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황홀한 심연을 굽어보는 그의 빛나는 눈, 한 줄기의 빛이 더 매혹적으로 빛나는 암흑에 파묻힌 그, 영원한 질식 속에 떨어진 소년, 소녀는 연한 물빛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소년의 입술 속에 혀를 들이밀었다. 호수물이 그득 들어찬 소년의 입속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년을 먹어치울 수도 그를 흙으로 덮어 묻어 놓을 수도 없었다. 소년의 하늘빛 피부는 호수의 물과 지독하게 잘 어울렸고 소녀로서는 그 속에서 이루어진 황홀한 결속을 헤쳐놓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새벽이 떠오르고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소년을 어루만지고 그를 끌어안으며 흐느낀 탓에 소녀의 몸에 묻었던 붉은 흙의 얼룩은 모두 씻겨져 있었다.

소년의 시신은 아직도 물 위에 떠 있었다. 더 이상 비린 숨을 내쉬지 않는 푸른 입술. 더 이상 소녀를 어루만지지 않는 손은 수면의 날카로운 날에 절단되어 물 속에 잠겨 있었고 소녀 속의 개를 탐하던 이빨은 온실의 식물처럼 희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소년의 잎사귀와 줄기, 꽃과 열매는 모두 호수 속에 있었다. 처음부터 물에서 태어난 수중식물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지만 그녀의 유령은 어디로 갔는가? 그녀의 개는? 미칠 듯한 짠맛은? 소녀는 돌이킬 수 없이 아득하고 황홀한 잠의 심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와 그녀의 유령이 잠들어 있는, 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더러운 개들이 그들의 부드럽고 끔찍한 잠을 애무하며 지키는 어둠 속으로. 그러나 소녀는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사내의 밑에 깔려, 원치 않는 살을 맛보며, 살에 뜯기면서는 도저히 매일 돌아갔던 검푸른 안개 속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술을 단단히 잠가 보아도 여물지 못한 틈새는 자꾸만 열리며 이물을 받아내었다.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깨어 있었다. 갈망과 상태의 괴리가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 그녀는 선뜩하리만치 예민한 감관으로 사내가 가하는 고통을 속속들이 느껴야만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런 식일 필요는 없는데도 그녀는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너무 많은 소리에 지쳐버린 목에서 꺽꺽거리는 침묵밖에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사내는 소녀의 공포를 탐하듯 끔찍한 침묵이 질질 새어나오는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대었다. 마치 덫에 걸려 죽어가는 어린 짐승같은 그녀의 신음이 달콤한 밀어라도 된다는 양. 소녀는 사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 역시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소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소녀를 오해하고 있었다. 사내가 탐하는 소녀의 몸, 그가 주워담는 소녀의 감미로운 노래를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 소녀는 사내와 소년의 꿈에 시달렸다. 이전처럼 소년의 푸르고 아름다운 유령이 소녀의 곁을 바람과 같이 스쳐가는 꿈은 아니었다. 소녀는 꿈 속에서 소년의 부재와 사내의 존재에, 끔찍하도록 뒤집혀진 욕망에 시달려야 했다. 소녀는 잠도 들지 못한 채 꿈을 꾸어야 했다. 불면을 덮쳐오는 꿈은 그 어떤 꿈보다 허망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불면의 환각을 헤매며 소녀는 호수로 걸어들어갔다. 사내가 그녀의 무참한 신음을 겁탈했던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칠 듯이 두려웠지만 그곳에는 소년의 유령이 잠들어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그 호숫가에 있었다. 소녀는 더 이상 사내와 소년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죽음과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삶의 그림자처럼, 소년의 유령과 사내의 몸은 항상 같은 장소에 도사리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에 대한 갈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제치고 먼저 죽음의 품으로 들어가버린 뒤에도, 호수 바깥에서 떠도는 소녀의 몸을 두고 호수 속에 들어찬 물그림자에게 빠져들어 떠난 이후에도. 소녀는 밤마다 몽유병에 시달리는 방랑자처럼 검은 숲을 배회하였다. 물론 소녀는 몽중이었지만 잠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벌써 한달동안 소녀는 단 한순간도 잠에 들지 못했다. 소녀는 눈에 띌 정도로 수척해졌다. 불그스름한 피부는 소년의 얼굴처럼 창백해졌고 선원의 밧줄처럼 단단하게 짜여진 팔다리는 갈수록 헐거워졌다. 하지만 밤은 소녀의 수척한 변화를 깊은 어둠의 베일로 가려주었다. 숲 속으로 들어오는 소녀의 그림자를 군인이 잡아채었다. 소녀의 검붉은 피부가 사내의 검은 몸 아래 깔려 짓뭉개졌다. 소녀는 그가 망령인지 실존하는 몸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소녀는 벌써 수백의 사내에게 겁탈당했고 수백의 소년을 끌어안았다. 환상은 실제처럼 고통스러웠고 실제는 환상처럼 끔찍했다. 당신은 꿈인가요? 하고 물어 보았지만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첫 만남의 순간 그러했듯 소녀의 입술에 귓바퀴를 가져다대고 그녀의 신음을 달콤한 교성처럼 오해하여 훔쳐담는 잔혹한 몸짓. 허벅지 사이를 파고드는 타자의 감각, 소녀의 귓바퀴를 잡고 그 속에 밀어넣는 끔찍한 소리들.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소녀를 할퀴고 소녀의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느낌. 소녀는 그 중 어느 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지만 악취와 같은 감각은 소녀의 피부 속속들이 배어들었다. 이런 운명도, 이런 고통도 소녀의 별자리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별들을 산산조각내지 않는 이상, 밤하늘의 아득한 베일을 찢어발기지 않는 이상, 소녀의 아픔은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앞으로 또 이러한 고통을, 하늘에 새겨져 있는, 그녀의 피부와 유전물질 깊숙한 곳에 인박여 있는 아픔을 소녀는 또 몇 번이고 겪어야 하는 걸까? 소녀의 뱃속에서 질질 새어나오는 체액, 소녀가 모르는 살과 피로 만들어진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 그녀의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몸이 아닌 살이 앓는 아픔을 왜 그녀는 느끼고 있는 것인가? 살과 피, 자궁과 질, 얼굴과 언어, 이름과 운명, 기억과 미래가 모두 그녀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의 뱃속을 찢어발기듯 삼켜오는 이 고통만은 오로지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이성도 정동도 아닌 아픔이었으며 아픔이 곧 그녀였다. 오로지 아픔만으로 인해 그녀는 실재할 수 있었다. 고독의 아픔, 실존의 아픔, 절망의 아픔, 그 모든 숱하고 비열한 아픔들. 그녀의 고통과 미래, 부채꼴로 펼쳐진 모든 순간들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별들조차도 그녀의 치욕을, 그녀의 아픔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녀의 고통을 알겠지만 그것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 모든 여자들과 모든 짐승들과 모든 곤충들, 모든 미물들, 모든 존재와 비존재에게 닥쳐오는 아픔을 한꺼번에 겪는 이는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모든 아픔을 함께 앓는 신이 있다면 그는 미치광이일 것이다.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은 그녀의 고통을 관음하는 신이 아닌, 온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져 백치 여자처럼 낄낄거리는 광인의 신이었다. 그녀는 오직 암과 같이 자라난 신의 광증만을 믿었다. 건강한 이성은 결코 그녀의 이해자가 될 수 없었으므로.

