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자

어슴푸레한 수증기와 격자무늬 타일. 붉은 얼룩으로 어지러운 거울과 음울한 밤의 노래. 바닥과 벽면은 희뿌연 안개로 온통 젖어 있었고 소년은 안개에 가만히 고개를 기대었다.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

소년은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잘못이 없는 자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잘못이 없기 때문에 소년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소년은 꿈처럼 흔들리는 욕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부신 검은 몸을 거울과도 같은 수면에 담그고 있었다. 소년은 거울 바깥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입체적인 두상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고집스레 다문 채로 속삭였다. 아직 나가면 안 돼.

아직이요? 언제까지? 하고 소년이 대꾸했을 때, 여자는 내가 죽을 때까지,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죽지 않았나요?

영사막처럼 흘러내린 수증기 아래에서 여자의 육체는 잔혹한 빛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소년은 그녀의 죽음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런 식일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처음 그녀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창백하게 반짝이는 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환하게 웃었다. 웃기 전에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소년의 비명을 듣고 정신을 차린 듯 입술 위에 검지 손가락을 얹으며 소년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하고 여자가 말했을 때 소년은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날 해치지 않을 건가요? 엄마는, 소년은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여자가 고집스레 캐묻고 나서야 소년은 수줍게 말을 이었다.

엄마는 검은 사람들이 모두 괴물이라고 했어요. 낮에는 몰라도 밤에는 절대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고요.

여자는 웃으며, 그럼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되잖아. 하고 말했고 소년은 여자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의 만남이 몇 번이고 계속되었다. 악몽처럼 달콤한 대화가 이어졌다. 언젠가 여자가 유리창 안쪽으로 갑작스럽게 머리를 불쑥 들이밀 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여자를 거의 신뢰하고 있었다.

소년은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끔찍한 무표정으로 소년을 마주보며 그녀를 구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미래의 실종자이며 과거로, 그녀가 출발한 과거로 하염없이 여행하는 중이라고.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리바에는 유령들이 많아, 얘야, 하고 여자가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아니라 네가 유령이라고 생각했지. 물론 우리 둘 다 유령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합리적인 가능성은 가장 나중에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이전에는 유령을 본 적이 없니? 하고 여자가 물었을 때, 소년은 울먹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소년은 유령들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여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소년이 알고 있는 유령과는 다른 무언가라는 것,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여자는 배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검은 물 위에 떠오른 판자들을 찾아 헤맸지만 모든 판자에서 밀려나 가라앉고 말았다고, 검은 물 깊은 곳으로 하염없이 떨어져내려 마침내 소년의 방 창문까지 떠밀려 온 것이라고. 난 과거로 가라앉고 있어. 내 죽음과 한없이 근접하는 과거. 끝없이 내려가다보면 언젠가 죽음의 순간과 맞닿을지도 모르지만 한없이 가까워질 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쳐.

소년은 여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까닭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한 번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고 소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소년과 여자가 정확하게 같은 순간에 눈을 깜빡거렸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소년이 눈을 감고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에도 여자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은 어디까지 가고 싶은데요? 하고 소년이 물었을 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죽었다고 생각했어. 마침내 죽었다고. 죽음은 끝이라고 믿었으니 그 이후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던 거야. 죽음으로 가는 길이 그토록 험난하고 불안하다는 걸 누군가 말해주었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난 끔찍하게 무방비한 상태로 죽음의 강에서 떠올랐고 죽음에 미친 망자들이 날 밀어내는 동안 내 몸을 방어할 수 있는 칼자루 하나 없이 순순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

엄마는, 소년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죽은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고 말했어요. 아빠는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사라진다고 말했고. 간혹 실종된 사람들이 죽기도 하지만 죽은 사람들이 실종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날카로운 초승달처럼 휘어진 여자의 입술과 그 사이로 드러난 흰 이들.

