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11회

그럼 붕어도 사람이면 안 되는 거니.

안되죠. 우리는 사람 아닌 것들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으로 사는 건데요.

여자는 구역질을 해댔다. 소리의 웃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쉰내가 진동했다. 오래도록 묵혀서 더 이상 붉지 않은 피의 냄새. 어째서 우리의 이야기에는 구정물을 토하고 배설하는 사람들 뿐일까요. 여자는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요한 그물 속에서 몸을 뒤집으며 제 복부를 마구잡이로 긁어대는 늙은 거미들의 비명처럼 높고 힘없는 신음.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할 말들로 짖어대는 사람들밖에 없잖아요. 죽어가는 벌레처럼 끽끽거리면서 비명하거나 눈속에서 오줌을 흘리며 기어가는 게 아니라 에튀드를 연주하거나 왈츠를 출 수도 있을텐데요.

네가 사람이 된다면 사람의 언어로 운다면 나는 너를 죽여버리고 말 거라고 말해주는 시가 있었어. 난 한 번도 그런 고백을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누군가 나를 사랑해준다면 그렇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

책은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아요.

그럼, 모두 내 혼잣말이라고?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나누는 건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얼룩, 유령, 나방, 어쩌면 우리는 원상이 없는 비유들을 주고받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얼룩, 유령, 나방.

쥐, 뱀, 거미.

눈, 약속, 빛.

빛이 없는 그림자들을 겹치며 소음들을 뱉어내는 너희의 곁으로 아무도 스며들지 않았다. 한밤이 지나는 동안 너희는 너희의 소음에 익숙해졌고 결국 아무것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말을 무시당한 사람은 잠시 불쾌감을 느낄 뿐 얼마든지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지만, 침묵을 무시당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 극도로 예민해져서 자기 속으로 굽어들어가고 말아. 개중에는 제 살을 뜯어 먹는 사람들도 나오지. 인어는 목소리를 빼앗겨서 죽고 만 게 아니야. 물거품을 들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침묵을 함께 견뎌 주는 귀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죽어버리고 만거야.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의 침묵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우리의 침묵을 들을 수 있게 될까요?

네가 사람의 말을 할 줄 알게 되면. 그리고 나는 마침내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너를 죽여버리고 말 거야.

제대로 된 기억에는 향도 맛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마들렌의 맛이나 차의 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떤 감각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도요.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요.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던 엷은 막이 찢어져버린 것만 같아요. 세계는 기억들의 세부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단단한 벌들의 성곽과 같고 그 끈끈한 속에서 계속 헤매는 느낌이에요. 이제는 뭐가 기억이고 기억이 될 것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어요. 온통 기억뿐인 것만 같아요. 흐린 밤 어스름한 별의 체열마저 게걸스레 훔쳐가 미미하게 떨며 빛나는 숲속의 거미줄처럼, 모든 일들은 아주 희미하게 빛나고 있어요.

괜찮아. 너는 흩어지지도 녹아버리지도 않을거야.

눈에 비쳐들어오는 모든 빛이, 모든 구멍을 파고들어오는 소음들이 내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나도 모르는 형상을 내 속에 가두어 두기를 종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괜찮아. 누구도 너를 설득하려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설득할 수 없는 모든 소음들이 너를 비켜 지나가듯이.

당신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군요. 마치 당신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려야 할 것만 같아요. 눈부신 꽃의 얼굴들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감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끈적거리는 속을 겉으로 뒤집어 쓰고 화사하게 웃는 소년들 앞에서 그들의 미소를 흉내내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겉과 속을 구분하는 피막을 잃어버린 채로는 속을 까뒤집어 놓은 얼굴의 표정을 따라할 수는 없는데 그런데도 파르르 올라붙으며 진동하는 머리의 살점을 느끼면서 비참해져 본 적이 있나요.

넌 다른 남자애를 만나 본 적도 없잖아.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내려오기도 전에 낮을 절망스럽게 변질시키는 밤의 예감처럼.

