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13회

소리. 모두가 너를 두고 갈 거야. 허공에서 춤을 추던 여자가 눈을 감고 발을 내저으며 달려가던 곳으로, 육체와 마음의 공간을 잊고 돌아간 순수한 공간으로, 난 너를 데려갈 수 없어.

어째서? 그녀를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나야. 네게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하나하나 관찰한 건, 그래서 당장이라도 눈송이들이 표상하던 비극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수백의 유리들을 모두 기억하는 건 나야.

그래도 넌 유리가 아니야.

날 유리라고 불러주던 사람들도 있었어.

그 사람들도 유리가 아니야.

그럼 얼음사막은 누구의 고향이지?

소리,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어선 안돼. 네 고향에는 모어도 지명도 없다는 걸, 아무도 네 고향의 위치를 찾을 수 없고 아무도 네 고향의 이름을 발음할 수 없다는 걸.

이름도 지도도 없이 난 무얼 기억해야 하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 없어. 기억은 네 가슴속에 파인 냄새나는 구덩이 속에서 심해의 미생물처럼 떠돌고 있으니까. 네가 그것들을 기억하려 하는 건 그것들을 잊기 위해 노력할 때뿐이야. 넌 아무리 발악해도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니 기억할 필요도 없어.

날 두고 가지 마. 유리. 여긴 네 방이잖아.

응. 너는 버려두고 갈 수 없지만 나는 잊고 갈 수 있어. 내 방이니까. 넌 그냥 평소처럼 내가 잠든 틈을 타서 네 기억의 휴게실로 돌아가면 돼. 난 내가 해야하는 일을 드디어 찾아냈어. 난 글을 쓸 거야. 소리. 너처럼 비참하고 불우하지만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있는 글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나고 죽고 잊혀지는 하나의 긴 실타래를 가지고 있는 글을. 난 유령이 되지 않을 거야. 네가 보여준 글들처럼 우스꽝스러운 언어로 울지 않을 거야. 죽은 채로 태어난 아기들을 넌 차마 버리지조차 못했지만 난 달라. 내 아이들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채로 태어날거야. 누구보다 크고 높은 목소리로 울부짖을 거야. 누구라도 내 흉측한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내 글을 방문할 거야.

가지 마. 난 네가 나와 함께 죽어줬으면 좋겠어.

난 나를 가둬둔 모두가, 나를 배제하고 나를 소외시키고 나를 유폐하고 나를 잊고 나를 방치하고 나를 기만한 모두가 오래도록 살았으면 좋겠어. 나만이 죽어버린 세계에서 내 글과 함께, 흉측한 얼굴을 한 명랑한 사람들만이 오래오래 살며 시간에 오염된 공간을 만끽했으면 좋겠어. 소리, 울지 마. 네가 들어야 하는 건 내 말이 아니라 내 울음뿐이라 하더라도. 네가 들을 수 있는 건 내 말이 아닌 울음뿐이라 하더라도. 네가 증언해줄만한 언어조차 난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언어를 스치고 빠져나간 무형의 말들이 우주 어딘가엔 존재한다면 바깥에서의 삶도 우리가 감내해야 할 진실일 수 있었던 걸까요?

여자가 너만큼 이기적이었다면 네게 말을 걸지 않았을 텐데. 아무도 네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영영 바깥을, 얼음사막의 유년을 꿈꾸며 잠들 수 있었을 텐데.

한없이 반복되는 하루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다란 문장이다. 낱낱의 어휘들로 나눌 수 없는 문장이다. 더듬더듬거리면서 서툴게 이어나가는 문장, 세련되게 쪼갤 수 없는 문장, 어둠이 갇혀 있는 문장, 빛도 함께 갇혀 있는, 그러나 빛은 어둠을, 어둠은 빛을 볼 수 없는 문장, 사실은 빛도 어둠도 없는 어스름한 문장, 너희는 일생동안 빛과 어둠을 찾아 헤매었지만 사실 어디에도 빛과 어둠은 없었다는 것을, 그것은 다만 짙거나 옅은 어스름을 가리키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다는 것을, 삼각형이나 원과 마찬가지로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하학적인 상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언젠가 알아차리게될 때, 그때 너희는 너희의 언어에서 빛과 어둠을 가리키는 모든 어휘들을, 빛과 어둠이 상징하던 모든 어휘들을 지울 수 있을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한 번도 빛과 어둠의 세계에 속해 본 적이 없었기에. 여자의 두 다리는 아프지 않다. 너는 아프지 않은 두 다리를 주물러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여자의 텅 빈 하반신에 손을 뻗는다. 여자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하얗고 맨들맨들한 가면처럼 보인다. 그녀의 눈과 코, 인중과 안와, 돌출되고 함몰된 이목구비의 그늘들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대답한다. 만지고 싶니? 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만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난 다리를 잘라내고 싶어. 플랫 구두를 신은 발, 하이힐을 신은 발, 유리 구두를 신은 발, 스타킹을 신은 발, 그것도 아니라면 맨발, 뭐든지 좋아. 다만 내 발을 잘라내고 싶을 뿐이야. 하고 여자가 말한다. 여자는 꿈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두 다리가 없으므로,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누구도, 하물며 그녀 자신도 그녀의 다리를 잘라낼 수는 없는 것이다. 네게는 두 다리가 있었지만 다리를 잘라보고 싶은 욕구는 없었다. 다리를 가지고 싶은 욕구가 없었으므로. 여자는 나가고 싶다고 했다. 날 내보내 줘.