소년은 불현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냐도 당신처럼 예뻤어요. 신부님도 선생님도 그랬어요. 내 여동생이 우리 마을에서 제일 예쁘다고. 물론 당신은 밤처럼 검고 그 애는 달처럼 하얬지만 달은 밤에 뜨고 밤은 달을 피워내니까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지도 몰라요. 당신도 그 애를 본 적이 있나요?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어른들은 동생의 몸을 도려냈어요. 날카로운 초승달로 조각내고 도려내는 걸 난 꿈 속에서 봤어요. 아냐는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그 애는 날 모른 척했어요. 난 울면서 매달렸는데, 초승달에서는 계속 검은 피가 흘러내렸고 동생은 당장이라도 녹아 없어질 것 같았는데, 흘러 넘치면서도 동생은 날 부르지 않았어요.

관 속에 담긴 그 애는 한 번도 찢겨진 적이 없는 것처럼 고요했고 마치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부드러웠어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눈꺼풀이 너무 희어서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아빠가 그 애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을 때도 그 애는 미동조차 없었어요. 난 동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빠는 칼을 그대로 내리꽂았어요.

아빠가 동생의 가슴을 찌르는 모습을 모두가 보고 있었죠. 동생은 이미 죽었는데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아빠는 그 애의 심장에 검을 꽂았고 난 그 애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소리쳤어요.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많았죠.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어른들이었어요. 그들은 엄마 아빠를 노려보면서 악마라고 수군거렸어요. 엄마 아빠는 흐느꼈지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어요.

동생은 당장이라도 살아날 것처럼 부드럽고 희었는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관 뚜껑을 닫았고 깊은 구덩이 속에 동생을 떨어뜨렸어요.

난 안된다고 비명을 질렀죠. 그 애는 하늘로 올라가기로 약속했다고요. 땅 밑이 아니라 하늘 위로.

검은 옷을 입은 여자와 남자들이 갑자기 끔찍하게 새까만 눈으로 날 돌아봤어요. 마치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거짓말을 했다는 듯이.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우린 약속했는걸요. 동생은 하늘로 올라가서 우리를 돌봐주겠다고 오직 우리만을 바라보고 지켜주는 천사가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엄마 아빠는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창백해 보였지만 정작 기절한 건 나였어요. 사람들은 아빠가 아니 엄마가 아니 아빠가 아니 엄마 아빠 둘 다 범인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엄마 아빠를 체포해갈 수는 없었죠. 당연한 일이에요. 아냐는 자살했으니까!

그 애는 목을 매지도 않았고 쥐약을 먹지도 않았지만, 그 애의 손을 조른 건 내 손이었지만 그 애는 자살했어요. 만약 당신이 날 심판하러 온 거라면, 소년은 시뻘건 눈으로 소리쳤다.

내 손을 잘라내도 좋아요. 하지만 내게는 다른 잘못이 없어요. 그 애는 천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언제나와 같이 날 이용했죠. 그 애를 아름답게 치장시키고 깨끗하게 씻기고 부드럽게 돌보았던 내 손으로 그 애는 목을 졸라달라고 했어요.

내가 목을 조를 때 그 애는 웃었고 아마 나도 웃었을 거예요. 우린 조금도 아프지 않았어요. 난 천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 애를 천사로 만드는 대신 내가 천사가 되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그 애의 목을 졸라 주었어요. 그 애를 씻기고 꾸미고 돌봐주었듯이.

여자는 어느덧 상반 전체를 유리창 안쪽으로 들이민 상태였다. 부드럽고 축축한 안개 같은 품이 소년을 감싸 안았다.

아냐는 그 애에게 가능한 방식으로 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죽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건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요. 원치 않는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은 불가해하게 휘어진 상태로 끝까지 넘어지고 꺾여 죽은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애도하고 용서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구에게 용서받을 수 있나요.

아냐는 끝까지 예뻤어요. 그 애의 죽음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난 그 애의 죽음을 만들어낸 손이 바로 내 것이라고, 그 애의 죽음은 그토록 아름다운 죽음은 내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죠.

아냐는 자살했으니까.

잔가지의 그림자가 소년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가벼운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면서 소년은 어느새 작지만 두툼한 발까지 전부 들어온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꿈처럼 검었다.

사람들은 모두 아냐를 기억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아냐, 희지도 어리지도 않은 아냐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눈부시게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주근깨가 뒤덮인 아냐, 연녹빛 곰팡이와 얼룩에 훼손된 아냐, 뼈가 드러나고 붉은 살이 검게 썩어가는 아냐, 등이 굽은 아냐, 머리가 희게 샌 아냐, 나날이 자라나고 마침내 늙어가는 아냐를 떠올릴 수 없어요.

