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1

인체의 코드를 복제해낼 방법을 찾게 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존재를 백업해두기를 원했다. 생의 중요한 기억들을 저보다 단단한 사물 위에 기록해놓으려 애쓰던 오랜 습성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나 특권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고대부터 살아남은 글은, 삼천 년 전부터 전해져내려오는 글은 언제나 몇몇 작품뿐이었듯, 바로 이 순간 써내려가는 글이 아닌 수천 년 전에 누군가 특별한 이가 써내려간 특별한 글이 이 순간 읽히듯. 영원에 가까운 운을 손에 넣지 못한 자들의 불운은 단 하루조차 전해지지 못했다. 아홉 번의 이혼을 하고 사별을 하며 자식을 잃고 비극적인 사랑 끝에 불 속에서 익사하여 생을 마감한 여배우의 차라리 관능적일 정도로 매혹적인 삶을 불운이 아닌 지독한 행운으로 느끼는 이들은 기꺼이 그 여배우가 되기 위해, 그녀의 참혹한 생을 도둑질하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평범한 불운, 그리 아름답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은 고통은 그녀의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권태와도 뒤바꿀 수 없었다. 아픔을 전유하듯 불운을 소유하고 비극을 살고자 하는 이들, 가장 참혹한 비극으로라도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이들 모두가 배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듯, 제 지난한 생을 기록하고 퍼뜨리고자, 그래서 언젠가는 알려지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욕망을 해갈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소원이 부질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해야만 했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감정은 체념뿐이라는 사실을.

집 안에서 바이올린의 목을 움켜쥐고 한때 그녀의 우수와 고독을 울려주었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녀를 전해주지 못했던 그 기만적인 몸뚱이를 테이블에 내려쳐 깨뜨리는 소녀의 울음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행위는 퍼포먼스가 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진 이들은 수천 쌍의 시선들을 소유할 수 있다. 언젠가 그 시선들이 모두 떨어져나간 뒤에도 돌이켜 볼 추억도 있다. 하지만 소녀와 같이 평범한 불운을 살아가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어딘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가 잉태하고 배설한 아이들은 끔찍하게도 못생겼지만 그 기형에 관능을 느끼고 그들을 겁탈하기 위해 그녀에게 값을 치르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제가 낳은 흉측한 아이들을-어쩌면 그들이 너무도 평범하게 못생겼기 때문에?- 어느 시장에도 내놓지 못했다. 사창가에서도 그 애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벌레먹은 사과를 파는 노파도 그녀의 이야기를 사지 않았다. 그녀는 전단지를 건네듯이 그녀의 아이들을 품안 가득 끌어안고 미친 여자처럼 상점 주위를 배회하면서 행인들에게 그녀의 가엾은 아이들을 공짜로 넘기려고 했으나 그녀의 글을 받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그녀를, 그녀의 아이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격적인 절망과 함께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이 가엾은 애들에게도 보지가 달려 있는데! 그 애들도 배설을 하고 구토를 하고 지금은 아니어도 곧 생리를 할 거고 관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역겨운 짓거리들을 해낼 수 있는데. 이 애들도 장기를 가지고 있고 여린 피부를 가지고 있으니 누구라도 원한다면 이 애들의 배를 갈라서 텐트 안으로 들어가 어린 아이들을 살해하던 그 무참한 손으로 이 애들의 연약하고 붉은 속살을 파헤칠 수 있을 텐데. 이 애들도 비명을 지르고 흐느끼고 어쩌면 황홀과 절망을 느끼면서 죽어갈 수 있을 텐데. 이 애들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데.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 입맞춤도 성교도 없이 낳은 아이들을 원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관청에라도 아이들을 팔아넘기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성의 관리들은 검은 먹지로 덧대어진 입을 벌려 그녀에게 신분증과 서류를 요구하였지만 소녀는 아무런 말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되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너무나 수월하게 그들의 요구를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똑바로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오로지 그녀뿐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변을 지리는 아이들을 축축하게 젖은 품 안에 밀어담고 관청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천상의 식물들이 내려앉은 천구에는 대지의 내장들이 이리저리 헤엄치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그들의 시야에 소녀가 들어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치도 느낄 필요가 없었으나 소녀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아무도 소녀를 돌아보지 않았고 아무도 소녀를 끌어안지 않았으며 아무도 소녀를 뒤따라오지 않았다.

