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목장

소년은 돼지목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돼지목장에서 태어났다. 그랬기에 아무도 소년이 돼지목장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에게 있어 돼지목장에서의 탄생은 경이로울 정도로 우연적인, 유일한 사건이었다.

분홍빛의 두툼하고 풍만한 살들에 파묻혀서 소년은 나날이 돼지처럼 부풀었다. 소년이 돼지들의 분뇨와 진흙으로 가득한 진창에서 돼지들의 매혹적인 살 속에 파묻혀 지내는 것을 그의 부모는 못마땅해했다. 돼지목장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소년을 보고 혀를 차며, 혹은 낄낄거리며 저 애는 누가 뭐래도 돼지목장의 아이야, 하고 속삭였다.

소년은 돼지처럼 분홍빛이었다. 그는 돼지처럼 뚱뚱했고 돼지처럼 많이 먹었다. 소년은 다른 소년 소녀들보다도 돼지들을 더 편하게 여겼다. 돼지들의 생활습성과 표정, 행동과 움직임을 소년은 주의깊게 살펴보고 모방하였다. 돼지들은 오줌을 온몸에 바르고 햇빛에 말려내어 몸을 식히며 가려운 등을 서로에게 맞대며 애정을 나누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돼지의 언어를 익히지 못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소년은 어엿한 한 마리의 돼지처럼 능숙하게 돼지 무리에 섞여들 수 있었다. 간혹 소년의 부모조차도 수십 마리의 벌거벗은 분홍 등 사이에 파묻힌 소년의 분홍빛 퉁퉁한 등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소년은 어미 돼지의 젖을 먹고 잠들었고 돼지들의 등과 배를 긁어주기도 했다. 돼지들은 소년을 그들의 아이처럼, 형제처럼 사랑했다. 소년 역시 돼지들을 사랑했다. 그들이 도살되기 위해 팔려갈 때면 눈물을 흘리며 배웅할 만큼, 남겨진 돼지들과 함께 사라진 돼지를 떠올리며 슬퍼할 만큼.

더 이상 어린아이의 사랑스러운 기행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나이까지 소년은 돼지들 무리에 깊이 파묻혔고 사람들은 소년이 미쳐버렸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부모가 소년을 목장 밖으로 내쫓고 매질을 해도 소용없었다. 소년은 어느 틈엔가 돼지들 사이로 섞여들어 돼지들의 젖을 먹으며 위로받았다. 소년이 돼지들과 접붙는 모습을 들켰을 때 소년의 아버지는 도살용 총으로 소년을 쏴 죽이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총은 불발하였고 부모는 소년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정말 돼지 같았다. 그가 돼지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부부에게는 곧 소시지처럼 발긋하고 부드러운 살을 가진 여자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은 돼지들과 함께 꿀꿀거리며 살아가는 소년을 서서히 잊어갈 수 있었다.

소녀가 처음 태어났을 때, 산파가 들어올려준 아이의 붉은 살을 보면서 돼지고기를 떠올린 사내는 끔찍하게 놀랐지만 다행히도 여자아이의 붉은 피부는 곧 눈처럼 희게 변해갔고 부부는 안심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돼지들에게 빼앗겨 소년에게 차마 주지 못한 애정까지 그들은 소녀에게 모두 헌신하였다.

소녀는 종달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녀는 돼지처럼 음침하고 기묘한 소년과는 달리 활발하였으며 사교적이었다. 소녀가 열댓 명의 소년 소녀들을 데려와 모래 장난을 하며 노는 것을 부모는 행복하게 바라보곤 했다. 소녀는 티 없이 행복하게 자랐다. 돼지 목장의 딸이 아니라 목사나 제과점의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녀는 청결했고 아름다웠으며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부모는 소녀가 소년처럼 돼지들에게 물들 것을 두려워하며 소녀가 돼지들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했다. 소녀가 태어날 무렵 소년은 돼지 사료를 먹고 축사에서 잠들기에 이르렀기에 소녀는 오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뒤 거절당한 남자아이가 소녀를 저주하며, 네 오빠는 돼지라며, 돼지 동생이니까 너도 돼지인 거야, 하고 말할 때도 소녀는 그 애가 모욕적인 거짓말로 그녀를 음해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이 열에 들떠 남자아이와 함께 소녀의 오빠를 조롱할 때, 그녀가 돼지의 동생이라고 말할 때, 소녀는 그녀를 감싸고 있던 은근한 비밀의 존재를 깨닫고 말았다. 어째서 엄마는 돼지들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는 걸까? 소녀는 지금껏 그녀의 내부에 틈입하지 못하고 소녀 주위를 안개처럼 떠돌고 있던, 소년에 관한 소문들을 불현듯 떠올렸다.

