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여자-레몬캔디, 너희, 들의 물방울

네가 여자를 만나듯 현도 요제프 칼을 만난 것일까? 계절마다 현의 앞에서 투신하는 소년이 요제프 칼일까? 어느새 옷장 속에서 기어나온 여자가 네 발가락을 깨물었다. 검은 눈이 너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현을 긋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제프 칼의 연주가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확실히 기묘하고 탐미적인 소리였지만, 20세기 이후부터 그런 연주는 제법 흔하지 않나요. 난 그와 비슷한 음악이 사용된 독일 영화를 열 편 정도 들 수 있어요. 사실 그의 연주보다는 마술이 더 흥미로웠죠. 그는 밤하늘만큼이나 창백하고 겨울만큼이나 구부정한 남자였어요. 그가 내 앞에서 불을 뿜었을 때, 나는 눈 위에 붙은 불을 본 것처럼 놀라고 말았어요. 내가 웃으면서 그에게 칭찬을 하자 그는 부끄러운 것처럼 고개를 숙이더군요. 난 그에게 불을 더 보고 싶으니 다시 들려달라고 말했어요. 참, 말하지 않았나 보군요. 그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공연을 했거든요. 우스운 일이죠. 남의 집에 초대도 없이 들어와 불을 뿜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손님이라니. 광대도 아니고요. 하긴. 광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는 어렸을 적에 서커스단에서 지냈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요. 그는 서커스단의 아이였던 거예요. 날 때부터 서커스단에서 태어난 건 아니고-그러니까 아마 그의 부모는 서커스단 출신이 아닐 거예요.- 언젠가 유원지에서 순회 공연을 하던 서커스단의 출연자 전용 천막에 불쑥 들어와 눌러 앉았다고 해요. 이름이 뭔지, 어디에서 왔는지, 부모는 누군지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았대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그는 어린 시절을 통째로 잃어버렸던 거예요.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순간은 서커스단의 식탁 앞에 앉아 불을 뿜는 아이들을 구경했던 추억이라고 했어요. 달큰한 술냄새와 묵직한 불의 기운, 앞 이마가 뜨뜻하게 달아오르는 느낌과 천막 천이 검게 타들어가는 모양, 햇빛에 엉망진창으로 데어버린 새벽녘의 하늘처럼 지저분하게 그을은 벽과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고 했는데, 그날 이후로 천막을 못 쓰게 된 서커스단은 곧장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고 해요. 그래도 그는 그 한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어요. 눈 앞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모양, 높은 음자리의 비명, 달콤하게 퍼져가는 진득한 냄새. 그을은 천 바깥으로 작은 구멍이 뚫렸는데, 그게 꼭 별처럼 보였다고도 했어요. 왜, 별은 하늘의 창문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꽤 수다쟁이였나보네.

그건 아니었을 거예요. 아빠는 그 사람이 꽤 과묵하다고 했거든요. 나한테는 첫 만남의 순간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았는데요.

첫 만남이 아니었을 수도 있죠.

내게는 첫 만남이었어요. 난 그날 이전에 그를 본 기억이 없으니까. 내게 있어 그는 비쩍 말라 더 길게 느껴지는 얼굴과 잔뜩 옹송그린 등, 가늘고 길쭉한 다리를 갖고 있던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 태어난 거예요. 그는 어린 시절도 없이 태어났으니까요.

잠깐, 불을 뿜었다고 했어? 난 그가 불을 뿜지 못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래요. 그 사람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당신이 본 건 환각이라고. 너무 덥고 어두워서 그 사람이 불을 뿜는다고 착각한 거라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말이죠. 그날 나는 와인 한 입조차 마시지 않았어요. 잠도 충분히 잤고요. 취한 게 아니라면 그런 환상을 볼 이유가 없죠.

어쩌면 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르지. 너희 아버지는 연금술사였다며.

그럴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건 거짓이 아니에요. 설사 마법이라고 해도, 내가 직접 본 걸, 그렇게 환하고 붉었는 걸, 그 불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어쨌든 그가 유년에 불을 뿜지 못했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아요. 그는 그가 자란 서커스단에서 유일하게 불을 뿜지 못하는 아이였대요. 그것 때문에 어른 단원들에게 많이 맞기도 했고, 또래 애들한테도 따돌림을 당했었나봐요. 서커스단에서 내쫓길 지경까지 갔다고 해요. 그가 카드 마술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그런 일도 줄어들었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린 건 아니었죠. 그는 결국 사기마술을 치던 것이 들통나 서커스단에서 쫓겨났고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말했어요. 관중석에 앉아 있던 나를 보고 쫓아왔다고. 내 얼굴 때문에 죽음마저 포기했다고 했죠.