소녀는 굴욕적인 냄새를 질질거리며 집까지 걸어갔다. 여관과 성과 숲과 학교는 모두 무대장치처럼 검고 기이한 생김을 하고 있었다. 젖은 목재의 쿱쿱한 향기가 풍겼다. 소녀는 더러운 흙 위에 애들을 내려놓고 제 발로 걷도록 시켰다. 몸을 잔뜩 움츠리며 징그러운 소리로 미야오 울던 아이들은 소녀의 발에 머리를 문지르며 범속하게 흉측한 얼굴을 내보였다. 가슴이 잘려나간 소나무에서 풍기는 송진 냄새, 환부에서 흘러내리는 피 섞인 젖의 악취, 소녀는 산산조각난 바이올린의 등을 적셨던 부드럽고 아름다운 단풍나무의 물결을 떠올렸다. 바이올린이 깨어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럼에도 악몽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소녀가 느꼈던 깊은 연민과 혐오의 메스꺼운 감정을 설명할만한 언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들은 검고 작은 머리로 미야오 하고 울고 있었다. 소녀가 낳은 것은 잿빛의 통통한 쥐새끼들이었는데 그것들은 어느새 소녀의 발치에서 길고 아름다운 꼬리를 흔들며 고양이의 언어로 흐느끼고 있었다. 소녀는 이제 한 마리의 쥐새끼도, 손톱만큼 작은 벌레도 임신할 자신이 없었다. 소녀의 작은 상반신에 기형적으로 매달린 거대한 유방과 터무니없이 늘어나버린 자궁, 쥐의 발톱에 긁혀 생리도 없이 출혈하는 질구와 습관처럼 배어든 메스꺼움. 임신하지 않고, 아무것도 낳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소녀는 올빼미처럼 샛노랗고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흉측하고 평범한 아이들을 팔아넘길 곳이 있을까. 그녀는 다시 장에 가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어디에 가든 누구든 그녀의 멍청한 아이들을 거절하리라는 사실 역시. 삶과 실존을 애증하는 이라면, 성을 불태우고 도망쳐온 호수에 투신하는 대신 그 앞에서 담배를 빼어무는 소년이라면 매일같이 장에 갔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싸구려 사창가에 아이들을 팔아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헐거워진 자궁과 축 늘어진 젖가슴만으로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렸다. 그녀가 낳은 쥐새끼들은 이미 너무나 많았고 거기에 징그러운 털복숭이 문장을 덧붙인다고 해서 좋아할 이들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쥐들은 너무 많아, 차마 죽일 수 없는 자들이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겠고 이미 태어나버린 애들이라면 없는 체 무시하는 게 최선이겠지, 하고 소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낳아버린 것을 이제와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가련한 새끼들을 물어 죽인 고양이의 언어로 울어대는 이 멍청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가엾은 것들. 밤처럼 새까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얼굴들을 소녀의 가느다란 종아리에 하염없이 문질러대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소녀는 중얼거렸다. 아무도 너희를 겁간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너희의 부드러운 살을 가르고 입술을 묻고 너희를 위해 울어주지 않을 거야. 너희는 뒷골목의 싸구려 무대에도 설 수 없을 거야. 너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갈 거야. 울음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소녀는 순간 제 쓸모없는 귀가 먹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날카로운 얼음송곳을 귓속에 박아대는 듯한 절망적인 통증.