소녀는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학교를 빠져나와 돼지목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소녀는 벌거벗은 채 돼지의 젖을 빨고 있는 더러운 금발을 발견했다.

그는 사람이었다. 돼지처럼 헐벗었고 돼지처럼 붉었지만 분명히 사람이었다. 소녀는 그가 그녀의 오빠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소년은 이름 모를 소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진흙과 오물, 짐승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통에 소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역겨움을 견디기 위해 코를 막았다.

돼지의 더러운 젖에서 머리를 떼어낸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소녀는 소년의 붉게 부풀어오른 입술이 그녀와 놀랄 만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소년은 끔찍할 정도로 더러웠다. 그는 돼지처럼 뚱뚱했고 돼지처럼 붉었고 돼지처럼 불결했다. 처음 소년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소녀는 죽을 듯 놀랐지만, 백치처럼 희게 벌어진 눈이 멀뚱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자 곧 깊은 수치가 소녀를 덮쳐왔다. 소녀와 꼭 닮은 붉은 입술은 돼지의 끔찍한 체액으로 젖어 있었다.

소년이 돼지처럼 킁킁거리면서 소녀에게 다가오자 소녀는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축사에서 소년을 만났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자 소녀를 저주했던 남자아이는 곧 소녀에게 다시 매혹되었고 아이들은 소녀를 모욕하며 느꼈던 치기 어린 기쁨을 잃어버렸다. 아이들은 더 이상 소녀의 오빠에 대해 노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일그러진 거울 속에 비추어진 소녀의 얼굴을, 묽은 체액으로 젖은 소년의 입술, 소녀의 것과 같은 입술을 잊을 수 없었다. 소년은 아직도 돼지들과 함께 있을 것이었다. 어째서 소년은 소녀처럼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소녀처럼 두 발로 걷지 않고 소녀처럼 깨끗한 옷을 입지도 않고 그토록 벌거벗은 채로 그토록 더럽게 사는 것일까?

소녀는 온종일 소년에 대해 골몰하면서도 부모에게, 아마 모든 내력을 알고 있을 그들에게 소년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다. 그들이 소년의 존재를, 소년과 소녀 사이의 치명적인 유사성을 확증해줄 것이 미치도록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종종 돼지들 사이에 파묻혀서 뒹굴고 젖을 빨고 사료를 먹고 잠을 자는 소년을 찾아가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소녀는 한 번도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잠드는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그토록 더럽고 그토록 냄새나고 그토록 그녀와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은 소녀의 엄마나 아빠보다도 더 소녀와 닮아 있었다. 특히 작고 도톰한 입술은.

소녀는 마치 다른 미래를 그녀일지도 몰랐던 상실된 미래를 관찰하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 역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소년 역시 소녀에게서 같은 것을, 소년과 같은, 그러나 소년일 수 없는, 불가능한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소년이 돼지에게 입맞추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소년의 혀가 돼지의 끔찍하게 붉고 육중한 입 속에 파묻힌 것을 보았을 때, 소녀는 역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 앞에서 구토를 했다. 견딜 수 없는 불결함을 자처하고 그곳에 머리를 쳐박는 소년이 미칠 듯이 증오스러웠다. 소녀의 입술로, 한 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는 소녀의 작고 아름다운 입술로 소년은 돼지의 끔찍하고 역겨운 침을 삼키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의 얼굴을, 그가 가장 역겨운 방식으로 모욕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빼앗아 숨겨놓고 싶었다. 얼굴 가득 묻은 끔찍한 얼룩들을 닦아내고 깨끗이 씻어 말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돼지의 침과 분뇨로 얼룩진 입술은 소년에게 속해 있었다. 소녀는 황홀한 거북함으로 소년이 돼지와 함께 뒹구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 자신의 타락을 목격하듯 가만히 굳은 채, 소녀는 벌거벗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돼지처럼 벌거벗었고 돼지처럼 아름다웠다. 소녀는 꿈처럼, 두 개의 몸을 동시에 살았다. 그녀는 돼지우리 안에, 그리고 바깥에 있었다. 어떠한 몸이 선행했는지 소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몸의 냄새가 바깥에 서 있는 소녀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피처럼 검은 오물의 짙은 냄새.

