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나도 더 이상 빈대들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있어요. 레몬캔디는 모르는 어릴 적의 이야기에요. 그 애는 무척이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당신의 이야기와는 모순되게, 슬플 때는 언제든지 울고 욺으로써 무언가를 요구할 줄 아는 아이였죠. 물가에 떠내려온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거뭇한 우수를 지니고 있는 아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애는 이웃들을 사랑할 줄 알았어요.

붉은 지붕을 가진 옆집에 살던 늙은 셰퍼드가 죽었을 때에도 레몬캔디는 진심으로 흐느껴 울었어요. 이

웃들은 개에 대한 사랑으로 흐느끼는 레몬캔디를 대견하게 쓰다듬었지요. 그리고 그 애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죽은 개는 검고 축축한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파리와 구더기들의 작은 위장 속으로 나뉘어 담기는 것이 아니라, 눈부시게 새하얗고 찬란한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이곳에 남은 개의 육신, 네가 쓰다듬었던 자그마한 머리통과 네 입술을 핥았던 따뜻한 혓바닥, 네 주위를 맴돌았던 작고 귀여운 발바닥들은 모두 더 이상 그 개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이라고, 너는 그것을 추모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고, 네가 불렀던 개의 이름은 모든 안식이 드리우는, 더 이상 노을에 젖어 피흘리지도 태풍에 잠겨 발작하지도 않는 하늘의 위, 적란운들의 위, 햇빛 바로 아래에 설원처럼 고요히 펼쳐진 안락한 장소로 올라간 거라고.

그러니 울 필요 없단다, 아가. 하고 제인 할머니는 레몬캔디의 얼굴을 감싸쥐었죠. 울지 말렴. 행복이라는 감정만이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간 개를 축복해 주어야지. 죽는 것은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야.

레몬캔디는 할머니의 파랗고 곧은 눈짓을 믿었어요. 그녀의 말은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설명을, 죽음에 대한 해설을 준비해둔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지요. 레몬캔디는 나날이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제인 할머니가, 눈에 띌수록 수척해지고 가벼워져 곧장이라도 하늘 위 높은 곳으로 날려갈 것만 같은 제인 할머니가 죽음에 대해 거짓말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리고 천진한 아이는 모두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어요. 그 애는 이웃들을 사랑했고 죽음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천국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웠으니, 배운 것은 곧장 시험해 보아야 직성이 풀렸겠죠.

소년은 더 이상 실험쥐들에게 약물을 주입해 그것들을 급속도로 노화시키는 할아버지의 실험을 보면서도 메스꺼운 느낌을 받지 않게 되었어요. 소년은 할아버지가 쥐들을, 이승에서 바글대며 끝없는 삶을 견디고 있는 쥐들을 구원하고 있다고 믿었죠. 소년은 할아버지처럼 모두를, 기왕이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이웃들을 모두 구원하고 싶었어요. 레몬캔디는 할아버지의 연구실에서, 알비노 쥐들이 시뻘건 눈을 치켜드며 끽끽거리는 유리 케이지 옆에 있던 주사약을 통째로 들고 우물가로 달려갔어요. 아마 우물가에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났더라면, 가령 제인 할머니를 만났더라면 그 애는 할머니에게 웃으며 말했을 거예요. 자신이 남몰래, 대견하게도 스스로 저지르려 하던 범행을, 혹은 선행을 낱낱이 고백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제인 할머니는 어떻게 대꾸했을까요? 산 자들이 습관처럼 그리하듯 죽음의 추악함에 대해 말했을까요? 죽음에 다가가는 동안 애써 가꾸어놓았던 죽음에 대한 인식의 화단에 독을 끼얹으며 죽음은 죄악이라고 털어놓았을까요? 아니면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죄악이라고, 죄악을 범한 자는 희고 안락한 적란운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위협했을까요? 하지만 자연스러운 죽음이 무엇인지,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인 할머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 거예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수컷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출산하며 죽는 암컷들은 자연스럽게 죽은 것인가요? 수컷 빈대의 성기에 배가 찢겨 죽어간 암컷 빈대들은? 수컷 빈대의 성기에 속이 헤집혀 죽어간 수컷 빈대들은?