소녀는 밤의 얼룩에 착색된 얼룩덜룩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언젠가 무대에 오를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 하얀 조명과 어울리도록 반질반질하게 분을 바르고 수천 쌍의 눈빛들을, 연기같이 무한히 결핍된 작은 빛무리들의 희미한 웅성거림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것이라고 믿었던 얼굴, 그녀가 볼 수 없는 얼굴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얼굴. 그녀가 낳은 아이를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낳은 아이를 겁간하고 죽여줄 수 있는 사람은 소녀밖에는 없었다. 엉망으로 깨진 거울조각으로 아이들의 엷은 목을 긋고 환부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밀어넣어 아득한 침묵을 연주할 수 있는 이는. 차라리 고통스러울 정도로 간단할 것이다. 아무도 그녀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고 심지어는 초경조차 하지 않은 소녀이므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따라서 그녀가 죽인 아이도 실제로는 죽은 적이 없음을, 모두 소녀의 가련한 환상일 뿐이라는 것, 그녀의 아이들의 고독과 고통을 증명할 수 없듯 그들의 죽음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 그녀를 대신하여 증명해 줄 것이다.

소녀는 부드러운 살갗 깊숙이 밀어넣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비명과도 같은 살의 음률을 연주했다. 참을 수 없는 역겨움. 언제나. 언제고 밀려오는 메스꺼움. 소녀는 밤의 자궁에서 또다시 두어 마리의 아이를 구토해냈다. 쥐새끼들은 그녀의 텅 빈 젖을 향해 달겨들며 찍찍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쥐새끼를 낳는 자신이 쥐새끼라는 사실을, 이토록 하염없이 출산하는 천박한 몸이 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힘겹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깨끗이 씻기고 소독하여도 쥐새끼는 천성적으로 더러운 것이다. 소녀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상처주지 않기 위해 비누거품을 내어 입속과 귓속, 항문까지 말끔하게 씻어내었던 쥐새끼의 흉측한 아가리를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 가여운 새끼들을 가슴팍 안에 밀어넣고 관청에 갔을 때 경악하며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 자지러지게 울면서 기절하던 소년과 그녀의 가슴을 만지기 위해 만지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와 가련한 손을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던 소녀. 그녀의 쥐새끼를 사랑하려 했기에, 그러나 사랑할 수 없었기에 상처받던 사람들.

그녀는 쥐새끼를 낳아대는 한 아무도 그녀의 자식들을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사유는 역겨움을 참고 감내하기에는 너무도 얕고 조악하였기에. 그다지 매혹적이지도 황홀하지도 않은 병균들을 사서 감염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이를 팔고 싶다면 쥐새끼를 낳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쥐새끼인데, 쥐새끼가 아닌 다른 무엇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 쥐새끼를 잡아먹고 고양이의 언어로 미야오 울어대는 도둑맞은 새끼들을? 아냐, 차라리 말끔히 씻겨내고 씻겨내고 또 씻겨내어 짙은 잿빛의 털이 희멀건 색으로 탈색되고 가느다란 꼬리가 닳아 없어지고 나면 그들을 애완용의 햄스터로 오로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인접한 종으로 속여 팔아넘길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들이 쥐새끼라는 사실을, 매년 열댓마리의 새끼들을 배고 낳아대며 끝없이 번식하는 끔찍한 병균 덩어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천성적인 불결함을 타고났음을 감출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것으로 좋은가? 고양이와 햄스터를 팔아넘긴다고 해서 그녀가 쥐새끼를 낳았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을까? 길쭉한 주둥이와 검고 무기질적인 눈, 아무리 씻겨내도 떨어지지 않는 작고 가느다란 꼬리, 무엇보다도 찍찍, 찍, 찍거리는 울음소리. 오로지 경멸받거나 연민받기 위해 태어난 더러운 육체. 소녀는 천박한 역겨움에 치를 떨며 몸을 떨었다. 의미를 구걸하며 울부짖는,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랑을, 연민을 얻기 위해 구걸하며 카메라 앞에서 제 헐벗고 앙상하며 가엾고 무력한 나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오지의 아이들처럼. 새카맣고 새카만, 하염없이 새카만 눈동자들.