소녀의 부모는 소년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집 밖에서 소녀는 돼지 목장의 소년에 대한 소문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누구나 소년을, 이름 모를 소년, 아직도 살아 있는 소년, 그러나 은밀하게 감추어진 소년을 알고 있었다.

베이커리의 폴 아저씨는 소년이 똥통에 빠져 죽었다고 말했다.

안나는 새처럼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소년이 돼지들에게 잡아먹혀 죽었다고 했다. 엄마가 그랬어. 너희 오빠는 돼지들이랑 어울리다가 돼지에게 물어뜯겨 죽었다고. 그러니까 짐승들과 너무 가까이 어울리면 위험하다고.

소년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소년의 더럽혀진 몸이 생생히 분출하는 음험한 악취를 아무도 맡지 못했다. 소년은 살아 있었다. 소녀의 입술로 돼지의 젖을 빨면서, 소녀가 잠드는 침실 바로 뒤편에서, 돼지우리에서.

소녀는 절망적인 비밀을 사랑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소년을 본 것은 그녀뿐이었으니까. 소년은 소녀의 입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소녀는 소년과 끔찍한 유사성으로 이어져 있었으니까.

소녀는 점점 오랜 시간 돼지우리에 숨어들게 되었다. 수업에도 친구들과의 놀이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없었으므로. 악몽처럼 아름답고 개인적인 비밀. 누군가 그녀에게 소년에 대해 묻는다면 소녀는 두려워서, 그리고 행복해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으므로.

그러나 대체 누구에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모두가 소년을 알고 있는데, 소년을 모르는 채로, 소년의 악취도 소년의 입술도 소년의 불결함도 모르는 채로 소년에 대해 안다고 믿고 있는데.

소녀는 소파에 멍하니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돼지우리에 가 봐도 돼요?

피곤에 지친 여자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흠칫 놀라 소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니?

돼지우리요. 돼지들을 보고 싶어요.

여자는 소녀의 가녀린 어깨를 붙들고, 차오르는 비명을 억누르며 속삭였다. 안돼. 오늘 저녁에는 극장에 가기로 했잖아. 악취가 배면 안 되잖니.

소녀는 여자의 불투명한 얼굴 속에 묻혀 있는 비밀을 캐내듯 되물었다. 돼지우리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요.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안방으로 들어가버리자 소녀는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비밀을 숨긴 여자의 음험하고 고통스러운 몸짓, 누설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는 서글픈 표정과 날카로운 비명은 소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저열한 승리감과 죄악감에 상기된 얼굴로 소녀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내몬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나한텐 아무 잘못도 없었어, 여자는 헐떡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녀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돼지우리에서 잠든 아이를 보았을 때, 여자는 기묘한 안도감과 서글픔에 휩싸였다. 아이는 천사처럼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유독 붉고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돼지처럼 붉은 살을 벌거벗은 채, 그 애와 꼭 닮은 새끼돼지들과 함께. 돼지들에게 둘러싸인 아이는 정말 돼지처럼 보였으나 사랑스러웠다. 여자는 동물들과, 특히 돼지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가 순결한 천사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평온한 순결함이 갑작스럽게 끔찍한 불결함으로 바뀌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돼지들 사이에서 돼지들과 함께 돼지들을, 그리고 돼지들.

