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4

소녀는 다리를 넓게 벌려 소녀들의 베란다로 곧장 뛰어내렸다. 소녀들은 소녀가 그녀들의 열쇠라도 되는 듯 반겼으나 소녀는 아직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녀의 예상과는 달리 열쇠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소녀들이 절망하여 주머니만 하염없이 뒤진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그리 넓지 않은 베란다는 난장판이었다. 베란다 바닥은 낙엽들로 뒤덮여 있었으며 심지어 몇몇 이파리들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축축했다.

소녀는 늪을 헤매듯 끈적하거나 말라붙은 이질적인 나뭇잎들 속에 손을 집어넣고 휘적거렸으나 끔찍하게 다양한 감각 중 무엇 하나를 구분해낼 자신은 없었다. 벌써 수천 개의 열쇠들이 그녀의 손을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도 소녀는 손을 빼낼 수 없었다.

간신히 끄집어낸 손에는 흠뻑 젖은 나뭇잎과 바스라진 나뭇잎 가루뿐이었다. 열쇠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열쇠는 없었다는 느낌이 소녀 안에서 번져오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문을 잠그고 바깥에서 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소녀들은 밤과 절망에 지쳐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여전히 소녀의 사라진 두 손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녀들의 등 뒤로 나아가 문고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비명조차 없이, 다만 지친 채 삐걱거리는 희미한 소리만을 흘리며 열렸다.

소녀들은 소녀가 열쇠를 찾은 것이라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소녀는 소녀들이 문고리를 충분히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 안쪽에서는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소녀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듯 소녀들을 흘겨보았다.

너밖에 없어? 하고 베란다에 있던 소녀가 물었다.

안쪽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셋이었는데 너희가 너무 늦는 바람에 다 돌아가서 잠들었어.

베란다의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너뿐이야? 하고 다시 속삭였다.

안쪽의 소녀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너희는 끔찍하게 게을러.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잘 시간이 지났는데도, 곧 이모가 돌아올지도 모르는데도 우린 너희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심지어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나뿐이냐고? 아니, 나도 곧 돌아갈 거야.

너희가 바깥에서 지내는 동안 우린 모두 바깥을 견뎌내는 너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너희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너희에 대해서만 고민했어. 언제쯤 너희를 데리러 가는 게 가장 좋을지 몇 번이고 의논했고 그래서 저녁 여덟 시, 가로등 불이 들어오는 시간에 너희와 교체하기로 결정했지.

그건 순전히 너희들을 위한 결정이었어. 가로등 불이 들어오면 잠들기 어려우니까 너희들을 배려해서 너희를 대신할 우리가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던 거야. 하지만 정확히 저녁 여덟 시에 문을 세 번 두드렸음에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았지.

우리 중 하나는 소리 지르는 것이, 우리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규칙조차 잊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어. 그 애는 당장 절규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고 했지. 그런데도 우린 그 애를 말리고 너희를 기다렸어. 너희에게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너희는 우리가 오기 전까지는 잠들어서는 안 되니까, 설령 잠들었다고 해도 너희 중 하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충분히 깨어날 수 있을 정도로 얕은 잠만 잘 수 있으니까, 둘 다 깊이 잠들어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변명은 하지 마. 너희가 그렇게 파렴치하고 방만하게 우리 규칙을 훼손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

우린 너희가 너무 아프거나 너무 지쳐서 문까지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라고, 너희의 늦음을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했어. 삼십 분을 기다리고 나서 두 번째로 문을 세 번 두드렸지. 첫 번째에 곧장 달려나오지 못한 너희가 곧장 문을 열어야 할지, 다음 기회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너희도 알겠지만 우리는 절대 문을 두 번 두드리지 않아. 문을 두드릴 때는 언제나 세 번씩 문을 두드리고 그걸로 끝이지. 그건 첫 번째에 세 번의 기회가 모두 소요되었다는 의미야. 너희도 알겠지만.

