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1 (헨젤과 그레텔, 그라쿠스)

버스 창가에 기대어 그는 사드를 읽었다. 조금만 그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가 읽는 것이 사드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버스기사의 면허증을 유심히 살펴보는 정도의 관심, 달의 흐릿한 얼룩을 더듬어 살피는 정도의 관심만.

책등은 끔찍할 정도로 굵었고 한 광인이 저주와 관능과 신념으로 지어올린 시간은 차 안에서 읽기에는 지나치게 길었다. 잔혹한 고문을 당하는 소년과 소녀들, 육체를 속박당하고 항문이 찢기고 배설물을 머금으며 죽어가는 여자들 펄펄 끓는 물 속에 쳐넣어져 죽어가는 여자와 손가락이 잘린 채 겁간당하는 소녀들 구역질도 거북함도 없이 그는 사드를 읽었다.

사드를 읽으시는군요, 하고 어떤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일까? 그녀는 알린처럼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여자였으나 정말 그녀일까?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승객들이 올라타는 것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에게 말을 걸었던 갈빛 눈의 여자는 곧 버스 가장 뒷자리로 가 앉았다. 열두 명의 승객들이 올라탔고 그는 출발하였다. 승객들도 도로도 적나라한 침묵으로 젖어 있었다. 오직 끝없이 음탕하게 자라난 나무들만이 게걸스럽게 호흡하고 있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참았다. 식물성의, 식물들의 세계에서 그들은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표류해온.

사내는 그의 나무를 선택해야 할 때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종점까지 가는 동안 버틸 수 있을까? 두 시간 가량의 항해 동안 그가 뛰어내리지 않고 깨진 차창 유리로 목을 꿰뚫지 않고 낯 모를 누군가에게 죽여 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끝까지 그가 참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리라는 것을 사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오래도록 그렇게 버텨왔으니까, 참을 수 없을 때도 그는 참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는 이 도시에 남은 유일한 버스기사였고 그의 승객들은 아마도 유일한 승객들이리라.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면서도 승객들에게는 이사를, 혹은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갈 법한 거대한 짐이 없었다.

사내는 백미러의 각도를 바꿔가며 승객들을 한 명 한 명 살폈다. 그들은 소돔의 방탕주의 학교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사내가 상상하는 인물들을 닮아 있었다. 사내는 그들에게 쥘리와 알린, 마담 뒤클로와 노파 마리, 방도시엘과 브리즈퀴, 에르퀼, 젤라미르, 제피르, 아도니스, 오귀스틴, 젤미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얼어붙은 도로에서 미끄러지면서도 버스는 계속 나아갔다.

승객들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면서 체념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절망적인 겨울이 더 이상 서글프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무덤덤해 보였다. 가장 어린 소년과 소녀조차도 말없이 식물들의 제국을 넘겨다 보았다.

사내는 피로에 닳아버린, 더 이상 말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의미의 지난한 계절에 깊이 매몰되어 생매장 된 승객들이 하지 않은 말을 들었다. 겨울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춥고 그들은 더 이상 살아있고 싶지 않다고.

오귀스틴을 닮은, 그러나 오귀스틴이 아닌 소녀가 갑작스럽게 입을 열 때까지도 기사는 그들이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슈바르츠발트로 갈 거예요, 하고 소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자그마한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버스 안에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얘야, 우린 아직 멀리 가야 한단다, 숨을 아껴야 해 하고 소녀의 대각선 오른쪽 자리에 앉은 노파가 끔찍하게 자그마한, 그러나 소녀의 것과 마찬가지로 버스 안에 기이할 정도로 선연하게 울리는 소리로 속삭였다.

소녀는 아랑곳 않고 계속 속삭였다. 슈바르츠발트로 갈 거예요. 아빠는 먼저 그곳으로 갔어요.

기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종점은 슈바르츠발트가 아니란다.

그는 다소 무례하게, 그리고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제 목소리에 지레 놀라 헛기침을 했다.

소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종점까지 가면 아빠가 데리러 올 거예요. 우리 아빠는 사냥꾼이에요 그곳에는 산양들과 사슴들이 많으니까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거예요.

소녀가 책의 문장들을 읽듯 너무도 무감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서 농담을 말하는 것인지 혼동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토록 무관심한, 격정 없는 어조가 얼마나 끔찍하게 진실할 수 있는지 사내는 알고 있었다.