여자가 그 애에게 다시 젖을 물릴 수 있었을까? 진흙이 묻은 그 애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었을까? 여자는 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애가 원하는 것은 돼지우리였다. 그 애가 원하는 것은 돼지들이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 그녀가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음침한 쾌락을 그 애는 원하고 있었다. 그 애는 돼지들의 아이였다.

돼지목장의 남자와 결혼하면서, 그녀는 결코 돼지목장을 치우지 않겠다고, 오물을 뒤집어써도 행복하게 웃는 잡역부와 같은 여자들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그의 남편은 그녀에게 그런 일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그와 만났던 순간처럼, 백합처럼 깨끗하고 고요했고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소녀처럼 순결하고 깨끗할 것, 돼지들과는 다를 것, 붉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을 것, 바닥에 오줌을 흘리지도 않고 오물 냄새를 풍기지도 않을 것,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지도 않고 잔반 찌꺼기를 핥아대지도 않을 것, 돼지처럼 욕망하지 않을 것, 그가 그녀에게 그러한 것들을 원한다는 걸, 그리고 그녀 자신 역시 백합처럼 깨끗한 그녀를 원한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에게는 수십 마리의 돼지들이 있었고 돼지우리에 있는 숱한 암퇘지들과 그녀가 다르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침대 시트에서는 언제나 말라붙은 햇볕의 고요한 향기가 났고 테이블에 장식해 놓은 꽃들은 싱싱한 연녹빛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날카롭게 잘려나간 줄기의 끝단, 투명한 물을 게걸스럽게 빨아드리는 흡수기관을 여자는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가렸다.

아들이 돼지들과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들이 무엇이 되어버렸는지 여자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불결함이 여자가 유전한 무언가라는 생각을, 아들의 붉은 살이 그녀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 악취가 어쩌면 그녀에게도 있으리라는 거북한 생각을.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들이 미쳐버린 것은, 아들이 돼지처럼 역겨운 것은. 왜냐하면 그녀는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주었으니까. 그녀는 깨끗이 소독한 젖을 물려 주었고 가장 부드러운 천으로 아이의 땀을 닦아 주었고 기저귀가 오물로 젖을 때마다 더러워진 엉덩이를 깨끗이 씻어내 주었으니까.

돼지들 때문이야, 하고 여자는 생각했다. 남편 때문도 아니고 나 때문도 아니야. 그 애 때문도 아니야. 그건 돼지들 때문이야. 고약한 돼지들, 음침한 돼지들, 오물 속에 틀어박혀서 터무니없는 생각만 하고 있는 미쳐버린 짐승들 그 고약한 짐승들이 그 애를 순진하고 사랑스럽고 가여운,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그 애를 꼬여낸 거야. 불쌍한 것, 가여운 것, 하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어? 하루종일 그 애만 감시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 애는 내 게 아니고 나는 그 애 게 아니니까. 그 애를 망쳐버리기 위해 이를 가는 짐승들에게 내가 어떻게 맞설 수 있었겠어?

아들은 불가해할 정도로 긴 시간을 돼지우리에서 보냈다. 아들에게서는 돼지들의 살비린내가 진동했다. 친구라고는 돼지밖에 없는 아이. 사람들은 그 애를 비웃었다. 몰락한 가문을 조롱하듯이, 아직 싱싱한 그녀의 흰 꽃 앞에 앉아서 아들이 돼지들을 닮았다고, 누가 보아도 그 애는 돼지목장의 아들이라고 낄낄거렸지. 여자는 슬몃 웃었지만 깔깔거리는 순박한, 그을린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하고 따져 묻고 싶었다. 악의 없는 해사한 흰 치아들, 토끼처럼 거대한 앞니, 창문 너머에서 그 애가 벌거벗은 채로 뒹굴고 있다는 생각만 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여자는 고백하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녀가, 그녀처럼 아름답고 정결한 여자가 그런 돼지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녀는 노력했다고. 그녀는 끔찍할 정도로 애썼다고.

