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8회

한 명 한 명이 물방울을 연기하는 거야. 그래서 짙은 초록의 장마를 만들어내는 거야.

무지개가 아니고요?

응. 무지개를 기대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우리는 무대 위에서 꿈을 쫓지도 않을 거고 성공하지도 않을 거야. 우리는 무대 위에서 실패 할거야. 하얀 꽃, 붉은 꽃, 노란 꽃, 어떤 색이든 좋아, 어떤 색의 꽃이든 끝내 피지 못하고 우중충한 초록 이파리만을 떨구며 쓰러져 죽을거야. 우리는 모두 무대 위에서 피지 못하고 죽는 거야. 무지개가 아닌 짙은 녹색의 장마가 되어 떨어져 죽는 거야.

그건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인가요?

아니. 알잖아. 우리의 하루가 모두 다르다는 걸. 서로 다른 선 위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질질 기어가는 바깥의 사람들이 사는 시간이 모두 다르다는 걸. 이곳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유년의 악몽만큼이나 강렬한 간극이 있다는 걸. 등 뒤로 결박된 손을 천장에 매달고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가 누구였는지 알아?

나도 배역이 있나요? 고문받는 사람은 고문하는 사람과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 있지요. 고문하는 자들은 고문받는 자가 흘린 오물을 조금 들이키며 짙은 단내에 몸서리를 치죠. 고문받는 자들은 고문하는 자가 흘린 눈물을 보며 웃지요.

응. 넌 어린 종지기를 연기해주면 좋겠어. 비가 오는 밤마다 종탑 위에 서서 혼자 종을 치는 거야. 네가 치는 종소리는 우레 같은 빗소리에 가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지. 곧 너는 종과 빗소리에 고막이 터져버리고 말아. 그래, 네가 치는 종의 울음소리는 아무도 듣지 않는 거야. 새벽마다 떨어지는 벼락의 소리조차 너는 듣지 못해. 종탑 아래에서 내려오라고 고함치는 신부의 소리도 너는 듣지 못해. 넌 네 발끝을 적시며 떨어지는 검은 물을 바라보며 종을 울려. 그리고 곧 종을 향해 벼락이 떨어지지. 넌 종 속에서 시꺼멓게 타들어가 죽는거야. 비는 그렇게나 많이 오는데, 불 붙지 않은 대기는 너무나 축축한데, 네 몸을 관통하는 시꺼먼 불을 꺼 줄 물기는 어디에도 없어. 넌 종처럼 흐느끼며 검은 물처럼 출렁이는 밤의 아래로 떨어져.

끔찍한 이야기네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지 몰랐는데.

난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저 네게 맞는 배역을 주고 싶을 뿐이야. 넌 내가 생각하던 종지기를 닮았으니까. 어릴 적 읽던 책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사랑을 하던 곱추를 닮았어. 넌 그처럼 비참하고 그처럼 외로우니까.

외롭고 비참한 사람이 나뿐인가요.

그래. 넌 내가 널 경멸하길 바라고 있잖아. 유리의 방에서 내쫓기기를, 걸어 나가는 방법을 깨달은 유리가 그녀의 내부에서 널 몰아내기를, 그녀의 이물질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를, 그래서 유리를 떠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잖아. 돌아올 곳이 없어지면 낯선 곳을 여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유리, 넌 희망하고 있기에 더 비참한 거야. 희망만큼 우리를 불우하게 만드는 독은 없어.

난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아요. 희망은 기대니까. 난 바랄 뿐이에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작고 반짝거리는 기적들을, 결코 일어나지 않을, 죽음보다도 확실한 부재를, 그걸 은밀하게 바라는 것마저 멈출 수는 없어요.

그래. 하지만 소리, 욕망은 널 더 비참하게 만들 거야. 넌 이미 알고 있잖아.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걸. 난 이미 관두었어.

무얼요?

기대하지 않는 것.

너는 여자의 작고 단단한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밤에는, 밤에는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한밤의 어휘들은 너무 유치하고 보잘 것 없으니까.

괜찮아. 난 읽는 법도 모르는걸. 널 비웃지 않을 거야.

알고 있었어요?

뭘? 네가 나를 비웃고 있다는 걸?

응. 미안해요.

괜찮아.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누구도 가엾어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더구나 이렇게 비좁은 세계에서는.

미안해요. 하지만 이젠 당신이 가엾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내 글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았지만, 당신은 그래도 당신을 속였던 한 남자 앞에서 배우라는 역할을 연기했잖아요.

