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4회

바깥이라고? 그럼 안은 어딘데? 황당해하며 중얼거리는 소리의 눈 앞에서 유리는 제 몸을 가리켰다. 여기, 이 안쪽. 숨과 물이 들어가는 곳.

아니야, 바깥은 이 방 바깥이야.

이 좁은 방을 바깥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리에게 있어서 첫 일출을 맞이한 곳, 언어와 날숨이 새어나가는 곳, 피부를 둘러싼 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외부는 아무리 좁은 공간이라도,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바깥이었던 것이다.

여기보다 더 바깥.

그런 게 있어?

응,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소리는 의심에 가늘어진 유리의 두 눈을 마주쳤다. 여기보다 더 바깥. 이 방의 바깥. 바깥의 바깥. 네 하루는 내 하루와는 다를 거야.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와 하루, 끝과 끝, 바깥과 바깥. 어쩌면, 소리가 믿었던 바깥도 바깥이 아닐 수도 있었다. 소리의 바깥은 누군가의 내부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소리보다 긴 하루를 사는, 소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긋한 일몰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안쪽이 소리의 바깥일 수도 있었다. 방과 방, 방들의 미로를 내려다 본 적이 있었던가. 소리는 언제나 본능적으로 찾아들었던 유리의 방들을 생각했다. 어쩌면, 방과 방, 그리고 방의 옆에 놓인 방들에는 소리가 마주하지 않은 유리들이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채 하나의 방, 하나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가 마주하지 못한 수천, 수만개의 내부들이, 유리가 되지 못한 수만 개의 안쪽들이 바깥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소리의 바깥은?

내 바깥은 너야, 소리.

유리는 소리를 빤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최면을 걸 듯 중얼거렸다.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잖아. 오늘 밤을 여기서 보내기로 했잖아. 그렇지?

그래, 내일, 내일은 나가자 유리. 데리러 올게.

소리는 말 없이 앉아 있는 유리를 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유리는 어둑한 실내에서 소리가 사라지는 모양을 꿈을 바라보듯 멍한 눈길로 지켜볼 뿐이었다. 소리의 출구로 자신도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소리를 빤히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유리의 출구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람의 욕조에 등을 대고 드러누운 채 뜨끈한 물에 몸이 녹아가는 줄도 모르고 노곤한 습기에 취해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는 눈사람처럼, 유리는 소리를 따라 나서지도 문을 막아서지도 않았다. 그저, 가지 마. 나를 두고. 애원하듯 속삭일 뿐이었다. 소리가 나선 문턱은 유리의 바깥이었다. 존재조차 지각할 수 없는 바깥. 안쪽의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정한 외부. 유리의 바깥은 소리에게는 이미 안쪽이었다. 방의 바깥에서, 미로의 안쪽에서 소리는 여느때와 같은 일몰을 맞았다. 유리의 어제 역시, 새로운 방에서 처음을 맞이한 유리의 바깥으로 내몰려 있었다. 어제의 기억은 이미 소리에게만 속해 있는 바깥-소리의 내부였다.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지 못한 유리는 그대로 죽고 만 것이다. 일몰을 함께하지 못한 유리는 이제 없다. 그렇지만, 유리만이 바깥을 경험해도 괜찮은 것일까? 소리는 이 미로의 바깥을, 소리가 알고 있는 바깥의 바깥을 영영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바깥으로 떠나가는 소리를 빤히 보고서도 그것이 바깥인 줄 모르는 유리와 마찬가지로. 유리를 데리고 소리의 내부, 유리의 바깥으로 나선다면 소리는 영영 혼자만의 내부에 갇히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바깥으로 나선 유리는 홀로 내부에 남겨진 소리를, 제 옆에서 바깥을 꿈꾸는 소리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바깥으로 나서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유리가 바깥으로 빠져나온 순간 유리가 머무르던 방은 더 이상 누구의 바깥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방들은 모두 신기루처럼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소리는 안쪽을 잃게 되는 것이다. 유리의 방, 더는 유리에게 속해 있지 않은 유리의 하루들이 모두 사라지고 소리의 몸을 이루었던 기억들이 소리의 숨구멍을 막고 괴롭혔던 색도 냄새도 없는 먼지들이 모두 사라지고, 안쪽도 바깥도 아닌 유리의 바깥에, 소리는 홀로 남겨지게 될지도 모른다. 유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애의 바깥이 바깥이 아니라는 것도, 그애의 안쪽이 바깥일 수 없다는 것도. 바깥을 향해 뻗어 있는 소리의 구멍들은 모두 하루라고 믿었던 날들의 기억으로 메워져 있었다. 먼지들은 소리를 갑갑하고 서글프게 만들었지만 누군가의 기억 없이, 소리는 더 이상 멀쩡히 서 있을 수도 주저 앉을 수도, 사람의 형태로 존재할 수도 없었다. 제 것이 아닌 기억들은 이미 소리의 몸이 되어 있었다. 아직 소리에게는 바깥과 안쪽이 모두 필요했다. 유리의 방들과 미로가 모두 필요했다. 소리는 하루를 끝마친 유리를 두고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바깥으로.