소년이 죽음이라면 사내는 삶이었다. 소녀가 증오하고 피해왔던 삶, 소녀는 삶을 피해 죽음으로 질주했지만, 있는 힘껏 달려 그 질기고 역겨운 피막을 찢어내려 했지만 결국 삶은 그녀의 몸을 휘감고 그녀의 속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아무도 원한 적 없었던 실존을. 그녀가 원한적 없었던 몸, 오직 원해지기만 했던 낯선 이의 욕망, 낯선 이의 고기. 소녀를 배제한 채 짜인 소녀 몸의 법칙은 소녀의 의지와 소녀의 갈망, 소녀의 지각을 소외한 상태로 소녀의 모든 순간과 아픔들을 결정지을 것이다. 그 내적이고 치밀한 법칙으로부터 소녀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녀 혈류의 흐름을 한 번도 바라본 일이 없듯.

어느 누구도 소녀의 실존을, 진창처럼 엉망이 되어버린 실존을 책임져 주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다리 사리에서 흘러내리는 소름끼치는 타액의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낯선 이방인이 그녀의 몸 속에 뿌리내리려고 했던 생명을, 욕망이 득시글하게 거품이는 실존의 역겨운 악취를, 소녀는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모든 일들이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며칠 전에 떠올렸던 생각을 되뇌었다. 개를 탐하고 들어온 길이었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나무바닥을 적시며 들어오는 그녀에게 소녀의 엄마는 무얼 하냐고 물었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쥐가 나왔다고, 쥐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것이라고 변명했다.