교사는 소녀의 감지 않아 더러운 머리를 주저하며 쓰다듬었다. 너무 늦기 전에 제출하라고 재촉하며. 무엇을? 소녀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반항적으로 올려다보며 되물으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기억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담은 사진을 제출하는 것이 그녀와 함께 같은 교실에 앉아 있는 열댓 명의 아이들에게 부과된 과제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장난스럽게 묻는 젊은 교사에게 소녀는 쥐들에 대해, 그녀가 낳고도 버리지는 못했던 쥐들에 대해, 아비 없는 애들에 대해, 지금도 그녀의 말라빠진 가슴 속에서 갈빛의 젖꼭지에 이를 박고 흐느끼는 쥐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으나 그리할 수 없었다. 꿈의 세계에서는 다른 꿈에 대해 선언하는 일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소녀는 코코펠리에 대해서도 고양이의 울음을 배운 쥐들에 대해서도 사창가에서도 거절당한 가여운 아이들에 대해서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사는, 그녀와 같은 꿈을 공유하는 저 의미심장하며 무의미한 인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좋아, 하고 교사는 앳된 청년의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기억하고 싶은 것, 잊을 수 없는 것, 잊어야 할 것을 믿을 수 없는 것, 하지만 소중한 것, 잊지 못하는 것보다는 언젠가 잊을 수밖에 없는 것, 사라질 것, 지금이 아니라면 잊고야 말 것을 포착하는 것이 좋을 거란다. 앨범의 양은 한정되어 있고 이미 잊지 못할 것, 언제고 다시 반복될 것을 또 다시 잡아채어 포착하는 건 낭비일 뿐이니까. 너는 그리 사치스러운 형편이 아니니 신중해야 한단다. 그러나 너무 신중해서는 안 돼. 오늘 안에는 제출하는 게 좋겠어. 지금 당장이라도 이 부조리한 꿈을 파기할 수 있게. 처음부터 잘못 쓰인 이야기를 불태워버릴 수 있게. 네가 제출할 사진과 함께 우리가 한 장씩 포착한 장면과 함께 모두 불태워버리면 얘야, 꿈 속을 떠돌던 은밀한 쥐새끼의 새까만 눈도, 네 늘어난 자궁도 전염병을 욕망하는 배우들도 모두 재로 변해버리면 그때는 새하얀 잿더미 속에 묻혀 있는 아름다운 보물에 대해 상상할 수도 있지 않겠니. 사막에 있는 우물이 별보다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빛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과 함께 타들어가는 관리들 그들의 걸레짝처럼 젖은 음울한 낯도 네 가엾고 사랑스러운 쥐새끼들도 모두 타들어가버리면 우린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성과 그 속에 먼지처럼 쌓여든 네 아이들을 불타가면서 황홀한 악취를 풍기는 네 아이들을 기억할 수도 있을텐데, 또 전설 속의 동물이나 황제에게 진상된 희귀한 코끼리와 같이 비현실적인 것도 지양했으면 좋겠어. 우리의 꿈에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만남은 생겨날 수 없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벌써 다 제출한 것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청년은 달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애들은 오늘 아침에 다 제출했단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어쩌면 그 전날에, 어쩌면 한 달 전에, 어쩌면 네가 이곳에 처음 오기도 전에, 어쩌면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쩌면 우리의 만남이, 너의 존재가 발생하기도 전에. 누구도 너를 기대하지 않을 때 그들은 최후의 순간을 벌써 정해놓았단다.

하지만 현실에는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 없어요. 소녀는 비열한 음모꾼처럼 교사의 정념과 불안을, 인간의 동력장치인 고통을 치밀하게 계산하며 은밀한 어투로 속삭였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라도 괜찮나요?

교사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글쎄, 네게 더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남아 있을까?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꾸지 못한 꿈이라면 영영 맞닥뜨릴 수 없을 가능성이 가장 크단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정도로. 아무리 애걸하고 호소한다고 해서 네게 새로운 배역이 주어지는 건 아니야. 나도 교사 역할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단다. 난 누구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매혹적인 여배우가 되고 싶었지. 하지만 난 여배우를 연기하기에는 부적합한 생김과 출생을 가지고 있었어.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아무런 조심성 없이 아주 어릴 적부터 노출하고 말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방법도 없었지, 하지만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막 태어났을 때, 난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내가 여배우가 되고 싶은지 남배우가 되고 싶은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깜깜한 시야와 지독한 침묵 속에서 앞으로 평생토록 기억하지 못할 울음을 내뱉어내는 중이었고 그 사이에 이미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여배우가 되고 싶은지 남배우가 되고 싶은지 결정한 사람들은 내 가랑이 사이에 늘어진 작고 붉은 생식기의 모양을 감별해내고 말았으니까. 여배우가 되겠다는 건 아니에요.