슈바르츠발트에는 동물들이 살지 않아, 하고 소녀의 뒤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서글프게 웅얼거렸다. 그곳에는 이제 그라쿠스도 없지. 짐승들은 전부 얼어 죽어버렸고 호수 가장 깊은 곳에는 민물고기조차 살지 못한단다. 전부 얼어버렸으니까.

그렇지만, 하고 소녀는 흐느끼듯 가쁜 소리로 속삭였다. 아빠는 먼저 슈바르츠발트로 갔어요. 종점까지 가면 아빠가 데리러 올 거예요.

얘야 제발, 하고 소녀 앞의 노파가 속삭였다. 숨을 아끼렴.

소녀 옆에 앉은, 소녀와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 소녀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애는 미쳤어요. 하지만 우리는 슈바르츠발트로 갈 거예요.

승객들은, 그리고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괜한 실랑이를 이어가기에 그들은 너무 지쳐 있었고 그들의 무호흡은 그토록 견고한 것일 수 없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슈바르츠발트는 천국이 아니에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요. 그곳에서 우리는 밤새도록 일을 해야겠죠. 슈바르츠발트는 다른 모든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슈바르츠발트는 상징적인 도시예요. 그곳에 도시를, 재건을,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으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누군가는 사냥감 역할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럼 누군가는 사냥을 할 수 있겠죠. 내가 사냥감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해도 난 주저없이 할 거예요. 우스꽝스러운 꼬리를 달고 머리띠를 쓰고 맨몸으로 숲 속을 기어다녀야 한다고 해도 난 할 거예요. 사냥꾼 역할을 맡은 부랑자들이 앙상한 손을 내게 겨누면서 보이지 않는 총알을 발사하면 난 쓰러지겠죠. 그리고 우리는 함께 쓰러진 내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을 거예요. 우리는 맛있다고 말할 거예요.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이 다시 내게 사냥감 역할을 맡긴다고 해도 난 사냥감 행세를 할 거예요. 왜냐하면 사냥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냥감이 있어야 하니까. 슈바르츠발트에서 우리는 행복할 거예요. 지쳐 쓰러져 잠들면서도 우리는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힘들기 때문에,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슈바르츠발트를 현실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슈바르츠발트는 현실이에요. 내가 사냥감을 맡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쓰러져 울었으니까 사냥도 현실이고 피륙도 고기도 전부 현실일 거예요. 우리는 폐허가 된 성채에서 잠들겠지만 그곳에서 사라진 제국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거예요 그곳이 마치 우리의 고향인 것처럼 우리가 그곳의 주민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서글퍼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이 애는 미쳤어요, 하고 소년은 소근거렸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버스는 밤처럼 넓고 단조로운 추위를 표류하며 지나고 있었다.

우린 사냥을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소년이 느릿하게 속삭였다. 아무도 네게 사냥감 역할을 시키지 않을 거고.

왜냐하면, 소년은 습관적으로 숨을 들이키지 않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내뱉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사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냥 슈바르츠발트에서 살 거야 그리고 기다릴 거야.

소녀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면서 속삭였다. 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사내는 슈바르츠발트에 어떠한 미래도 없음을, 그곳에 살던 유일한 사냥꾼은 리바로 건너가 버린 지 오래임을 알려주지 않았다. 슈바르츠발트에는 나무가 아주 많단다, 하고 체념한 듯 속삭일 뿐이었다.

소녀는 흐느끼고 싶은 듯 작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다행히 소년이 소녀의 어깨를 치며 만류했다.

우린 자살하지 않을 거예요, 하고 소년은 선언처럼 내뱉었다.

승객들은 깜짝 놀란 듯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직설적으로 그토록 오만하게 그런 말을 내뱉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

우리는 슈바르츠발트에 갈 거고 그곳에서 살 거예요. 사냥감이 없다면 나무를 베면서 목수가 되어서 나무 껍질을 뜯어먹으면서 나무 토막 위에서 잠들면서 살 거예요.