다행히도 제인 할머니로서는 그녀의 마지막 안식일을 남겨두고 이런 고통스러운 고민에 골몰할 필요가 없었어요. 레몬캔디는 우물가까지 다가가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가 할아버지의 독약을, 시간을 앞당기는 신비한 물질을 우물 속에 집어넣는 모습을 엠마 아주머니가 멀리에서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죠.

엠마 아주머니가 레몬캔디의 만행을, 우물가에서 서성거리던 소년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것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였어요. 밤사이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가 마신 사람들이 하나둘 얼굴에 끔찍한 주름을 매달고 굽은 등으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거예요.

마을 바깥에 살던 의사들은 지독한 전염병이 퍼졌다고 생각하고 진료를 거부했어요. 결국 마을 안에 살던 수의사 페터가 사람들을 진료하고 나서야, 늙어 죽어가는 젖소와 병에 걸린 마을 사람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발견하게 되었죠. 사람들은 신이 자신들에게 절망적인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어요. 그들은 교회로 달려가 자신의 악행에 대해 낱낱이 고해했지요. 엠마 아주머니가 레몬캔디의 악행에 대해, 인과에 가장 밀접한 그의 행위에 대해 고발하기 전까지, 우물로 달려간 사람들이 가엾은 희생양으로 선정된 사냥개 한스에게 우물 물을 마시게 하고, 인간보다 짧은 수명에서의 급격한 노화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 충견을 보기까지 마을의 혼란은 계속되었죠.

사람들은 치를 떨며 레몬캔디에 대해 욕했어요. 연금술사는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레몬캔디와 마리 이모를 데리고 얼른 다른 마을로, 레몬캔디가 평생을 보냈다고 생각한 그들의 고향으로 이사했죠. 레몬캔디는 그곳에서, 우물 물을 마시고 늙어버린 사람들, 더 늙다 못해 죽어버린 사람들과 개들의 최후를 지켜보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고 떠나가고 말았어요. 레몬캔디는 그가 제인 할머니를 천국으로 보냈다는 것도, 싱그럽게 피어나던 청년들을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넣었다는 것도, 그의 선행이 절반쯤 성공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른 마을로 떠나가고 말았어요.

빗속을 헤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다른 마을까지 도착했을 때, 레몬캔디는 그의 모어와 모어를 사용하던 이웃들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마치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건너가면서 그 이전의 언어가 간직했던 추억들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마을 사람들을 독살하려고 한 괘씸한 고아 소년의 일에 대한 전설을, 우물에 독을 풀었던 비정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레몬캔디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다른 어휘와 음절들로 번역된 이야기는 그가 어릴 적 떠올렸던 우물의 모양, 제인 할머니의 다정한 손짓과 적란운 위의 아늑한 설원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그는 어린시절의 악행을 감싸고 있던 어휘들을 잊으면서 천진했던 악행도 전부 잊어버렸던 거예요.

