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쌍둥이 2

반쯤 열린 진료실 문밖으로 하늘빛 간호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서성거린다. 그들은 소문처럼 무성하고 소문처럼 흐릿하고 소문처럼 아름답다. 여자는 의사의 유독 크고 부드러운 머리가 당장이라도 고꾸라져 꺾여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얼굴은 지독히 붉은빛이고 그의 얼굴은 아이처럼 매끄러우며 왼쪽 귀에는 종유석 모양의 긴 살점이 늘어져 있다.

선생님은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어요, 하고 여자는 참지 못하고 말한다.

의사는 피식 웃는다. 여자는 그가 긍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그의 한쪽 귀를 홀린 듯 바라본다.

그녀와 함께 교실에 앉아 있으면 그녀의 얼굴 쪽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이 나방처럼 몰려들었는데 내 쪽으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죠. 내겐 친구가 한 명도 없었고 그 애에겐 친구가 죽도록 많았으니까.

그녀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교적이었어요. 우리가 공유하는 불구마저도 그 애에게는 사교를 위한 매력적인 자질이 되었죠. 다리를 저는 애들이나 언청이나 눈먼 아이들과도 같은 매혹적인 무언가가 그녀에게 있었어요.

우리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전신을 찍고난 뒤면 그녀의 붉고 엷은 입술에 마이크를 가져다 대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 애는 어릴 때부터 립스틱을 좋아했어요. 얼굴에 희거나 검은 분을 바르기도 했지만 짙은 푸른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죠. 그러나 입술 색은 나날이 바뀌었어요. 어떤 날은 깊은 숲처럼 짙은 녹빛이었고 어떤 날은 흘러가는 새벽처럼 보랏빛이었고 또 어떤 날은 낙화하기 직전의 꽃처럼 붉은빛이었죠. 입술은 투명한 유리처럼 매번 다른 빛이었고 난 유리창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듯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어요.

그녀의 빛은 한 번도 내게 번진 적이 없었고 우리는 영원처럼 떨어져 있었지만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등교할 때 내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건 아니에요. 몸이 그녀에게 있는 날에도 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죠.

학교에서, 하고 여자는 말을 멈추었다.

의사는 갑작스럽게 고개를 숙였고 그의 붉은 머리가 테이블 한가운데에 부딪혀 크고 둔중한 소리가 불완전한 밀실에 울려퍼졌다. 남자 간호사들 셋이 순식간에 진료실 안으로 밀려들더니 쓰러진 의사를 등에 들쳐메고 진료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의사를 들쳐멘 것은 두 명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끔찍이 불안한 몸짓으로 서성거리며 그들은 올려다보기만 하였는데 그들의 기묘한 행렬이 방 안을 빠져나가는 속도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병적일 정도로 느려서 여자는 단호히 굳어 있는 시계를 몇 번이나 훔쳐보아야 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선생님이 쓰러지실 줄 알고 있었다고요, 하고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남아 있던 간호사가 안도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달려들 듯 뛰어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선생님이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선생님이 마지막에 무슨 말을 들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직 죽지 않은 걸요, 그렇죠? 하고 여자는 불안하게 속삭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멀쩡하셨어요. 멀쩡히 앉아서 내게 뭐라고 충고하시기까지 했는데,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붉은 머리의 남자는 여전히 철제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는 서랍을 열고 닫듯 계속해서 양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자는 그가 푸른 알약을 꺼내들 때만 해도 그게 여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 부드럽고 축축한 입 속으로 알약 세 개를 밀어넣었고 벽에 걸린 거울에서 푸른 간호사는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며칠 밤새도록 이 자리에 앉아 계셨으니까요, 하고 말했다. 큰일은 없을 거예요. 저도 선생님이 곧 쓰러지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무언갈 찾으시는 것 같았죠. 우린 다른 누구보다도 선생님의 건강에 가장 예민한데 어쩔 수 없는 일이랍니다. 그가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까. 요즈음 의사는 그리 많지 않지만 간호사들은 끝도 없이 많으니까.

거울 표면으로 올라오는 붉은 형상. 간호사는 거울 밑바닥으로 사라진다. 의사는 수만 개나 되는 서랍들을 자폐적으로 열고 닫으며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여자는 그에게 그 서랍들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의사는 약들이요, 하고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는 약들을 무엇으로 만드냐고 묻지 않는다.

의사는 나비들이요, 혹은 나방들, 하고 대답하지 않는다.

의사를 들쳐메었던 간호사 두 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진료실로 들어온다. 그들은 선생님을 쉬게 내버려 두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여자의 진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던 순간, 의사가 그들의 뇌 속에 투영된 미래와 암시들을 찍어가던 순간 말 없이 오늘 이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여자는 그 사실을 아주 뒤늦게야, 오늘이 닥쳐서야 깨달았지만 의사는 그들의 뇌 속을 들여다보던 첫 순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자는 고개를 젓고 간호사들의 얼굴은 길고 깊은 주름으로 일그러진다.

