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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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금의 바깥이 있을 뿐이다. 네가 망가뜨린 시간에는 계절도 날짜도 없다. 회고의 날들을 추억하는 시인에겐 고향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접점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접 붙일 수 없는 말들을 억지로 엮어가며 시를 낳는 것은 아니다. 묽은 체액을 먹고 짙은 먹빛으로 번져가는 말들을 읽고 우리는 자란다. 우리는 우리가 마실 수 없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 우리는 우리가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삼키며 자란다. 말을 살찌우는 것이 논리가 아니듯 시를 살찌우는 것이 언어는 아니다. 향기롭기보다는 비극적인 추억을, 비극적인 추억보다는 도착적인 시간을 원할 때가 있다. 향기롭지도 비극적이지도 도착적이지도 않은 시간을 쓰는 삶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어휘 없이 모든 것을 부르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러한 순간들은 인화지 없이 찍어낸 사진과 같아서 기록될 미각도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어떠한 감각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애써 그러모은 빛의 얼룩을 순식간에 상실한 채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필름 없이 빛만으로 찍은 사진들의 이야기이다.

돌이켜 보면, 처음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야기와 추억, 경험의 시작점은 대개 다른 곳에 위치하니까. 그래도 유리, 그애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리는 너희가 거쳐온 모든 하루들을 대변하는 이름이었으니까.

유리는 얼음 사막의 귀신으로 태어났다. 어쩌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귀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리의 어미는 귀신이었고 얼음 사막에서 산혈을 흘렸으므로 유리는 얼음 사막의 귀신으로 태어났다. 이러한 문장을 유리는 몇 번이고 만들어왔다.

나는 얼음 사막의 귀신으로 태어났어.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누구에게 하는 말이니?

응, 나는 몇 번이고 네게 말을 걸었어.

나는 네가 아니야.

알아. 그럼 너는 누군데? 네 이름은 뭐니?

나는 네가 유리인 만큼이나 “소리”야.

소리, 저기 이상한 게 떠내려왔어. 나랑 같이 가 줘.

그치만 너는 너무 위험해 보여.

어째서?

네 얼굴은 너무 파랗고 목소리는 너무 가늘잖아. 꼭 귀신처럼.

소리?

응. 네 소리.

소리는 네게 속해 있는 어휘잖아.

아니, 소리는 나만큼이나 네게 속해 있는 말이야, 유리.

유리,

아니, 소리.

응, 소리. 나는 귀신이 맞아. 그러니 무엇도 의심할 필요 없어.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너는 뭐가 무서웠던 건데? 귀신이? 유리가? 소리가? 내가? 네가?

글쎄, 이젠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아마도 나는 네가 알 수 없는 어휘로, 그러니까 말이 될 수 없는 무언가로 돌변할까봐, 그게 두려웠던 것 같아.

그래. 그럼 얼른. 서둘러.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니까.

너희의 이름이 유치하다는 걸, 그래서 너희에게 이름을 지어준 누군가가 너희의 이른 죽음을 예감한 것만 같다는 걸, 유치한 이름이 어울릴만큼 어린 너희들은 알지 못했다.

유리는 소리의 손목을 잡고 유치원 놀이터를 지나 공원 옆의 풀숲으로 들어갔다. 주민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숲에는 치렁치렁한 거미줄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유리는 짐승의 살을 베어내듯 숲의 껍질을 헤치며 검푸른 풀의 살 속으로 들어갔다. 불가해한 어휘들로 구성된 뉴스 방송을 귓바퀴에 걸친 사내가 너희의 앞을 지나쳤다. 사내는 너희들을 뒤돌아 보지도 않았다.

유리.

응. 소리.

여기는 길이 아니야.

유리는 푸른 입술을 씰룩거리며 소리를 다그쳤다. 응. 이곳은 길이 아니야.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투였다. 응. 길이 아닌 곳은 함부로 지나가면 안 돼. 소리는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으나 유리는 침묵을 알아듣고 쏘아붙였다. 넌 아직 무섭니?

응?

무서운 게 뭔데?

글쎄, 잘 모르겠어. 나는 그런 구체적인 어휘들은 알지 못해. 한 번도 문장의 태를 넘어선 어휘들로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뱀은?

뱀?

응. 뱀은 무서워?

