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1

거울 바깥과 거울 내부 깊숙한 곳의 균열. 소녀는 눈을 감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치명적인 균열이 입을 벌려 미소 지을 때까지.

부드럽고 관능적인 비명. 우리는 함께 비명을 질렀다. 지울 수 없는 자국이 하얀 숨으로 번져가고 줄어드는 동안 우리는 비명을.

쥐처럼 많은 남동생들이 어린시절을 만끽하며 우는 동안 소녀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현관을 나선 뒤 엘리베이터를 건너 반대편 복도 끝까지 걸어가서 초인종을 누를 것. 소녀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알고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그녀의 공간, 그녀의 초대, 그녀의 소재.

소녀는 견디지 못하고 동생의 작고 부드러운 머리, 복잡한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나날이 비등해가는 징그러운 머리를 유리 화병으로 내리쳤다. 동생은 식물의 뿌리가 내린 아름다운 무늬와 함께 깨어질 수 있어 기쁘다는 듯 낄낄거렸고 소녀의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동생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흐느끼는 그녀에게 소녀는 아직 동생이 여덟 명은 더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남자아이였다.

소녀는 아직도 동생들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 중 몇은 쌍둥이였으며 몇은 쌍둥이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환희, 복잡한 행복으로 나날이 부풀어오르는 핑크빛의 머리들.

소녀는 아직 동생들이 많다고 말했고, 게다가 그들은 모두 남자이고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고, 엄마는 비명을 질렀고, 남동생은 백치처럼 낄낄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소녀에게 나가라고, 나가서 사라지라고, 제발 사라지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소녀는 엄마가 더 이상 소녀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가 바라는 것은 소녀의 부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나가서 놀다 오렴.

흠뻑 젖어 침잠한 소리를 소녀는 분명히 들었으나 엄마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소녀는 이성의 분열적이며 히스테릭한 복화술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엄마는 남동생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유리조각과 뒤섞여 바스라진 두개골 조각들을 주워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아직도 여덟이나 남은 남자아이들이 달처럼 희고 쥐처럼 더러운 얼굴을 들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여덟이나 남은.

소녀는 엄마가 아홉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을 원하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했다. 모든 나비 이름들을 주워담아 장식해놓으려 하는 편집증적인 나비수집가처럼, 그녀는 모든 차이들을 전시하고 분류하고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녀는 아홉이나 되는 남동생들의 이름이 전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의 이름을 결코 부르지 않을 것이었지만 엄마는 그들을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그럼에도 같은 이름으로 부를 대상이 아홉이나 필요하다는 것을 소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코 엄마를 해치지 않을 것이었다. 소녀의 엄마는 하나뿐이었으므로. 물론 바깥에 나가면 아홉의 남자아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엄마들이 있겠지만, 소녀가 바깥을 살기 전까지 소녀의 엄마는 오로지 소녀가 기억하고 소녀가 마주하고 소녀가 부르는 한 명의 여자뿐이었다.

소녀는 엄마 역시 소녀가 엄마에게 대하는 대로 소녀를 특별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아이들은 아홉이나 되지만 소녀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므로. 엄마는 소녀를 소녀가 엄마를 대하듯 대해야 했다. 소녀는 엄마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고 마땅히 그녀에게 엄마라고 불려야 했다. 그러나 엄마는 마치 소녀가 열 번째 남자아이인 것처럼 굴었다. 그녀가 하나뿐인 그녀라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깊고 매혹적인 틈이 있으며, 탄생의 순간 그녀를 둘러싼 모든 목격자들에게 연약하게 노출된 살을 고스란히 비추어보여야 했음에도, 그에 따라 소녀는 소녀라고 불려야 했고, 소녀로 살아야 했음에도, 엄마는 마치 소녀가 열 번째 남자아이, 이 집안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흔해 빠진 남자아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부당한 일이었다.