당신은 언제라도 나갈 수 있어요. 봐요. 문도 열려 있잖아.

너는 벽처럼 새하얀 문의 틈새를 벌려 안쪽으로 당겨 열면서 이야기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다리 없이는 나갈 수 없어.

팔로 기어 나가요. 하반신이 잘려도 생을 향해 진물을 흘리며 나아가는 절지동물처럼.

그들은 생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야.

그럼 죽음을 향해. 안쪽에 죽음이 있다면 바깥에도 있을 테니.

다리 없이는 기어 나갈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아니요. 다리 없이도 기어 나갈 수 있어요.

사람이 아니라면.

기어 나가기 위해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

그래요.

소리는 서글픈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이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함께 남아주면 좋겠어요. 함께 밤을 지새우고 함께 갑갑한 숨을 나누면 좋겠어요.

네겐 돌아갈 곳이 있잖아.

아니요. 내겐 이 방뿐이에요.

거짓말 마. 네가 매일 다른 방들을 드나든다는 걸 알고 있어. 그 방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도.

그 방들이 모두 얕고 비참한 몇 개의 어휘만으로 불린다는 것도, 당신은 알고 있겠죠.

그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건 아니야. 물론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아무것도 상징할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 이외에, 우리가 보지 않은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걸. 알지 못하는 걸 상징할 수는 없는 거예요.

알지 못한다면? 모르기에 상징한다면?

적어도 내가 말하는 단어들은 상징이 아니에요. 난 명료한 의미로 정의될 수 없는 문장들만을 이야기하고 내 문장에 오도되는 것은 당연하니까, 사실 내가 이토록 절박하게 이야기하는 말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의미가 없는 것만이 나를 이렇게 아프게 만드니까. 임부의 튼살, 잃어버린 죽음을 게워내며 헛구역질하는 갓난아기, 모래사막, 벌판에서 쓰러져 유골이 된 연인, 끌어안긴 사내는 일생동안 여자를 알지 못했음에도 그를 끌어안고 죽어간 여자와 함께 백골이 된 탓에 연인으로 불리게 된 두 개의 유골, 여자를 겁탈하며 여자를 죽이는 절지동물들, 더는 무엇도 수태하지 못하는 검은 자궁과 그 속에서 익사한 채 꼬리부터 비어져 나오는 검은 쥐들, 악몽을 꾸고 시꺼먼 흙 위에 구역질을 하는 살인자, 하지만 아무것도 게워내지 못하는 사내, 뱃속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는 사람들, 뱃속을 비우고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생물들.

넌 배경에 대해서는 조금도 묘사하지 않는구나.

난 배경을 보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건 형상도 마찬가지지.

이곳에는 배경이 없으니까.

그건 모든 것이 마찬가지지.

그래도 상상할 수는 있잖아요. 난 당신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고 당신의 다리를 상상할 수 있어요.

그래도 배경을 상상할 수는 없겠지.

그래요. 난 한 번도 구체적인 바깥의 풍경을 감각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난 한 번도 복잡한 지형지물의 세계에 속해본 적이 없으니까.

난 당신이 알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요.