하지만 너희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어. 오직 너희만을 위해, 하루 내내 추위 속에서 떨고 있었을 너희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해 두 번째 예외가 주어졌음에도 너희는 곧장 문을 열지 않았어.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난 삼십 분을 더 기다리고 구급차를 부를 생각이었어. 너희는 끔찍한 치명상을 입었거나 죽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너희들은 비참할 정도로 멀쩡해 보여. 다리도 팔도 모두 그대로라고! 이해할 수 없어.

너희들을 이해하기 위해 쓸데없는 노력을 더 하고 싶지도 않아. 다른 애들이 너희를 포기하고 침대로 돌아갔을 때도 난 계속 너희를 믿고 기다렸어. 마지막 삼십 분에도 너희가 나오지 않으면 너희에게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 증명되는 셈이니까 너희가 끝내 부재하기만을 바랐지.

하지만 너희는 모든 기대를 비웃고 마지막 순간에, 너희가 나오지 말았어야 했던 그 순간에 문을 열었어. 자,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너희는 살아가는 게 마치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게 유희일 뿐이었던 것처럼. 베란다 바깥과 안쪽에서 우리가 너희 짓궂은 장난을, 말도 안 되는 나태를 참아내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마치 우리가 안을 견디고 너희가 바깥을 즐기는 것처럼.

베란다는 너희 전유물이 아니야. 우린 너희에게 바깥의 권리를 양도한 게 아니라고. 너희는 우리가 세 번 문을 두드리는 순간 곧장 문을 열었어야 했어. 우릴 조롱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랬어야 한다고.

베란다의 소녀들은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기 위해 문의 틈을 벌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안쪽의 소녀는 발 하나만을 문 바깥쪽으로 밀어넣고 약간의 틈만을 남겨두었다. 베란다의 소녀들은 소녀의 발을 다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몰차게 문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녀들은 힘을 빼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쓰는 것 같았다.

소녀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할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서서 안쪽의 소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소녀들이 평소와 달리 문을 열어야 할 때를 놓치고 당황한 것도, 문을 열어서는 안 되었던 때에 문을 열었던 것도 모두 소녀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녀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소녀가 베란다를 건너와 도움을 주기를 원했던 것은 소녀들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소녀로 인해 발생한 불행 역시 소녀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소녀들의 구원이 소녀의 것이 아니었듯, 소녀들의 불행 역시 소녀의 절망은 아니었다. 소녀는 자신이 안쪽의 소녀에게 세 번째 소녀로 취급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기에 자신이 옆집에서 건너왔다는 변명을 하려 했으나,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안쪽의 소녀는 추위와 분노 때문에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듯 속삭였다. 우린 놀고 있는 게 아니야. 너흰 삶을 농담으로 만들려 했지만 우리에게 생존은 한 번도 농담인 적이 없었어. 우리가 열한 명이었던 게 우리의 죄는 아니었지만 그걸 감당하기로 합의하지 않았어? 각자의 열한 명을 책임지기로 약속했잖아.

처음 문을 세 번 두드릴 때만 해도, 하고 안쪽 소녀는 말을 이었다. 우린 즐거웠어. 행복하진 않았지만 즐거웠지. 너희가 곧장 나오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린 추위와 외로움을 용감하게 견뎌낸 너희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기로 약속했어. 하지만 너희는 나오지 않았지.

오 분이 지났을 때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십오 분이 지났을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모두 직감했지. 설령 너희가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너희가 베란다 끝에서 문까지 기어서 온다고 해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천천히 문을 연다고 해도 십오 분은 지나친 시간이야. 하지만 너희는 이십오 분이 되어도 문을 열지 않았어.

우린 더 이상 즐겁지 않았어. 조금도 즐겁지 않았어. 조금 전에 우리가 즐거워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린 절망했어. 너희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지. 너희가 안쪽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 안쪽에서 잠들면 될 일이었으니까, 이런 시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너희도 알고 있으리라 믿었어. 그런 사보타주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어.

