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2

소녀는 남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홉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을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여자가 그녀의 뱀들을 저주한다고 말하기를 은밀히 기대하며. 그러나 그녀는 그런 식으로 동조하지 않았다.

뱀들은 입을 벌렸고 여자는 침묵하였다.

소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소녀가 홀로 식어버린 찻물을 홀짝거리는 소리만이 축축한 방 안에 울려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시간, 두 시간, 아니면 벌써 하루가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겨우 십 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소녀는 놀라지 않을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끔찍하게 손상되어버린 시간, 녹슬어 부패한 시간이 제멋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십 분이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소녀는 홀로 흠칫 놀라며 생각하였다. 단 십 분이라도 충분히 긴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나치게.

그토록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여자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소녀를 잠식하였다. 젖을 떼어낸 여자, 그것도 그토록 난폭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비어버린 여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소녀는 어느새 텅 비어 있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짙은 녹빛의 얼룩만이 바닥 위에서 옅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죽은 여자의 얼굴은 봐도 괜찮을까? 죽은 나무들의 무성한 이파리를 허락받지 않고 떼어내고 찢어발기고 뭉그러뜨릴 수 있는 것처럼.

죽었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소녀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죽은 여자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소녀는 결론을 내렸다. 죽은 신의 얼굴마저도 사방에, 가장 은밀하고 치욕스럽고 더럽고 불길한 곳까지도 노출되니까. 죄수들은 죽은 신의 볼에 성기를 문지르며 사정하고, 치매에 걸린 노인들은 신의 입술에 제 변을 신중하게 분칠하고, 아이들은 신의 머리칼에 침을 뱉으며 놀기 마련이니까. 하물며 죽은 여자의 얼굴 정도는.

소녀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결심을 하는 순간 뱀들은 입을 다물었고, 여자는 소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떠올린 듯 말을 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난 거울에 비친 그녀를 아니, 그녀가 비추어지지 않는 여백을 관찰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난 나를 보는 데에 지쳤고, 더 이상 거울에서 표류하는 뱀들을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는 거울로 가득 차 있었지. 꼭 세상이 전부 거울로 이루어진 것 같았어.

장마 이후에는 치명적인 추위가 닥쳤고 얘야, 얼어붙은 물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았지.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엘리베이터 안은 나와 그녀로 가득 차 있었고 그리 높지도 않은 위로 올라가는 시간은 치명적으로 길었고 살아남기 위해서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서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나를 이해해야만 했으니까.

그녀가 거칠게 숨을 들이키는 모습, 가녀린 가슴이 끔찍하게 부풀어올랐다 꺼져들고 작은 얼굴이 당장이라도 졸도할 듯 눈처럼 창백하게 희어지고 눈꼬리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난 전부 지켜보았지. 그녀를, 그리고 나를 보지 않겠다는 결심도 잊고 난 그녀가 깨어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버티는 아슬아슬한 모습을 바라보았어.

그녀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을 때, 그녀는 한 마디의 단어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어. 끔찍할 정도로 나지막한 속삭임, 어떠한 의미도 형태도 문법도 갖추지 못한 신음만을 간신히 흘렸지.

그래도 난 알아들을 수 있었어.

적어도 그녀가 말을, 그녀를 파멸하며 지탱하고 그녀를 찢어발기며 접붙이는 독과 같은 말을 창조하는 감미롭고 치명적인 광경을 목격했으니까. 거울 속의 그녀들은 한없이 와해되며 발생하고 있었어.

네 엄마는 정말 검더구나, 하고 여자는 갑작스럽게 소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소녀는 아직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수면 위에 흐트러진 깊다란 파열만이 익숙해지지 않는 상처만이 소녀의 앞에 아른거렸다.

소녀는 한 번도 엄마가 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단지 엘리베이터가 어두웠을 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그토록 어두웠던가? 소녀는 굳이 말하자면 엄마는 검다기보다는 흰 편에 속한다고 말했다. 소녀보다도, 남자아이들보다도 훨씬 희다고. 그러나 여자는 그런 말을, 소녀의 사실을 원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여자의 머리를 보지 않고도 수면 위에 일렁거리는 흐름을 알아차렸다.