소녀는 집안 곳곳을 기어다니고 변을 싸지르고 멍청한 검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면서 흐느끼는 남자아이들을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둘러보곤 했다. 엄마가 그들에게 처음 글을 가르쳐주던 날 소녀는 충격을, 그 치명적인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제발 그들에게 나를 길러낸 언어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음성을 주지 말라고 울부짖었지만 소용 없었다. 엄마는 아홉의 남자아이 전부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어린 소녀에게는 가혹한 치욕이었다. 소녀는 엄마가 아홉의 남자아이들에게 한때 소녀만을 위해 주었던 부드럽고 물컹한 젖을 주는 것도 견뎌냈다. 끔찍할 정도로 작고 날카로운 이가 구더기처럼 득실거리는 짐승 같은 입 속에서 으무러지는 젖. 점점 보랏빛으로 멍들어 진물이 나오는 젖을 보면서 소녀는 한때 그녀의 흰 잉크와도 같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던 영토가 멍자욱으로 더럽혀지는 치욕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글을 가르치는 것은. 한없이 둥글고 동시에 울룩불룩한 붉은 머리에서 소녀의 언어가 삐져나오는 꼴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소녀는 남자아이들이 불가해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언어를 익혀나가는 모습을 공포에 떨며 지켜보아야 했다. 꿈속에서까지 남자아이들은 입을 벌리고 익숙한, 치욕적인, 퇴색된 언어를 쏟아내었다.

그들은 소녀의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고, 소녀의 엄마를 소녀가 아는 것과 같은 형상의 기호로 써내려갔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아홉 개의 엄마, 그리고 엄마.

소녀는 남자아이들은 결코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아무리 자라도 그들의 젖은 부풀지 않을 것이며, 흰빛의 잉크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 내부에는 일말의 빈공간도 없을 거라고, 그들의 틈은 벌어지는 대신 나날이 메워져갈 것이며, 그들의 몸속에는 손톱만 한 기생충 한 마리 자라날 수 없는 폐허일 거라고 엄마를 설득하려 했지만, 엄마는 소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엄마는 끔찍하게도 아홉 마리의 남자아이들을 전부 사랑하는 것 같았다. 마치 소녀를 사랑하듯이, 아니, 소녀를 사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남자아이들 전부를.

소녀는 남자아이들의 편평하고 앙상한 가슴을, 짙은 갈빛의 유두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지껄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아홉 개의 얇고 거친 입술들은 그래서 그러나 그러므로 따라서 따위의 말을 계속해서 지껄였다. 그들은 한 번도 그리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거지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워. 아름다운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그러나 흉폭해.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해서도 안 되고 아름다워서도 안 돼, 하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에 붙은 역접을 소녀는 모조리 등치로 고쳐쓰고 싶었다. 그러나 소녀는 점점 남자아이들의 치명적이고 유치한 언어습관을 익혀가고 있었다. 소녀는 종종 그러나, 하지만, 따라서, 그러므로, 하고 말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면 제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의 입술, 처음부터 그녀와 함께해왔고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개,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간혹, 그러나 아주 간혹이라도 그녀의 의사에 따라 움직여주었던 그녀의 입술을 마음대로 벌할 수도 없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남자아이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규칙 때문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아홉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은 저들끼리 말도 안 되는 폭력의 규칙들을 만들어냈는데, 그들은 소녀 역시 그들의 규칙에 따르기를 원했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홉의 남자아이들은 마치 소녀가 열 번째 남자아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끼리 정한 규칙을 소녀 역시 함께 정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이 정한 그들의 규칙에 소녀 역시 복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함께 만든, 결과적으로 소녀 역시 동의한 규칙이었으므로.

물론 소녀는 한 번도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규칙에 동의한 적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문구용 가위를 입 안쪽에 들이밀고 벌어진 날을 그러모아 입을 찢어내려는 소녀의 단단한 손목을 붙잡고 소녀를 밀쳐내며 거대한 안개처럼 둥실거리면서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이 집에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겠군, 하고 소녀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을 때, 남자아이들은 커다랗게 뜬 어린 짐승 같은 축축한 눈으로 소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들은 삼십 평방 미터 아파트 어디에나 있었지만 소녀는 하나뿐이었으므로, 그녀의 죽음 역시 한 번뿐이었고 그녀의 삶 역시 한번뿐이었으므로, 그녀의 죽음은 함부로 결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집에서 그녀가 낳은 누구도 그녀가 낳은 누구를 죽일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은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소녀와 달리 남자아이들은 아홉이나 있었고, 그들 하나를 죽인다고 해도 여전히 여덟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이 남을 것이었으며, 둘을 죽인다고 해도 셋을 죽인다고 해도 여전히 남자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었으므로.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소녀는 백합처럼 길고 불길한 복도가 직선으로 이어지는 어느 시간 어느 공간으로도 소녀를 데려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는 수억의 엄마와 수억의 소녀들이 있으며, 소녀는 수억 번 죽고 수억 번 죽이고도 여전히 같은 소녀와 같은 엄마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짙은 녹빛의 상록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소녀는 당장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당장 죽어도 괜찮다는 것 당장 죽더라도 여전히 수억의 똑같은 소녀들이 수억의 똑같은 엄마들이 있으리라는 것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원하던 죽음 관능적으로 물결치며 소녀를 애무하고 유혹하고 충동질하는 미끄러운 얼굴을 향해 한 번쯤 뛰어들어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수 억의 똑같은 소녀들이.