손님이 돌아간 뒤 여자는 창밖을 보며 흐느꼈다. 진진한 악취는 창문에 투과되며 달콤한 내음으로 바뀌었다. 속을 뒤집어놓는 달달한 분뇨의 악취. 대체 그 애는 어떻게 그런 곳에서 알몸으로 지낼 수 있는 걸까?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 돼지목장에서 살았던 남편조차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잠깐 산책을 갈 때도 상복과도 같은 검은 양복을 차려 입는 남편은 돼지 목장의 주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서 돼지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게 씻었고 돼지들을 관리하는 일도 대체로 잡역부에게 맡겼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면 돼지 축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 애는 돌연변이가 분명해, 하고 여자는 망연하게 생각했다. 돼지들이 유혹했다고 어떻게 그 더러운 곳에 들어갈 수 있었겠어? 마을에는 깨끗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같이 놀 만한 또래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애가 외롭다고 말해주었다면 난 당장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을 거야. 동네 아이들을 모두 데려와서 내 아이가 얼마나 애틋하고 사랑스러운지, 그 애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만한 구석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었을 거야.

아이는 어른이 되어버리기도 전에, 여자가 그 애를 놓아줄 준비를 하기도 전에 돼지 똥통에 빠져 버렸다. 그 애는 여자의 아이가 아닌 돼지목장의 아이, 돼지들의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그 애는 돼지들 사이에 파묻혔다. 여자가 알지 못하는 황홀, 여자에게는 역겹기만 한 깊은 쾌락에 빠져버린 그 애를 여자가 어떻게 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돼지들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데, 돼지들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은 그 애였는데.

아들이 돼지처럼 꿀꿀거리면서 진흙으로 얼룩진 무릎으로 기어 다가올 때 여자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애는 이미 돼지와 다름없었다. 한때 그 두툼하고 발가벗은 더러운 살이 그녀의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임신 기간에 그녀는 술이나 커피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환희하기 위해 행복하고 아늑하기 위해 애썼다. 습관적으로 치밀어오르는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여자는 긴 시간 잠을 청했다. 악몽 속의 그림자 괴물들에게는 다윗의 별을 달아 주었고 태양을 닮은 신비로운 가면을 씌워 주었다. 그녀는 입가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웃었으며 모차르트와 비발디를 들었다. 안락한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여자는 아이의 부드럽고 황홀한 미소를 떠올렸다. 결코 돼지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돼지를 잊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부단한 노력 끝에 마침내 돼지들에 대해 잊어버렸다.

갓 태어난 아이의 피투성이 얼굴을 사랑하기 위해 여자는 끔찍하게 노력했다. 그 애가 여자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녀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뼈와 살이 유리처럼 투명했다면 그 애는 여자의 심장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움츠러들고 있는지, 마치 독에 썩어가는 나비처럼, 말라붙은 낙엽처럼 변해가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육중한 햇빛이 여자를 내리눌렀다. 여자는 숨이 막혀 헐떡거리면서 그녀가 잊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소년과 붉음, 게걸스럽게 벌어진 축축한 입술과 외설적으로 부풀어 오른 짐승의 검은 젖가슴들, 돼지, 돼지, 돼지, 그리고 돼지들. 무덤과도 같은 자궁 아래에서 여자는 잠을 청하려 애썼다.

두 번째 아이가 없었다면 그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임신했을 때 그녀가 은밀한 절망에 사로잡혔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녀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두 번째 아이가 돼지가 아니라는 확신, 두 번째 아이 또한 돼지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확신, 돼지를 낳은 그녀가 돼지가 아니라는 확신이. 순결한 흰 꽃잎으로 감싸인 꽃들이 여름의 절정에서 얼마나 흉측하게 벌어지는지, 분뇨와 시체를 먹고 부화한 파리들의 역겨운 발에 짓밟힌 꽃들이 얼마나 황홀하게 웃는지, 찢어지면서 얼마나 달콤한 향기를 흘리는지 여자는 알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깨어나면 여자는 죽을 것처럼 괴로웠다. 그녀의 입 속을 파고든 흰 구더기들의 악취가 그녀의 뱃속에 고스란히 배어드는 것 같았다.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구더기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절개된 그녀의 자궁 속에 희게 꿈틀거리는 벌레들만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그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 해도.

