자의 죽음을, 그의 첫 이미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흐르는 균열 속에서 춤을 추듯 일렁거리는, 그러나 고요한 여자를 묵묵히 응시했다. 여자는 사내에게 응시를 되돌려주지 않았으나 그는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죽음을, 그녀의 소재를, 그녀의 이미지를 가진 이는 자신뿐이었으니까. 그녀는 그만의 비밀이었으니까.

소녀가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녀의 노트가 기묘한 문양들로 빼곡이 차있는 것을 발견하던 때였다. 사냥꾼이 별생각 없이 그녀의 노트를 펼쳤을 때 소녀는 수줍게 그의 소맷자락을 잡고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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