남자아이는 죽었을까? 남자아이들은 소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유리화분과 함께 깨어진 머리가 간신히 맞붙어 끔찍하고 황폐한 언어들을 생산해내고 허기와 공포 갈증과 환각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한 번 깨져버린 남자아이의 머리에는 영원한 상흔이 남을지도 몰랐다. 그럼 소녀는 그 아이를 어디에서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홉의 남자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것은 그러한 깨어짐이 아니었을까? 이름을 갖기 위한 찢겨짐. 깨어진 머리와 돌이킬 수 없는 균열들. 우연적인 숙명의 고유한 무늬.

바깥에 나온 소녀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치명적인 발상에 따라 수억의 소녀이기를 포기하고 깨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훤히 뚫려 있는 아파트 복도 난간 너머로 보이는 땅은 그리 깊지 않았다. 소녀는 죽지 못하고 깨어질 것이었다. 깨어지지 못하고 죽을 것이었다. 양자는 서로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소녀는 난간 너머를 흘깃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단순하고 매혹적인 미로, 하나뿐인 길로만 이어지는 운명과도 같은 미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소녀는 알고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을 때 뱀처럼 부드럽고 아득한 목소리가 그녀를 초대하였다. 소녀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현관문과 문 안쪽의 현관 입구 양벽은 모두 깨끗하고 매끄러운 거울로 되어 있었다. 소녀는 거울 속에 비추어진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천 마리의 뱀들이 쉭쉭거리면서 대기중에 흩어진, 서서히 흘러가며 흘러드는 소녀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뱀들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방 안은 짙은 물비린내로, 악취와도 같은 물의 폭력적인 냄새로 가득차 있었으므로.

소녀는 순간 여자가 두툼한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나신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 커튼처럼 늘어진 검고 풍만한 하반신이 권위적으로, 그리고 매혹적으로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차를 마시겠느냐고 물었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야에는 소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을 것임에도, 그녀의 뒤통수에서 촉수처럼 돋아난 뱀들의 시야를 그녀 역시 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소녀가 거절할 리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는 길고 두툼한 나신으로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듯 현관 안쪽으로 들어갔고 소녀 역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정면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녀는 소녀에게 경고하지 않았지만, 소녀는 그녀의 얼굴을 그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미소를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뱀들로 뒤덮이지 않은 그녀의 연약하고 여린 살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것은 여자의 음부를 응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안 벽과 천장, 심지어는 바닥까지도 매끄러운 거울로 되어 있었다. 무척이나 축축하고 부드러운. 소녀는 곧 집안이 물과 안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어붙은 물과 안개들, 거울은 모두 얼어가거나 녹아가는 수증기였다.

소녀는 얕고 축축한, 그러나 견딜 수 없이 깊은 거울에 맨발을 조심스럽게 맞부딪히며 걸어갔다. 물 위를 걷듯, 물 위로 추락하듯. 뱀들은 소녀를 향해 길고 붉은 혀를 내밀며 가쁜 호흡을 들이키고 있었다.

소녀는 갑작스레 자신이 오래 머물 수는 없으리라고 밝혔다.

말을 꺼내고 난 뒤 소녀는 후회했다. 그녀는 소녀가 오래 머물기를 기대한 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를 찾아오는 소녀는 어쩌면 아홉이나 되었을 것이고 그녀는 소녀들을 일일이 구분하지도 못할 것이며 그럴 필요조차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소녀가 돌아가고 난 뒤에도 소녀와 정확하게 같은 얼굴과 같은 키와 같은 목소리, 같은 걸음걸이를 지닌 소녀가 또다시 그녀의 초인종을 누를 것이고, 그녀는 소녀를 초대할 것이고, 그 소녀는 또다시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고, 그때도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소녀가 사라지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었다. 어쩌면 벌써 아홉의 소녀가 모두 여자를 다녀갔을지도 몰랐다. 소녀들은 모두 여자를 경험하고 여자를 지나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벌써 몇 번, 아니 수십 번이나.