바깥에, 바깥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불가능에 두고 온 목소리. 유리들이 속삭이는 소리. 충고하는 소리. 얘야. 유리를 괴롭히지 마렴. 유리를 해치지도 말고. 그 애를 더럽혀서도 안돼. 유리는 투명해야 한단다. 투명한 본질을 갖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유리가 아니란다. 유리는 아플 수도 없어. 아픔을 앓기 위해 아픔을 알기 위해 유리는 유리이기를 포기해야 한단다. 투명하고 둥근 속으로부터 비집어져 나와 비참하게 흐르는 절지동물의 내장처럼 그 애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은 유리는 유리일 수 없단다. 더럽혀진 유리는, 멍이 든 유리는, 다른 색으로 물들어 불투명해진 유리는 더 이상 연약하고 희미한 빛의 몸짓들을 그대로 투과시키는 유리일 수는 없는 거란다. 그러니까 유리를 다른 색으로 물들이되 그 애를 막아서는 안 돼. 붉고 노란 색으로, 참혹한 회녹색으로 물들이더라도 그 애는 투명해야 한단다. 그 애는 반짝이는 유리병이 될 지언정 병이 들 수는 없고 날카로운 모서리로 너희를 아프게 할지언정 아플 수는 없는 없는 거란다. 잊지 말렴. 유리에서 비어져나오는 투명한 살을 너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럼에도 네가 스스로를 유리라고 부를 수 없는 건 네가 유리의 본성인 투명함 이외에도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무척이나 많이,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언젠가 네가 투명함 이외의 모든 본성들을 버리게 되면 가리어진 껍질들을 모두 벗겨내게 되면 알게 될 거야. 사실 너는 그다지 투명하지 않다는 걸. 아주 희미한 투명함만으로는 유리로 불릴 수 없다는 걸. 선명하도록 투명한 유리가, 오직 투명함만을 본성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유리가 있는 한. 그래도 넌 스스로를 유리로 부를 수 있게 되겠지. 우리는 그렇게만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거란다. 우리는 그렇게만 유리인 척 할 수 있는 거란다.

선함은 유쾌(agréable)할 순 있어도 아름다울 순 없는 거야. 아름다움은 관능이고, 관능은 추악하기 때문이지. 적어도 내게 있어선 추악하지 않은 아름다움은 없어.

눈처럼 아늑한 북극곰의 시체 위에서, 라고 소년은 썼다. 무얼 쓰는지, 무얼 상상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순간적인 인상들은 무엇보다도 영원이라는 개념에 맞닿아 있었다. 너는 숨이 컥컥 막힐 정도로 꽁꽁 얼어버린 채로 영영 그치지 않을 것처럼 내리는, 한 방울도 쏟아지지 않는 비에 대해 생각했다. 밤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눈은 그와는 달랐다. 새벽에 무력하게 뭉그러져 버리는 눈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리는 바닥에서 최후를 준비하는 얼음 결정들을 먼지를 쓸 듯 팔꿈치로 이리저리 밀며 뒤적거리고 있었다. 너는 여자의 방에도 우산이 아닌 다른 것, 예컨대 한 줌의 햇빛이나 눈송이들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녀는 평소와 달라진 점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저 향기도 없이 으무러가는 겨울 꽃가루들, 생명력도 정충도 없이 단지 녹아가기 위해 내려오는, 물 이전의 것들을 그녀는 끝내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최초를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그녀는 우산 이전의, 물 이전의 무언가를 간직할 수 없을 것이다. 베개 속에 몸을 숨기고 그 위에 놓인 하얀 목덜미를 물어뜯어 흡혈하는 해충들이 네 악몽을 그녀에게 옮겨주지 않는 이상, 단지 기어가기 위해 붙여진 두 개의 다리를 갖게 된 그녀가 마침내 사람으로서 이제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물 이전의 것들을 바라보게 되지 않는 이상 여자는 눈을 눈인 채로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루를 넘게 사는 생에게서 피를 빨리는 동물의 젖은 목덜미를 부럽게, 또한 다소 치욕스럽게 내려다보는 유령의 비참한 신음소리처럼,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다리 없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난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발레리나가 되었을 거야,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하루에 열두시간씩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발목이 퉁퉁 부르트고 말라 비틀어진 허벅지 사이에서 녹색 변이 새어나올 때까지 춤을 췄을 거야. 국립발레단이 아니라면 시립발레단에서, 그것도 아니라면 동아리에서, 그것도 아니라면 길거리에서 혼자서라도 춤을 췄을 거야. 다리만 있었다면. 발레슈즈 없이도 푸앵트를 하고 우아한 턴을 하며 호선을 그릴 다리만, 길고 하얄 필요는 없어, 아주 뭉툭하고 흉측한 다리라도 좋아. 난 하루에 열두 시간씩 발레를 췄을 거고 누구보다 오랫동안 턴을 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다리가 없다고 해서 발레를 포기할 수 있었던 건 아니야. 여자는 짐승처럼 흐느끼며 말하기 시작했다. 난 아직도 열두시간씩 발레를 추고 있어. 재능이 없다면 숙명도 아닐 거라고, 가망이 없다면 갈망하지 않아도 좋다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 아니, 누군가 내게 충고했더라도 돌이킬 수 없었을 거야. 난 결코 발레리나가 될 수 없겠지만 아직도 춤을 춰. 발레를 막 시작한 애라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포지션도 취할 수 없지만, 막 걸음마를 떼는 갓난 아이만큼도 제대로 걸어다닐 수 없지만 지금도 상상 속에서 계속 발레를 연습하고 있어.

하루를 넘어간 순간부터 계속?