늙은 여자는 책장의 구석자리에서 어스름한 잿빛으로 빛나는 천조각을 꺼내었다. 어둠속에서도 은은하게 아른거리는 천은 아마 환한 빛 아래에서는 희게 보일 것이었다. 너를 위해 준비했단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소리는 여자가 건네준 것이 여자아이의 옷임을 알 수 있었다. 길게 나풀거리는 천은 매끄러웠고 아랫단이 훤히 뚫려 있었다. 당신은 내게 수치를 주어서 내쫓을 생각인가요. 하고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바깥이 익숙한 사람에게 구태여 선물을 들려보내며 조롱하는 사람은 없다. 조롱당하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안쪽에 속한 사람인 법이다.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고 비웃어줄 만한 체력도 담력도 없었다. 여자의 피부는 더 이상 희지도 검지도 않은 몽혼한 색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렬한 빛 속에서도 그녀의 가죽은 제 본연의 색을 빼앗기고 굴욕적으로 가려지고 말았을 것이다. 남은 것은 빛뿐, 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빛뿐이었다. 어둠 속에 머무는 동안 소리는 색의 개념을 잊어갔다. 소리는 더 이상 색도, 어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희미한 빛의 잔향 속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너는 여자가 유년시절에 입었을 것이 분명한 옷으로 갈아입는 대신, 소녀의 피부와 몸의 자세가 모두 뭉그러진 하얀 천 조각을 받아들고 유리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가지 마. 옆에 있어 주렴.

무섭나요?

그래.

늙은 여자가 그리 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소리는 그때까지 공포가 질투나 성욕, 식탐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다. 너는 그만큼이나 많은 주름을 가지고 있고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가까운 사람이 미래에 천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에게 죽음은 곧 도래할 축제와도 같았고 다른 무엇도 그녀로부터 여자의 가장 기념비적인 날을 빼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삶도, 죽음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직까지 무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리는 그녀의 공포가 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여직 남아 있는 자신의 어린 마음으로 소리에게 수치를 주고 있었다. 밝은 빛으로부터 쏟겨내려오는 환한 멸시를 받은 듯 소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너는 늙음으로부터 비켜서 잠자는 여자를 두고 방을 나왔다.

유리는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오는 사이 너는 유리의 옆에서 어둠이 배어든 흙을 바스라뜨리며 놀고 있었다. 어쩌면 흙이 아니라 하얀 눈일지도 몰랐다. 보이는 것은 검은 물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네 옆에 누워 있는 아이가 유리라는 것만은 여럼풋한 직관으로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네가 그 아이의 이름을 물으면, 네가 유리니, 하고 물으면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라는 사실은. 너는 오래도록 외로웠다. 흙도 눈도 검게 바스라진 어둠 속에서는 고독만이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고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고독으로부터 느껴졌다. 정신의 안쪽은 몸의 내부만큼이나 여리고 흉측한 생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너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삶이 영원하다고 믿는 건 아니지만 고독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예감은 무거운 추처럼 네 중심에 견고히 내려앉아 있었다. 너는 그 추를 움직이거나 끄집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그 무게가 이끄는 깊숙한 아래쪽으로 주저앉을 뿐이었다. 꿰뚫고 들어갈 수 없는 평평하고 납작한 흙바닥 위로. 파고들 수도 스며들 수도 없는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 결국은 위로. 내부와 외부를 갈라놓으며 속과 겉을 느끼는 피부가 망가져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은 매우 단단하고 끈적하다. 피부를 잃어버린 너는 더 이상 무엇으로도 더렵혀지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물들지 않는다. 너는 한없이 투명하며 더럽고 꿰뚫고 드나드는 물기는 없다. 눈 역시, 그저 바닥에 버석거리는 건조한 결정들로 고여 있을 뿐이다. 일순 젖은 뒤에 뭉그러져 사라지고 마는 이슬로 죽어버리기 전까지. 얼룩은 젖지도 않은 채 머물러 있다.

만약 네게 기억이 그토록 괴롭지 않았더라면 너는 무엇이었을까. 만약 박사가 네 머릿속에 심겨 있는 기억의 조각을 끄집어내주겠다고 한다면 너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억의 고통,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만이 너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물질이었으니까. 기억은 네게 무엇보다도 추상적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물질이었다. 만약 네가 유리에게 기억의 칩을 이양하겠다고 하면 그애는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팔뚝을 깨무는 그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그애는 팔뚝을 깨물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애는 정말 어제를 갖게 될까봐 말 못할 두려움에 떨게 되겠지. 너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기다림은 공간을 잃은 시간처럼 날카롭고 무거웠다. 지연된 시작은 소리의 몸 안쪽에 깊숙한 틈새를 벌려놓고 있었다. 시계라도 갖고 있으면 나았을까. 너희의 팔목에 하나씩 초침을 박아 놓았다면 한 바퀴를 구르며 달려나갈 때마다 살결을 찢어놓는 날의 감각을 느끼면서 더 이상 팔을 깨물지 않아도 좋았을지 모른다. 너희는 결국 하나의 불완전한 원을 몸에 지니게 될 것이다. 구멍이 되지 못한 상처. 스며들지도 꿰뚫지도 못한 흔적. 마치 얼룩과 같은 상흔을 너희는 늘 그렇듯 너희의 얼룩들 위에 매달게 되겠지. 그렇지만 너희는 한 번도 시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날이 떠오르고 지는 건 무언가를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을 유영하고 감각하는 생물들이 가지지 못한 날의 틈새를 알아차릴 수 있듯. 너희는 언제나 끝을 직감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끝을 겪어 보지 못한 빛의 틈새가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안녕, 너는 유리가 맞지? 언제나 질문은 대답보다 많은 말들을 담고 있었다. 사실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소리는 더 이상 그것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응. 나는 유리야.