그러나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낳았다. 소녀는 기적처럼 해맑고 햇빛처럼 해사하였다. 소녀가 아이답게 울어젖히는 모습마저 여자를 안심시켰다. 유달리 조숙하고 음침했던 아들과는 달리 딸은 그 나이대의 애처럼 순진했던 것이다. 다행히 딸은 바깥에 나가 햇빛을 쐬고 친구들과 뛰노느라 돼지들에게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묘지에서 살면서도 무덤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모르는 아이들처럼 소녀는 비밀에 대한 자각조차 없이 행복하게 자라났다.

소녀가 그녀처럼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데려와 자그마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여자는 구원 받은 듯 안심하였다. 그간의 악몽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간혹 여자를 은밀하게 짓누르는 죄악감의 서글픈 무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정도의 고통은 수월하게 감내할 수 있었다. 하나뿐인 딸이 평범하게 자라준다면, 그리고 가장 적합한 시기에 순결한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떠나간다면, 딸의 유년을, 숭고하고 절절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추억만으로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여자는 얼마든지 돼지목장의 비밀을 묻어두고 죄악감을 망각하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는 눈처럼 희고 아름다웠다. 갓 태어났을 때의 불길한 붉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소녀는 희었다. 강렬한 햇빛조차도 소녀를 검게 그을리지 못했다. 햇볕 속에서 소녀는 더욱 눈부시게 빛날 뿐이었다. 소녀는 터질 듯이 애틋한 소리로 웃었으며 아이답게 고집스럽고 신경질적이었다. 간혹 의젓한 체 할 때조차 아이 특유의 허술한 이기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더욱 사랑스러웠다. 소녀가 부모 앞에서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떼를 쓸 때면 여자는 가련하고 투명한 딸이 사랑스러워 파열할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아들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아들이 소녀처럼 깨질 듯한 높은 소리로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애는 언제나 숨어서, 우울증자처럼 끅끅거리면서 울었다. 축사 한 귀퉁이에 숨어서 움츠린 채 흐느끼는 작은 등이 노인처럼 보여서 여자는 끔찍하게 놀랐다. 아들은 늙은이처럼 연약하고 조숙하였다. 지성과 사교성 대신 감성만이 지나치게 발달한 것처럼 그 애는 차마 말 못 할 서글픔으로 여자를 올려다보고는 했다. 그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여자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에게 부당한 눈빛이었다. 여자가 겪어서는 안 되는 절망이었다. 여자가 받아서는 안 되는 끔찍한 죄악감.

하지만 여자는 아들을 돼지 목장으로 쫓아낸 적이 없었다. 여자는 아들에게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부드럽고 고결한 것만을 물려 주었다. 제 발로 돼지들에게 찾아간 것은, 돼지들에게 감염되고 돼지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래서 돌이킬 수 없이 돼지가 되어버린 것은 아들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 애를 그곳으로 내몬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들의 늙어빠진 검은 눈은 부당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겪은 깊은 고통을 아들에게 강요한 적조차 없었다. 절망과도 같은 순결함, 짓무른 깨끗함과 고통스러운 미소를 결코.

그런데도 아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삶을 달관하지 못한 늙은 여자처럼 흐느꼈다. 대체 그 애가 무엇을 겪었다고, 그 애가 어떠한 고통 어떠한 찢어짐, 어떠한 답답함, 어떠한 터질 것 같음, 어떠한 미쳐버림을 겪었다고 그렇게 흐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 애는 임신을 한 적도 없고 미친 아이를 낳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그렇게 한순간에 미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이가 원한다면 여자는 무엇이든 들어 주었을 것이다. 돼지가 되는 일만을 제외하면, 구제할 수 없는 욕망에 파묻혀 역겹고 깊은 구멍이 되어버리는 것만을 제외하면 무엇이든. 그녀는 아이를 바닷가에 데려갔을 것이고 부드러운 모래에 손을 담그는 유쾌한 장난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축축한 흙이 손을 더럽힐 때 얼마나 즐거운 간질거림이 피부를 파고드는지, 밤의 정원이 얼마나 눈부시고 향기로운지, 만발한 꽃잎을 조심스럽게 찢어낼 때 얼마나 악독한 희열이 차오르는지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그녀가 경험해온, 그녀를 유지시켜온 작고 치명적인 범죄들을 조금씩.