응. 처음 하루를 넘는 그 순간부터 계속. 하루에 하루를 집적하고 어제를 쌓아가는 동안 꿈을 갖는 게 좋겠다고 그가 말했지. 그러면 무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난 발레를 하고 싶다고 말했어. 누구보다 어여쁜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어. 어쩌면 대답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듣지 않았지. 발레를 춰야겠다고 발레를 출 수밖에 없다고 발레를 추지 않으면 난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 난 그날부터 매일같이 발레를 추는 영상을 꿈꾸고 발레를 추는 영상을 보고 발레를 추는 영상만을 몽상하면서 이 지긋지긋한 어제들을 쌓아나갔어. 나도 내가 병신이라는 걸 알아. 그런데 어쩌겠어? 난 발레를 추지 않고 살 수 없어. 그러니 난 아직 살아 있는게 아니고 아마 앞으로도 평생 동안 살지 못하겠지.

비웃지 않아요. 당신이 발레 슈즈를 불태우지 않고 묻어 두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난 당신 춤이 좋아요. 소리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꿈 속에서 너는 여자의 방에서 우산을 접으며 의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의사는 네게서 등을 돌리고 병원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강하게 투과하며 빛을 내동댕이치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는 마치 빛 속에 감싸여 창문 너머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의사에게 네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의사는 병원의 진단실로 탈바꿈한 여자의 방에서, 네가 한 번도 의식해 본적이 없던 창문을, 지독한 빛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창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그가 창문 너머에 앉아 있는 새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햇빛만큼이나 새하얗고 창문만큼이나 단단한 물성을 지닌 새를. 넌 그를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만약 여자의 병이 고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그런 절망적인 진단을 내리는 순간에 의사가 새에 골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갑작스레 창문 밖에서 뛰어들어오는 새벽의 빛처럼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의사의 앞에 마주앉아 역광이 비추어 잘 보이지 않는 그의 실루엣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의사는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때, 너는 돌이켜 생각해도,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이상한 행동을 했다. 병실에서 뛰쳐나간 것이었다. 그건 의사의 입술에서 나올 치명적인 선고가 두려웠기 때문도, 그의 방만한 태도가 역겨웠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너는 순간 의사를 위해야 한다고, 그에게 그가 원치 않는 병명을 입밖으로 꺼내게 하는 수고를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너는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는, 아니 한 번도 걸어볼 수 없을 것이라는 운명을 인도받을 여자보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 주어야 할 의사의 입장에서 치를 떨며 바깥으로 도망친 것이다. 무의식에 따라 걸음을 내딛게 되는 치명적인 순간에 우리는 종종 그와 같은 행동을 저지르곤 한다. 꿈 속의 방에서 너는 그 누구보다도 여자였고, 그렇기에 온전히 그녀의 마음을 앓을 수 없었다. 너는 여자였기에 의사가 되었고, 네 마음을 의자 위에 내팽개친 채 방에서 나왔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여자는 여전히 뭉툭한 사타구니를 팔로 감싼 채 날숨을 색색 내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그 방에 남겨둔 그녀의 존재를 그녀가 발견하지 못하길 바랐지만, 그녀는 결국 같은 의자 위에 앉아야 할 것이다.

늙은 여자는 매우 천천히 책을 읽어나갔다. 언젠가 소리가 그녀를 시인이라고 부른 뒤부터 여자는 주로 서재에서 밤을 보냈는데, 그녀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독서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는 암흑에서 더욱 부옇게 빛나는 그녀의 희미한 체열만으로 책의 속살 위에 인쇄된 글자를 뚫어져라 노려보곤 했는데, 어둠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소리로서는 그녀가 과연 글자를 읽고 있는지, 이렇게 어두운 공간에서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미미한 빛만을 가지고 글을 읽는 일이 가능한지, 혹시 그녀는 눈을 감고 책을 읽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소리는 늙은 여자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눈을 감고 누군가가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상상하며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한 몽상이 그녀의 독서방식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결국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그녀에게 어떻게 책을 읽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소리의 추측이 절반 정도 맞다고 인정했다. 소리가 처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소리의 목소리에서 피어오르는 이미지들을 만끽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소리가 바깥에 나가 있는 동안 그녀는 독서에 대한 열망,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눈꺼풀 속의 거무스름한 색채들을 잊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혼자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소리가 짐작한 대로 소리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서를 이어가던 도중, 그녀는 이러한 독서방식이 단지 그녀의 혼잣말하는 습관을 타인의 목소리로 변조한 것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이후부터는 도저히 소리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음색을 바꾸고 억양을 변조해 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선명하고 지긋지긋한 목소리를, 혼잣말을 하는 일상적인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녀에게 독서는 일상으로부터, 시로부터의 도피였으므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불가능의 세계를 엿듣는 일이었으므로, 독서에서 그녀의 음성이 끼어드는 일은, 그래서 그녀의 찬란한 미지를 혼잣말로 전락시키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순이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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