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10회

소녀는 그곳에서 연극을 할 계획이라고 속삭였다. 무대도 관객도 없이. 대본도 연출도 없이. 너희는 사막의 축축하고 끈적한 하얀 모래에 손을 담그고 너희의 손을 애처롭게 붙잡는 젖은 흙을 파헤치며 아래로 아래로 파고들었다. 너는 무얼 찾는지도 모르면서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흙을 파내었다. 조개와 식물의 뿌리, 화석과 진주, 갑작스레 흙 아래에는 세계를 피해, 출현을 피하여 잠들어 있는 뱀과 쥐, 바퀴벌레와 구더기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흙 속에 담겨 있는 손이 미친 듯이 뜨거워졌다. 너는 손등만이 드러난 하얗고 작은 생물 같은 손 위에 핏빛 오물을 게워냈다. 소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너를 돌아보았다. 하얀 모래 위에서 그녀의 붉은 얼굴은 관능적으로 보였다. 너는 깊은 수치를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축축한 모래 속에 파묻힌 손이 조여드는 감각이 거북스러웠다. 흙 아래에 어떠한 덫이 숨겨져있는지 너는 알 수 없었으나 덫은 언제나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만은 꿈에서 으레 그러하듯 어떠한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작은 불꽃과 폭음을 동반하며 폭발하는 덫은 신체의 말단을 산산이 으스러뜨리며 하나의 잠재된 기호에서 행위로, 현상으로, 고통의 주체로 변모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아직 터지지 않은 덫은 오로지 은밀한 기호에 불과하므로 너는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다. 덫이 폭발하기 전에 고통을 느낄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잘못된 병이고 그릇된 고통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덫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부조리한 고통을 합리적인 고통으로, 승인될 고통으로, 정당한 고통으로 만들 수밖에는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흙의 내부는 지독하게 축축하고 두려웠다. 부러진 손톱 사이로 파고드는 더운 물, 네 손등을 쓰다듬으며 네 피부 깊숙한 곳까지 착색되기를 열망하는 벌레들의 원초적인 욕망. 손톱 사이로 기어드는 작고 하얀 구더기들, 마치 모래와 같이 순결하고 연약한. 네 손 안에 머리를 비비며 휘감겨오는 퉁퉁한 지렁이와 네 손끝을 갉아먹는 시궁쥐의 날카로운 이빨. 너는 황급히 손을 빼내려 했으나 너무 깊이 박아넣은 손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만 담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손목 깊은 곳까지 박혀 있었다. 소녀는 여전히 붉은 손으로 그녀의 밑을 파내려가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아직 체현되지 않은 고통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넌 아이처럼 엉엉 울며 울음소리만으로 네게 닥친 고통을,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아득한 절망을 호명하려 했으나 너와 같은 방식으로 우는 것들은 지상에 넘쳐났기에, 새에게 등껍질을 파먹힌 달팽이도 차도에 뛰어들어 꼬리가 짓뭉개진 고양이도 호수로 뛰어드는 들쥐들도 손발이 잘려나가는 관목들도 모두 너와 같은 방식으로 울고 있었기에 네 울음은 들리지 않았다.

의사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그는 하얀 가운도 입지 않았고 청진기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너는 그가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떠한 전제도 인과도 없이 모든 사실들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꿈 속에서 으레 그러하듯. 너는 절망적인 그리움에 사로잡혀 그를 끌어안고 싶었으나 잿빛의 천을 덧대어 놓은 그의 너덜너덜한 얼굴은 낯설었다.

프란츠 박사는 소리의 머리 뒤쪽에 심어 둔 칩에 대해 말했다. 그건 네 연장된 신체야. 왜, 아직도 네 것 같지 않니? 네 속에 있는데도?

너는 끊임없이 자라나는 손톱들과 머리카락들, 허벅지 위쪽과 성기 아래쪽에서 돋아나는 다리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도 그것들이 네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모든 기억들은 네 속에서 너를 벗어나 움틀대고 있었다.

박사는 네 뒷머리를 외과 수술용 가위로 몇 가닥씩 몇 가닥씩 일일이 잘라내면서 말을 건넸다. 정말 기억하고 싶니?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거야. 너희가 하루를 살아가도록 변화해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괜찮아요. 나는 돌아가고 싶어요.

얼음사막으로?

그래요. 소리는 놀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나요? 내게 최면이라도 걸었나요?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단다. 너희들은 모두 같은 종이고 서로의 주변에서 살아왔으니까,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군요.