바깥의 사람들은 소리와 마찬가지로 방 안쪽 사람들의 하루를 건너갈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방보다 긴 일몰이 존재했다. 소리가 처음으로 바깥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유리와 함께 커다란 들쥐를 마주보았던 기억을 떠올렸을 때였다. 아니, 그것이 들쥐였는지 뱀이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피리 부는 사내의 뒤롤 쫓아가던 들쥐들을 모조리 잡아먹었던 검은 물 속의 뱀처럼,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뱀들을 씹지도 않고 붉은 살 속으로 밀어넣던 짐승처럼, 거대한 쥐떼와 같은 짐승은 우글거리는 피부 속에서 찍, 찍 하는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때, 너희는 손을 마주잡고 뱀-혹은 쥐-를 바라보고 있었다. 뱃속에서 가슴팍에서 팔꿈치에서 아랫배에서 두툼한 목에서 찍, 찍, 찍찍하는 울음이 찢어지듯 갈라져나왔다. 바라보는 사이에 유리 역시 찍, 찍하고 울며 소리의 눈앞에서 쥐떼 속에 섞여들어갔다. 가지 마, 나를 두고. 소리는 찍, 찍찍 하고 울지 못했다. 뱀은 여전히 소리가 흉내낼 수 없는 언어로 울고 있었다. 소리 역시, 뱀이 흉내내지 못하는 언어로 울부짖었다. 유리는 너희의 언어를 버렸다. 너희의 몸을, 너희의 손을 버렸다. 소리는 마주잡았던 손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었다. 소리는 남겨진 언어로 낯선 현상의 정체를 묘사하고 추측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너희의 언어에서는 시꺼멓게 바글거리는 눈들에 적합한 어휘를 찾을 수 없었다. 소리는 오래도록 흐느꼈다. 검은 눈들, 검은, 눈들, 눈에 맞비추어진 상은 체액에 얼룩져 번들거렸다. 너, 왜 우니? 유리였다. 쥐도 뱀도 아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불그스름한 피부의 유리. 소리는 그녀가 유리이며 얼음사막에서 온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얼음사막이라는 말을 꺼내기 이전부터. 그 순간부터 소리는 하루를 넘어선 기억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유리는 기억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는 매일 첫 인사를 나누었고 첫 번째 입맞춤을 하였으며 첫 번째 깨문 자국을 팔꿈치에 새겼다. 쥐와 뱀, 얼음사막이라는 어휘들을 유리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생뚱맞은 어휘들을-이 방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번들거리는 눈들을 바라볼 때의 꺼림칙한 감각을 아무리 설명해 보아도 유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겁쟁이구나, 소리. 쥐나 뱀, 얼음사막 같은 건 모두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해. 용기나 기적, 유령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꿈같은 거라고.

아냐, 유리. 쥐떼랑 뱀, 얼음사막은 모두 실재하는 거야. 유령과 고독, 꿈만큼이나 절실하게 존재하는 거야. 소리는 유리의 통통한 목을 졸랐다. 새까만 눈동자에 핏발이 서며 불룩 튀어나왔다. 유리는 켁켁거리며 기침을 하면서도 소리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지 않았다. 발버둥도 치지 않았다. 손을 올리지조차 않았다.