그러나 아들은 여자를 까마득히 추월해버렸다. 돼지의 몸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흐느끼는 아들의 붉은 등 앞에서 여자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다는 것을, 아들의 범죄는 여자가 짐작할 수조차 없이 깊고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발가벗은 소년보다도 더 발가벗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돼지가 묻은 소년, 소년이 담고 있는 여자의 일부가, 더럽혀진 여자가 여자를 향할 것이라는 생각이 욕망하는 게걸스러운 검은 눈이 여자를 바라볼 것이라는 생각이 여자를 미치게 만들었다. 뱃속이, 가슴이, 목 안쪽이, 입이, 눈꺼풀이, 내장이 끔찍하게 조여들었다. 고통과도 같은 내밀한 결핍이 벌어진 꽃잎들 사이사이에서 흉측하게 드러나는 것을 여자는 느낄 수 있었다.

여자는 도망쳤다. 그러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번뿐인 범죄, 한 번뿐인 욕망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여자의 갈망은 그보다 깊었으니까.

남편이 도살용 총을 들이댈 때도 여자는 말릴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더럽혀진 아들을, 불결해진 붉은 몸을 심판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절망적인 욕망을, 회복할 수 없는, 갈망하는 구멍을 산산이 찢어발기기를. 그러나 총은 불발하였고 아들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아들을 잊기로 결심했다. 발사되지 않은 총알은 벌거벗지 않은 몸들을 관통하였고 그들은 아들을 벌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건 더 이상 그들의 아들이 아니었다. 한때 여자의 몸에 있었으나 이제는 무한히 변질되어버린 붉고 음탕한 살.

여자는 새로운 아이를 잉태했다. 그녀의 몸에 올라타 헐떡거리는 사내의 두툼한 몸이 아들과 닮았다는 사실을, 꼭 돼지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여자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도 그녀의 알몸에서, 부풀어오른 배와 가슴에서 같은 것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짐승 같은 헐떡임을, 돼지처럼 나직하고 천박한 신음을 듣지 않기 위해 큰 소리로 대화를 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숨소리는 목소리를 잠식하였고 신음은 문장들을 뒤덮어 질식시켰다.

임신한 뒤로, 여자는 결코 남편에게 벗은 배를 보이지 않았다. 고기처럼 붉게 부풀어 오른 살, 간혹 여자는 그곳에서 자라는 것이 정말 고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뱃속에는 때로는 구더기들이, 때로는 돼지가, 때로는 고깃덩이가 들어있었다.

여자는 출산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가 낳는 것이 그녀의 비밀을 누설할 것이라는 끔찍한 불안감이 사그라들지를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정말 돼지를 낳는다면, 아들이 돼지가 되어버린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벌어진 꽃잎의 틈새에서 부글거리며 자라나는 작은 진드기들, 여자의 삶이 붉고 향긋한 고깃덩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자는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었다. 모차르트도 비발디도 없었다. 한밤의 부드러운 노랫소리도, 감미로운 이야기도 없었다. 여자는 미칠 듯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헐떡거렸다. 여자가 어떠한 악몽을 꾸는지, 뱃속에서 살아가는 피와 살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여자가 보는 것, 여자가 불안해하는 것, 여자가 절망하는 것, 여자가 원하는 것을 뱃속의 아이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뱃속의 아이는 여자 때문에 괴물이 되는 것이었다.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노래 대신 악몽을 마시고 자라나는 아이는.

산파가 길쭉하고 거대한 소시지를 꺼내었을 때 여자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피를 닦아낸 아이는 희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게, 소녀는 자라났다. 여자가 믿었던 삶처럼, 불결한 살과 피, 진물을 모두 덜어내고 무덤에서 기어나온 유골처럼 소녀는 희었다. 여자는 소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흰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남편도, 마을 사람들도 소녀를 사랑했다. 소녀는 돼지 목장의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오직 유달리 도톰한 입술만이 붉었을 뿐, 소녀는 죽은 이처럼 창백했다. 꽃의 비밀에 탐닉하지 않는 아이, 잘려나간 꽃의 절단면에 삶이 있음을, 꽃에 베어 피흘릴 수 있음을, 꽃잎 한가운데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노란 가루로 손이 축축하게 젖어든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 소녀는 아이다운 순수한 음험함으로 투명하였다. 여자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의 비밀을 내맡길 수 있을 정도로. 눈 먼 여자의 순진한 방만함으로, 그들의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끔찍한 위험을 내버려둘 정도로.