그럼, 이전에도 그를 본 적이 있나 보네.

아니요. 내게 그런 기억은 없어요. 난 한 번도 마술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없어요. 병에 걸리고 난 뒤부터는 산책조차 하지 않았는데. 아마 그는 착각한 걸 거예요. 착각 때문에 삶도 죽음도 미루어 둔 거죠. 그래도 그가 싫지 않았어요. 난 그를 경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했고, 그가 내뿜는 불이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의 연주는 조금 시시했지만. 설마 그가 내게 끝까지 그 연주를 강요할 줄은 몰랐어요. 피아노를 가르쳐 줄 때만 해도, 그냥 심심풀이 정도로만 생각했죠. 혼자 있을 때, 그가 알려준 화성들을 연주하면 그리 외롭지 않았으니까. 나날이 연주하다보니 난 놀랄 정도로 피아노에 빠져들었어요. 난 당신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가 일러 준 화성들은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죠. 난 어느덧 그보다 훨씬 유려하고 매혹적인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아닌 내 연주를 듣고 울었죠. 그리고 나서는 당신이 아는 대로예요. 난 그가 설계한 병에 걸렸고, 그가 평생에 걸쳐 들었다는 내 노래를 듣게 되었어요. 내가 한 번도 노래한 적 없는 내 울음소리가 귓속에서 끈질기게 울렸고, 난 그 낯설고 서글픈 노래에 순식간에 빠져들고 말았죠. 온몸에 꽃잎처럼 노란 얼룩이 번져갔고 곧 모든 사람들이 내가 감염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는 것도, 내가 그들을 감염시켰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야. 그는 체념을 익힐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는데 어떻게 너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는 끝까지 비참했지만 그래도 내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어요. 그는 점점 자주 우리집에 들리곤 했죠. 하지만 난 한 번도 그를 초대하지 않았어요. 수줍음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가엾게 중얼거리는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난 그와 계속해서 함께하지 않았어요. 그는 날 보면 쫓기듯 황급하게 자신의 비밀들을 속삭이기 시작했고, 그의 수다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중간중간 더듬거리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죠. 같은 어절을 몇 번이고 덜덜거리면서 발음하면서도, 자신이 잘못 발음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내게 그의 일생을 전하는 일만이 그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나갔죠. 안타깝지만 난 그가 한 말 대부분을 잊어버렸어요. 그가 수다를 떠는 동안 난 검붉게 물드는 그의 귓바퀴나 움푹 팬 눈두덩이, 길게 뻗은 목과 가느다란 손목뼈 같은 것을 보고 있었어요. 거친 갈색 머리카락이 빛과 함께 내려앉은 먼지를 놓치고 살랑거리는 모양을 지켜보았죠. 내가 기억하는 건 첫 만남 때 그가 내게 알려주었던 황당한 개인사와 유독 시뻘겋던 불, 그리고 만남 때마다 내게 건네 주었던 편지에 적힌 악보의 화성들 뿐이에요. 그래요. 그 악보만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어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죠. 난 병에 걸린 이후로 죽을때까지 그 멜로디만을 들었으니까. 그 울음이 우리를 죽였으니까.

그녀의 비밀을 공연히 캐낸 것 같은 죄책감이 일었다. 시신을 보았을 때에도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어떤 이는 가족의 죽음보다 완전한 타인의 비극에, 상상 속 이별에 더 쉽게 눈물을 흘린다. 제제의 아픔에 흐느꼈던 이도 작은 아이를 죽인다. 얼굴을 걷어차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짓밟아 부러뜨린다.

그런 문제는 아니에요. 말했잖아요.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당신이 새삼 기자처럼 캐묻는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건 아니죠.

