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12회

가랑이?

갈비뼈가 뻐근하게 벌어지고 그 사이로 서늘한 어휘들이 네 안을 베며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어휘들이. 혹시 그녀가 두려운, 두려운, 침묵으로 고함에 질려 찢겨져버린 귓속의 얇은 베일로

찢겨버린 일상의 바깥으로 도망가려는 것은 아닐까.

가지 마요, 나를 버리고.

그녀는 누구지? 그녀는 너를 버려두고 오래 전에 사라지지 않았던가. 너는 더 이상 그녀의 방으로 건너갈 수 없었고 그녀도 더 이상 너를 소리라고 불러주지 않았으며 너와 그녀가 남기고 간 하루들은 자물쇠조차 없이 문이 잠겨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너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여자의 텅 빈 얼굴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가지 마요.

괜찮아.

춤을 추던 여자의 발 아래로 달큰한 악취가 흘러내렸다.

괜찮아. 너를 두고 아무데도 가지 않아. 우리는 어디로도 가지 못할 거야.

여자는 찢어진 아가미처럼 거칠고 여린 목소리로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내 손목을 볼래?

너는 여자의 왼쪽 팔목을, 아니

오른쪽 팔목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팔은 멍도 상처도 손자국도 없이 매끈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 그럼 내 발목을 볼래?

너는 여자의 발목을, 아니 발을, 아니, 다리를, 아니, 가랑이를, 아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뭐가요?

난 아무데도 가지 못할 거야. 기어가지도 뛰어가지도 못할 거야. 마지막 춤조차 추지 못할 거야. 난 아직 사람이 아니니까.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다리로 버티고 선 바닥 위에서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네 머리맡에 지저분한 트렁크를 놓고 사라졌다. 잠금쇠도 걸려 있지 않은 트렁크를 열자 가여울 정도로 꽉 조여져 접힌 우산들 수십 개가 보였다. 너는 우산 하나 하나와 눈을 맞추며 칠이 벗겨진 손잡이 부분을 매만졌다. 우산이 젖어있었다면 좁은 공간 안에서 곰팡이꽃이 번졌을지도 모른다. 우산은 메말라 있었다. 이곳, 안쪽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우산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너는 여자와 함께 우산을 나누어 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혹은 여자와 함께 달아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혹은

여자를 두고 달아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네게 말했을 것이다. 도망가라고. 기어서라도 바깥으로 나가라고. 네가 사람이니까. 너는 결국 이곳에 남았을 것이다. 너는 그녀가 아니니까. 그녀가 두고 간 두 개의 다리가 네게는 아깝지도 애틋하지도 않았으니까.

유리의 팔목은 나날이 지저분해졌다. 수십 차례 반복해서 물린 상처는 채 아물지 않은 채 짙은 빛깔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애에게 새겨넣은 상처들은 노화의 흔적이 되었다. 넌 주름도 없이 늙어가는 그녀의 팔목이 불안하고 부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유리.

응?

넌 유리가 맞지?

그래.

너의 이름을 가르쳐주지도 그애의 묻지도 않는 날에는, 그애가 너를 유리라고 불렀다.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네게 남아 있는 유리들의 잔향을 그녀도 알아챈 것일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언젠가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유리라는 말을 중얼거렸고, 그녀는 그 말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새로운 언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너희는 언젠가 들었던 말만을 거푸 중얼거렸다. 하루가 시작되고 사라지기 전까지의 언어만을.

유리. 난 너를 기다리지 않을 거야.

응. 나도 너를 기다리지 않을 거야.

널 찾지 않을 거야.

응. 나도 너를 찾지 않을 거야.

유리는 부드럽게 반들거리는 눈을 맞추어 왔다. 마치 네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시 올 거지? 나를 깨우러 올 거지?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살아온 방만큼, 꼭 하나의 방만큼 다시 돌아올 거야. 꼭 하루만큼 너와 함께 보낼 거야.

