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사내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한때 그는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는 여인이, 마음을 잃은 몸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가늠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여자를 찾아 헤맬 정도로. 붉은 숲에서 그녀의 얼굴을 가진 꽃을 보고 꿈을 꾸듯 그 옆에서 잠들었을 때에도, 밤새도록 이슬처럼 내려앉은 꿀이 가슴팍에서 반짝였을 때에도, 굶주린 개미들이 그를 애무하며 갉아먹었을 때에도 E flat의 진폭은 그의 머릿속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현기증에 파랗게 일렁거리던 하늘이 붉은 빛을 되찾고 나서야 그는 꽃이 그녀를 닮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사내는 더 이상 여자의 얼굴을 기억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낡고 더러운 골목으로, 푸른 햇볕이 그의 목을 졸라오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을 초입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는 처음 보는 이였다. 한때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찾아오곤 했던 나이 많은 문지기는 어디론가 떠난 뒤였다. 음악가 앞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는 수염자국이 새파랗게 돋은 청년이었다. 추레한 차림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머리를 긁적거리던 전임자와는 달리 그는 잘 다려진 제복 차림이었다. 음악가는 자신이 심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한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이 장소가 그에게 속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그것은 거짓이었으므로. 음악가가 문지기를 향해 다가갔을 때, 문지기는 그의 뒤에서 부드럽게 미소 짓는 남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문지기는 음악가의 뒤편을 거리낌 없이 마주보았다. 마치 그곳에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그제서야 음악가는 어떤 장소에 속하지 않는 일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음악가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내들을 지나쳐 반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찾아 온 다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음악을 공부하겠다며 피아노로 낯선 음들을 주절거리는 조카는 그의 광증에 지쳐 떠나간 지 오래였다. 연금술사는 시간에 중독되어 나날이 어려지다 못해 죽어버렸다. 몸을 두고 늙어버린 마음은 주름 투성이었지만 아무도 그 유해를 볼 수 없었다. 마음의 노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연금술사의 어린 몸뿐이었다. 분홍빛이 도는 말간 몸은 주름진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에게는 노화된 몸이 필요했다. 결국 그는 시간을 도약하여 몸과 마음 사이의 지나친 극간을 따라잡기로 결심했다. 오염된 물방울처럼 짙은 빛깔의 차들이 흘러다니는 물살 위로 그는 투신하였다. 같은 시간을 선택한 몸과 마음은 그제서야 이별하였다.

꿈 속에서 너는 음악가의 연인을 만났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얼굴에는 작은 꽃잎 모양의 노란 반점이 피어나 있었다. 얼굴에 꽃을 매단 이들에게서 난다는 고약한 향기는 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염병을 앓고 있기에 직접 너와 대면할 수는 없다며 네게 편지를 보내왔다. 외롭다고. 눈을 감고 문턱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고. 그들의 얼굴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꽃이 피어 있고, 그녀의 얼굴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꽃이 피어 있다고. 같은 꽃을 피운 사람들이 입을 맞추는 자리에 그녀의 입술은 없다고. 편지의 마지막 줄에 그녀는 오래전에 연주했던 곡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괴롭다고 썼다. 비에 젖은 편지에는 그녀의 얼굴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봉투째 젖어든 사진은 누렇게 물이 들어 있었지만 그녀의 매혹적인 얼굴만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전체적으로 길쭉하며 희미한 인상이었다. 쌍커풀 없이 길쭉한 눈에 각진 턱, 얇은 입술. 너는 문득 그녀의 초상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저없이 서랍에서 연필을 꺼내들었다. 다행히 연필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뾰족하게 깎인 그대로였다. 너는 그녀의 얼굴을 이루는 선-기실 환영에 불과한 선들을- 세밀하게 묘사해 나갔다. 놀랄 정도로 사실적인 작품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완성도 하기 전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은 사진과 매우 흡사하였고, 또한.

네 머리맡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건 네 얼굴인데.

그림은 너와 같은 생김을 하고 있었다. 너는 무의식중에 짧은 코 바로 아래 붙여 그리던 도톰한 입술을 발견했다. 사진을 따라 그리던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콧방울처럼 보이던 것은 기묘한 음영이었고 그 아래로 연한 선이 이어져 있었다. 입술은 얼굴의 아랫부분, 턱과 가까운 곳에 매달려 있었다. 그림을 고쳐 그리고 나자

초상을 그녀에게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네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너는 황급히 그녀에게 보내기 위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네게 보낸 것처럼 손편지로 보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던 연필, 어느덧 끝이 뭉툭하게 닳은 연필로 너는 前略이라는 한자어를 썼다. 이후의 내용은 두서없이 이어졌다. 안녕. 네 그림을 그려봤어. 앞으로도 너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어. 상처난 몸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 너는 외롭다고 썼지만 네가 혼자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네 얼굴에는 선이 많으니까.

너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말들을 적어놓은 편지를 너는 두 번 다시 읽지 않았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야 너는 그녀가 입원한 병원의 주소도, 그녀의 집 주소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편지는 더 이상 네 손에 없었다. 침대 위에 있던 할아버지가 감추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긴 팔을 뻗어 누렇게 바랜 종이를 등 뒤로 밀어넣는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너는 차마 그의 등 아래 손을 밀어넣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뒤집어본 적이 없는 등. 타인의 손에 내맡겼던 등. 욕창으로 망신창이가 되어버린 등은 네 비밀도 수치도 치부도 아픔도 아니었으므로. 그 등이 네 곁에 있을 리가 없으므로.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네게 보낸 편지도. 네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도. 그녀가 네게 보내지 않은 편지도. 네가 그녀에게 보낼 수 없었던 편지도.

그 이후로도 간혹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너희는 서로에게 부친 적도 없는 편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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