겨울이 끝날 때까지? 하고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갈빛 눈의 여자가 속삭였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창가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겨울은, 노파가 속삭였다. 끝나지 않을 거야. 가장 더운 날조차 겨울에 속해 있을 거란다. 종점까지 갈 수 있다는 낙관조차 포기한 듯 노파는 고집스러웠던 침묵을 버리고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겨울은 끔찍하지만 가장 끔찍하다고 볼 수는 없어. 적어도 우린 겨울에 속해 있으니까, 가장 절망적인 것은 겨울에도 겨울에 속하지 못하는 일이지. 겨울이 시작되고 난 뒤에도 더위를 참지 못해서 알몸으로 생활하던 남자를 본 적이 있단다. 그는 내 오랜 친구였는데 날이 추워질수록 그는 더 깊고 진득한 열기에 시달렸지. 그의 피부는 정말 지독하게 뜨거웠어. 그는 너무 덥다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덥다고 중얼거렸지 난 그가 더워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겨울이었으니까, 얘들아 동물들은 추위에 죽어가고 있었지 더는 익사할 수 없을 정도로 호수가 꽁꽁 얼어붙었고 하지만 그 사람은 덥다고 했어 너무 덥다고 결국 그는 온몸이 동상으로 썩어 죽어버렸단다.

노파의 옅은 입술 틈에서 흰빛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소녀는 느닷없이 속삭였다. 우린 집에 불을 지르고 왔어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처음에는 식탁과 의자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꽃병을 유리창에 던져 깨뜨렸는데 그래도 집은 처음과 같았어요. 이해할 수 있나요? 가구가 망가지고 어질러졌어도 집은 그대로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성냥에 불을 붙였어요. 처음에는 불이 잘 안 붙더라고요. 그래서 도끼로 테이블 끝을 잘라내고 나무를 쌓아서 불을 붙이려 했는데 그러다가 오빠는 도끼에 발을 찧을 뻔했어요. 하지만 다행히도 불은 붙었고 넘실거리면서 게걸스럽게 이죽거리면서 발목까지 스멀스멀 타올랐고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서 흰 석회벽이, 더러워진 시트가, 정신병자를 묶어 두었던 침대 다리가 심장처럼 시뻘겋게 타들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난 조금 울었고 오빠는 울지 않았어요. 오빠는 숲으로 들어가자고 했는데 내가 반대했죠. 슈바르츠발트에 가자고 말한 건 나예요. 오빠도 그러자고 했어요.

새벽부터 버스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어째서 아빠가 슈바르츠발트로 가 버린 것인지 생각했어요. 우리는 슈바르츠발트라는 도시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슈바르츠발트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구체적으로 슈바르츠발트에 대해 상상해야 했어요. 아빠는 그렇게 되고 난 뒤부터 말이 많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아빠가 그렇게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우리는 엄마가 아빠보다 오래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아빠보다 훨씬 굳건했고 건강했으니까.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없었어요. 침대맡에도 테이블 밑에도 하나뿐인 옷장 속에도 없었죠. 뒤뜰을 샅샅이 뒤져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는 엄마가 숲으로 갔으리라는 것을 알았죠. 하나 남았던, 삭아가던 자살자의 유일한 유품인 넥타이가 없었으니까. 엄마가 자신의 나무를 찾아 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믿을 수는 없었죠. 엄마가 아빠를 두고 홀로 숲 속으로 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어요.

아빠는 아직도 살아서 벌레처럼 바즈락거리고 있었어요. 아빠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죠. 우리는 아빠가 무엇을 먹고 살아남았는지 상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아빠가 나무처럼 기이하게 기다래진 다리로 갑작스럽게 일어서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난 비명을 질렀어요. 내 목을 조르고 머리를 내리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빠는 슈바르츠발트로 갈 거야, 하고 말했죠. 먼저 가 있겠다고. 버스의 종점으로 우리를 데리러 가겠다고. 아빠는 쓰러지기 전처럼 명료한 목소리로 그러나 서글프고 지친 소리로 말했어요.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고 소년은 속삭였다. 아빠는 묻지 않았죠. 어쩌면 그때 아빠는 이미 숨을 참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난 아빠가 새들을 잡아먹었을 거라고 말했지만, 소년은 소녀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넌 믿지 않았지.