이번에는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자그맣고 따끈한 귓바퀴가 느껴졌다. 그녀의 속에서 음성을 갖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언어들이 느껴졌다.

박사는 매일 여자의 방에 찾아갔다. 그는 그녀를 안을 때마다 구두 한 켤레씩을 선물했다. 여자는 그의 선물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를 실망시킬까봐, 그 때문에 그녀의 다리수술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그녀의 허튼 우려가 모든 것을 망쳐버릴까봐 불길한 손으로 구두를 받아들였다. 분홍 발레 슈즈와 하늘빛 유리구두, 빨간 구두와 메리제인슈즈, 살색 뮬과 플랫 슈즈까지. 사내는 꽃말을 읊어주듯 그녀에게 구두의 이름들을, 그녀에게는 생소한 어휘들을 조곤조곤 일러 주었다. 그녀는 외국어를 배우듯 구두를 부르는 이름들을 익혀나갔다. 본래 그녀는 성급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매끈한 구두들을 바라보면서 두 다리로 걸어나가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두 다리로, 자그마한 두 발로 매일 다른 구두를 갈아 신고 바깥으로 나서는 상상을 믿게 되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속여가며 뱃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욕망, 두 다리로 걷고 싶다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목구멍 안쪽까지 아리게 끌어올리며 실컷 앓았다. 마지막 날, 박사는 구두를 들고 오지 않았다. 그도 맨발이었다. 그녀는 나체로 그를 맞았으나, 박사는 그녀를 뿌리치고 멀리 서 있었다. 높은 곳에 있는 얼굴이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윤곽을 자세히 노려보면 잘못 맞춘 주파처럼 조금씩 이지러진다는 귀신들처럼. 사내는 곧 비가 올 테니 옷을 입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그는 두 다리로, 단단한 힘줄이 불거진 두 발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여지껏 구두 속에 숨겨 두었던 수치심이 물밀 듯 흘려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날숨, 날숨, 날숨, 날숨만을 내쉬며 꺽꺽거렸다. 그녀는 속았던 것이다. 그녀는 믿고 말았던 것이다. 멍청하게도, 순진하게도.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 우화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는 미신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리 없는 인어가 다리를 갖게 되는 동화는 상징이라는 것을 알면서. 상징이 되기에 그녀는 그리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으므로, 그녀는 영원히 다리를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 어째서 믿고 말았던 걸까? 어째서, 그녀에게 조각과 같이 정교하고 과실처럼 생기있는 두 개의 발이 생기리라고 그토록 철석같이 믿고 말았을까? 매일 밤 밀려드는 의심에 온몸을 황홀하게 떨면서도. 그녀는 믿고 말았다.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실망할 일도 없으리라는 걸,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간절히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걸, 이 방에서 살아오는 하루 동안 그녀는 배워오지 않았던가. 아니, 그녀는 학습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실패는 그녀의 본질이었다. 그렇기에 방심했던 것이다. 실패뿐인 그녀를 공들여 속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가슴이 흠뻑 젖을 때까지, 눈물과 침과 콧물이 배를 타고 뭉툭한 사타구니로 흘러내려갈 때까지. 나체가 짠물로 흠뻑 젖을 때까지 울었다. 날숨, 날숨, 날숨만을 꺽꺽 내쉬면서. 실컷 울고 나서야 그녀는 다리라는 것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평생을 우주에서 떠돌며 토성의 고리를 보기만을 기다리던 비행사처럼, 항로를 잃어버린 소형 로켓에 갇혀 우주미아가 되며 떠돌면서 토성의 고리와 우연하게 마주치는 일만을, 그것이 기적인 줄을, 불가능한 일인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남몰래 염원하던 우주비행사처럼. 죽어가는 동안에도 끝내 토성의 고리라는 말을 내뱉지 못할 우주비행사처럼. 이루지 못할 소원만은, 그만큼 간절한 갈망만은 차마 유언할 수 없었던 사람처럼, 그녀는 우산, 우산, 우산, 우산,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녀는 뮬, 메리제인슈즈, 펌프스, 슬링백이라는 어휘들을 잊을 수 없었다. 한번 배운 외국어는 그녀의 언어 깊숙한 곳에 곰팡이처럼 스며들었다. 결국 그녀는 뮬, 메리제인슈즈, 펌프스, 슬링백이라는 어휘들로 비를 막았다. 어휘들을 접었다 펼치며 물기를 털었다. 그것의 살과 살 사이에 들어찬 젖은 천을 쓰다듬으며, 우산, 우산, 우산, 우산, 하고 중얼거렸다. 여자는 사내가 선물한 우산들을 잊을 수 없었다.