우린 엄마를 닮지 않았어요. 엄마는 겨울 하늘처럼 희고 창백하지만 우린 밤처럼 검으니까. 우린 엄마를 닮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닮았죠. 누구나 우리가 같은 최초를 공유하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었어요. 우리 둘만으로 끝일 수도 있었다고요.

하지만 엄마는 만족하지 못하고 또 낳았죠. 또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그리고 또. 낳을 때마다 엄마는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마르고 허약해졌는데 배만 개구리처럼 불룩 기어나와서 괴물처럼 보였어요.

투명한 뱃가죽 사이로 푸르고 붉은 핏줄이 고스란히 비치던 것을 기억해요.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서 올챙이처럼 헤엄치고 있는 이전의 무언가도 보일 것 같았죠.

결국 아홉을 낳았고 아홉은 모두 남자아이들이었고 그들은 끔찍할 정도로 닮았고 쌍둥이뿐 아니라 쌍둥이가 아닌 남자아이도 쌍둥이들과 닮았고 그들은 마치 아홉 쌍둥이인 것처럼 닮았고 몇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키도 똑같고 머리 크기도 비슷하고 말투도 똑같이 어눌하고 팔다리의 생김뿐 아니라 길이도 비슷해서 심지어는 귀의 모양이나 손금까지도 비슷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그 애들을 구분해서 부를 수 없었어요.

첫 남자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엄마도 직감했는지 아이 이름을 짓는 일을 미뤘고, 결국 이름을 지어 구별하여 부르는 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죠. 결국 그들은 아홉이었지만 하나같은 아홉이었고 꼭 아홉일 필요도 없는 아홉, 단 하나여도 다를 바 없는 아홉이었죠. 엄마, 알잖아. 평생 아홉이나 되는 남자애들과 함께 살 수는 없어, 하고 내가 엄마를 말렸을 때도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물론 몇 년 동안 엄마는 더 이상 아이들을 개구리처럼 똑같이 생긴 남자아이들을 낳지 않았지만 모를 일이죠. 그 애들이 열이 되고 열하나가 되더라도 엄마는 한 명도 포기하지 못할 거예요.

정말이지 아홉은 너무 많아요. 평생 아홉이나 되는 남자애들과 함께 살 수는 없어. 하고 난 잠을 자면서도 중얼거렸죠. 남자애들이 듣든 말든 상관없었어요. 내가 견딜 수 있는 건 하나 혹은 둘 정도의 남자애들, 둘 정도는 그리 닮든 닮지 않든 큰 상관이 없죠. 그래요. 셋까지도. 하지만 아홉은 너무 많아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난 처음처럼 놀라죠. 아홉이나 되는 남자애들이 전부 살아있다는 사실이 미칠 정도로 두려워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남자애들 말이야. 전부 살아있어. 아홉 전부, 하고 말하면 엄마 역시 겁에 질려 새벽처럼 치명적인 흰빛으로 변해가는 게 느껴지는데도, 엄마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당연한 일이라고 대답하죠. 그러나 당연한 일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에요. 우린 아홉이나 되는 똑같은 남자애들을 간신히 견디고 있을 뿐이에요. 그 백치같은 애들,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애들, 쉽게 달랠 수도 없는 애들.

난 아홉이나 필요하진 않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아홉을 다 사랑하려 했고, 아홉을 전부 낳으려고 했고, 아홉을 전부 기르려고 하고 있죠.

문득 수백이나 되는 뱀을 낳은 여자 앞에서 이러한 말을 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누설해버린 진실을 보상할만한 거짓을 발명해낼 수 없었다.

여자가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않았기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누워 있었다. 수백 마리의 뱀들이 쉭쉭거리며 소녀에게 미소지었다. 소녀는 뱀의 매끄럽고 차가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여자의 자리에서 소녀는 집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여자의 집은 사면이 거울로 되어 있었으며 거울 위는 검게 찰랑이는 물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앞, 소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등지고 있던 자리는 검은 커튼으로 뒤덮여 있었다. 조악하게 떼어낸 밤의 거죽처럼 엷은, 그리고 구겨진.