유리, 넌 무섭지도 않아?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곧 일몰이야, 소리. 무서워하는 것은 유리가 아니었다. 소리였다. 내일로 건너가지 못하는 것은. 도래하는 일몰이 두려워 견딜 수 없는 것은. 소리는 입을 벌리고 하얀 모자이크 타일을 바라보았다. 말간 침이 발톱 옆으로 떨어졌다. 하얀 바닥은 덜 하얀 빛깔로 물들어갔다. 커져가는 점을 바라보면서 소리가 중얼거렸다. 유리, 너는 내일을 믿지 않아?

응. 그런건 편지나 질병, 시와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는 말에 불과해.

나는 조금, 믿는 것 같아.

종교를 믿듯이?

그런 걸까? 신을 믿듯이?

신의 존재 혹은 부재를 믿듯. 종교를 믿는다면 달리 뭐겠어?

모르겠어. 하지만 유리, 나는 느껴져. 쥐도 뱀도 얼음사막도 전부 다. 눈 안쪽이 부서질 것처럼 죄여오고 가슴과 목을 잇는 긴 통로에서 하얀 물뱀들이 바글거리는 것 같아. 메슥거려. 딸꾹질을 할 때마다 두피 아래에서 쥐들이 하얀 울음소리들을 낳아 파묻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주 역겹고 애틋한.

소리, 그건 착각이야. 너는 딸꾹질을 하고 있지 않아. 게다가 쥐들은 울지 않는다고.

쥐들이 울지 않는다고?

그래. 쥐들은 오래전부터 울지 않았어.

뱀은?

뱀이야, 뭐. 지독하게 울지.

어떻게? 찍찍하고?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는데? 쥐도 뱀도 얼음사막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그건 유령만큼이나 없는 거라며?

너 정말 집요하구나. 유령은 없어도 유령이라는 말은 있잖아. 쥐나 뱀도 마찬가지지.

그게 아니야, 유리. 나는 얼음사막에서 너를 만났어. 그곳에서 우리는 뱀에게 잡아먹힌 쥐떼들을 함께 봤어.

그래. 유리는 아직도 침을 흘리고 있는 소리의 입술을 맨손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소리, 쥐도 뱀도 느낄 수 없지만 일몰이 다가오는 건 느낄 수 있어. 한 번도 일몰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아. 뱀이 찍, 찍하고 운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아득한 일출보다도 훨씬 확실하게. 소리는 피부 위를 작은 벌레처럼 돌아다니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느꼈다. 미안, 소리. 일몰이야. 일몰이 내려오고 있어. 이 시간만은 조용하게 맞이하고 싶어. 너희는 마주한 눈을 감고 몸을 돌려 등을 맞대었다. 하얀 방의 위쪽부터 거무스름한 그늘이 내려오고 있었다. 거꾸로 내려앉는 물처럼. 너희는 시꺼먼 물에 침몰되듯 가만히, 그림자가 추락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리는 내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다음날, 소리는 처음으로 두 번째 일출을 맞았다. 그림자가 물러나고 다시 하얗게 변한 방에는 소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기억하지 못하는- 눈이 쌓여 있었다. 검고 반들거리는 눈들이 아니라, 같은 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훨씬 차고 깨끗한 결정들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눈을 난생 처음 보는 손으로 익숙하게 굴려 뭉치며 너희는 눈사람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내일의 존재에 대해 말했으며 누군가는 거짓말을 했고 누군가는 거짓을 말했고 누군가는 거짓을 잊었고 누군가는 가슴팍에서 녹아가는 눈사람을 내일로 미루어 두었다. 너희는 평생토록 눈 덮인 바닥 위에서 눈사람을 만들어온 사람처럼 굴었다. 눈사람도 내일로 가지고 있을까, 소리는 눈사람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가슴팍에서 미지근한 체온에 녹아내린 눈은 몇 개의 음절보다 빨리 사라졌다. 일몰은 어제보다 빨리 왔다. 끝은 처음보다 무딘 색으로 가라앉았다. 두 번째로 맞는 일몰을 소리는 어제보단 덤덤하게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유리가 울었다. 그녀는 맞잡은 손 위에서 경련하는 입술을 맞부딪히며 속삭였다. 가지 마, 나를 두고. 소리는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잘못 알고 있었다. 그녀가 틀렸다. 떠나가는 것은 유리였다. 내일로 내몰려진 소리를 두고 가는 사람은.