잘 모르겠어. 뱀은 길고 구불구불하게 흘러가는 생물이지, 종에 따라서 아가리보다 커다란 생물들을 한 입에 몸 속으로 밀어넣고. 커다란 들쥐들을 뱀이 삼키는 광경은, 오히려 뱀의 몸통 속으로 들쥐들이 제 몸을 쑤셔넣어 겁간하는 장면처럼 보인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어. 어렴풋이. 응. 어렴풋이. 목이 긴 뱀의 아가리 깊숙한 곳에 있는 이빨에서는 독이 정력적으로 뿜어져 나오는데 그건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그 뱀이 들쥐 수천마리는 즉사시킬 수 있는 독을 구멍 깊숙한 곳에서 은밀하게 배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도. 도끼에 목이 잘린 뱀은 한시간 동안이나 저를 죽인 고기를 노려보면서 독을 뿜는다는 것도. 그렇지만 독과 머리가 살아있다는 게 뭐가 무섭다는 걸까. 뱀의 뱃속으로 대가리를 쑤셔넣는 들쥐들을 한 입에 깊은 곳까지 밀어넣어 본다면 알게 될까.

나는 뱀을 먹어본 적이 있어.

언제? 어떻게? 무서웠어?

내 입으로 먹어본 건 아니야. 유리는 푸르스름한 입술을 크게 벌리고 살덩어리를 한 입에 밀어넣어 삼키는 동작을 해 보이며 웅얼거렸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뱀을 잡아먹었다고 했어.

뱀을?

응. 시꺼먼 뱀을. 뱀은 내가 태어날 때까지 살 뿐인 몸을 비비 꼬면서 몸부림쳤대. 다리도 팔도 가슴도 배도 허벅지도 손도 손톱도 아닌 살덩어리를 움틀거리면서 비명을 질렀대. 엄마의 살 속에 있었던 살이 아닌 무언가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 때까지. 그리고 나는 귀신으로 태어났어. 뱀처럼 시퍼런 얼굴을 하고.

너희 엄마도 귀신이야?

응? 그건, 잘 모르겠어. 기억나지 않아.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었지? 내가 이야기 했던가?

아니, 외계에서 온 선원들을 훔쳐보러 가는 길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어, 아직.

소리는 끈적끈적한 실타래를 풀어헤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맞잡은 손에는 한 마리가 아닌 생물들의 타액으로 짜인 거미줄이 엉겨붙어 있었다. 너희는 손을 강하게 맞붙였고 손과 손 사이에 들어가 있던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으스러지는 숨결은 너희를 간지럽혔다.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숨결을 너희는 느끼지 못했지만 발치에는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허리께가 문드러져 머리를 가랑이 사이로 늘어뜨린 벚꽃나무의 뿌리에서는 나무를 버린 유충들이 번데기를 벗고 덜 여문 날개를 버리고 몸을 버린 채 피난하고 있었다. 소리, 이게 뭐야? 네가 내게 보여주려 했던 게 이거 아니야? 유리는 북극곰 열댓마리는 노닐 법한 크기의 빙하 앞까지 다가갔다. 거대한 나무들이 잘려나간 자리는 꽤나 큰 길이었다. 뱀처럼 시퍼런 얼굴을 한 무언가가 빙하 속에서 걸어 나왔다. 너희는 너희가 알고 있는 여러 어휘들을 맞추어 보았다. 얼굴은 정물처럼 굳어 있었다. 너희는 상대에게 안도감을 주려 웃음을 지어야 할지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그를 노려보아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어설픈 망설임을 표정짓고 얼굴을 흘겨 보고 있었다. 안녕, 얼굴은 입술조차 벌리지 않고 말했다. 안녕. 너희는 화답했다. 그게 전부니? 얼굴이 물었으나 너희는 대답을 알지 못하였다. 뭐가요? 말 말이야. 내게 할 말이 없니? 글쎄요, 당신은요? 글쎄, 나는 너희가 알고 있는 어휘만큼만 말할 수 있단다.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문장들로만 이야기하고. 너희는 내가 누군지 아니? 아니요. 응,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너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로 부르렴. 꼭 그만큼 친근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럼, 엄마. 그게요, 갑자기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지금 가장 입에 익은 단어예요. 당신 혹시 시퍼렇고 더러운 들쥐를 잡아 먹은 적이 있나요? 가랑이에서는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입으로는 산달에 맞추어 찢어 먹었던 뱀의 비늘을 토해내고 있었을 거예요. 아니. 나는 기억하는 순간, 기억하는 어휘만, 그러니까 지금 소리내어 말할 수 있는 문장들만을 살기로 결심했단다. 나는 지금 네 문장을 따라외울 수 없어. 기억할 수 없다는 말이란다. 알겠지? 응. 당신은 우리 엄마를 잡아먹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요. 그래. 엄마, 하는 부름에 다물어진 입술 혹은 그보다 아래 불룩 튀어나온 뱃속에서 그래, 하는 대답이 흘러나왔으나 유리는 그래, 하는 말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엄마, 그래, 엄마는 그걸 타고 여기까지 날아왔나요? 유리는 엄마의 등 뒤에 늘러붙은 빙하 모양의 비행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나는 한 번도 날아 본 적이 없어. 내게는 날개가 없단다. 휘둘러 볼 팔조차 없어. 봐, 엄마는 네 개의 다리를 들어올려 보였다. 그럼 여기까진 어떻게 왔는데요? 기어서. 우주의 바닥에 배를 깔고 기어서 왔단다. 소리는 꺄르륵 웃었다. 거짓말, 걷지도 않고? 응. 기어서. 대가리를 앞으로 두고 얼굴을 중력에 문대며 살을 움틀움틀 도달할 수 없는 너저분한 방향들로 밀어내면서 이곳까지 온 거란다. 네 엄마도. 엄마도? 그래. 엄마의 목울대 혹은 엄마의 뱃속에서 엄마의 대답이 울렸다. 그래. 너희는 상상도 못할 어휘들을 목젖 안에 밀어 담으면서 이곳까지 기어 왔지만 그건 너희가 들을 수 없는 문장들이란다. 우리도 데려다 줘요. 어디로? 당신이 온 곳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휘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조합으로 뒤얽혀 있는 낯선 곳으로. 유리는 엄마의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가위처럼 벌어진 두 다리가 입술을 찢어버릴 듯 허공을 내달렸다. 거꾸로 선 아이처럼 유리는 엄마의 뱃속에 코를 박고 찬 밖에 다리를 내단 채 버둥거렸다. 소리는 유리의 발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엄마, 엄마, 나도, 나도 찢어내줘요. 일그러지고 망가진 살 속으로 나도, 나도 돌아가고 싶어요. 돌이킬 수 없게. 망가진 소리로. 나. 내 손으로 다리를 부러뜨리고 날개를 찢어내고 싶지는 않아요. 가지 마요. 나를 버리고.