내 혼잣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

내가 들어주고 있잖아요. 당신이 하는 말은 모두 시예요. 난 당신의 목소리를 사랑해요. 당신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음들, 당신의 호흡이 이어지는 부분도, 당신의 발음 사이를 메우는 부드러운 간격도 모두 좋아해요.

그래. 나도 네 말의 리듬을 좋아해.

그래요. 어차피 의미를 이해받기를 원한 건 아니었잖아요. 우린 서로의 목소리를 태워줄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있었으니까. 대신 우리는 서로의 소리만을 듣고 있었으니까.

그래.

실망하지 말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나도 당신을 따라 글을 잊고 싶어.

불가능해. 문맹을 배울 수는 없으니까. 말 더듬이를 따라하면 말을 더듬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어. 공포를 훈련시키면 털실만 보아도 까무라칠 수 있다는 말도. 말 더듬증이나 공포를 배울 수는 있어도 문맹을 배울 수는 없는 거야.

그녀는 허벅다리를 찢겨내듯 세게 긁어내며 신음했다. 가려워, 가려워, 너무 가려워.

괜찮아요?

아니, 아마 난 고독보다 가려움증으로 먼저 죽고 말거야. 가려워, 가려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잠깐만요, 당신 손톱에서 피가 나요.

철판을 긁는 듯 소름끼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렸다. 여자는 허벅다리를 긁고 있었다. 아니, 여자는 바닥을 긁고 있었다. 너는 그제서야 여자에게 허벅다리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 몹시 늙은 것처럼 보였던 여자의 얼굴은 희멀건한 어둠으로 매끈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우산임을 자청하던 그녀는 언제 이곳으로 온 걸까? 바깥을 아는 사람들만이 모여드는 이 방, 이 서재에 그녀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부적절했다.

당신과 함께 말을 더듬어주겠어요. 하고 그녀에게 말했더라면, 그녀는 기뻐했을까. 우리가 서로의 결핍을 모방해서 말을 더듬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렴풋이 반짝거리는 그늘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살 수 있었을까. 네 한쪽 다리를 잘라 그녀에게 주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병신이 되어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더라면, 무게중심이 잡히지 않아 계속해서 쓰러지는, 잘못 설계된 인형처럼. 시각과 청각, 우리를 붙들어매던 언어로부터 해방되고 난다면, 강박 없이 우리는 어딘가 떠돌게 될까. 아니, 엷은 뿌리를 드러내놓고 우리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뿌리가 뽑혀나가도 우리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멀리 날아가기에 우리는 너무 젖어 있으니까. 가볍고 아늑한 바람은 높은 데서 부니까.

우리는 결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소리나는 대로 받아적을 뿐이다. 우리는 적을 수 없는 소리를 적으려 하고 있다. 인식의 범위 바깥에서 지글대고 있는 소음들, 적확한 음운의 자리도 문자의 자리도 갖지 못한 채 유령처럼 장소 없이 떠도는 울음들. 우리는 매 순간 틀린 글자들을 창조하고 있다. 그것만이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는 방법이라고 믿으며.

이건 다리 없는 여자가 소녀일 적, 그녀가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살던 날에 그녀를 둘러싸던 소음이다. 소녀의 방에 들어온 아이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너 이상해.

소녀는 황급히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니야. 눈도 두 개 귀도 두 개 코도 있고 입술도 있어. 너랑 똑같은데.

아니야 이상해. 다리가 없잖아.

뭐?

다리를 들어봐.

소녀는 낯선 어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아이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는 답답해하며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기다란 팔 두 개를 들어 보았다. 그러고보니 아이에게는 팔이 네 개나 달려 있었다.

다리를 들어보라고, 이렇게.

소녀는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가 들어올린 것이 팔이 아니라‘다리’라는 것을. 하지만 ‘다리’라니? 그녀는 새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다리’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대체 무엇을 위해 ‘다리’를 달고 그녀보다 높은 곳에 머리를 대는 것일까. 그곳에는 푹신한 구름도 달콤한 사탕도 없는데. 그녀가 주저앉아 있는 바닥에 얼굴을 물만한 뱀이나 징그러운 벌레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비좁은 사각의 방 안에서 하루를 마칠 것이고 하루 이후에는 어떤 미래도 없는데. 그녀에게는 ‘다리’를 움직여가며 뛰어다닐 바깥이 없는데. 그녀에게는 드러누운채로도 꼭 들어차는 이 작은 방뿐인데. 이 내부를 떠나면 아무것도 없을텐데. ‘다리’라니. 무엇을 위하여? 그녀에겐 다리 같은 것이 필요 없었다. 그렇지만 필요 없기에 그것은 소녀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아니, 다리라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기에 필요한 본질일지도 몰랐다. 그래, 원숭이를 원숭이로 만드는 이성과 돌고래를 돌고래로 만드는 우수처럼. 필요 없는 것처럼 보였던 다리의 필요는 그녀를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핵심적인 부품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그동안 ‘다리’를 잊고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동안 ‘다리’를 잃고 살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동안 인간답지 않게 살았던 스스로의 무지가 못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필요없는 그것, 그렇기에 필요한 그것, 난생처음 들어보는 ‘다리’라는 어휘를 몸에 매달고 있지 않기에, ‘다리’와는 무관한 하루를 보내왔기에 그녀는 그만큼 추하고 몽매한 것이 아닌가? 소녀는 갑작스러운 수치심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이는 문득 아주 서글픈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괜찮아.