우물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지만,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난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책상이 가장 높이 보이던 시절부터 죽음은 날개를 매달고 고요한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일찍 죽은 아이들, 신으로부터 직접 구원받을 정도로 어리고 순수한 아이들, 선택받은 아이들은 남보다 빨리 그곳에 도달한다고 생각했어요. 난 굶어죽은 아이도 병으로 죽은 아이도 동정하지 않았어요. 나 대신 적란운의 땅으로 먼저 입양된 아이들을 부러워할 뿐이었죠. 종종 난 그토록 일찍 죽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죄를 저지른 것 같은 아이들도 보았는데, 그때에는 그 애들이 저지른 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 애들이 다리뼈를 부러뜨리고 날개를 꺾고 주둥이를 뭉그러뜨린 짐승들은 모두 저주에 걸려 허덕이고 있는 이야기 속 괴물들이며, 괴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육신을 절단하여 망가뜨리면 그들은 비로소 아름다운 정령으로 되돌아간다고요. 그때 꾸었던 꿈들은 다시 생각하면 무척이나 기이하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찬란한 꿈이라고만 생각했죠. 어린 천사들이 깨물어 으깨놓을 수 없는 유리병과도 같은 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천국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는 꿈, 그 애들이 고통에 취해 유리병 대신 짓이겨놓은 날벌레들의 날개와 개미들의 성기가 노을처럼 환하고 신비로운 빛으로 피어나며 불구가 되어버린 그 애들의 놀잇감들이 아름다운 천사들로 돌아가는 꿈이었어요.

내 출생에 대해 의심한 건 집 밖에 있던 어느 허름한 이탈리아 식당에 홀린 듯 들어가 식사를 하던 때였어요. 남자 사장 한 명이 운영하던 집이었는데, 그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기른 흑인 사내였죠. 그가 나를 위협스럽게 반짝이는 하얀 눈으로 뚫어지게 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어지는 일련의 운명과도 같은 행동으로 나를 놀래키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상을 지금까지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는 코부분이 내려앉은 은테안경을 쓰고 중절모에, 얼룩이 덕지덕지 묻은 더러운 앞치마를 두른, 다소 우스꽝스럽고 일관성 벗는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에 내게 그러한 세부사항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을 정도로 한데 뭉쳐진 눈송이만큼이나 새하얀 그의 두 눈이 인상깊게 느껴졌어요.

그는 내게 아무말 없이 주문서로 보이는 두툼한 종이를 내밀었는데 그게 주문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하얀 눈동자를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죠. 난 당장에라도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며 창 밖으로, 아무런 고민 없이, 색이 보이지 않는 눈짓을 그들의 앞길에 쳐박은 채 내달리고 있는 청소년 무리밖에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도저히 나를 구하러 뛰어들어 줄 것 같지 않는 무심한 행인들밖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가 이내 포기하고 사내의 눈짓을 따라 그가 건네준 두툼한 서류철을 들여다보았죠. 초록색 가죽 서류철을 펼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테지만 당시의 내게는 마치 하나의 저녁 노을이 저물어가는 것처럼 긴 기간처럼 여겨졌죠.

서류철을 펼치자마자 내 눈에 띈 죽음과 관련된 단어들이 나를 소스라치게 했어요. 그건 한 마을에서 일어났던 미제 살인사건에 대한 신문을 스크랩해놓은 자료였어요. 난 메슥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눈앞에서 격동적으로 떨리는 글자들을 한 줄로 다잡아 놓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어요. 당시에 해석한 내용이 진실이었는지, 그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나는 사내의 하얀 눈동자에 홀려 완전히 귀신의 소굴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아득한 기분이었으니까.

기사는 독일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장기미제살인사건에 대한 글이었어요. 개인적인 추측으로 점철된 기사는 객관적인 내용만을 기록하는 기술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소설, 소설 이전 단계의 스케치와 유사한 것으로 보였어요. 기사는 한 마을에서 우연히도 겹쳐서 일어난 살인사건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었는데, 기자는 그 살인사건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 우연히 그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수수께끼의 가족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죠. 집 안에서 기이한 실험들을 계속하던 사내와 집단노화사건,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신비로운 사건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에요. 도시전설과도 같은 황당한 추측으로 흘러가던 기사의 내용을 따라 읽으면서 더욱 메슥거리는 속 탓에, 내가 글이 지시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읽고 있는 것인지, 단지 눈 앞에 떠오른 어휘들을 마구잡이로 합쳐 유리 주사위를 굴려 소설을 쓰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행위예술가처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분간이 안 될 정도였죠.