소리의 머리칼을 모두 잘라내지는 않았다. 외과수술, 더구나 머리수술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지 의심이 들긴 했으나 소리로서는 진위를 파악할만한 경험도 지식도 없었다. 마취는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사내가 이야기했다. 네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 있겠지. 너만 간직하고 싶은 하루 같은 것 말이야. 그런 게 없다면 내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소리는 까슬하게 잘려나간 머리 밑단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얼음사막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싶어요. 나, 언젠가 그곳으로 나갔던 적이 있던 것 같아요. 그곳의 사람들은 나를 유리라고 불렀고 유리들은 나를 두고 떠나갔어요. 모든 장면들, 빛의 기울기나 발소리의 크기와 같은 세부까지 다 기억이 나지만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는 기억나질 않아요. 그것도 내 기억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그건 너만 알 수 있는 일이란다.

정말, 마취를 하지 않을 건가요?

그래. 마취를 하고도 견딜 수 있는 비밀이란 없으니까. 네 비밀을 더 소중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마취 없이도 머리 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단다.

선생님, 사실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유리가 함께 내일로 건너가고 싶다고 해서요, 그애한테도 선생님이 한 것 같은 일들을 해 줬던 것 같아요. 팔꿈치 안쪽을 깨물었는데 별로 아파하지 않았어요, 그애는.

정말 그렇게 말했니? 내일로 건너가고 싶다고? 이상한 일이구나. 너는 분명 그애가 내일을 믿지 않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이야.

그랬죠. 어쩌면 함께 내일로 건너가고 싶다고 말한 건 저였을지도 몰라요. 간혹 착각하거든요. 유리를 부르는 내가 유리인지, 유리로 불리는 그애가 유리인지. 우리는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그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혀를 잇새로 붙였다 떼지도 않고요. 같은 꿈을 꾸다 보면 그애게 무엇을 생각하든 그걸 곧장 기억할 수 있죠. 그건 그애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 수술은 언제 끝난 건가요?

기억 연장 수술이라면 아주 오래 전에 끝났단다. 네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옛날에.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저는 옛날 일이라고 해서 더 흐리게 기억하지는 않아요. 모든 기억은 똑같이 정교하고 선명하지만 무감하죠. 그건 선생님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아니. 언젠가 네가 내 뒷머리를 자르고 살을 열어 그 속에 네 기억 칩을 심어놓는다고 해도 너만큼 잘 알지는 못할 거야.

계단의 밑면에 껌처럼 붙어 있던 여자가 흐느끼면서 배설했다. 너는 끈적한 땀이 늘러붙은 여자의 위에서 깨어났다. 안녕, 안녕. 나는 소리예요. 그래.

여자는 제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꼭 모든 것을 기다려 온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 아침에 제 위에서 신음도 없이 외과수술을 견뎌낸 소리와 마주칠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양.

당신, 거짓말을 했죠.

거짓말이야 오해만큼이나 숱하게 그리고 무고하게 퍼져 있지 않겠니.

당신도 하루를 넘겨 살았잖아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게 중요하니? 나는 살아 있지도 않은데.

우산은 배설하지도 땀을 흘리지도 않아요. 당신은 살아 있어요. 날마다 더러워지는 만큼 당신은 살아 있는 거예요.

여자는 구역질을 했다. 뜨끈하고 역겨운 냄새가 너희를 뒤덮었다. 당신은 우산이 아니에요, 하고 거듭 외치면서도 소리는 여자로부터 우산들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우산이 없는 곳에 외따로 남겨진 여자는 유빙을 잃어버린 북극곰처럼 서글프게 하얗고, 붉은 장미를 잃어버린 붉은 나비처럼 초라하게 화려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유리, 소리, 너희는 서로의 이름을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어.

여자는 위액에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걸 불러줄 수 있는 건 네가 아닌 사람뿐이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단다.

몸 위에 이름을 새기면서 죽어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니?

아니요.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데 실패한 사람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이름을 불리는 데에도 실패한 사람들은 가끔 그런 벌을 받곤 한단다. 나는 그 처형식에 불려가 본 적이 있어.

거짓말이죠? 당신이 이 방을 나가 본 적이 있다고요?

그래. 이곳에서 나와 배우 일을 했었다고 말하지 않았니.