그러나 소녀는 아직 여자를, 여자와의 대화를, 여자와의 마주침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에게 여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소녀는 소문처럼 쉭쉭거리며 일렁이는 수천 개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홀린 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물론 모든 것을 편평하게 일그러뜨리고 모든 것을 더 매혹적으로 만들며 동시에 더 견딜만 하게 왜곡시키는 거울 속에서.

바깥은 춥지? 하고 여자가 물었다.

소녀는 또다시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늦게서야 네, 하고 대답했다.

사실 소녀는 바깥이 춥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소녀가 바깥에서 경험한 것은 그녀를 유혹하듯 무참한 검은 녹빛의 나뭇가지와 깨어지기에는 너무 부드럽고 얕은 땅이 전부였음에도. 그러나 소녀는 바깥이 춥다는 것을, 그것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춥다는 것을 불현듯 알아차렸다. 소녀의 발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갑작스레 치명적인 간지러움이 그녀를 덮쳤다.

소녀는 당황하여 울듯 흐느꼈다. 소녀는 그녀의 내부가 지나치게 뜨겁다는 것을, 바깥이 추운 만큼이나 위반적으로 따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뱀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어쩌면 모두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차는 바깥에서 마주쳤던 나무처럼 짙은 녹빛이었다. 녹빛의 줄기와 녹빛의 뿌리 녹빛의 둥지와 녹빛의 나뭇가지들 이파리 역시.

그녀는 소녀를 본 적이 있다고,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소녀는 그녀가 만난 소녀가 소녀와 끔찍하게 닮은, 그러나 소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만난 소녀들은 소녀이기도 했으므로.

그녀는 소녀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소녀의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녀의 엄마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예감도 느낄 수 없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소녀의 엄마의 실제적인 형상이, 광학적이며 물리적인 현상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불현듯 잔혹하고 격정적인 예감이 그녀를 덮쳐왔다고.

그녀는 소녀가 그녀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하기까지 했는데, 소녀는 그러한 농담이 불쾌하고 천박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지나치게 긴 웃음. 물의 가죽 밑에 들어찬 얇고 아름다운 균열들.

여자는 소녀와 함께 웃었는데 그녀의 웃음은 놀랄 정도로 진실한 것이었다. 소녀는 짧고 단발적이며 매섭고 히스테리컬한 그녀의 웃음에 매혹당했다. 그녀가 소녀의 가식적인 웃음에 웃음을 터뜨린 것인지, 그녀 자신의 저열한 농담에 사로잡혀 웃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웃음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소녀는 그녀에게 딸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느릿하게 밀려가며 일그러지는 수면에서 여자의 뱀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소녀는 의자 밑으로 허리를 구부려 손을 아래로 뻗어 그녀의 보이지 않는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애틋한 파문과 함께 그녀의 흐릿한 형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놀란 소녀가 손가락을 떼어내자 일렁거리던 여자의 실루엣이 서서히 끈적하게 모여들어 다시 뱀들의 아름다운 미소를 드러냈다. 소녀는 갑작스레 용서받지 못할 농담을 발작하듯 토해냈다.

뱀 고기를 먹어본 적 있어요? 하고 물었을 때 뱀들은 짙은 녹빛의 검은 눈으로 소녀를 응시하였고, 소녀는 고요한 물 너머에서 그녀를 거꾸로 올려다보는 뱀들의 눈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었다.

너는 어떤데? 하고 그녀는 물었고 소녀는 잘 모르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마 먹었을 거라고. 먹어본 고기가 먹어보지 않은 고기보다 더 많으므로.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에 그녀는 수없이 많은 살을 삼켰으므로.