우린 너희에게 더 줄 수 있는 게 없어. 문을 열기만 하면 너희는 우리가 될 것이고 우리는 너희가 될 텐데 대체 누가 누구에게 불만을 항의할 수 있다는 거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려서 너희를 이해해보려 했지만 그래도 이십칠 분은 지나쳤어.

결국 너희들이 우리에게 고의로든 실수로든 저지른 최초의 잘못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으로 너희를 위해서 예외를 범했지. 두 번째로 세 번 문을 두드린 것 역시 나였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눈물이 미친듯이 흘러내렸지만 너희를 위해서 울음을 참았어. 너희가 곧 뛰어나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너희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어. 너희가 나오지 못했던 건 선한 죄책감 때문도 절망 때문도 아니었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어.

정말 너희가 나오지 않았을 때, 다른 애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로 돌아갔지만 난 여기에 남아서 너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어. 마지막 삼십 분에도 너희가 문을 열지 않으면 너희의 피치 못할 사정, 그게 무엇이든 도저히 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곤경이 입증되는 셈이니까.

일 분 일 분이 지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수천 명의 폭도들이 너희를 강간하고 찢어내고 살해하고 농락하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광경을 몇 번이나 견뎌냈을 것 같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희는 우리였으니까 난 내 죽음을 참아내야 했던 거야.

너희가 바깥에서 아무런 걱정도 없이 건강한 사지로 돌아다니면서 시시덕거리는 동안 내가 몇 번이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소녀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베란다의 소녀들 역시 끔찍한 절망에 전염된 듯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베란다의 소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안쪽의 소녀는 순식간에 발을 빼고 문을 거칠게 닫았다. 소녀들의 손가락이 문에 접질렸다. 소녀들은 간신히 비명을 참아내었다.

안쪽의 소녀가 슬며시 문을 열어 기회를 주자 소녀들은 순식간에 손가락을 빼내었다. 문이 다시 거칠게, 그러나 불가해하게도 조용히 닫힌 뒤 소녀들은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닫힌 문을 쳐다봤다.

그녀들은 방금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소녀는 소녀들이 끔찍한 착각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베란다의 문은 안쪽에서 열리는 구조였다. 소녀의 집이나 여자의 집과 같이. 대부분의 다른 집들이 그렇듯 소녀들의 집 역시.

소녀들이 서로의 손가락을 입술에 물고 빨아주는 사이 소녀는 문고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보았지만 예상대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녀들에게 기회를 준 것도, 기회를 빼앗은 것도, 문을 열지 않은 것도, 문을 연 것도 안쪽의 소녀인가?

소녀는 소녀들의 삶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들에게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물어보았다.

소녀들은 다시 안쪽에서 문을 세 번 두드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적어도 그녀들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늦춰진 것만은 분명하다고.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서로의 입에 교차하여 물고 웅얼거리며 대답하는 소녀들의 말투는 놀랍게도 무척이나 평온하게 느껴졌다. 소녀들은 마치 다른 이의 불행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다. 끔찍한 절망을 안쪽의 소녀가 먼저 선점했기에 바깥의 소녀들에게는 더 이상 슬퍼할 만한 자격이, 책임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먹을 건 있어? 마실 건? 하고 소녀가 물었을 때 소녀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에게는 아무런 예비책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는 여자에게 부탁해 음식과 물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녀들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것 같았으나 소녀는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순식간에 베란다를 넘어 수증기가 그득 맺힌 축축한 베란다 창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소녀는 무심코 여자를 곧장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거울로만 여자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베란다 소녀들의 실수에 전염이라도 된 듯.

여자는 찢어진 입을 귀밑까지 올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벌어진 틈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환희로 웃고 있는지 고통으로 울고 있는지 소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침묵이 아닌 거대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소녀는 발작적으로 여자를 따라 미소 짓고서는 곧장 후회했다.