그 애가 살아있었다면 점점 흉하게 변해갔을지도 모를 일이죠. 어린 시절에 끔찍하게 아름다운 애들이 자라날수록 기묘한 축에 뒤틀린 듯 변해가는 것처럼.

밤은 사물들의 고유한 선을 무너뜨렸지만 경계선을 잃어버린 사물들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소년은 검은 빛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세계를 묵묵히 견뎌내었다.

우리는 그 애를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악용하고 있어요. 죽음이 예정된 자살자의 사진에 코를 박고 흐느끼는 쥐새끼들처럼. 난 마치 그 애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이 그 애의 꿈을 꾸며 잠들어요. 그곳에는 그 애가 있고 나는 없어요. 그 애는 나 없이 자살하지 못하죠.

그 애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깨끗한 두 개의 길고 축축한 날개를 달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 애의 날개를 만져보고 돈을 내요. 유리창을 닦는 하인들은 따로 있어요. 유리창 바깥에는 당신이 아니라 군중들이 있죠. 안개처럼 희멀건 얼굴의 사람들이 오직 그 애의 날개를 훔쳐보기 위해 서성거려요.

엄마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고 아빠는 베트남 인민들을 총살하지 않고 아냐는 석고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요. 나비의 날개처럼 생긴 날개, 깃털 하나 없이 거대하고 축축하며 끔찍하게 연약한 겹으로 펼쳐진 날개는 땅바닥에 반쯤 내려뜨려져 있어요.

돈을 내고 그 애의 날개를 만지는 여자들은 치명적인 연약함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요. 난 모든 것을 모든 구석에서 모든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해요. 수천 곳에서 시작하며 파고드는 내 시선을, 난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들을 훼손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죠.

그곳엔 내가 없어요.

난 나라는 오염의 기재 없이, 불가피하게 훼손시키는 치명적인 표상 없이 한없이 투명하게 그 애를 바라봐요. 난 내가 없는 세계에 절망적으로 매료되지만 그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아냐는 자살했죠. 내가 아니라 아냐가 자살했어요. 그 애는 원하는 일은 모두 하고야 말았으니까. 그 애는 언제나 성공하는 아이였고 난 언제나 실패하는 아이였죠. 그 애의 목을 조르는 순간에도 난 내가 실패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 애는 천사가 될 수 없을 거고 그 애는 끔찍하게 늙어갈 거고 머지않아 흉측해지고 말 거라고. 얼굴이 길어지거나 코가 너무 높아지거나 눈이 너무 커지거나 얼굴을 이루던 아슬아슬하고 가녀린 균형이 순식간에 붕괴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균열로 파괴되고 말 거라고. 그 애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그 애를 지탱하는, 그 애가 지탱하는 선이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일순 망가져 버릴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 애가 못생겨지는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질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 애는 여태까지 그랬듯 성공했죠. 내가 실패한 게 아니라 그 애가 성공했던 거예요. 죽음이 그토록 간단할 수 있다고는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었죠. 죽지 못한 채 저속하고 천박한 고행을 수십 년간 견디고 있는 사람들, 말라빠진 껍질에서 검고 누런 진물을 질질 흘리며 기어다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파괴된 인간 너머의 공백으로 넘어가지 못했죠. 그 애의 이마는 거울처럼 고요했어요.

소년은 안개와도 같은 수증기가 얼굴을 투명하고 희멀건 분처럼 뒤덮고 있다고 느꼈다.

언제 나갈 수 있나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꿈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당신도 아마 내 꿈을 꾼 적은 없었겠죠. 난 동생이 남기고 간 하얀 원피스를 입고 미인대회에 나갔지만 접수원들은 당황한 얼굴로 날 내쫓았죠. 동생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빗겨주던 빗으로 내 머리를 빗고 동생의 입술을 꼬집어 붉게 만들었던 손으로 내 입술을 꼬집고 동생에게 입혀주던 눈처럼 흰 원피스를 입고 동생을 내보내려던 미인대회에 접수하러 갔지만 그들은 받아주지 않았어요.

엄마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상담 선생님은 동생이 되고 싶냐고 물었어요. 내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도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모르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했죠.