하지만 그 뱀들은 모두 죽어 있었어요. 하고 소녀는 변명하듯 소리쳤다. 난 죽지 않은 고기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뱀을 먹었더라도 그 뱀은 이미 죽은 뱀이었을 거예요. 난 한 번도 내 손으로 먹잇감을 죽여본 적이 없고 언제나 먹잇감들이 내 입속으로 폭력적으로 쏟아들어왔는데, 마치 내 텅 빈 내부를 잠식하듯이 날 점령하고 차지하듯이 날 강탈하고 빼앗듯이 그렇게 밀려들어왔는데, 난 입을 막을 수도 없었고 구토를 할 수도 없었어요. 그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난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먹어왔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건 먹은 게 아니라 먹힌 거였어요. 난 한 번도 삶을 원한 적이 없고 무언가를 먹고 싶었던 적이 없고 항상 죽음이 죽은 고기들이 부패해가는 살들 역겨운 고기들이 내 안으로 침범해왔는데 난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구역질을 하는 동안에도 고기들은 스며들어왔고 너무도 폭력적이고 적나라한 방식으로 내 안으로 물밀 듯이 들어왔고 난 내가 삼킨 고기가 되었지만 내가 삼킨 고기는 내가 될 수 없었고 수억의 죽은 고기들 꿈틀거리는 검은 살들은 흉측한 자취를 남기고 사라진 뒤 또다시 밀려오고 난 다시 흰빛의 살로 흰빛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한없이 깨끗하고 달콤하고 비릿하고 매혹적인 단일한 색채로.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언젠가 네 젖도 부풀 것이고 네게는 언제나 선한 액체가 남아 있을 거라고. 그걸 타자에게 혹은 네게 줄 수도 있다고. 그건 같은 일이라고. 너는, 네 입술은 언제나 네 타자니까. 하지만 전부 주는 건 불가능하죠. 엄마는 내게 물렸던 젖을 아홉이나 되는 내 남동생들에게 물려 주었고 난 끔찍하게 역겨운 살을, 나와는 무관한,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관계를 탈취하는 죽은 살을 삼켜야 했어요. 난 누구에게도, 내게도 젖을 물리고 싶지 않아요.

소녀는 여자의 가슴을, 아니 여자의 깊고 끔찍한 검은 공백을 보았다.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잔혹한 찢김의 표식. 피에 젖은 갈비뼈가 드러났고 검게 짓무르고 부패한 살 위에는 젖처럼 순결한 흰빛의 구더기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선천적인 건가요? 아니면. 하고 물었을 때 여자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소녀는 과도하게 많은 과도하게 허기지고 과도하게 갈증난 그녀의 자식들이 그녀의 부드럽고 얕은 젖을 참지 못하고 물어 뜯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젖을 준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의미였던가? 희고 비릿한 액체는 한 번도 잉여인 적이 없었고 그것은 여자의 살이고 피고 생이고 고통이고 관능이고 외로움이었으며, 준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토록 참혹하고 괴로운 것이었던가? 소녀는 그녀의 과도한 상처에 매혹당하였으나 그녀의 성스러운 자비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살을 떼어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녀가 고통받았기에, 그 고통이 관능적으로 아름다웠기에, 다른 어떠한 의미도 없이 누군가를 살리지도 구하지도 못한 채 불가해하게 아름다웠기에 찢겨나간 검은 공간에 빠져든 것이었다.

소녀는 그녀의 입술에 신비롭고 매혹적인 흰빛을 흘려주던 엄마를 사랑하였으나, 그녀를 길러내고 그녀를 살찌우고 그녀를 희게 만든 흰빛을 부인할 수 없이 사랑하였으나, 언젠가 제 가슴을 직접 도려내고 말겠다고 여자의 앞에서 맹세하였다. 코코넛 열매처럼 둥근 구멍이 다닥다닥 차오른 텅 빈 가슴을 찢어내고 희멀건 액체가 검은 피에 섞여 바닥에 흩어지는 것을 누구도 살리지 않고 누구도 죽이지 않고 그저 쏟겨지는 것을 바라볼 거라고. 검은 쓰레기봉투에 부패하기 시작한 가슴을 묶어 버릴 거라고. 그래도 결여로 변해버린 불구의 공간에 흰빛은 차오를 것이고, 불구는 끔찍하게 아름다운 빛으로 젖을 것이고, 그녀의 불구는 처음부터 불구가 아닌 역동적인 생성이 되어 웃겠지만 그것은 끝내 깊은 상처처럼 아플 것이고 끝내 깊고 고통스러운 자상일 것이고, 그녀의 검고 둥근 구멍들은 바깥으로 드러난 구멍들은 다른 아픈 구멍들만을 낳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녀를 이해할 것이라고. 소녀는 맹세했다.

난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었어요. 하고 소녀는 흐느꼈다. 지워버리는 것, 생성되지 않은 것들 발견되지 못할 것들, 이미 썩어버린 것들,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을 거듭 지워버리는 것만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고, 동생들은 내가 틀렸다고 말했지만 난 그런 식으로 더듬더듬 끔찍하게 느리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지우고도 남은 말은 너무 많았고,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죠. 그럼에도 결국 난 내가 미래에 무엇이었는지, 미래에 무슨 말을 했는지, 미래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하고 소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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