이제 와서, 소녀는 황급히 덧붙였다. 남배우가 되겠다는 말도 아니고요. 그저 아직, 소녀는 제 언어의 무의미성과 모순성을 가리기 위하여, 동시에 은밀한 암시를 표면까지 끌어올리기 위하여 음울한 침묵으로 말을 맺었다.

소녀의 곁을 정방형으로 둘러싼 아이들은 이제는 필름도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사진기에 눈을 갖다붙이고 뒤집어진 형상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룩과도 같은 빛의 형상을 어떻게든 끄집어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고 또 체념하는 가려진 눈빛들. 부질없이 맺혀든 상을 향해 너무 커다랗고 실제적인 머리를 집어넣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몸짓들. 두터운 필름 카메라에 얼굴을 붙인 아이들은 싸구려 공상과학 영화 속의 엑스트라처럼, 연출가의 조악한 환상에 현혹되어 기계장치로 신체를 대신한, 과거와 미래 어딘가, 미래 어디에도 실존하지 않으며 과거에만 존재했던-그러나 증언해줄 수 있는 과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오직 꿈속에서만 연출되었던 사적인 영화의- 미래적인 이미지의 초상처럼 보였다.

소녀는 교사가 그녀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욕망을 위해 부역하는 꿈속 장치에 불과하므로. 교사는 체념한 투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물었다. 어째서 우린 더는 믿지도 않는, 이미 깨어버린 꿈을 꾸는 걸까.

하지만 이 꿈은 소녀의 것일 뿐 교사의 꿈은 아니었으므로, 소녀의 꿈은 지극한 사적인 무대일 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꿈이었으므로, 예술도 역사도 종교도 될 수 없는 비좁은 망상에 불과했으므로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메라에 시선뿐만 아니라 동그란 앞이마까지 반쯤 담근 아이들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아무것도 연민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려 애쓰며 웨딩드레스처럼 치렁치렁한 하얀 앞치마를 더러운 바닥에 질질 끌며 거대한 국그릇을 들고 주방을 안절부절 못하며 배회하는, 소녀보다 세 뼘은 더 큰 거대한 쥐들을 지나쳤고 강당에서 배드민턴을 하다가 새처럼 떨어져내리는 깃털에 불시에 달려들어 코를 박고 침을 흘리는 짐승들의 식별할 수 없이 그늘진 머리들을 보지 않고 지나쳤다. 꿈의 세계는 주체도 대상도 없는 연기와 같은 결속의 희미한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그곳에는 본질적으로 시선의 일방적인 권력관계도 응시의 단순화된 메커니즘도 압제적인 권력관계도 없었다. 아득하게 퍼져나가는 어스름과도 같은, 언어도 시선도 아닌 희미하며 동시에 확고한 인식의 덩어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아무것도 뚫어지게 관찰하지 않으면서 그녀를 경유하며 발생하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일별하였다. 빛의 얼룩에 목을 매단 나무들을 헤치고 식물의 끔찍하게 가녀린 가지에 목을 매고 자살하는 데에 성공한 앙상한 시신을 지나서 이름도 색채도 형체도 알 수 없는 사물들을 경유하여 교정 뒤편의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운동장에 찬란한 원색의 페인트로 도색된 철제 놀이기구들이 건설된 이후에는 버려진 개들과 하수구의 독가스를 피해서 도망나온 이민자 쥐들, 따돌림당하는 더러운 아이들만이 새벽의 이슬처럼 남몰래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으슥한 장소였다.