욕실에서도 목을 맬 수 있나요? 젖은 천장에 매달려 죽을 수도 있나요? 꿈의 끈으로도 목을 맬 수 있다면 난 벌써 수천 번은 죽었을 거예요. 유리창 너머에서 당신은 내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난 아무것도 듣지 못하면서도 당신의 입술에 매료되어 텅 빈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죠.

그 사이에 아냐는 죽었고 엄마는 죽지 못했고 아빠 역시. 몇 개의 그림자가 들락거렸지만 변한 것은 없었어요. 난 내가 없는 악몽을 살듯이 동생이 없는 밤을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끔찍하게 악용되었다는 생각, 돌이킬 수 없이 뒤틀렸다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아요. 살았던 거죠. 누군가 살아서 우리를 악용하고 있는 거죠.

어째서 그 전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당신을 기다렸는데. 당신은 너무 늦게 왔고 아냐의 이마는 거울처럼 고요했어요. 삶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투쟁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죠. 꿈의 절단면이 이루는 도형들에, 거울의 기하학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아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당신은 웃고 있었죠. 어쩌면 당신이 아니라 내가 늦었던 건지도 몰라요. 당신을 너무 늦게 기다렸던 건지도.

불완전한 밀실 내부로 꿈처럼 파괴적인 리듬이 밀려들고 있었다. 소년은 축축한 안개에 머리를 기댄 채로 죽어가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창문 너머에서의 기억이 없다고 속삭였다.

리바에는 귀신들이 많단다, 얘야. 어쩌면 그녀는 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럼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거죠? 하고 소년이 물었을 때, 여자는 불현듯 침묵하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사라진 적 없다는 것을. 오직 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파문당한 아이들, 초대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쫓긴 아이들과 초대받지 않았기 때문에 고발당한 아이들. 여자는 소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며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유령학자였다고 말했다.

소년은 여자가 창문 밖에 있는지 욕실의 수증기에 서려 있는지, 그 자신이 창문 안쪽에 서 있는지 욕실 안쪽에 주저앉아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여자의 말을 들었다. 끔찍한 현기증이 그를 뒤흔들었으나 소년은 비틀거리면서도 그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는 여전히 욕실 안에 혹은 창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열하고 치졸한 연구로 빠지지 않기 위해, 동시에 사변적인 연구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 연구자는 연구 대상자가 되어야 해. 카프카 연구자는 카프카여야 하고 오직 카프카만이 카프카를 연구할 수 있지. 자살자들에 대해 연구하는 자들은 자살자가 되어야 하고 창녀 연구가들은 창녀가 되어야 하고 음악 연구가들은 음악이 되어야 하고 사진 연구가들은 사진 이미지가 되어야 해. 연구를 하면서 연구자들은 자신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또 그가 연구하는 무언가가 되어가는 거지. 인간의 이후를 연구하는 자들은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인간 이후가 되어가고 인간을 연구하는 자들은 인간 이전이거나 인간 이후이기를 그만두고 인간이 되어가고.

리바의 유령을 연구한 자들은 모두 실패했거나 실종되었지. 그러나 실종된 자들이 실패한 건 아니었어. 리바의 유령에 대한 연구는 모두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실종자들은 분명히 누구보다도 적확하고 경험적이며 동시에 지나친 감상에 매혹되지 않은 냉정한 시선으로 유령들에 대해 묘사할 수 있었어. 그들이 영원히 실종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의 논문은 학계에 발표되어 상찬받았을 거야. 그러나 저술자가 미상인 논문을 책임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들의 수려하고 적확하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냉혹한 논문은 어느 학술지에도 게재될 수 없었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느 실종자의 주장에 따르면 리바의 유령들은 토착 유령과 방랑자 유령으로 구분되지. 그러나 리바 태생이든 리바를 경유하는 유령이든 간에 그들은 본질적으로 과거로 여행하는 미래의 실종자들이며 어디에도 실명이 등재되지 않은 불법적인 유랑민일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들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므로 그들에 대해 추적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인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

그러나 리바의 유령들은 무관심하게 망각해버릴 수 없는 도저한 현상이야. 리바의 시민 대부분이 리바의 유령에 대해 알고 있어. 대놓고 리바의 유령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사실 리바의 언어 대부분이 유령들에 대한 희극적인 암시지. 리바의 시민들은 리바의 유령들의 언어를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비극적인 언어를 빌려쓰고 있으니까. 리바의 언어가 다른 어떤 도시,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까닭은 그것이 산 자들의 언어가 아닌 망자들의 언어이기 때문이야. 리바 언어의 고유하고 모호한 음울성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관조해본 자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특징이지.