그랬죠. 그런데 그게 당신이었나요? 어딘지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야 그렇겠지. 너는 매일 꿈을 꾸고 있으니까. 우리는 지금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나는 바깥에서 한 떠돌이의 처형식을 지켜본 적이 있단다. 연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을 거야. 그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어떤 강렬한 장면이라도 보고 나면 내게 영감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때는 온통 한 길로 나 있는 굴 뿐이었어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단다. 발 밑에 기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렇지만 당신에겐 다리가 없잖아요.

이건 은유야. 처형식은 특별했어. 물론 몸에 날카로운 끌을 대서 서서히 죽이는 방법도 요즈음에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구식이기는 했지. 비인도적이고 구시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제는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날의 처형은 이름을 새기면서 죽는 처형방식의 마지막 집행식이었단다. 그래도 내가 입장료를 내고 처형식에 참가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어.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건,

비슷한 이야기를 책에서 읽어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유형지에서 자신이 신봉하던 처형 기구를 지키기 위해서 울부짖던 장교의 이야기였죠. 그는 신성한 기계와 같은 최후를 맞았어요. 제 몸에 죄를 새겨넣어야 할 고문도구는 그가 믿던 죄목 대신 거칠고 야만스러운 구멍만을 뚫어냈죠. 그는 그 속에서 기계와 함께 망가져버렸어요.

그래. 내가 하려던 말도 비슷해. 내가 본 처형식도 그 처형 방식을 개발한 사내를 대상으로 집행되었던 거니까. 몇 군데 차이는 있지만. 그 기계는 망가지는 대신 정상적으로 집행이 끝난 이후에 불에 타 화형당했고, 사내는 그 기계를 만들었지만 그리 사랑하지는 않았을 거야. 자신이 만든 처형 기계를 비판하는 글을 학술지에 발표했거든. 네 이야기 속 장교처럼 처형기계를 믿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기로 결정했지. 그날, 처형식에는 유달리 많은 관객들이 찾아왔어. 관객들은 모두 그 길고 가느다란 바늘이 그의 가슴팍에 몇 번이고 같은 획을 그어내는 모양을 지켜봤단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섯 시간이 넘도록, 가느다란 상처에서 그가 피를 흘리다 못해 심장발작을 일으켜 죽어버릴 때까지.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단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획과 동작들을 지켜보았을 뿐, 그의 이름이 어떤 발음과 음정으로 불리는지는 듣지 못했으니까. 글자에는 소리가 없다는 걸 그날만큼 확실하게 느꼈던 날은 없었을 거야. 아마도 선고문을 읽을 때 판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는지도 몰라. 어쨌든 나는 그걸 기억해낼 수 없었어. 처형식이 끝나고 안내원의 퇴장 권고에 따라 출구를 나설 때,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무도 내게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단다. 그게 그리 중요하냐고 되물은 사람까지 있었어. 처형식에서 몰래 사진 촬영을 한 기자가 이름을 새겨 죽이는 중세적인 고문 방식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글을 쓴 바람에, 그 파장이 커져서 누군가가 신처럼 숭배했던 피집행자의 아들은 화마에 휩싸이고 말았단다. 그런 기계는 아마, 그 기사가 모조리 불타기 전까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나요?

글쎄. 기억나지 않아. 결국 그의 이름은 부르지 못했으니까.

그는 괴로워 보였나요?

아니.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어. 적어도 내가 아는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은 아니었어. 어쩌면 그 전부터 죽어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만큼이나 많은 법이니까.

유리를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소리를 그애의 방까지 이끌어 주지는 못했다. 너는 하루의 시작과 끝의 주기와 무관하게 이어지는 여자와의 대화에 골몰해 있었다. 여자는 더이상 어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보다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너는 여느때처럼 그녀의 옆에서 우산을 접었다 펴며 어디에서 흘러들었는지 모를 우산의 물기를 말렸고 여자는 간혹 그 사람의 이름은 뭐였을까, 하는 혼잣말을 네 눈치를 보지 않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것으로 족했다. 너는 여자의 침묵을 듣고, 그녀는 너의 침묵을 들으며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믿었다. 비록 여자는 사람과 사물의 대화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미로 속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자랐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미로의 주민인 건 아니지.

그건 마치, 우리가 영원히 만나지 못할 거라는 예언 같아요. 당신은 그걸 바라고 있나요?

아니, 나는 무엇도 바라지 않아.

다리도?