네게 줄 게 있어.

이게 뭔데?

옷이야. 아마 너는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옷일 거야.

소리는 늙은 여자로부터 받았던 주름진 원피스를 유리에게 건네었다. 불그스름한 새벽에 천조각은 언뜻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날이 머리 위, 다다를 수도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곳으로 올라가고 나면 그것은 천연덕스러운 흰색으로 변할 것이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냥 네가 가져.

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소리는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였다. 어쩌면 바깥의 서재의 눅눅하고 깊은 어둠이 배어들었는지도 몰랐다. 유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같은 냄새가 소리에게서도 풍기고 있을 것이었다. 소리는 제 팔목을 코에 갖다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나한테서도 냄새가 나니? 하고 소리는 구태여 묻지 않았고, 유리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냄새는 언제나 과거에 속해 있는 물질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을 것이다. 냄새를 잊고 우리는 죽어간다. 소리를 잃고 우리는 죽는다. 아직은 아침이었지만 해가 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소리는 잘 알고 있었다. 무던히도 긴 시간을 견디어내야 하는 만큼 간혹 짧은 날도 있는 법이다, 그런 날이 오늘이라는 것을 소리는 직감할 수 있었다. 너희는 서로의 냄새로부터 멀어지면서 서로의 숨을 잊어갔다. 우리는 마주보는 빛들을 잊어갔다.

너무 많은 말, 혹은 지나친 말. 너희는 이미 들은 것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으며 언젠가 들었던 것만 다시 들을 뿐이었다. 너희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산산조각날 듯 가냘팠다. 너는 유리의 팔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른 선물도 있어.

소리는 서재에서 꺼내온 그림책을 건네 주었다. 커다란 고목 아래 두 명의 어린 아이들이 손을 잡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걸 다 읽으면 바깥으로 데려다 줄게.

유리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건네어 받은 그림책 위의 검푸른 얼룩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너는 그애의 기억장애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제를 기억하게 되면 그애는 더 이상 유리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애의 방은 사라지고 말겠지. 주인을 잃은 방은 더 이상 누구의 안쪽도 되지 못하고 어스름한 바깥으로 남겠지. 유리는 종이 위의 글자들을 읽는다기보다는 얼룩을 감상하는 듯한 몽혼한 눈짓으로 그림책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서재에는 동화가 유독 많았다. 늙은 여자는 그중에서도 한 미국 작가의 동화를 유독 자주 꺼내어 보곤 했다. 그 작가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너 말고도 있었단다. 그때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지. 사실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문맹이고 어떤 책이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그날그날 손에 걸리는 대로 꺼내어 드는 편이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물을 때까지 나는 특정한 작가의 책을 반복해서 읽고 있다는 것도-정확히 말하면 손에 들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 오해라는 건 말로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해갈할 수 있는 오해란 없으니까. 어쩌면 그 사람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지.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작가의 이름을 하나의 친숙한 얼룩으로 기억해서 그런 그림이 내비치는 책들만 골라서 꺼내어 들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이의 말을 부정하는 게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셈이지.

이런 사정을 다 설명할 수도 있잖아요.

너도 알잖니. 나는 말이 서툴고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가 없다는 걸. 중간에 말을 버벅거리거나 중요한 단어를 놓치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그 사람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할 수도 있잖아. 그런 오해는 영영 돌이킬 수 없을 거야. 어쩌면 그는 내가 책을 혐오한다고 생각해서 이 서재를 다 불태워버리는 친절을 베풀려 할지도 모르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오해지만 어쩌겠니. 그건 말로써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내게는 왜 다 말해 주는 건가요?