리바 여행객들은 리바 사람들이 귀신처럼 흐느낀다고 불길한 저주를 중얼거린다고, 이방인들을 끔찍하게 적대한다고 호소해. 리바 시민들은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반론하지만 사실 절망적으로 정확한 묘사지. 삶과 이방을 찬미하는 유령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유령들의 저주를 삶과 이방에 대한 끔찍한 비방을 그대로 되뇌고 있는 셈일 거야.

얼마 전에 리바의 시장이 유령의 증언을 바탕으로 리바의 유령 생태와 언어, 기후에 대한 상관관계를 발표했어. 그는 익명으로 논문을 게재하려 했지만 그의 비서들이 언론에 고발한 탓에 그 천박한 논문을 작성한 자가 다름아닌 리바의 시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어. 그는 오직 밤에만 개인적인 연구에 집중했다고, 그를 위해 십 년 동안이나 한숨도 자지 않고 연구를 해왔다고 항변했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보기에 그의 논문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형편없어.

리바의 시장은 결코 실종될 수 없었기에 가장 천박하고 조악한 연구밖에는 할 수 없었던 거야. 그는 리바의 유령들에 대한 연구가 현존하는 실종자들을 가시화하고 포착하고 드러내는 일이라는 사실을 외면했어. 대신 누구나 알고 있기에, 너무도 당연해서 부연할 필요도 없기에 구태여 학술지에 발표한 적도 없었던 리바의 기후와 언어, 유령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사변적인 연구에나 집착했어.

그는 놀랍게도 리바의 기후와 언어, 유령이 불가분의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모호한 결론으로 논문을 끝맺었어. 그건 정말이지 무책임하고 끔찍하게 유치한 결론이야. 리바의 기후와 리바의 언어와 리바의 유령들은 모두 서로의 효과이므로 상호연관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 중요한 건 그 애처로운 망명객들이 어느 시간에서 어느 시간으로 떠오르는지, 혹은 가라앉는지, 그 유령들이 한때 무엇이었고 어떤 현실을 파기하였으며 어떠한 가상을, 어떠한 금지된 시간을 현실화하고 있는지 하는 거지.

시장은, 여자의 소곤거림, 귓속으로 밀려드는 축축하고 미지근한 물기, 소년은 욕조의 흰빛이 폭발하며 흘러내리는 것을, 마치 흐느끼듯이 무너지는 것을 꿈꾸듯 멍하게 바라보았다.

밤에도 리바의 시장이었던 거야. 그는 한 번도 익명인 적이 없었고 한 번도 실종된 적이 없었고 그래서 유령 연구에 처참하게 실패했던 거지. 난 리바의 유령을 연구하기 위해 실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실종되지 않고는, 리바의 시민인 채로는 시장처럼 어처구니 없는 연구, 실은 연구조차 아닌 연구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소년은 절망적으로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여자의 목소리는 짙고 무거운 빛처럼 그의 주위를 떠돌았다. 끔찍하게 습한 공기가 거북스러웠으나 소년은 계속해서 숨을 쉬고 있었다. 지금도 여기도 아닌 어딘가가 있을까 하고 소년은 홀로 생각했다. 여자의 무거운 안개는 소년의 바깥에서, 그리고 소년의 내부에서 날카롭고 둔중하게 호흡하고 있었다.

아냐는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과 여자는 숨을 쉬고 있었다. 소년은 밀실을 불쾌하게 뒤덮은 숨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깜빡거렸다. 은근하게 휘어지는 타일의 격자. 보이지 않는 현실을 훼손하듯 서서히 내려오는 흰 영사막.

여자는 짐승처럼 낮고 깊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고 창문 밖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신경질적으로 가로막힌 아득한 바깥과 안개,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깊은 안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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