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의 물방울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너는 그의 옆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치아를 딱딱 맞부딪히는 소리. 서늘하고 달콤한 흙의 향기. 밤을 쏘다니는 짐승의 울음.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그림자들. 손을 맞잡고 사랑을 속삭이는 유령들. 너희에게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 잡음 사이로 섞여드는 목소리. 그녀에게 대안이 있었다면 당신은 죽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누구도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이가 없듯. 흙을 파야 할까?

글쎄요. 개를 묻는다고 생각해 봐요. 크게 다를 것도 없잖아요. 기억나지 않나요. 편지를 썼잖아요. 최후의 순간에 삶 대신 죽음을 선택한 내 친구들은 모두 무엇을 했다는 말이에요? 낭만적인 사랑을 살기 위해 혁명가의 임무를 대신 맡은 사내의 죽음은? 횡단보도에서 혁명 동료의 총에 맞아 즉사한 그 사람의 천성은 혁명이나 투쟁, 대의와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가 아는 것은 오직 사랑, 그것도 역겨울 정도로 달콤한 낭만뿐이었는데, 그가 선택한 죽음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는 사랑을 선택한 적이 없다고?

개라고? 그가 사랑을 위해 심장을 바친 혁명가에게 그의 죽음은 사랑이 아니라 대의였어.

다를 게 있나요? 당신은 사람을 사랑하듯 개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난 사람도 개도 사랑하지 않아. 개도 사람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내 말은. 개를 죽여도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굳이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는 거야.

당신은 모든 언어를 망쳐놓고 있어요. 누군가 너를 바라보았으면, 누군가의 시선이 너를 변형시켰으면, 빛이 너를 서서히 찢어주었으면 하고 일생을 바라오지 않았던가. 어째서 넌, 누군가 너를 해치길 원하면서 타인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지? 그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일체의 상징을 그만두기로 했잖아. 괜찮아. 모든 몽상 속에서 타인은 우리를 피해갔으니까. 우리는 누구와도 섞여들지 못한 채 평화롭고 서글픈 늪의 표면 위로 둥둥 떠오르고 말았으니까.

상징 없이 말할 수도 있나요? 걱정 말아요. 우린 이미 오래 전에 실패했고 우리의 패배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러니 이제 그의 얼굴을 씻겨주어도 괜찮을 거예요. 자, 두려워하지 말고.

달빛에 젖어 창백하게 빛나는 손가락이 네 검은 손 위에 겹쳐졌다. 너는 그녀의 환상을 조심스럽게 사내의 머리까지 옮겨갔다. 너는 떨리는 손으로 사내의 목을 감싸쥐고 있던 비닐봉지의 매듭을 풀었다. 매듭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풀렸지만 비닐봉지의 안쪽 면이 사내의 얼굴에 끈적하게 늘러붙은 탓에 잘 벗겨지지 않았다. 힘을 주자 비닐봉지의 일부가 허공에 베인 흉터처럼 찢겨나갔다. 너는 식물의 여린 잎사귀를 찢는 아이처럼 비닐봉지를 벗겨내었다. 순간, 너는 사내의 눈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수천 겹의 얇은 비늘을 겹쳐놓은 것처럼 아득하게 반짝이는 어둠이 너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눈에는 네가 비추어지지 않았다. 유령을 마주보고 있는 거울처럼.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때, 검은색 비닐봉지의 매듭은 사내의 목에 그대로 묶여 있었다. 손톱에 찢겨 드러났던 비닐의 상처들도 모두 온데간데 없이 메워져 있었다. 그저 검게 구겨진 비닐봉지 뿐, 그곳에는 사내의 눈을 암시하는 흔적조차 없었다. 사내의 사타구니 위로 시꺼먼 개미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기에, 아니, 사내의 비명을 들을 수 없었기에 너는 사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죽은 몸이 살아 있는 생물들에게 얼마나 매혹적으로 비추어지는지를 잊고 있었다. 죽은 몸을 갈망하는 것은 죽은 자들뿐만이 아니다. 어둠 속에 은밀히 숨어있던 생명들이 여남은 다리를, 날개를 질질 끌며 사내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너는 그들만큼 사내를 갈망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으므로 그것들의 포식에 소스라치며 사내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사내로부터 떨어지고 나자 너의 눈치를 보고 있던 시꺼먼 벌레들, 나방들, 파리들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사내에게 달겨들었다. 넌 미련 없이 사내를 포기했다. 빨려들어가듯 검은 비닐봉지 속으로 쏟겨드는 물결이 사내의 입술과 귀, 눈과 피부, 삶 내내 그의 시야를 반사해왔던 빛의 조리개 사이로 짓이겨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민한 감관이 엉망으로 뭉그러지고, 망가진 신경에 속속들이 들어차 그의 피부를 찢어놓는 생들의 마찰. 생들은 죽음을 차지하기 위해 저토록 격렬하게, 역겹게, 색정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렇게 죽음을 물어뜯어 소화시킨 생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음을 베어먹은 그들은 이전보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의 발악은 죽음보다는 격렬한 생의 에너지에 흡사해 보였다. 결국 생은 죽어가는 것인가, 우리는 죽어갈수록 더 강렬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돌아가요. 당신에게 물어다 줄 죽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당신을 소외시킨 숱한 죽음이 어디에 있는지 난 속속들이 알고 있어요.

여자의 옷장이 비밀스러운 틈새를 삐걱거리며 네게 말했다. 흙 위에는 사내가 질질 끌려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너는 어둠 속에 깊이 새겨진 그 흔적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앉아 있던 아이가 검은 눈을 들고 네게 인사를 건넸다. 너는 아이처럼 희미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반쯤 열린 채로 방치되어 있던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것이 엘리베이터가 미끄러져 닫히는 소리였는지 네 현관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소리였는지, 옷장이 약간의 틈새만을 남겨둔 채 스스로를 닫는 소리였는지, 사내의 입술이 틀어막히는 소리였는지, 그의 눈꺼풀이 닫히는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너는 잘 자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내일도 여자가 네 곁에 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예감에 안심하며. 그녀는 어디로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너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일상은 비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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