뭐?

괜찮다고. 너는 이상하지 않아. 넌 정상이야.

다리가 없는데?

괜찮아. 곧 두 다리가 생길 거야.

생기지 않으면?

소녀는 지금껏 알지도 못했던 미지의 어휘가 갑작스레 제 삶을 결정지을 핵심적인 전제라도 되는 양 매달렸다. 다리가 필요해. 다리가 없으면 나는 뭐지?

괜찮아. 아이는 소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소녀의 눈은 아이의 튼튼하고 가느다란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개의 길쭉하고 아름다운 선. 발과 발가락을 가진. 어떻게 지금까지 ‘다리’ 없이 살아올 수 있었을까. 소녀는 매달리듯 물었다. 생기지 않으면?

생길거야. 아이는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소녀는 보채듯 되물었다.

생기지 않으면?

생길거야.

해가 질 때까지도 아이는 소녀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소녀는 그 애가 떠나기 전에 확답을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곧 하루가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녀는 다리 없이 살다 죽을 것이다. 그녀는 끝내 본질을 갖지 못할 것이다. ‘다리’ 없이 그녀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다리’가 없다면, ‘다리’가 없다면, ‘다리’ 없이 살아왔던 오전과 오후의 시간들, 그녀가 ‘다리’를 모른 채 지내왔던 최초와 최후의 하루는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소녀는 차라리 다리가 영원히 자라나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이상한 나와 함께 해줬으면 좋겠어. 다리가 없는 나를 병신이라고 부르고 경멸해도 좋아. 그냥 내가 이상하지 않다고 하지 말아줘. 난 아프고 이상해. 그런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좋아. 그냥 이상하다고 해줘.

아이가 잠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이상하지 않아.

네 두 다리도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너도 ‘다리’를 잊었으면 좋겠어. 아니, 다리를 잃었으면 좋겠어. 그럼 너는 끝까지 내 곁에 남아 ‘다리’없는 이상한 하루를 함께해 주겠지. 나를 두고 ‘다리’만이 걸어나갈 수 있는 바깥으로 사라지지 않겠지. 네가 내 곁에서 죽었으면 좋겠어. 네 다리를 잘라주고 싶어. 너도 내 다리를 잘라줬으면 좋겠어. 아니, 네가 내 다리를 잘라줬으면 좋겠어. 나도 다리를 갖고 싶어. 네가 잘라줄 수 있는 다리를, 잃어버릴 수 있는 다리를, 추억할 수 있는 다리를 갖고 싶어.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낮까지 햇빛을 가려주던 천장이 돌연 사라지고 피처럼 붉고 서글픈 노을이 방을 시뻘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물기에 절은 구름이 유독 짙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너는 그제서야 그 애가 네 곁에 걸터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너는 ‘다리’에 대한 생각에, 너와 함께 ‘다리’ 없이 사는 생각에 취해 있었기에 그 애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애의 얼굴은 너무 높은 곳으로 멀어졌다. 네 시력은 아주 나빴기에 다리의 길이만큼 위쪽으로 올라간 그 애의 얼굴은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네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넌 이상하지 않아. 곧 다리가 생길테니까, 어서 정신 차려. 난 먼저 갈게.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서.

소녀는 희박하게 이지러지는 얼굴의 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곽을 잃고 허공에 편평하게 퍼져가는 살, 사각의 벽에 매몰되는 슬픈 표정. 그래, 안녕. 가지마. 나를 버리고. 나와 함께 있어줘. 내가 이상하다고 해줘. 제발.

그래, 다리가 생기면 꼭 기어서 따라와. 기다리고 있을게. 참, 다음에 오는 길에는 우산을 가지고 올게. 곧 비가 올 것 같으니까. 미안하지만 밤중에는 다시 오지 못할 거야. 그때는 나도 잠을 자야 하거든.