어디에 가는데?

유리는 소리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캐물었다.

손, 시리지 않아? 눈사람을 만드느라 새빨갛게 변한 손가락을 마주 잡으며 소리는 중얼거렸다.

들었어?

아니, 네 생일도 네 고향도 아직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 아직.

유리, 네 엄마를 기억해? 네가 태어나던 날의 일을?

아니. 소리,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알잖아. 내겐 엄마도 생일도 없어. 너와 마찬가지로.

내겐 생일이 있어. 아마 엄마도. 있을거야.

기억해?

아니.

유리는 키득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바보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더 이상 없는 거야. 네겐 생일이 없어. 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끝내 알지 못할 거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린 아이들만의 특권이니까. 알잖아, 우리는 더 이상 유년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어리지 않다는 걸. 눈사람의 몸통에 유리는 진눈깨비를 거푸 덧붙였지만 작은 눈덩이는 불어나는 만큼 유리의 손에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자라나며 사라지는 눈사람을 지켜보며 속삭였다. 내일이면 잊어버릴 텐데.

내일? 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일이라니. 그런 추상적인 말이 어디 있어. 내일도 어제도 죽음도 행복도 비극도 여기에는 없는 거야. 너는 아직도 구체적인 어휘들을 쓰는 게 서툴구나.

유리, 그래도 너는 어제도 유리였어.

무슨 말이야? 설마 너, 어제를 기억해?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그럼 어떻게 아는데? 어제 나는 없었는데도.

그래도, 어제 유리는 있었어.

어디에?

아마도, 여기에.

그게 나였다고?

아니, 아마 그건 아닐거야.

그래. 내겐 어제의 기억 같은 건 없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어제나 내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우리는 수천 일을 기억하고 사는 짐승들이 아니니까.

유리. 기억하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

아니. 유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기억만큼 무서운 건 없다고 했어. 사람을 죽이는 건 기억 뿐이라고 했어. 소리, 굳이 닿지 않는 먼 곳을 기억할 필요는 없어. 유리는 벌거벗은 가슴팍에 눈사람을 갖다 대어 끌어안았다. 유리는 가슴의 안쪽에서 눈사람의 맥박을 들었다.