아빠가 우리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는 걸, 그리고 그만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침대에 묶여 있지 않을 때면 아빠는 언제나 동생에게 달려들어서 목을 졸랐죠. 그래도 이 애는 도망치지 않았어요. 아빠를 침대 다리에 동여매면서, 나무처럼 거칠고 앙상한 손목과 발목들을 결박하면서 우리는 울었어요.

눈물은 순식간에 얼어붙어서 볼이 눈가가 견딜 수 없게 간질거렸는데도 우리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어요. 그래도 그 무렵엔 아빠가 가장 행복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아빠는 마음껏 미워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모든 것을 증오하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그건 고통스럽지만 숨을 참아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아빠를 미워할 수 없었어요. 아무도 미워할 수 없었죠. 우리는 숲 속에서 혼자였어요.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정확히 같은 사람이었고 정확히 같은 대상이었고 정확히 같은 목소리였고 정확히 같은 추억과 정확히 같은 미래를 가진, 도저히 홀로가 아닐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아마 목을 매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죽고 말 거라고, 어쨌든 돌아갈 수는 없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애가 나와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우리는 자궁 속에서 뒤얽혀 합쳐지는 쌍둥이처럼, 한 몸에 엉글어진 두 개의 머리처럼 같은 운명에 속해 있었으니까.

아빠가 목을 조를 때보다, 소녀가 속삭였다. 두 발로 일어서서 슈바르츠발트에 간다고 말할 때가 더 무서웠어요. 그만큼 아빠가 무서웠던 적은 없어요. 완전히 낯선 남자 같았죠. 난 너무 놀라서 더 울 수도 없었어요. 어쩌면 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아빠와 같은 병에 걸린 남자, 터무니없이 낯선 남자였을지도 몰라요. 그럴 거예요. 아빠는 더 이상 그렇게 똑바로 일어서서 명확하게 발음할 수도 없었으니까. 아빠는 영원히 그럴 수 없을 거였으니까. 그건 완전히 낯선 남자, 우리가 처음 보는 남자였던 거예요. 맞아요. 그 사람은 너무 커서 우리는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어요. 어쨌든 우리는 남자를 따라가기로 했어요.

슈바르츠발트로, 하고 소년이 말을 이었다.

승객들과 기사는 가엾은 남매가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떠한 광기는 현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노파는 그런 일, 사람이 뒤바뀌는 일, 사람을 착각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만은 아니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사람의 얼굴을 식별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낯선 사람들이 간혹 그녀에게 엉뚱한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말을 걸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샹빌, 뒤클로, 혹은 콩스탕스 같은 이름으로 상대에게 대답했고 그러면 상대는 어리둥절한 눈치로 여자를 집요하게 관찰하고는 화를 내며 떠나가거나 여자에게 장단을 맞추며 기묘한 역할 놀이에 동참하고는 했다고 노파는 낮은 소리로 낄낄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생애와 내력, 친구 관계와 미래까지 즉석에서 부여해 주었지. 그러고 나서 우리는 헤어졌고 즉각적이고 기적적이었던 상상을 망치지 않기 위해 다시는 만나지 않았어.

그런데, 하고 노파는 무척이나 서글프게 속삭였다.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란다. 아마 그 남자는 너희 아빠였을 거야. 내가 너희만큼 어렸을 때 난 아이를 생매장 한 적이 있어. 그 애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지. 심장이 뛰고 있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그 자그마한 가슴이, 아직 탯줄이 달린 배가 바들바들 경련하는 걸 분명히 보았지. 하지만 그 애는 너무도 피투성이었고, 죽음처럼 피투성이었고, 더 이상 살아날 수 없을 것처럼, 삶이 아닌 것처럼 앙상하고 작아서, 그래서 난 그 애를 묻었어. 난 의도적으로 삶과 죽음을 혼동했지. 그 애가 살아나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그 애가 죽었기를 바랐으니까. 난 그 애를 바들거리는 끔찍하게 뜨거운 심장을 얼어붙은 땅에 묻었어. 손톱이 까뒤집어지고 역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땅을 헤집고 그 얕은 구덩이에 애를 밀어넣었어 애는 발버둥 치지도 않았지. 그 애는 죽은 것이라고, 죽지 않았으면 저렇게 피투성이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죽지 않았어. 그 애는 분명히 살아 있었어. 살아 있어서 그렇게 피투성이였던 거야.