소녀의 엄마는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여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찬장을 뒤졌다. 그녀는 이웃에서 선물한 밀쿠키와 쥐약을 꺼내 쿠키 위에 쥐약을 떨어뜨렸다. 엄마는 쿠키의 밑면을 조심스레 받쳐 소녀에게 건네며 쥐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에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내일이면 죽을 거야. 그것들, 그 욕심꾸러기 악당들한테 본때를 보여 주자고. 빛보다는 어둠에 익숙한 소녀의 눈은 장난스레 웃는 엄마의 입술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의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안방문 바로 옆면 벽에 붙어 있던 나방을 손으로 때려잡은 뒤 손에 묻은 날개의 자국, 뭉그러진 시체를 툭툭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라오며 수십 번 수백 번은 마주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동물을 먹거나 사육하고 고문하진 않았지만 언제든지 죽일 수는 있었다. 더욱이 곤충이나 쥐처럼 작은 짐승들을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오로지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도 되는 양 굴었다. 작년 겨울에 숲에서 영원한 잠-불면에 빠져든 할머니는 벌레를 죽일 때마다 그의 명복을 비는 주문을 외웠으나 소녀는 그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바퀴벌레와 파리, 모기와 흰개미, 쥐와 나방의 몸은 모두 불온한 것인가? 새로운 생을 빌며 그들의 낡은 육신을 짓뭉개 죽여야 할 만큼? 그들의 몸은 돌이킬 수 없는 불구인가? 그토록 지독하고 추악한 불구라면 당장 죽어야 하는 것인가? 어째서 소녀는 이전에는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소녀는 어떤 답을 내리고 지금까지 타살로 가득한 생을 견뎌오며 살아온 것일까? 소녀는 무수한 질문들, 언제나 같은 질문들에 대답하는 대신 그저 질문 자체에 무뎌지며 살아왔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깨달았다. 그러나 소녀로서도 나방아나 쥐, 개미나 바퀴벌레의 죽음이 서럽거나 아프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뿐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죽여야만 하는 걸까? 쥐의 먹이에 독을 타고 나방의 몸을 으스러뜨리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러한 물음은 한달 뒤 어째서 그는 그녀를 해쳐야만 하는 것인가? 어째서 검은 사내들은 그녀를 겁탈하고 아프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의 몸과 형상, 유령은 어째서 소녀를 소년에게로 친절하게 보내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지독한 상념들로 이어졌으나 지금의 소녀로서는 오로지 그녀와 그녀가 해칠 수 있는 생물들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었다. 인간의 입과 쥐의 아가리를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 하고. 지금껏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진실들을 소녀는 돌연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쥐를 위해 마련한 죽음의 쿠키를 옆집 아이에게 건넨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아이에게 닥친 불행을 슬퍼할 것이다. 쥐가 먹고 죽어야 하는 독약을 먹고 죽은 아이의 황폐한 몸 앞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은 쥐약을 쥐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째서 사람은 쿠키를 먹어서는 안 되냐고 묻는 소녀에게 그들은 그것은 쥐의 쿠키라고, 쥐의 죽음이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마땅히 쥐가 삼켜야 했던 고통이라고. 어째서 쥐는 쥐약을 먹고 온몸을 비틀어가며 내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에 못이겨 죽어야 하는가? 다만 살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생이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무엇에 해롭단 말인가? 빵조각에 독을 발라 그들을 죽이는 인간이? 빵을 갉아먹고 최후의 식사를 토해내며 죽어가는 쥐가? 어쩌면 소녀의 어미는 쥐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 소녀는 쥐를 낳을지도 모른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방인의 살이 그녀의 몸속에 무엇의 씨앗을 심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낳을 아이가 그녀처럼 붉은빛의 피부와 두 개의 팔, 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와 두 개의 폐를 가졌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쥐들에게는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발이 기형으로 보일 것이다. 그들의 발을 잘라 비틀어내며 팔로 만든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발이라는 불구의 저주를 유전하여 답습해간 쥐들은 언젠가 인간이 될까? 그들은 또, 언젠가 불구의 인간을, 네 개의 발을 가진 인간을 낳아 다시 쥐의 원형으로 돌아갈까? 우리는 이미 오래도록 쥐와 인간의 불구를 교차하며 거대한 원을 그리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쥐의 불구를 증오하며 쥐들을 죽이고, 인간의 불구를 증오하며 인간을 죽여가며. 우연히도 지금, 쥐의 불구와 인간의 몸을 살고 있는 소녀는 쥐약을 먹고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감히 확신하지는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소녀가 쥐약을 먹는다면 적어도 그녀의 이웃들,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발을 가진 사람들은 소녀의 죽음이 부당하다며 울어줄 것이다. 소녀 대신 죽음의 자리로 기어들었어야 할, 소녀의 삶의 자리를 갈취한 쥐들을 저주하며. 요단강의 사공을 깨물고 도망치며 소녀를 망령들의 강으로 밀어넣은 것이 쥐라고, 소녀의 죽음이 쥐들이 잘못이라고 부르짖으며.

미칠듯한 생각은 아침까지 이어져 소녀의 머리 속에서 쥐떼처럼 부풀어오르며 그녀의 사랑스러운 개의 속살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직 소년을 만나러갈 시간은 아니었다. 소녀는 해갈되지 못한 고민들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누구라도 소녀의 이상한 언어를 고발하지 않고 잠자코 들어줄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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