여자의 절망, 혹은 환희를 끔찍한 방식으로 약탈하여 악용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소녀는 환각적인 성질의 힘으로 일렁거리는 기형의 입을, 불온한, 미친, 아름다운, 신적인 괴물의 벌어진 틈을 응시하였다. 여자의 길고 아픈 틈 역시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들리지 않는 압력, 팽창과 수축을 동시에 물화하며 고양하고 있는 내밀한 울음을 바라보았다.

매끄럽고 흐릿한 사방의 거울과 수증기 속에서 수십으로 증폭된 여자들과 소녀들이 마주보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 모두가 개별적인 삶이며 절단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곧장 잊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녀는 어린아이의 기민한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여자가 언제부터 비명을 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들리지 않는 첫 비명을 내지르던 순간부터. 여자의 비명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은 채 계속해서 소모되어 이제는 순전히 암묵적인 현시 이외에는 존재할 수도 들릴 수도 없는 비명의 기호로서의 찢어진 입술만이 남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녀는 여자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여자의 몸은, 여자의 입술은, 여자의 상처는 기호가 아니었다. 소녀는 들리지 않는 비명에 가 닿기를 원했다. 여자가 무척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에도 소녀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듣기를 원하였다.

그럴 리 없지만 여자는 마치 베란다에서 소녀들이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듯 일 리터 용기의 물통과 컵 두 개, 알록달록한 과자들이 가득 들어있는 분홍색 플라스틱 상자와 두툼한 담요를 네모나고 커다란 접시에 담아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담요 위에 놓여 있는 과자 상자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기에 소녀는 여자로부터 시선을 돌려 접시에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아직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아무것도 비추어지지 않는 불투명한 사물들을 바라보면서도 여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는 차갑고 얕은 물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구멍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어 버린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밤을 헤매는 나방을 유혹하는 날카롭게 벼려진 흰 달처럼 소녀를 잡아끌었다.

소녀의 검은 가슴, 익숙해지지 않는 찢겨짐 앞에서 소녀는 망설이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찢어진 입을, 상처의 절단면을 만져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닿고 싶었다. 들을 수 없더라도 가까이, 더 가까이, 더는 경계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그러나 여자의 상처는 소녀를 위로하기 위해, 소녀를 더럽히기 위해, 소녀를 끌어안기 위해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소녀는 여자가 소녀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와해되는 것, 파멸하는 것, 망가지는 것은 오로지 소녀의 몫이었다.

소녀는 순간 여자가 베란다의 소녀들처럼 울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곧 아무도 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기는 여자와 소녀의 환영, 이제는 사실과 구분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실들이 몇 번이고 흐릿하게 되비칠 정도로 젖어 있었으나 비가 하늘의 슬픔이 아니듯 수증기는 그녀들의 눈물이 아니었다.

소녀는 불가능을 만지려 드는 눈먼 여자처럼 서서히 손을 들어올렸으나 수증기는 얇고 섬세한 영사막들이 아니었고 소녀는 겹쳐진 영상 하나도 흩어놓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고요하고 침착하게 파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녀는 곧 그녀가 사라지리라는 것을, 그녀가 새벽의 거미줄에 내려앉았던 달빛처럼 산산이 깨어지고 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에게 오염됨으로써 그녀를 모욕하고 싶었으나, 결국 그리할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

여자의 비명은 광폭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녀의 입술은 너무도 손상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녀의 훼손된 틈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적어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존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들은 처음부터 폐허였던 흰 결여처럼 조용하였으나 단 한 번도 폐허인 적은 없었다. 모든 끝이 별의 파열처럼 다가드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소녀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처럼, 물의 주름 밑에 유년을 빠뜨리고 사라져버린 아이들처럼, 불투명하게 얼어버린 호수 밑에 목을 집어넣으려 헛되이 애쓰지 않는, 떠밀려 살아남은 해변의 실종자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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