그래. 잘가. 네가 미워.

응. 잘자.

소녀의 방에는 소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우산들이 자꾸만 쌓여갔다. 우산으로 가득 찬 방에서, 물기에 젖은 우산을 펴 말리며, 여자는 자신이 우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의 방에는 우산뿐이었으므로.

살아 있던 기억을 가진 무언가를 매일 먹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비참한지 너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사내는 우리들에게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과 동물의 살들을 건네 주었고, 우리는 작고 지저분한 테이블-마찬가지로 이름도 용도도 알 수 없는 빛의 버튼들이 흩어져 있는-에서 무언가를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먹히는 생의 기억은 너희에게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비릿하고 씁쓸한 맛과 턱의 운동, 맑은 침, 목넘김, 그것 뿐이었다. 너희는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살아 있던 무언가를 먹으면서 다른 일에 정신을 파는 일을 할 만큼 먹는 일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내심 느끼고 있었다. 기억을 가진 너희가 기억을 가졌던 무엇을 먹는 일은 부자연스럽고 비참한 일이라는 걸.

나중이 되어서야 사내는 그날 우리가 먹었던 것이 말린 쥐 고기와 뱀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울부짖으며 물었지만 유리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을 뿐이었다. 아직도 먹는 일에 적응하지 못했니? 그래. 저 안에 있을 때 유리는 자기 살을 먹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살만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한입씩 한입씩 저를 베어먹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거라고 하루를 넘기고 남아도는 어스름한 시간에 모여드는 우리를 돌보던 여자가 말했어.

찍,찍찍,찍 하는 소리를 내며 유리들이 웃었다. 유리, 너는 새로운 식습관에 적응할 필요가 있겠구나.

뭐?

얼음사막에는 먹이가 그리 풍부하지 않아. 요즈음에는 눈도 잘 내리지 않고. 기껏해야 쥐 고기나 뱀풀 정도, 그것도 아니라면 거미줄이라도 먹을 테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너희들은 모두 쥐의 얼굴을 하고 있고, 쥐와 뱀의 언어를 신음처럼 내지르잖아. 우리는 우리의 살을 먹어서는 안돼.

그럼, 굶어 죽을 거야?

유리, 물론 한번 익힌 언어를 잊어버릴 수는 없지. 우리는 알고 있는 언어를 들을 수밖에 없고 살고 있는 언어라면 내뱉어버릴 수밖에 없어.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는 거야. 그게 남의 기억이라도. 남의 언어라도. 언어도 기억도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바깥은 없으니까.

모르겠어요. 요즈음 나는 자꾸 유리를 잊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유리는 더 이상 내곁에 없고. 내게는 그애가 남겨두고 잊어버린 기억들 뿐이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유리가 얼음사막에서 태어나고 미로 속으로 들어간 뒤부터 내내 유리를 잃고 지내왔단다. 새로운 기억도 없이 나날이 소모되어만 가는 기분, 더 이상 자라나는 대신 희박해져가는 기분을 너도 알겠니?

그렇다면 당신들은 유리의 방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얘긴가요?

그래. 그러니까 말했잖니. 너를 기다려왔다고. 지금 너는 누구보다도 유리에 가까운 존재니까.

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유리는 바깥에 없고 우리는 나날이 우리를 잃어만 갈텐데. 그애를 데리고 나올 걸 그랬어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업고서라도 질질 끌고서라도 같이 나왔어야 했는데.

그럼 그렇게 하지 그러니.

네? 돌아가도 되나요?

그래. 누구도 너를 붙잡지 않을 거란다.

나를 기다려왔다고 했잖아요. 오랫동안.

그래. 그래도 네가 이곳에 남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으니까. 우리는 오늘 저녁에 서커스 캐러밴으로 돌아갈 거야. 그곳에는 어제를 기억하는 눈빛으로 바닥을 더듬고 있지만 추억에 대해서 말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는 사자가 진득한 냄새를 풍기면서 제 오물 위에 드러누워 있단다.

나를 붙잡지 않을 건가요?

그래.

눈 속에 파묻고 불태워 주지도 않을 건가요?

그래.

사내는 마지막으로 너를 서글픈 낯으로 바라보며 쉭쉭거리는 뱀의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곳에는 폴란드인 병사가 없어. 쥐나 뱀도 없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알아 주면 좋겠구나.

그들을 만났을 때 어떤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너를 잡아 붙들고 서커스 캐러밴에 구속하여 영원히 너를 훔쳐낼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걸까. 유리들은 너를 붙잡지 않았고 너는 처음부터 비껴나 있던 달의 그림자처럼 우리의 무리에서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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