도망치지 말아요.

꿈속에서 너는 네가 서 있는 계단의 밑면으로 기어 사라지는 여자를 붙잡았다.

아직 가지 말아요. 당신 얼굴을 보고 싶어.

어째서?

목이 쉬어 희미하게 바랜 목소리가 벌레의 울음소리처럼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어째서?

하루가 가기 전에 나는 당신을 잊고 말테니까.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가 너와 바닥을 마주한 자리에 얼룩처럼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바닥에 엎드려 계단의 턱에 뺨을 갖다 대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네 볼을 울렸다.

소용없어. 난 기어서 떠날거야. 내가 마침내 다리를 가지게 됐다는 말을 했었니?

아뇨. 당신은 포기했다고 말했어요. 사람이 아닌 채로도 괜찮다고. 죽은 채로 살아갈 거라고 그랬어요.

그럴 리가. 얼마 전 수술에 성공했단다. 어려운 수술이지만 성공했다고 박사가 소리치는 걸 못 들었니?

너는 여자가 묻혀 있을 건너편의 바닥을, 간헐적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울리는 하얀 밑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내겐 두 개의 다리가 있어. 나도 사람이야.

그래요. 우린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응. 그러니 나는 나갈거야. 기어서 건너갈 거야. 더는 달라붙지 못할 곳에서 중력도 부력도 없는 곳에서 떨어져 망가질 때까지 계속 기어갈 거야.

여자는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소리는 한 번도 누군가 소리를 찾아 소리의 공간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쪽은 언제나 타인의 자리였다. 기억은 소리의 내부가 아닌 타인의 바깥에 위치해 있었다. 물 속에서 다리를 하염없이 휘저으며 앞이 아닌 위쪽으로 떠오르는 사람의 망령처럼 소리는 부질없이 발을 내딛으며 아래쪽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앞으로 내달리고 있다는 끈적하고 기름기 많은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했다.

이제 유리를 잊어주지 않을래?

서재에서 밤을 새던 날, 늙은 여자는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한 숨의 잠 사이에 밀려들었다. 그녀는 유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건 네게 달려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꿈의 모서리를 맨손으로 만지지 못하듯. 아무도 꿈의 가장자리를 맨발로 걸어나가지 못하듯. 아무도 누군가를 잊을 수는 없다. 아무도 유리를 잊을 수 없다. 유리 자신조차도. 유리는 그저 잊혀질 뿐이다. 잊는 것이 아니라.

붉은 이빨이 늘어났다. 유리는 불그스름한 팔찌의 흔적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혀 밑의 파란 혈류를 새삼스레 지켜보지 않듯. 낙엽이 떨어져나간 손목의 끝단을 새삼스레 더듬어보지 않듯.