소녀는 커튼을 열고 발코니로 나섰다. 같은 층의 베란다, 커튼으로 덮이지 않은 모든 집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소녀는 그녀와 맞붙어 있는 베란다에 꿇어앉아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 두 명의 소녀를 보았다. 세 소녀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소녀처럼 검고 부드러운 입술을 가진 소녀들의 시선을 따라 소녀는 더러운 캔 안에 들어찬 흙과 새까맣게 돋아난 작은 나무, 그 위를 뒤덮은 투명한 거미줄을 보았다. 모든 것은 얼어붙어 있었다. 희고 날카로운 서리가 그들의 시선을 따갑게 찔러대었다.

소녀가 말을 꺼내려 하자 소녀들은 꼭 닮은 검지 손가락을 각자의 검은 입술에 붙이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깰지도 몰라, 그래 깰지도 몰라, 하고 그 애들이 말했다.

소녀는 깨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악의적인 충동이 물밀듯 올라와 소녀는 다시 한 번, 깨지 않을 거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두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녀의 치명적인 비명을 이미 사라져버린 비명의 잔향을 가만히 굳은 채로 듣고 있었다. 소녀들의 아름다운 눈이 투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소녀들은 울지 않았다. 그들은 소녀의 갑작스러운 폭력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소녀는 그들의 이름을 물었으나 소녀들은 고개를 저었다.

소녀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인지 무례한 소녀에게는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소녀들이 싫지 않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하고 그들이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을 때 소녀는 그들에 맞추어 작고 여린 소리로 너희들이 여기 있을 때까지, 하고 대답했다.

소녀들은 기분이 나아진 듯 수줍게 키득거리며 소녀에게, 그럼 오늘 내내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어, 하고 말했다.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소녀들과 함께 키득거렸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합류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비밀을 체득할 수 있다는 듯.

소녀들은 벌써 며칠 동안 이 베란다에서 밤을 보냈다고 말했다.

소녀는 믿을 수 없다고, 그녀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오늘 이전에 소녀는 한 번도 베란다로 나온 적이 없었으므로 그러한 대답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소녀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집안에는 소녀들과 같은 소녀들이 너무 많았고 그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 그녀들은 언제나 둘씩 아니면 셋씩 베란다로 나와 숨어있을 수밖에 없다고,

다른 소녀들이 그녀들과 교대하러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여기서 견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녀는 어쩌면 남자애들이 아홉이 아니라 열하나, 열둘,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불안에 사로잡혀, 그렇게 비밀을 숨긴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혹시 다른 베란다에서 남자애들을 본 적은 없느냐고 묻는 것도 잊고 소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녀들은 소녀가 하지 못한 질문을 알아차린 듯 처음부터 그녀들의 삶이 시작되던 첫 순간부터 이곳에 나와 숨어 지냈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교대로 바깥에 나와 사는 일에도 규칙이 있었어, 이렇게 온종일 기약도 없이 기다릴 필요가 없었지. 하고 왼쪽에서 화분을 어루만지고 있던 소녀가 말했다.

우린 열한 명이나 있으니까! 하고 오른쪽에서 다른 소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소녀가 말했다.

하루를 2/11로 나누어도 좋고 일주일을 그렇게 나누어도 괜찮지. 견디기 어려운 시간은 아니야.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그 정도의 시간을 바깥에서 참아내곤 하니까. 그렇게 가혹한 건 아니지. 하고 소녀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녀들은 마치 오래도록 같은 문장을 연습해온 것처럼, 연극무대의 대사를 외우는 것처럼 무감하고 정확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러한 규칙이 처음부터 지켜질 수 없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우린 너무 닮았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니까. 서로에게 순번을 정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불가능했지. 우린 서로가 모두였고 모두가 서로였으며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하고 다른 소녀가 말을 받았다. 한 번 베란다로 나오면 언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간혹 변덕이 생기거나 제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예감에 사로잡힌 아이가 베란다 문을 은밀하게 세 번 두드리지 않으면 우린 절대 문을 열지 않지. 베란다 문은 바깥에서만 열리니까.