나도 널 사랑해, 하고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너는 여전히 그녀가 낯설었다. 너희는 지금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평소처럼 이메일로? 육성으로? 꿈으로? 현의 소설은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간혹 몇 장의 페이지가 허물어지듯 넘어갔다. 그 속에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전조도, 그녀의 예감도 현에게는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현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그래요.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내 연인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요.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이 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당신이 처음 꿈을 꾸기도 전에. 그는 나를 찾아 붉은 숲으로 들어갔다가 붉은 꽃에게 잡아먹혀버렸죠. 그 꽃은 생애 마지막에 보았던 그의 얼굴로 의태했고, 난 하나뿐인 그의 초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유독하다는 걸 알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해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어요. 서로에게 무해한 사람들은 아니었죠, 분명히. 그건 이야기의 얼개를 가진 모든 사랑이 마찬가지이지 않나요. 특별히 절망적이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면,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겠죠. 부드럽고 향기로운 순간들은 추억조차 되지 못하고 증발해버리기 마련이니까. 난 그의 곁에 머물렀어요. 붉고 유독한 냄새가 내 온몸을 적실 때까지 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아차린 건, 붉은 숲을 횡단하던 여자가 나를 진단해 주었을 때였어요. 그녀는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했죠. 굶주린 그녀를 위해서 내가 먹을만한 열매 몇 개를 구해다 주었기 때문에, 또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의 위치도 알려주었기에 그녀는 내게 보답을 하고 싶어했어요. 그때 나는 심한 기침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나를 진찰해 주었죠. 그리고 곤란해하는 얼굴로 말했어요.전염병이라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떠나갔어요. 난 그녀에게 입맞출 생각도 그녀를 껴안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의사들이 병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의사들만큼 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이들도 없을 거예요. 그래요. 어쩌면 병자보다도 더. 환자들은 병에 걸린다고 해도 병을 신뢰하지 않지만, 의사들은 병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이죠. 어쨌든 병에 걸리고 난 뒤 난 돌아갈 곳이 없었어요. 내 병을 감염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나와 같은 병을 앓아주길 바라는 사람, 내게 감염되길 바라는 사람, 내가 감염시키고 싶은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고 그는 붉은 숲의 바깥에 없었으니까요. 난 그곳에 남기로 했어요. 그 다음부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 없이, 마치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배열된 사진첩처럼, 난 다시 집 안에 있었죠. 붉은 숲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기억했지만 어떠한 경위로 집 안에서 매일같이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며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 붉은 숲에서 감염되었던 병은 어떻게 된 건지,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 연주를 듣기 위해 내가 있는 곳으로 모여드는 것인지, 어째서 붉은 숲의 바깥에서, 내 연인도 없는 곳에서 난 연주를 하고 있는 건지, 그게 그 사람을 위한 연주인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죠. 어쨌든 난 관성에 따라 계속해서 화성들의 고리를 연주해나갔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내 연주를 따라 흘러갔죠. 깨달은 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어요. 내 병은 나은 적이 없고, 내 병은 변질되었고, 내 병은 더 이상 연인의 것이 아니게 되었고, 내 병은 그 사람의 것으로 뒤바뀌었고, 난 더 이상 그를 앓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요. 난 연인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내 병은 변해버렸어요. 들리는 건 그 사람과 함께 쌓아온 화음들 뿐이었죠.

그녀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절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늙어가는 영혼, 언제든 쉽게 바래는 마음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를 듣는 게 나뿐이라도 좋았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내가 사랑하던 매혹적인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볼에 코를 가져다 대자 순결한 냉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체취가 간절한 연인처럼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차들에서 우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서로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연인들이 최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깨물자 그녀는 수줍은 듯 숨을 죽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우리가 서로를 애무하는 동안에도 노래는 끊기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몸에 번지는 붉은 입술 자국들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애절하게 침묵하였다. 부드러운 노래가 사랑스러워 그녀의 묵직한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에게서는 이상한 맛이 났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부풀어가는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눈빛만으로 형태를 얻고 살을 불리며 서서히 자라나는 어둠. 눈을 피하면 희미하게 사라져버리는 어둠.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어둠일 수 있었다.

레몬캔디가 불을 켜자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내는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몸을 떨고 있었다. 퀴퀴한 악취에 진저리를 치며 레몬캔디는 다시 불을 껐다. 문 밖으로 한 발짝 나선 채, 닫힌 문틈 사이로 말을 해 왔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어요. 곧 사람들이 올 거예요. 아마 삼촌은 보지 못했겠지만, 당신에 관한 기사가 나왔거든요. 마리 이모의 가슴에서 체액이 발견됐는데, 그게 당신 거라고. 그 노래를 퍼뜨린 게 당신이라는 건 내가 이야기했어요.

이제 들리니?

레몬캔디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원망하니?

레몬캔디는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이 작곡한 노래가 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꽃처럼 노랗게 피어나며 죽어갔던 까닭이 뭔지, 난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당신이 그들을 죽이려고 한 건 아닐 거예요. 당신은 우리 이모만을 사랑하고 미워했으니까. 당신은 다른 누구도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그저 들려주고 싶었을 뿐이잖아요.

내가 듣는 게 진짜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게 그녀의 노래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건 당신의 노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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