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군인의 물방울

시간의 발명을 코코펠리 주민들은 여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며 칭송했다. 그녀가 전한 수의 개념 중 시간만큼 유용한 개념은, 수천의 사람들을 살릴 만큼 쓸모있는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인 사이의 만남을 순전한 우연에 치부하는 것을 거부했고, 만남의 날짜와 장소, 시간을 지정함으로써 필연적인 만남, 의도와 결부되는 만남을 가능케 했다.-물론 변덕이라는 의도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도 있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위급상황에서 사람들은 가장 빠른 활로를 어림짐작이 아닌 정확한 측정과 수치를 적용하여 모색할 수 있었고 수술의 성공률 또한 눈부시게 올라갔다. 주식이나 화폐거래가 가능케 된 것도 시간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날마다 정확히 같은 시간에 열리고 닫히는 주식 시장과 물리적 시장은 경제적 성장을 불러일으켰고 공공시설의 관리와 기차, 비행기의 운행 역시 일정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고수머리 군인에게 있어 시간은 진보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타락이었다. 시간이 진보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시간이 양과 음을 가지고 있다는 중립적인 코멘트를 내놓는 대신, 그렇다면 진보는 타락이라는 급진적인 언사를 표할 정도였다.

고향혹성 코코펠리에서 군인은 마술사였다. 사내는 언제나 기다란 중절모 속에 비둘기 새끼를 품고 다녔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모자를 벗는 것이 중요했다.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 예기치 못한 순간에. 관객 중 한 명이라도 그의 모자 속을 응시하는 순간, 그의 머리 위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에 모자를 벗어서는 안되었다. 사내의 모자는 그들의 인식은 조용히 덮어 주는 뚜껑이 되어야 했다. 비둘기는 인식의 프레임을 확장시키는 혁명의 날개짓이 되어야 했다.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 예기치 못한 순간에. 유년시절에는 모든 일이 수월했다. 사내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내의 화려한 손동작이나 카드에 빠져 있던 관객들은 갑작스레 뛰어오르는 비둘기를 보고 펄쩍 뛰어오르곤 했다. 그들이 경이와 공포로 전율하는 순간을 사내는 즐겼다.

하지만 시간이 발명되고 나서부터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그토록 간단했던 일이 더 이상 쉽지 않았다. 사내가 모자를 벗는 타이밍을 계산하는 비평가가 나타난 것이다. 삼분 오십초, 그게 그 비평가가 내뱉은 말이었다. 삼분 오십초의 법칙이라고, 그 여자가 속삭인 이후로부터 관객들은 사내의 손동작이나 카드, 황홀한 불빛 대신 초시계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사건, 오직 새의 날개짓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계장치의 눈금을 들여다보는 그들의 시야에는 벌써 수십 마리의 새들이 황홀한 날개를 떨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순간, 사내는 속으로 되뇌며 기대감에 반짝거리는 사람들의 눈을 훑어보았다.

삼분 오십초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그 시점부터 다시 삼분 오십초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삼분 오십초와 삼분 오십초, 무수히 겹쳐진 삼분 오십초 동안 사내는 관객들의 관심을 비둘기들이 날아다니고 있는 시계의 투명한 유리로부터 돌릴 수 없었다. 그들은 기계장치 속에 미래의 비둘기들을 사육하기 시작했으며, 계속해서 감시하며 비둘기의 해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순간이, 절정의 일순이 찾아드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사내는 안간힘을 쓰며 관객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반복된 손동작, 이미 반복된 카드마술, 이미 반복된 불꽃들은 관객들의 눈 속에서 흘러가는 삼분 오십초, 삼분 오십초, 그리고 삼분 오십초들의 마술을 벗겨낼 수 없었다.

사내는 흐느끼듯 호소했다. 여기를 보세요. 여러분 여기를. 하지만 사내에겐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었다. 사내의 삼분 오십초는 이미 오래전에 흘러가버렸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삼분 오십초의 흐름 속에 잠겨 있었다. 사내는 미치광이처럼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중절모 속에서 놀란 새끼 비둘기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몸부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자의 내부를, 벗어날 수 없는 헐거운 우리 속을 공포에 질린 채 바라보는 두 개의 작고 검은 눈동자. 사내는 어린 비둘기가 그토록 협소한 공간, 산소조차 없는 공간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은?

예기치 못한 순간, 사내의 법칙은 삼분 오십초가 아닌 예기치 못한 순간이었다. 그것을 어긴다면 사내는 공연은 실패할 것이었다. 사내는 더 이상 스스로를 마술사라 지칭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원하면서도 알고 있는 바를 행하지 않는다면,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사내는 예기치 못한 순간을 알고 있었고 예기치 못한 순간이라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았는데, 어째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중절모를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인가? 사내는 우주에 대해, 새로운 여왕에 대해 찬미하는 흔해빠진 노래를 부르면서 관객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비둘기의 투명한 그림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사내는 돌연 노래를 멈추고 그의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장광설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왜 태양은 행성들의 궤도를 붙들어 두어야 하나요? 왜 지구는 달을 보살피고 별에게서 훔쳐온 빛의 그림자를 추종해야 하나요? 왜 지구는 우리들을 지상에 붙들어 놓아야 하나요? 어떤 질량도 우리에게 중력을 강제할 수는 없어요. 실존을 강요할 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죠. 모든 건 부조리해요. 중력도, 무게도, 실존도, 삶도. 당연한 것은 죽음뿐이죠.