너도 내게 무엇이든 말해주잖니. 늙은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장애를 알고 있잖아. 이건 천박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너도 나만큼 흉하다는 걸 알고 있단다. 그러니 너는 날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귀머거리를 이해하는 건 벙어리뿐이라는 말인가요?

벙어리는 평생 벙어리를 이해할 수 없고 귀머거리는 평생 귀머거리를 이해할 수 없단다. 같은 병을 앓는다고 해서 아픔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그건 알고 있어. 서로의 흉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그래도 너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단다.

괜찮아요. 그런 오해마저 없다면 우리는 평생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어버릴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내게 건네는 말이 아니고 오해를 풀려는 말도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알아들을게요. 당신은 내가 어떤 식으로 오해해도 괜찮은 거라고요.

그래, 그렇게 오해해도 괜찮단다.

난 위로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영원히 지속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단지 잠시만 미루어두고 싶은 것뿐이에요. 당신도 그렇게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너는 기억이 더이상 아프지도 향긋하지도 않다고 했지. 그건 당연한 거야. 속살로부터 떨어져나간 피부는 네게 고통을 주지 못해. 하얗게 바래버린 껍질은 너에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거야. 가늘고 흰 뿌리들, 그건 그저 단단하고 구체적인 물질일 뿐이지. 네 속에 있는 기억장치도 마찬가지야. 네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건 너로부터 멀어져서 하나의 영상으로 투영되지, 그 거리에서 너와 기억을 긴밀하게 연결하던 신경들은 모두 끊어지고 결국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게 되는 거야. 네가 그걸 바라보는 순간 더이상 기억은 네게 속해 있는 유기체가 아닌 거라고.

신경을 누르면 아파요. 그렇지만 신경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신경을 잡아 뜯어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어요. 기억도 그렇다는 거죠.

그래. 네게 속해 있는 걸 바라볼 수는 없는 거야. 너는 너를 바라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해. 그렇지만 너로부터 멀어진 너는 더이상 네가 아닌 거지.

유리, 밖에 나가고 싶니?

유리는 네게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으면서 유리가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펼쳐진 그림책의 나무는 점점 깊어지며 자라나고 있었다. 얼룩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유리의 살에는 색도 냄새도 없었다. 책의 속살 역시. 악취는 언제나 현재에 속해 있고 음악은 기억에 속해 있었다. 소리는 내장을 드러내놓고 날씨의 처분을 기다리는 작은 짐승처럼 잠자코 서 있었다. 항상 촉촉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피막이 점점 말라가는데도 소리는 아무런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너는 초조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 대답, 하나의 음성만으로 선고가 결정될 것이다. 기억은 다시 네 속에서 축축한 체액을 머금고 한결같이 다른 방들을 살아가거나 시꺼멓게 쪼그라든 초라한 물질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계속되거나 끝날 것이다.

부럽구나, 난 한 번이라도 넘어져 보고 싶어.

여자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언제나 과거에 속해 있었다. 소리는 어느덧 여자의 방 안에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유리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루살이에게는 입이 필요없다. 몸을 덥히기 위해 돋아난 깃털로 하늘을 나는 새들과 음식을 먹기 위해 벌어진 입으로 키스를 하는 사람들, 언젠가부터 사라져버린 날개와 입. 날개도 없이 입도 없이 다리도 없이 우리는 더이상 불필요한 일들을 할 필요도 없이. 그래도 소화기관이 퇴화하여 입이 없어져버린 하루살이와는 달리 유리에게는 입이 있었다. 그애에게 입은 단순히 먹을 것을 삼키는 입구가 아니라 언어를 내뱉는 출구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 서재를 불태우면 누군가의 언어는 사라지게 될까?

나무 하나에 매달린 하나의 입술, 종이 한 장에 매달린 하나의 언어. 언어가 사라지고 나면 너희가 나누었던 모든 말들도.

허공에 매달려 춤을 추는 여자의 서글프고 나약한 인상. 그녀는 유리이며 유리가 아닌 모든 얼굴들을 살점이 딸린 가면을 쓰듯 번갈아 쓰고 있었다. 가면을 떼어 새로운 가면을 쓸 때마다 갈무리하지 못한 살점이 비어져 흘러내렸다. 여분의 살은 점점 불어나 소리의 얼굴이 되었다. 피도 없이 흘러내리는 투명한 살. 소리는 영문도 모른 채 제 앞으로 빗물처럼 새어들어온 얼굴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가랑이 사이로 오물처럼 흘러내린 그림자는 짙푸른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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