살을 파고들어간 날카로운 빛의 감촉. 뭉그러진 조직의 하얗고 투박한 빗금.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물질의 영혼. 물질의 살결 속에 마음이 있다면 마음의 속살 안 가장 내밀한 곳에는 아프고 비참한 살이 있을까. 창 속으로 흐느끼며 내질러 들어오는 새벽의 빛살에 고요히 타들어가는 살은 희었다. 유령은 뼈마디만 남은 마음으로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손가락에 비추어들어오는 달빛은 뼈의 단락을 움켜쥐며 글자들의 음울한 형상을 죄어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유령의 뒤에서 목으로부터 떨어진 네 목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몸으로부터 찢겨져나간 목의 이음매, 몸으로부터 떨어져간 마음의 이음매를 감별하듯 어루만지는 손길. 제발 나를 뜯어내주세요. 내게 흔적을 남겨줘요. 아이들은 미래로부터 떨어져나간 눈사람의 둥글고 차가운 머리를 품 안에 안고 흐느꼈다. 나를 삼켜줘요. 당신에게 나의 흔적을 남겨 줘요.

유리였다. 어디있다 이제야 왔어? 난 평생 네가 들어오는 소리만 기다리면서 살았어. 끝내 마주치지 못했다면 난 이 하루를 낭비했던 걸까. 전조도 없이 예감도 없이 눈만 쌓인 바닥에는 모든 일시적인 결정을 우악스럽게 쥐어 터뜨리는 햇빛이 내리꽂혀서 나도 곧 바닥 위로 끈적하고 볼품없게 녹아 흩어질 것만 같았어.

유리는 네가 선물한 동화책을 펼쳐들고 있었다. 눈이 묻어 얼룩덜룩해진 책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끝도 없이 죽어가는 이야기들을 봐왔어. 유리, 나는 몇 번이나 폭발도 결말도 없이 푸르게 썩어버린 이야기들을 살아 왔어.

미래와 과거를 모두 믿는 사람들은 없어. 지나간 것 지나갈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나가고 있는 것만을 사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갈 뿐이지. 유리는 손목을 들여보였다. 싱싱한 붉은 빛을 잃고 갈색 얼룩으로 변해버린 깨물린 자국은 더러웠다.

현은 죽어버린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가라앉으며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현을 위해 설계한 방들이 일순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리의 얼굴이 한 번도 불어 보지 못한 물풍선의 내부처럼 일그러졌다. 소리의 목소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의 순간처럼 조용하게 폭발하였다. 이 공간에는 더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벽도, 바닥도, 창도, 일몰도, 욕구도, 상처도. 너는 네 혀 속에서 절로 부풀며 깨어지고 있는 침방울들을 외부로 밀어내었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거야. 내가 영영 우산이 될 수 없듯 너 역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물 속에서 입을 맞추며 포개어지는 물방울들의 속에서는 어떤 언어가 번지고 있을까.

내가 두려워한 건 도저한 기억들 뿐이야. 죽은 개의 자궁 속에 웅크린 채 생의 방향으로 머리를 내미는 일이 끔찍하게도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개의 형상 뿐이야. 부드러운 뼈는 아직 여물지 않아서 테이블 위에서 넘어지는 것만으로, 그 작은 높이에서 추락하는 것만으로 사지를 뒤뜰며 산산이 부서지고 말겠지. 언젠가 네가 내가 선물해 주었던 유리구슬처럼.

난 네가 그런 걸 선물해 준 적이 없어.

그래. 넌 다른 방을 살았던 너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흉내내지만 그 방에 산 적이 없으니까.

그 방?

응. 그 방에서는 눈이 많이 내렸어. 우리는 같이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온종일 눈이 쌓인 바닥은 우리의 그림자 형태로 젖어 있었어. 넌 그게 시간이라고 말했짐나 난 이해할 수 없었지.

난 시간이 뭔지 몰라.

나도 마찬가지야. 난 내가 알지 못하는 어휘들만을 조금씩 자아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으니까. 그래도 들어봐. 난 바닥에 누워 네 숨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어. 넌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히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고 있었지. 그때 네 눈썹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는데, 그건 조금도 녹지 않고 네 숨과 함께 전율하고 있었어. 이해하겠어? 넌 눈송이만큼이나 차가웠던 거야. 창백한 얼굴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뼈대만큼이나 단단해 보였어. 난 너를 깨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네 얼굴에 쌓여가는 작고 정교한 눈송이들을 쳐다보고 있었지. 그때, 난 너와 함께 죽고 싶었어.