새하얀 정사각형들과 격자들. 홀로 떨어져나온 내일 소리는 눈을 감고 첫 숨을 들이쉬는 유리를 훔쳐 보았다. 먼지가 눈보다 하얀 색으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옆에서 소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글을 썼다. 펜도 종이도 없었으므로 네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거무튀튀하게 저물은 네 목소리 뿐이었다. 지금은 언제나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형태로 존재했다. 참고할만한 다른 어휘도 속삭임도 이곳에는 없었다.

유리, 나는 너를 설득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시를 쓰고 있는거야. 응, 그게 전부야. 모두를 설득시킬 수 없는 말로 끝까지 울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이 시인이니까. 아무도 같은 말로 울어줄 수 없는 흐느낌이 시니까.

잔뜩 구겨진 비닐봉투처럼 바스락거리고 서러운 글자들만이 떠도는 밤은 마치 거대한 냉동고 같았다. 견뎌내지 못한 하루는 썩다 만 살 그대로 미루어졌다. 달고 비린 침이 시와 함께 질질 새었다. 소리는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지금은 설득될 수 없는 시간이니까. 아무도 듣고 있지 않으니까, 유리. 아직 유리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유리,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모두 없는 거야. 아무도 설득하지 못한 말은 쓰일 수 없는 말이야, 유리.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나는 지금 지껄이고 있는거야. 구성도 논리도 없이, 그냥 흐느끼던 발음 그대로. 멸종된 들쥐들이 빠져 죽은 검은 뱀의 깊은 동굴 속에서 나는 찍찍거리고 있는거야, 이렇게 역겹고 미지근한 신음이 시라고 생각해. 유리, 나는 네 엄마의 말로, 내 엄마의 말로, 우리들 엄마의 찍찍거리는 목소리로 울고 있는 거야. 찍찍, 찍, 잃어버린 어미의 발성법은 낯설었기에 네 목소리는 수줍고 거칠었다. 그래도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는 단상을, ‘시’를 짓는 방식은 네게 익숙했다. 너는 수치도 없이 지껄였다. 차라리 누군가 네 울음을 들어주었다면, 찍찍, 하는 비명을 들은 누군가가 너를 한 입에 삼키고 달아났더라면. 어제, 네가 첫 번째 내일을 맞기 전에 들켰더라면 시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을텐데. 유리는 어둠 속에서 형체도 냄새도 없이 숨만 쉬고 있었다. 나지막한 숨소리는 찍찍, 찍하고 입 속에서 떨어지며 멀어지는 울음소리와는 무관한 리듬으로 새어나왔다. 우습지 유리, 이건 네 어미의 울음소리이기도 한데. 유리, 하고 불러 보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리고 아직, 유리가 아니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유리는 깨지 않을 것이다. 일몰과 일출의 사이, 어떤 별도 밝히지 못한 시야는 오롯이 유령들의 것이었다. 벽-볕, 새벽과 작별-에 속한 자들은 영영 마주할 수 없는 막간, 눈을 감고 하루를 마친 유리의 날숨은 이곳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유리. 내일은 모든 것이 변할 테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거니까. 괜찮아. 너는 내일 이곳에 없을 거니까. 뜨거운 물에 몸을 한 번도 담가 보지 못한 눈사람이 내일 이곳에 없어도 괜찮아. 한 번도 차가운 입술을 움직여 시를 읊어본 적 없는 눈들이 내일 이곳에 없어도 괜찮아. 괜찮아, 내일은 어쩌면,

유리가 아니어도 좋을 테니까. 너는 녹아버린 흰 눈송이 위에 미루어진 살과 숨을 내버려 두고 방을 나섰다. 내일은, 적어도 내일은 유리의 일몰을 함께 맞고 싶지 않았다.