소녀는 노인의 것처럼 쭈글쭈글하게 늘어진 가슴을 꺼내어 그 위에 산란기의 모기처럼 달라붙어 있는 쥐새끼들을 떼어내었다. 소녀는 독과 같은 강렬한 햇빛에 순식간에 검게 그을러버린 젖을 갈무리하고 뭉툭하고 단단한 손톱으로 제 피륙을 마시고 자라난 아이의 여린 목을 꿰뚫었다. 언젠가 키프로스 해변가에서 비너스의 아름다운 살갗을 예고하며 아득하게 피어오르던 결백한 거품처럼 축축하고 따끈한 거품이 쥐의 깊게 팬 아가리에서 소녀의 작은 손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소녀는 그녀의 발밑에서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사진기를 들어올려 죽은 아이를 촬영하였다. 열댓 마리의 아이들과 한 장의 사진, 어떤 아이를 가장 먼저 찍었는지, 어떤 죽음이 찍히고 찍히지 않았는지 소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쌍둥이처럼 꼭 닮았고 동일한 테마와 동일한 음률, 동일한 살, 동일한 피와 동일한 울음, 동일한 고통과 동일한 절망, 동일한 체념과 동일한 파멸, 동일한 폭력의 반복에 불과하였으므로. 그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생의 자기선언, 끈질긴 동어반복에 불과했으므로. 소녀는 열댓 개의 텍스트로 분열된 하나의 체념-혹은 체념의 불가능성-을 포착하였다.

교사는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소녀를, 소녀가 건넨 사진을 들여다보며 유감이라고 말했다. 어리고 순수한 청년은 마치 소녀를 위해 울어주는 여배우처럼 서글픈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그는 결국 여배우일 수 없었고 소녀는 그녀 자신의 고통조차도 재현할 수 없었으며 그녀가 찍은 쥐의 죽음은, 시체를 촬영한 사진은 재현불가능한 고통의 과잉 재현에 불과했으므로, 너무나도 적나라한 죽음을 어떠한 암시도 은유도 메타포도 알레고리도 없이 촬영한 사진은 어떠한 특정한 고통도 체현할 수 없었으므로 사내의 절망은 그녀의 비극적인 천재성에 대한 적합한 대답일 수 없다는 사실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유감이야, 네 사진은 끔찍하고 또 끔찍하지만 그뿐이야. 우린 그걸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구나. 그건 실재하는 죽음이었고 다른 어떤 말로도 번역될 수 없는 신체였다는 걸 우리 모두 네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네가 그 가엾은 아이의 목에 손톱을 박아넣고 죽음을 촬영하는 모습을 전부. 너는 실패한 음모꾼이란다. 정념과 불안의 밀도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인간을 조종하려 하는 음모꾼의 통찰을 갖지 못했단다. 오로지 그 통찰에 대한 희미한 지각이 불러일으키는 음울만으로는, 얘야, 단순한 암시만으로는 어떤 순간도 박제할 수 없어.

봐, 어느새 소녀만큼 어려진 소년은 검붉은 얼룩만이 이지러진 소녀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어. 사진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해. 사진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적이지도 않다는 걸. 사진이 포착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실재하지 않는 예감과 유령뿐이라는 걸. 고통을 마땅하게 표현해낼 언어가 부재한다고 해서 그곳을 공란으로 남겨둘 수도 그대로 모사해낼 수도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계속 신음하는 몸은 시신일 수도 죽음일 수도 없는 것처럼.

소년은 소녀의 하얀 원피스를 밀어올리며 그 속에 들어찬 시꺼먼 가슴에, 괴사하여 부패해가는 살덩어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대체 언제부터 아이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거야?

소녀는 소년의 새카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지저분하게 엉겨 있는 머리칼 깊은 곳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대답했다. 쥐새끼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내가 그 애들을 보면서 느끼는 끔찍한 고통은 그 애들의 고통이 아니라 그 애들의 고통을 대상으로 하는, 그 애들의 고통에 대한 내 고통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당신도, 당신마저도 나와 같은 꿈을 꿔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내 꿈을 함께 꾸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당신은 오로지 내 꿈의 지시대상으로만 관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죽어버린 쥐를 찍은 사진은 쥐의 죽은 피륙도 죽음도, 심지어는 그 애일 수 없는 다른 누구의 죽음도 아닌, 편평하고 매끄러우며 깨끗한 사진에 불과하다는 걸 당신이 알려주기 전부터.

Series Navigation<< 고백의 물방울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2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