소녀는 속삭였다. 어쩌면,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뱀들이 땅 밑에서 동면하며 살아남듯이 그 애도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살아서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노파는 소녀를 사랑스럽게, 그러나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겨울에는 애들이 많이 죽는단다. 그러나 전부 죽는 건 아니야. 숲에 들어간 아이들이 모두 행방불명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듯이. 그러니까 너희도 슈바르츠발트에 갈 수 있을 거란다.

고마워요, 하고 소녀는 수줍게 속삭였다.

기사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이를 꽉 다물었다. 그들은 언제까지 숨을 참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더 견딜 수 없게 되는 순간, 그래서 불가능을 주파하지 못하고 깨어지는 순간뿐인지도 몰랐다. 십자가에 매달린 소년이 까마귀의 둥글고 검은 눈을 보며 비상이 아닌 추락을 애걸하였듯. 그러나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어쩌면 종점을 지난 뒤까지도 계속 버틸지 몰랐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오열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하다못해 구역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숨을 참고 있었고 종점까지 견딜 계획이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내의 연인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달리 생각할 여지조차 없는 명백한 자살이었으나 사내는 그녀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오 년 전에 그들은 같은 건물의 일 층에서 살았고, 삼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이 층에서 살았으며, 그녀가 뛰어내리기 삼 개월 전부터 그들은 팔 층에서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일 층에서 혹은 이 층에서 뛰어내린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기대도 절망도 없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팔 층에 살고 있었고 그녀가 기대했던 지평은 일 층 높이에도 이 층 높이에도 없었으며, 육신을 산산조각낼 높이에 이르러서야 잔혹하게 얼어붙은 단단한 땅이 나타났고, 그래서 그녀는 죽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사내는 그녀가 자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적어도 추락 자살을 시도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내를 사랑하고 있었고 언젠가 그가 그녀를 죽여주기를 바랐다.

그녀가 하지 않은 말을 사내는 들을 수 있었다. 끔찍하게 지속되는 절정에 그녀가 사내의 손을 잡고 맞잡은 손을 그녀의 목 위에 올릴 때 그녀는 죽음조차 없이 삶을 넘어서고 싶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뒤라스의 연인들처럼, 절대적인 관능, 말 없이 그녀가 선택한 초극 속에서 죽고 싶다고.

그러나 자살은 아니었다. 사내는 종종 악몽 속에서 변색된 금속처럼 검게 변해버린 그녀의 앙상한 유령을 보았으나 유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뻐끔거리는 입술에서 사내는 어떠한 말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조금 울다 곧 사라져버렸다. 마치 죽음은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음을 입증하듯.

일주일이 지나자 유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내는 불을 붙여 여자의 시신을 직접 화장하였고 다시는 연인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끔찍하게 뭉그러진 뒷머리만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녀가 아름다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정확히 어떠한 방식으로 아름다웠는지 그녀가 어떻게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애틋했는지 그는 더 이상.

소녀는 속삭였다. 슈바르츠발트는 어쩌면 조금 덜 추울 지도 몰라요. 거기에는 아직 새들이 살 지도 모르죠. 그러면 아무도 사냥감을 연기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우리는 진짜 새를 사냥할 거고 새들의 목을 꺾어놓을 거고 새들의 깃털을 벗길 거고 새들을 박제할 거고 새들의 고기를 먹을 거예요. 몇 쌍의 새들은 남겨둘 거예요. 그들이 다른 새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계속 새들을 사냥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새들은 평생 사냥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사랑스러우니까.

소년은 소녀의 둥근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새들이 아름답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거야.

제발 그녀를 빨리 매장해 달라고 그는 의사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그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산산조각난 그녀가 바들거리면서 죽음을 향해 고꾸라지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쭈그리고 앉은 채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 깨진 과일처럼 바스라진 그녀를 바라보았고 사내는 여자의 뒤틀린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녀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그녀가 더 이상 출혈하지 않을 때까지, 그녀가 숨을 쉬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기다렸다.

의사는 여자의 연인인 사내보다도 더 슬피 울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가 하는 중얼거리는 긴 음절들을 사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죽은 여자가 그의 연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팔 층 높이의 창문에서, 그의 침실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서 돌이킬 수 없이 파손되어 버린 신체가 그의 침대 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인가?