소리는 하얗게 잠든 유리 아닌 존재의 방을 나섰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이었지만 소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발을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다보면 내일을 믿는 자들의 공간으로 나설 수 있었다. 하루보다 긴 날을 사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미로 속 하나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방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할법한 가정집과 연결되어 있다. 거실을 겸한 커다란 방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세 개의 작은 방문과 식탁 겸 책상인 4-5인용 테이블이 놓여 있다. 집안 곳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늙은 여자는 간혹 녹색 식물 이파리를 하나씩 뜯어내어 뜨거운 물 위에 얹어 차를 끓이곤 한다. 시큼한 오줌비린내가 찻잔 속을 누렇게 물들인다. 채식주의자들은 식물의 피부를 진하게 우려낸 차로 요기를 했고, 육식주의자들은 새의 뼈를 달인 물로 목을 채웠다. 늙은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녀는 소리에게 육식을 하는지 채식을 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어요. 제가 먹는 게 식물인지 동물인지 오래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럼 오늘부터 육식을 하는게 어떠니.

그럴까요?

늙은 여자는 놀란 듯 혀를 깨물더니 마른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조금 놀랐을 뿐이야.

고기를 먹는다는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야. 혹시 몰라 묻는 건데 만약 내가 채식을 권했더라면 너는 채식을 하겠다고 했을 거니?

그렇겠죠. 소리는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하다가 내뱉었다. 무얼 먹는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자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몇 번이나 마른기침을 하면서. 미안, 나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능한 사람이 아니란다.

당신도 시를 쓰나요? 소리는 비명하듯 소리쳤다. 나도, 나도 시를 써요.

늙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까막눈이란다. 글을 쓰기는커녕 읽지도 못해. 그래도 날마다 중얼거리기는 하지. 혼자서. 아무도 듣지 못할 말들로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말로 이렇게 중얼중얼거린단다. 이건 철저한 혼잣말이지 시가 아니야.

그건 시가 맞아요. 시는 본질적으로 혼잣말이니까요. 타인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란 다 그런 거죠.

늙은 여자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소리는 널찍한 테이블에 혼자 앉아 시를 읊었다. 고독은 실패라는 소설의 문구를 인용한 것이었다. 고독은 실패라면 실패한 고독은 성공인가. 여자는 주방에서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저런, 조심해야 해. 또 내 손을 물에 담갔잖아. 이건 내 살이지, 내 살. 내 살은 먹어서는 안 되는 거야. 봐, 아직 뜨겁잖아. 뜨거운건 먹어서는 안되는 살이야. 요리해서는 안 된다고. 먹어도 좋은 건 남의 살 뿐이야. 차갑게 식어버린 살. 너무 오래 방치되어 버린 살도 먹어서는 안되지. 검은파리가 날아와서 알을 까는 사체, 심장이 박동을 멈춘 지 두시간 안팎인 갓 죽은 살, 그게 육식하는 입이 삼켜도 좋은 살이야. 그래, 이건 남의 살. 남의 생살. 먹어도 좋은 살. 이걸 요리해야지. 너희는 생을 비관하는 사람에게 익숙한 언어로 겉돌았다. 너는 늙은 여자가 유리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늙은 여자는 소리에게 구운 고기를 건네었다. 무슨 고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는 미로 속에서 살며 한 번도 가축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먹는다고 해서 짐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먹으렴. 돼지고기란다.

소리는 나이프나 포크와 같은 식기들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지만 맨 손으로 도시락을 까서 입 속에 집어 넣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포크를 사용해 납작한 살덩이를 접시의 한쪽 끝에 고정시키고 나이프를 고기의 살결을 따라 그었다. 끝이 무딘 나이프였기에 칼질을 오래도록 해야 했다. 나이프와 포크의 이름을 배운 기억 없이, 나이프를 나이프라고, 포크를 포크라고 인식하듯 칼질은 자연스러웠다. 언어의 결 속에 대상물의 사용법에 대한 지식 역시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포크라는 말은 무언가를 찌르는 행위, 나이프라는 말은 살을 베어내는 행위를 연상시켰다. 소리는 어휘들의 감각에 따라 언어를 양 손에 들고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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