소녀는 깜짝 놀라 아니라고, 소녀는 분명 안에서 베란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베란다 문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으나 소녀들은 조용히 하라는 스스로의 규칙조차 잊은 듯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문이 아니라 창문이지! 여기에는 문밖에 없어. 하고 소녀들이 대답했다. 아파트의 각 집들이 모두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어린애들뿐이야!

수치에 새빨개진, 그러나 밤공기에 젖어 차라리 더 검어진 소녀를 마주보며 소녀들은 아파트의 집들이 겉으로 볼 때에는 무척 유사하지만 무척 다른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소녀들은 베란다를 통해 여러 집들에 건너가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옆집, 그러니까 소녀가 자리하고 있는 집에 여자가 세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그들의 은신처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집에는 함부로 건너갈 수 없어. 범죄를 저지르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이라도 받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

경찰들이 올 테고, 옆의 소녀가 말을 받았다.

우리를 샅샅이 뒤질 테고, 다시 옆의 소녀가.

우린 발각되겠지. 우리가 처음부터 열한 명이었다는 것, 모두가 철저히 속아왔다는 것,

그것도, 하고 옆의 소녀가 말을 이었다. 십일 년 동안이나 속아왔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우린 지옥에 갈 테고 영영 위로 올라갈 수 없을 거야.

다시는 새들을 볼 수 없을 거고 새들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을 테지. 지옥은 그런 곳이니까. 부풀어오른 풍선 속에는 대기보다 무거운 것, 우주보다 무거운 것, 별보다 하늘보다 무거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풍선이 되어서 한없이 가라앉는 거지.

그러나 밑이 없는 건 아니야. 하고 소녀가 대꾸했다. 지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 그게 천국과 다른 점이니까. 지옥은 언젠가 파멸할 거고 언젠가 몰락할 거고 언젠가 완전히 무너져내릴 텐데 그럼 지옥의 주민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사라질 수 없을 거고 남을 수도 없을 거고 파묻힌 채 경련할 수도 없을 거야. 모두가 그들을 잊을 테지만 그들만은 그들 자신을 잊을 수 없겠지.

그렇게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지옥에 가게 될 거야, 하고 소녀가 대꾸했다.

우린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아. 이모는 우리 집 암캐가 발정이 나서 어디서나 접붙고 다니는 창녀였기 때문에 지옥에 갈 거라고 했어. 그 애는 아직 세 살밖에 안 됐는데 매독에 걸려서 죽어가는 그 애에게 아무도 기도를 해 주지 않았어.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몰랐지만 기도할 줄 아는 아이도 기도를 해 주지 않았어. 지옥에 갈 자를 변호하면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그 애가 지옥에 간다면 우리 모두가 지옥에 가겠지 우리는 신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았으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 기도를 하지 않았어. 이모는 죽어버린 암캐를 저주했고 쓰레기 봉투에도 넣지 않고 창문 아래로 떨어뜨렸지.

이모가 베란다 문을 열고 나올까봐 조마조마했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베란다 문은 바깥에서만 열 수 있으니까.

소녀는 너희들이 베란다 문을 개조한 것이냐고 물었다.

소녀들은 고개를 저었다. 베란다 문은 처음부터 바깥에서만 열리는 거야. 처음부터 그랬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가 처음으로 베란다를 사용하기 전부터.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첫 번째 아이가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부터.

소녀는 불가해하고 비효율적인 그들의 시스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타인의 인생에 간섭할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것은 아니었기에 구태여 참견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녀들에게 그렇다면 어째서 문을 세 번 두드리고 베란다로 나온 것이냐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유배생활을 왜 자청한 것이냐고 물었다.

소녀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깥이 안보다 나으니까. 항상은 아니지만 바깥이 안보다 견디기 쉬운 날이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바깥으로 나오고 싶었기 때문에 나온 건 아니야.

그래, 하고 옆의 소녀가 말을 받았다. 우린 문을 세 번 두드려야 하기 때문에 두드린 것뿐이지. 그건 우리의 규칙이니까.

하지만, 소녀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희는 그 규칙이 쓸모없다고 했어. 지켜질 수 없는 규칙이라고 했어.

소녀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규칙은 쓸모없고 우리는 문을 세 번 두드려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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