그래. 사실은 다리 두 개도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몰라. 그렇다고 너나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 다리를 달고 싶다고 말한 건 내가 아니니까.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당신이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만큼요.

그래. 우리는 모든 걸 꼭 그만큼만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당신도 유리를 기다리고 있었죠. 언젠가 그애가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도 문도 다 열어놓고 하루도 닫지 않고 기억이 새어나가는 그대로 내버려 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여기까지 흘러온게 아닌가요.

아니야, 나는 더 이상 유리를 기다리지 않아. 네가 내 유리가 되어주었잖니. 모든 사람은 유령을 기다리지만, 나는 사람도 아니고 네가 유령인 것도 아니야. 어쩌면 유령이 사람을 쫓아다닌다는 말은 거짓말인지도 몰라, 유령보다는 사람에게 유령이 더 간절한 것인지도 몰라. 너는 내가 모르는 말을 해 줘.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목소리로 계속 나를 괴롭히지. 그걸로 된 거야.

난 유령이 아니에요.

그래. 유령이 가진 건 기억뿐이야. 너는 목소리도 얼굴도 다리도 머리카락도 가지고 있잖아.

유리도 유령이 아니에요.

그래. 하루만 살아가는 유령은 없어. 유령은 매일 죽지도 매일 살지도 않는단다.

잘 아시는군요. 마치 오랫동안 유령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글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유령은 없어. 내가 유령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나는 유령이 아닌 존재인 걸 거야. 유령이 간절한 만큼 나는 유령이 아닌 걸 거고, 사람이 간절한 만큼 나는 사람이 아닌 걸 거야. 그렇지 않니?

당신은 이상한 말들만 해요. 난 당신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어째서인지 당신이 한 말은 잊히지 않아요.

그건 이해하지 못한 말이기 때문일거야.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는 당신 말뿐이 아닌데,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걸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네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너는 고양이 울음이나 나방의 날개짓, 바람이 이파리들을 쓰다듬는 소리를 해석하지 않잖아? 그러니 오해할 일도 없을 거고. 의미를 생각하는 말들은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고 하지. 그게 비틀린 의미라면 더더욱 오래가지 않을까?

바깥의 방은 어두웠다. 소리는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유령들의 소굴로 걸어들어갔다. 아직 아무도 식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숨어들어간 것이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모두가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인지도 몰랐다. 흐느끼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내렸다. 밤이 온전히 검어지기 전에 부산물처럼 떨어져내리는 검붉은 그늘처럼, 들려오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 같기도 했고 사람의 흐느낌 같기도 했다.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리는 위층의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의 낡은 형광등 역시 불이 들어오지는 않은 상태였다. 사람의 체온으로부터 나오는 엷은 빛만이 서로의 실루엣을 아른거리게 만들 뿐이었다. 왔니.

좀, 오래 되었어요. 소리는 늙은 여자에게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리 없는 여자의 목소리와 놀랄 정도로 비슷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계속 여기에 있었나요?

그래. 네가 떠나고 난 다음 두세 명의 손님밖에 들어오지 않았단다. 손님이 없을 때 나는 혼자 책을 읽었어. 의미도 소리도 모르는 글자들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목소리를 쏟아흘렸지. 그동안 너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잔뜩 쌓였는데 지금은 그다지 많이 기억나지는 않는구나.

그렇죠. 난 당신이 아는 여자를 보고 오는 길이에요. 당신도 나도 이름을 모르는 여자 말이에요.

그래, 그녀에게 해 줬으면 하는 말이 있어. 그애는 아직도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네.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뭐가 사람이고 사람이 아닌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건지.

그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은 사람일 뿐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단다. 그보다 네가 없는 동안 이상한 책들을 많이 읽었단다. 주름진 손은 어둠 속에서 두툼한 그림책을 펼쳐 보였다. 어쩌면 여자가 펼친 페이지에는 그림이 아니라 커다란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소리는 커다란 얼룩을 해석해내려 애쓰며 물었다. 거기에는 뭐라고 쓰여 있나요. 기억이 나나요. 이 나무를 보고 나는 이런 말을 했어. 나무는 평생 같은 자리에 누워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 아무것도 잊지 않고. 어쩌면 사람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인지도 몰라. 잊을 수 있는 걸 가지고 잊어가는 존재가 사람이지 않을까.

글쎄요. 붕어는 3초마다 3초 이전에 생각했던 내용을 모두 잊어버린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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