그는 유달리 아름답고 흰 남자의 얼굴을 고통스럽게, 그리고 두렵게 바라보았다.

식량을, 혹은 책을 조금만 나누어주면 시신을 처리해 주겠다고 의사가 제안했지만 사내는 거절했다.

그는 얼어붙은 대지에 진득하게 늘러붙은 잔해를 모두 긁어모아 태웠다. 매캐하고 역겨운 향기가 그의 피부에 스몄다. 유령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가 묻는 말에 유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는 물을 것이 남지 않았고 그녀는 곧 사라졌다.

사드의 책은 그들의 침실에 남은 유일한 읽을거리였다. 그녀가 추락하기 전까지 그는 한 번도 사드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책은 언제나 여자의 가느다란 허벅지를 짓누르고 있었고 그는 책의 무게에 붉게 달아오른 연인의 허벅다리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죽고, 그는 사드를 읽기 시작했으며 여자의 죽음이 사드가 묘사한 어떤 살해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연극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호텔 방에서 거울을 보고 홀로 리어왕의 대사를 읊는 미친 연극 배우처럼 그녀는 끔찍하게 긴 역겨운 겨울을 참지 못하고 소돔의 방탕주의 학교에서의 한 대목을 연기해 본 것인지도 몰랐다. 창문에서 뛰어내릴 때만 해도 그녀는 그곳이 일 층 혹은 이 층 높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세 달 전부터 창문은 팔 층 높이에 있었고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높이, 아직 그리고 영원히 적응할 수 없었던 높이에 살해당한 것일지도 몰랐다.

버스를 운전하기 전에 그는 일 층에서 푸줏간을 운영하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혹한이 찾아왔고, 동물들은 손 써볼 도리 없이 모두 얼어붙었으며, 지독하게 단단해진 살점들. 도축용 칼을 아무리 내려쳐도 깨지지 않는 빌어먹을 동상들. 고기를 찾는 손님은 더 이상 없었고, 고기가 되어줄 짐승들도 더는 없었으며, 그는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망해버렸고, 냉동된 고기들을 헐값에 팔아버린 뒤에 그는 이 층으로 올라가야 했고, 결국에는 팔 층으로 옮겨가야 했으니, 왜냐하면 승강기가 없는 팔 층 건물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승객이 몇 되지 않는 버스를 운전해서 번 식량 조금과 사드의 페이지 조금만으로 일 층 혹은 이 층 방을 구할 수는 없었으나 팔 층의 낡아빠진 창고 방을 구할 수는 있었으므로 그곳에 그들은 침대 하나를 놓았고, 그리고 터무니없이 거대한 사드의 책 한 권. 팔 층은 놀랍게도 일 층 혹은 이 층 보다 쾌적했고 공기는 눈물이 날 정도로 맑았으니, 그들은 조금 행복하기까지 했고, 서로의 푸르스름한 입술에 입을 맞추면서 수줍게 노래를 불렀고, 사내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고, 왜냐하면 그는 예전부터 푸줏간 일을 증오스럽게 여겼으니까. 검은 눈들이 그를 노려보는 것이 죽도록 싫었고,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고깃덩이가 그의 몸 같았고, 그는 매일같이 고기 써는 톱날이 내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썰리면서, 조각조각 해체되면서, 언젠가 그는 제 손가락을 손목을 종아리와 목을 잘라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로지 피투성이의 붉은 빛에만 의존하여 그의 살과 고기의 살을 구분하였는데, 사실 그러한 구분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불이 꺼지고 나면 그는 붉음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고, 손가락이 잘리고 나면 그는 고기와 마찬가지로 붉을 것이고 피투성이일 것이며, 그러면 그는 고통조차 잊고 제 몸을 썰어내고 말 것이라고, 손가락을, 그 다음에는 손목을, 가슴팍과 무릎을, 허벅다리와 골반을 연결하는 접합부위를 능숙하게 해체하여 결국에는 목을 자르고 죽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고, 적어도 팔 층에서는 더 이상 죽음과 삶을 이미 고기인 것과 아직 고기가 아닌 것을 혼란스럽게 구분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는 차라리 행복하였고,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척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으며, 과장스럽게, 유일하게 살아 있다고 믿을 필요도 없었으니, 사실 살아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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