우리는 지금 만든 눈사람이 녹지 않는 동안만 함께하면 되는 거야. 더 멀리 가서 뭘 어떻게 하게. 그때는 눈사람도 몸통과 얼굴을 잃고 붙여주었던 두 팔을 잊고 웃음을 잊고 흐물어져서 눈, 물이 되어버리고 말 텐데. 그건 더 이상 눈사람의 모양도 갖지 못할텐데 망가진 눈사람을 기억해서 어쩌겠다고. 그냥, 그냥 눈일 수 있었던 눈송이를 불구로 만들어서, 그걸 뭘 어쩌겠다고.

유리,

응.

아마도 내일, 내일도 유리는 있을 거야.

그래. 유리는 아주 흔한 이름이니까.

소리는 유리의 체온에 반쯤 허물어진 눈사람을 잡아채었다. 아이의 손바닥보다도 작아진 눈사람은 울듯 웃고 있었다.

어쩌면 내일도 눈사람은 여기에 있을 거야. 죽지 않고. 잊지도 않고.

녹아버릴거야.

유리는 소리를 노려보았으나 눈사람을 다시 빼앗아 가지는 않았다.

응, 유리, 눈사람은 변할거야. 그래도 사라지진 않을거야. 녹아버려도.

유리는 눈의 파편들이 늘러붙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할퀴었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견딜 수 없을거야. 알잖아. 여기선 모두가 잊기로 했어. 내일도, 어제도, 그보다 멀었던 날도, 생일도,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잖아.

유리, 나는 건널거야. 오늘과 내일의 경계를, 하루와 하루의 살을 가르는 투명한 소음을. 내일, 말 해 줄게. 어제 여기에도 유리가 있었다고. 유리는 너였고 너였던 유리는 네가 기억을 데리러 오늘보다 멀리까지 떠나올 날을 기다리면서 내일 녹을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고.

그러지 마. 가지 마. 나를 두고.

나는 너를 두고 가지 않아. 너희처럼. 나를 두고 가지 않아. 나는 나를 두고 가지 않을 거야. 하루가 온전히 가라앉기 전에 나는 내일로 건너갈 거야.

소리는 미래를 얻었다. 소리는 유리가 알지 못하는 내일을 살았다. 유리의 오늘이 소리에게는 내일이라고, 유리의 오늘이 소리에게는 어제였다고 했다. 소리는 유리에게 내일 찾아오겠다고 했고, 유리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괜찮아, 내일 너를 찾아올 테니까.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너를 찾을 테니까.

나를?

응. 유리를.

약속을 한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너와 약속한 나는 내일 없을 거야.

괜찮아. 나는 너를 기억하니까. 약속을 한 너를 나는 기억하니까.

유리는 갖지 못한 유리의 내일은 이제 소리에게 속할 것이다.

누군가 내 사지를 잘라주는 상상을 할 때 얼굴이 뜨끈해져. 뜯겨나간 날개를 옥상 위에 곱게 개켜놓는 날을 생각할 때처럼. 손등에 날이 무딘 과도를 올려 놓고 흐느끼던 날을 기억하니. 한참을 기다려도 칼등을 조심스럽게 눌러 주는 손길은 찾아오지 않았고 너는 떨어져나간 살점의 흔적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어. 깨끗하게 잘려나간 몸의 단면을 생각하면 혀 밑에 달고 맑은 침이 고여. 몸에서 찢겨나간 머리의 밑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생각해. 임산부의 배를 걷어차는 생각을 하며 수음하던 시인을 훔쳐보던 일을 기억해.

남의 찬란한 시절을 훔쳐보면서 우는 것보단 낫지.

나도 어제를 기억하고 싶어.

어제를 가졌다면, 지금과는 다른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늘에 귀속되어 있는 유리는 어제의 유리와 같은 말을 할 수도,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유리는 변화할 수 없었다. 어제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으므로. 소리는 말을 멈추고 가만히 유리를 들여다보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소리가 섞여들었다. 살아있는 것은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시끄러운 법이다. 구태여 울지 않더라도. 유리는 제 앞에 놓인 기억의 숨소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리는 지친 소음을 진정시키듯 천천히 말을 꺼냈다.

유리, 좋은 생각이 났어. 흔적을 만드는 거야. 하루를 건너갈 수 있는 기억을 새기는 거야. 봐.

소리는 불그죽죽한 잇자국을 보여 주었다. 오른팔이었다.

몸은 하루를 넘기잖아. 상처를 기억하면 너는 어제를 가지게 되는 거야.

유리는 놀라 움츠러들며 소곤거렸다. 어디에서 물린거야? 혹시 근처에 들개가 사니? 소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곳에 우리와 다른 다리로 걷는 짐승들은 없어. 공연에 길들여진 짐승들을 데리고 유랑하는 극단은 어제 이곳을 떠나갔잖아.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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