이어진 기사는 우물에 독을 풀어 놓은 사내와-이 기사는 우연한 시기에 이사를 간 가족의 가장을 이미 명백한 범인으로 기정하고 있었어요- 몇백 년 전 검은 숲 속을 떠도는 이야기를 찾아 독일의 마을 곳곳을 헤매던 형제와의 유사성을 파헤치는 개인적인 추측 형식의 칼럼이었죠. 그는 오래전에 자신이 남겼던 이름을 유일한 이름으로 남기기 위해,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다소 황당무계한 전제가 내포된 글이었지요. 기자는 비슷한 사건의 일례로 일본의 작은 신사에서 모시는 신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 나간 연쇄살인 사건을 들며,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고유성, 그 현존성의 독특한 아우라를 지켜나가기 위해 사진복제 기술자들을 차례차례 죽여나가는 모더니즘 이전 그림들의 복수라고, 유일무이한 존재로 살아있고자 하는 이름들, 고유성으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우라를 재생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까지 확대적인 은유를 늘어놓아 그것을 읽는 나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죠.

난 아직까지 내 시야 안쪽에서 번득거리는 하얀 눈동자와, 무엇보다도 희게 빛나며 내 인상의 세계를 점령하고서도 하나의 이름도 갖지 못한 이 익명의 사내와 유일무이한 이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익명일 때 비로소 확보되는 유일성에 대해서, 이름을-어휘를- 가진 자는 반드시 잃게 되는 현존성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지쳐 그 눈동자의 흰빛과 도리어 사랑에 빠질 지경이었어요. 사랑은 하나의 은유에서도 태어난다는 프랑스 작가의 말을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익명과 이름, 현존과 무위 사이의 비유는 내게 너무나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난 더 이상 그 눈동자의 하얀 빛깔과 이름을 가지고 죽어간 사람들 사이의, 이름을 잃고 죽은 유령과 이름 아래에서 못박여 잠든 시체들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어요.

곧 작은 종소리가, 모든 사건의 종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 뒤 열린 유리문 틈으로 이러한 불길한 사건과는 전혀 무관해보이는 청년 무리가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들어왔고, 사내는 내게 다른 맛과 향료를 섞은 갖가지 파스타를 지칭하는 어휘들이 나열되어 있는 메뉴판을, 불길한 상징들이 뒤죽박죽으로 나열되어 있던 신문 스크랩과 똑같은 초록 가죽으로 덮인 메뉴판을 다시 건네 주었죠. 그리고 사내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간 뒤 다시는 나오지 않았어요.

곧 유달리 창백한 얼굴을 한 백인 종업원이 내게 다가와 주문을 확인했고, 난 그의 하얀 손목을 보며 흑인 사내의 창백한 눈빛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결국 나는 그에게 시킨 가장 대중적인 파스타를 한 입도 제대로 삼키지 못한 채 팁까지 얹어 주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왔어요. 그리고 다시는 그 이탈리아 음식점에 들어가지 않았죠.

몇 달 뒤, 용기를 내어 그 악몽 속 공간에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황폐하게 널브러진 상자 몇 개와 누구도 닦지 않아 지저분해진 유리 너머로 우주처럼 아득하게 이어진 검은 공간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난 오래도록 그곳에서의 경험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죠. 그야, 자신의 꿈 이야기를 일일이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없잖아요. 난 그게 내 몽상인지 꿈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내 피부와 눈, 외감을 통해 내 안에 고유한 인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사람들이 실제, 혹은 현실이라고 부르는 무언가였는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당신과 함께 유년을 만들어나가는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우물에 푼 독 이야기를 했을 때, 어떤 일인지 사내의 하얀 눈동자가 갑작스럽게 내 머릿속을 다시 잠식했어요.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털어놓지 않고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레몬캔디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마치 제 눈꺼풀 아래에서 겨울밤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계속해서 내리는 사내의 흰빛을 가라앉히려 애쓰듯. 곧 그는-혹은 너는- 다시 입을 떼었다. 이제 됐어요. 이야기를 계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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