미친 듯이 끽끽거리는 비둘기의 비명을 가리기 위해 사내는 더 큰 소리로 떠들어야 했다. 발광하며 푸드덕대는 비둘기의 소란을 감추기 위해 사내는 우스꽝스럽게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비둘기는 사내의 머릿속이 아닌 관객들의 시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관객들의 얼굴 위에 수면처럼 이지러진 황홀한 그림자를, 시계유리 속에 가두어진 비둘기의 아름다운 반사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내가 틀렸고 그들이 맞았던 것일까? 결국엔 예기치 못한 순간이 아닌 삼분 오십초였던 것일까? 관객들은 수십 번의 삼분 오십초를 견뎌내지 못하고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실망하였다면 사내는 절망하였다. 사내는 결국 한 쌍의 눈조차 삼분 오십초의 마수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으로 이양해오지 못했다. 미치광이 걸인만이 객석 한 구석에서 관객들이 흘리고 간 과자 봉지를 뒤지고 있었다.

마침 구름이 걷히고 짙은 백색의 햇빛이 기적처럼 무대쪽으로 내비쳤으나, 그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이한 이는 사내뿐이었다. 마술사는 한참 동안 주저앉아 빛에 쏘인 얼굴을 찡그리며 훌쩍이다가 문득 비둘기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도 경련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내의 예기치 못한 순간이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식은땀에 젖은 중절모를 들어올렸다. 그곳엔 더 이상 비둘기 새끼가 없었다. 오직 죽은 새의 시체만이, 불안과 공포에 질려 죽어버린 새의 유해만이 사내의 이마 아래로 무력하게 떨어졌다. 순식간에 석화된 유해, 놀랍도록 딱딱한 깃털과 몸을 쓰다듬으면서 사내는 새의 시신에 눈물을 쏟았지만 마술처럼 새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된 뒤에야 사내는 더 이상 자신의 예기치 못한 순간과 관객들의 예기치 못한 순간이 조응하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서글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로서는 더 이상의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코코펠리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지금, 사내는 자신에게 죽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사내의 예기치 못한 순간이었다. 사내는 중절모 속에서 내보내달라고 울부짖는 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덮쳐오는 삼분 오십초의 유령들로부터 구해달라고, 다시 온연한 예기치 못한 순간으로, 당신에게만 들리는 순결한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울부짖는 매혹적인 신음.

사내는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 둥치에서 나와 물의 그림자에 끌어안긴 소녀를 향해 달려갔다. 소녀의 거울상을 호수 깊은 곳으로 밀어젖히고 소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엾게도. 사내는 어린 비둘기가 추워요, 끌어안아줘요, 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소녀의 푸른 그림자는 호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삼분 오십초를, 지긋지긋한 삼분 오십초의 언어를 지껄이고 있었다. 군인은 그림자의 작고 단단한 머리를 군화로 찍어눌렀다. 그 애의 속에서 망령처럼 떠도는 삼분 오십초의 언어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빠져나가도록.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흐느꼈다. 군인은 그녀의 얼룩을 내팽개쳐 두고 소녀의 불그스름한 알몸을 껴안았다. 물의 요정처럼 숲의 악마처럼 황홀한 그녀, 그녀야말로 사내가 기다려온 예기치 못한 순간이었다. 사내는 더 이상 상대의 순간을, 관객의 표정을 읽어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거부의 몸부림은 환희에 찬 떨림이었으며 악에 받친 비명은 새의 노래처럼 아름다운 환호성이었다. 교성에 몸부림치며 뛰어오르는 소녀의 부드러운 몸, 물에 젖어 미끈한 붉은 살을 사내는 정신없이 깨물고 맛보았다. 소녀에게서는 어린 새처럼 풋풋한 날짐승의 노린내가 풍겼다. 군인은 어린 새를 어루만지고 그의 오랜 기다림에, 낯선 밤 속에 웅크리고 오랫동안 사내만을 기다려온 새의 정절과 고난에 입을 맞추며 깃털이 모두 벗겨진 날개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새는 가벼운 투정을 부리면서도 사내의 손짓에 호응하며 몸을 떨고 가녀린 울음소리를 뱉어내었다. 사내는 드디어 그를 옥죄어온 삼분 오십초들의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발로, 계속해서 소녀의 푸른 그림자를 물 속에 짓누르며 새의 검은 눈망울을 어루만졌다.

검붉고 축축한 대기에 갑작스레 눈부시게 하얀 햇빛이 밀어닥친 것은, 날카로운 백색의 칼날이 뭉근한 구름을 베어내고 사내와 새를 길게 찢어낸 것은 역시 예기치 못한 순간이었다. 군인은 경멸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새의 깃털을 어루만지는 마술사의 유려한 손이 아닌, 여인을 겁탈하는 군인의 더러운 손을 보았다.

빛에 얼굴을 베인 사내가 화들짝 놀라 소녀를 옭아매던 사지를 풀어낸 사이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달려들었다. 사내의 군홧발 아래에 짓눌려 있던 소녀의 그림자, 아니 소년이 황홀하리만치 하얀 얼굴을 드러내며 둥둥 떠올랐다. 소녀는 마술사의 손처럼 가늘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소년의 머리를 받치며 그의 푸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내는 그의 첫 실패를 멀거니 지켜보던 걸인처럼 소년과 소녀가 죽음의 피부를 맞대며 서로를 탐닉하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사내는 타인의 마술을 멀거니 방관하다 돌연 엄습하는 수치와 환멸에 못이겨 군막사로 도망쳐들어갔다. 검은 숲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내를 지켜보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유려한 손을 가진 마술사도, 하얀 깃털날개를 가진 비둘기를 모자 안에 넣고 예기치 못한 순간을 기다리는 마술사도 아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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