그 눈송이는 나만큼 따뜻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겠니?

아니. 너를 끌어안고 싶지 않았어. 너를 녹이고 물처럼 부드럽게 유영하는 공기로 만들고, 또 그렇게 비구름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너는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유리, 난 그 방을 혼자 살고 싶지 않았어.

넌 항상 혼자였잖아. 들어봐, 소리. 네가 준 책을 거의 다 읽었어.

벌써?

응. 넌 항상 같은 문장만 반복해서 쓰고 있으니까 아무리 많은 양이라도 읽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 다행이지 않아?

유리는 자그마한 입술을 소리의 귓가에 붙이고 소곤거렸다. 도저한 습기를 앓는 물방울들이 피와 이름을 기침해내는 구름 속에서 움틀거리는 밤의 그림자처럼.

잠깐만, 유리. 난 아직 듣고 싶지 않아.

난 아침부터 너랑 이야기할 순간만을 계속 기다려 왔단 말이야.

그래도. 곧 모든 게 변해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넌 내가 몰라볼 정도로 성숙하게 자라고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구두를 신고 이 방에서 걸어나가겠지. 네 밀실을 걸어나가는 널 난 감히 붙잡을 수도 없을 거야. 네게 이름을 구걸할 수도 없을 거야. 이곳에 무덤을 파던 건, 하루를 지새우며 눈송이로 얼굴을 파묻던 건 너뿐이었으니까. 난 수백 번 너를 두고 이 방을 떠났으니까. 난 수백 번 너에게 돌아왔으니까. 넌 한 번도 나를 붙잡지 않았지. 넌 두 번 다시 떠나가는 나를 붙잡지 않겠지. 아, 난 네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어. 너는 내 다리를 자르고 난 네 다리를 자르고, 아직은 비조차 내리지 않는 이 방이 보석같이 반짝이는 눈송이로 뒤덮일 때까지 우리가 같은 흙에 묻힌 유골로 발견될 때까지 결코 너에게 닿을 수 없는 이 방 안에서 네가 내뱉은 숨을 들이마쉬며 죽어갔으면 좋겠어. 그리고 다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유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직 네 불안만이, 적합한 어휘를 잃어버리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문장들만이 너희를 비켜나가며 맴도는 것 같았다. 끝과 시작이 돌이킬 수 없이 맞붙어버린 마콘도의 서사시처럼. 유리는 네게 입맞추지 않고, 너를 끌어안지도 않고 말했다.

괜찮아. 날 도와주지 않아도 돼. 난 이 방에서 나갈 방법을 찾아냈어.

어떻게?

오늘을 기억할 거야. 그리고 변하지 않는 모든 것을 바꿀 거야. 오늘을 어제로, 내일을 오늘로 바꾸어 부르는 거야. 아침까지 난 단단한 실체를 바꾸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어. 굽어 있는 두 다리를 펴고, 골반을 뒤틀며 걸어가고 손가락을 움직여서 글을 쓸거야. 소리. 난 글을 쓸거야.

제발 그러지 마. 함께 이곳에 남아줘. 이 방을 나가면, 넌 결국 바깥으로, 얼음사막으로 나가게 될거야. 그곳에서 네 어린시절을 찾고 글을 쓰겠지. 모두가 너를 읽고 너를 사랑하겠지. 그럼 나는? 네가 내일을 열어젖히고 걸어가는 동안, 심해에 가라앉아 있던 하얀 심장이 썩어가는 살을 잡아먹고 얼어붙은 호수의 엷은 얼음 표면까지 나와서 심장소리처럼 나직하고 비참한 노크소리를 내면 난, 이제 누구의 방을 헤매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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