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고래 엄마의 물방울

구석자리에 사는 괴물들을 너는 어릴 적부터 보아왔다. 괴물을 보는 사람은 괴물이 될 수 없다. 괴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괴물을 죽일 수 없다. 너는 오랫동안 구석자리에서 곰팡이처럼 번져가는 괴물들과 함께 살아왔다. 옷장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내가 아니니까. 난 그가 포기한 그녀의 마음이에요.

아냐. 넌 그녀가 아니야. 우린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우리의 흔적을 안고 생에서 다음 생으로 잘린 다리에서 진물을 줄줄 흘리며 기어가는 이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 여자는 죽었나요?

응.

죽고 나서,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되었나요? 끝났나요?

아니,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어린시절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끝조차 없는 거야. 하나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다른 무엇도 가질 수 없는 거야.

그럼 그녀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는 죽었어. 그녀의 삶은 그녀의 죽음을 잃고 남겨져 있어.

그건 어디에 있나요?

아무데도 없어. 그건 추억도 장소도 시간도 없이 머물러 있어. 누구도 만지지 못하고 누구도 해치지 못하고.

우리처럼?

그래. 우리처럼.

창밖에서는 기절한 새들이 비처럼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창백한 살결이 부서지고 산산난 조각들이 횡단보도 앞에서 서 있던 소년의 눈에 박혔다. 소년은 먼 눈을 떴다. 세상은 붉고 창백했으며, 아팠다. 또 그만큼 아름다웠다. 그 애의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누군가는 그 애의 아픔에 조소했고, 누군가는 그 애의 아픔을 무시했으며, 누군가는 그 애의 아픔에 안심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눈이 먼 사람들은 그 애의 앞에 엎어져 따끈한 선혈을 흘리는 유년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들은 벌건 눈물을 훌쩍거리는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멎은 채 흐르고 있는 그들의 오랜 핏물을 닦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세월이 그들에게 알려준 대로 그들은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다만 그들의 앞에 주저앉아 절망하는 소년이 그들과 같은 어른으로 자라나길, 그동안 그의 눈물을 아무도 닦아주지 않기를 내심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바람대로 아이는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무도 소년에게 기적을 설명해 주지 않았고, 소년 역시 기적이 되지 않았으며 종종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조각이, 겨울 밤동안 꽁꽁 얼어 날카로운 흉기로 벼려진 깃털이 빛의 급소를 찢어발길 때에도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소년은 특별히 절망하지도 희망하지도 않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동안 소년의 눈은 계속해서 아파왔고 날이 풀릴 때에면 눈동차처럼 검게 굳어 있던 핏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아무도 그 눈물을 닦아 주지 않았다. 따끔거리는 세상이 고통스러워 손으로 눈을 비벼대어도, 손짓에 부르튼 눈이 온통 붉은 핏물에 번져도 그 흉측하고 가여운 광경에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역겨움에 욕을 내뱉는 자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소년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얼마 뒤, 횡단보도를 급하게 뛰어 건너던 소년이 트럭에 치여 죽었다. 트럭은 소년을 뭉개고 뼈를 으스러뜨리며 지나갔다. 불구가 된 삶을 감당할 수 없었던 트럭 운전수는 그 애의 불구마저 부러뜨렸다. 초록불이었지만 트럭은 관성을 내버리지 않았고 소년은 일상의 속도를 따라 앞으로 돌진했다. 횡단보도는 계단 바로 위에 있었는데, 눈높이의 한참 아래에서 불쑥 튀어올라 여전히 어른의 시선보다는, 창백한 트럭 차량 위의 시선보다는 낮은 곳에서 기어가듯 달려가는 소년을 운전사는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실수가 아니었다면 그가 굳이 소년을 살해할 이유는 없었다. 실수가 아니었다면, 소년을 죽일 정도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그의 생 내내 없었을 것이다. 얼마 뒤 횡단보도는 계단에서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다섯 걸음 정도 옆, 다섯 걸음 정도의 유예를 두고 미루어진 관성과 관성의 교차점에서 다시 비슷한 사고가 일어났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보다 앞서 그 횡단보도에서 눈이 멀었던 소년들은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더이상 소년인 채 죽을 수 없는 소년들은 낭만적이고 비참한 죽음에 대해 듣고 오래도록 잊혀진, 앞으로도 잊힌 채로 남을 자신의 절망에 대하여 생각했을까, 혹은 소년의 아까운 절명에 대하여 애도했을까. 그들이 자신을 위해 울었기를 바란다. 그들을 위해 같이 눈물을 흘려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눈에 검은 피가 고인 채로 비참하게 늙어간 그들의 생을 의심하고 그들을 애도해준 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들은 아마 죽음조차 경험하지 못할 것이므로. 자신의 장례 한복판에 앉아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음을 그들은 보지 못할 것이다.

여자는 유년을 잃어버린 소년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습관대로 횡단보도가 있던 자리를 건너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더이상 신호등도 하얀 줄도 없었지만 그들은 자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그들이 눈이 멀었던 유일한 장소, 그들이 기억하는 유일한 장소인 횡단보도가 변해버렸다는 것을 보지도, 믿지도 못했다. 그들은 유일한 추억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몇 명의 어른들은 예전 횡단보도가 있던 자리를 건넌다. 트럭 운전수들은 두 군데의 지점에서 속도를 늦춘다. 횡단보도와 횡단보도의 유령 앞에서. 어느 쪽이 유령인지 그들에게 구태여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명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일상을 횡단한다. 그들의 눈 속에 파묻힌 새의 깃털이 언젠가 그들을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기를 은밀히 기원하며. 그러나 일상의 횡단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일상뿐이다.

우리는 평생 아무도 모를 언어를 울다 가는 거야. 혼자만의 언어를 발명한 시인처럼 죽을 때까지 헛소리만 지껄이다 가는 거야.

사상과 철학을 논하는 당신의 벌린 손에 아무런 언어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중얼거렸던 말들이 시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난 믿을 수 없었어요.

죽음조차 우리를 부재로 내딛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이라 보이는 행위의 정체는 다만 존재의 정지, 삶과 죽음을 모두 미루어두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너희의 미래뿐이었다. 가슴이 찢어져 하얀 진물이 새어나올 환희를 끝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미래, 간절한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 희열도 희망도 난교도 소름도 없는 미래, 시소처럼 불안한 일상의 프레임은 끝내 조금도 열리지 않고 너는 틈을 찾지 못한다. 작은 체액을 갈구하며 가짜임을 알고 있는 틀에 머리를 부딪혀 찧어 대어도 틈은 생기지 않는다. 경계조차 갖지 않은 사람들, 경계를 찢을 필요도 없이, 틀의 바깥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찢고 질질 흐르는 하얀 진물을 마신다. 갈증을 축이고 나면 끔찍하게 부드러운 모래까지 게걸스럽게 삼킨다. 그들이 그들의 생에서 떠오르고 추락하여 찬란하게 부서지는 사이 너는 영원히 저물지 않는 너의 생의 내부만을 절망적으로 응시하고 있다.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는다. 폭음과 파열, 파괴와 찢김의 모든 쾌락은 너의 바깥에 있다. 내부에서 너는 조심스레 무너져내릴 뿐이다. 투명하고 비밀스러운 출혈조차 없이.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너는 사내의 거짓된 사랑이 실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를 죽였던 노래가 실재했다는 것을, 그들이 앓았던 병이 실재했다는 것을, 그들이 꾸었던 악몽이 실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거짓들은 장소도 시간도 없이 실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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