그들은 비밀을 잊는 데 너무도 골몰한 나머지 비밀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말았다. 어쩌면 그토록 방심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토록 무심했을까? 소녀가 소년을 만난 것은 그녀의 탓이었다.

여자는 그녀가 마치 아들처럼 울고 있었음을, 고통을 내리누르며 가녀리게 흐느끼는 소리가 아들과 소름끼치게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다른 방식으로 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비밀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이처럼 깨질 듯 강렬하게 울부짖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돼지들을 보고 싶어요, 하고 속삭이는 소녀의 입술은 소년과 꼭 닮아 있었다.

피처럼, 헐벗은 음부처럼 붉은 것이 꽃잎처럼 움츠러드는 것을 여자는 멍하게 바라보았다. 투명하던 피를 붉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티 없이 말간 피부를 불투명하게 물들이는 슬픔의 기미는, 아이를 갑작스럽게, 너무도 갑작스럽게 성숙하게 만드는 비밀은 대체 어디에서 찾아오는 것일까? 여자는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불확실성을, 음침한 곳에서 자라는 곰팡이와도 같은 축축함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벽지에 피어있는 모든 꽃잎들은 소녀의 입술이었다. 아이다움을 상실해버린, 비밀을 가진 여자의 붉고 음험한 입술. 대체 언제 그렇게 커버린 것일까? 갑작스럽게, 너무도 갑작스럽게.

여자는 돼지처럼 흐느끼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곧 남편도 알아차릴 것이었다. 곧 모두가 알아차릴 것이었다. 소녀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소녀가 비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불길한 성취감에 젖어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

돼지들을 모두 죽여버려야 했다. 소녀가 그곳에 가기 전에, 단 한 마리의 돼지도 남지 않도록. 고통스럽더라도 소년을, 더 이상 그녀의 아들이 아닌 그 돼지를 먼 곳으로 쫓아버려야 했다. 돼지들 사이에 갇힌 채 행복하게 흐느끼는 그녀를 소녀가 마주치기 전에.

여자는 치밀어오르는 오싹함에 경련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넘어질 듯 위태롭게 문을 열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노인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감싸쥐고 흔들며 물었다. 봤니?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알고 있었다.

이 애는 벌써 본 거야. 여자는 주저앉아 흐느꼈다. 짐승처럼, 돼지처럼 헐벗은 채로 온몸을 떨면서. 왜냐하면 그녀는 들켜버렸으니까, 그곳에 무엇이 벌거벗고 있는지, 벌거벗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 그 불결함에서 얼마나 달콤한 악취가 나는지 전부, 전부 들켜버렸으니까. 소녀의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응축된 음험함은 모든 것을 누설하고 있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소녀에게서 나는 미미한 악취를, 소녀의 밀봉된 피부 아래를 떠도는 축축하고 붉은 피를. 소녀를 둘러싸고 있던 투명하고 위태로운 거짓이 산산조각났고, 여자는 금 간 여자 앞에서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네 피는 처음부터 붉었다고, 돼지의 음탕한 몸 속을 떠도는 체액처럼, 너는 처음부터 돼지와 같은 살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자는 침묵으로 고백하고 있었다.

소녀는 여자를 비난하지 않았으나 용서하지도 않았다. 비밀은 이미 유전되었고 그것은 이제 소녀가 감당해야 할 여자가 되었으므로. 소녀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소녀는 어른처럼, 늙은 여자처럼 흐느꼈다. 열린 창틈으로 돼지들의 희미한 악취가 흘러들었고 소녀는 그녀에게 이어진 비밀의 황홀한 갈망으로, 역겨움으로 입술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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