원한다면 우리가 직접 지금 당장 무료로 수술을 해드릴 수 있어요, 하고 왼쪽에 서 있던 간호사가 절박하게 속삭인다. 지금 침대에서 일어나면 선생님은 죽어버릴 거예요. 새로운 의사가 오면 우리는 새로운 의사의 새로운 병 새로운 버릇 새로운 불구 새로운 이름 새로운 기호를 처음부터 다시 외워야 하겠죠 그것뿐이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새로운 의사가 새로운 간호사들을 데리고 온다면 우린 매일 그들을 떠올리며 절망할 거예요.

간호사들은 하다못해 입원실에서 의사와 면담을 하라고 종용했다.

여자는 간호사들의 안내에 따라 작은 병원에 하나뿐인 입원실로 들어간다. 가장 안쪽 침대에 의사가 등을 대고 누워 링겔을 맞고 있다. 누렇고 투명한 액체가 믿을 수 없이 느린 속도로 내려앉고 있다. 의사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인다.

여자는 미련만으로 살아가는 유령처럼 그의 곁, 맨바닥에 주저앉아 끝을 모르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웃고 있었어요. 그녀를 떼어낼 수 없었던 건,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내가 영원히 그녀의 죽음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어요. 그녀는 죽으면서 웃고 있었는데,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가 아니라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최후의 순간에 불현듯 죽음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거울이 깨졌을 뿐이라고 하셨지만 거울은 기억나지도 않는 예전에 깨졌고, 거울이 깨져버린 뒤에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었어요. 선생님. 우리는 깨진 거울로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잠들고 먹고 꿈꾸고 죽어갔어요.

얼마 뒤 그녀는 수백 개로 갈라진 얼굴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수십 명의 소년과 소녀들이 우리 방에 드나들었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그녀의 나신 곳곳을 어루만졌는데, 난 죽을 듯 수치스러웠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죠.

내가 창녀라고 불렀을 때 내 뺨을 때렸던 게 그녀의 손이었는지 내 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녀의 연인들을 쓰다듬었던 게 내 손이었는지 그녀의 손이었는지도.

창녀라고 불렀을 때, 난 그녀를 내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내가 그녀를 창녀라고 불렀기 때문에 울었던 게 아니라 우리 엄마를 창녀라고 불렀기 때문에 화를 냈던 거예요. 왜 어떤 아이는 자라나고 어떤 아이는 사라지는 걸까요. 그러면서도 모든 아이들이 남아 있는 까닭은 뭘까요.

내겐 처음부터 삶이 있었고,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에겐 처음부터 죽음이 있었지만 우린 가지지 못한 것만을 꿈꾸었죠. 그녀가 죽은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그녀의 몸을 애무하고 어루만지던 손과 입술들, 그녀의 손이 밀려들어가던 길고 아득한 늪들을 난 분명히 기억할 수 있어요.

아빠는 그녀가 아니라 내가 죽었다고 했어요. 살아남은 건 그녀뿐이라고. 그림자들은 우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난 나지막이 울고 있는 그녀의 떨리는 얼굴을 돌아보고, 그녀는 그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이 부드러운 말들을 주고받는데, 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누워서 그들을 보고 있어요. 정말 바라는 것은 가질 수 없는 데도 난 그녀의 푸른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봐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지고 말았을 푸른 얼굴들이 거울 표면으로 갑자기 떠올라버리는 까닭은 뭘까요.

의사는 끔찍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거울에는 깊이가 없어요. 거울은 아무것도 담지 못해요. 거울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사물 역시. 언어 역시.

여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한다.

그러나 의사는 여자를 듣는다.

우리에게 내려앉고 우리가 무너뜨리는 무게를 즐긴 적은 없었지만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내가 견뎌야 할 형벌 같은 게 아니었어요.

의사는 한쪽 손을 들고 탯줄처럼 매달린 긴 줄을 아래로 당긴다. 세 명의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입원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다. 입원실에 누운 환자는 의사뿐이다. 의사는 간호사의 넓은 어깨에 거대한 머리를 걸치고 진료실까지 서서히 끌려간다.

여자는 차디찬 바닥에서 일어서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간다. 그들은 밤처럼 희고 고요한 침대들을,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시트들을 유령처럼 지나친다.

여자는 너무 늦었음을, 모든 일이 끔찍하게 늦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죽은 자를 잊지 않고 살아남은 자를 용서하기에는. 시계는 고장난 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시간을 표류하듯 좁은 복도 곳곳을 누빈다.

의사의 붉은 머리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오르고 여자는 허공을 떠도는 흰 무릎들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그녀가 처음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우린 둘 다 겨울을 좋아했지만, 겨울만이 우리가 동시에 좋아하는 유일한 것이었는지도 몰랐지만 이토록 긴 겨울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겨울은 나날이 춥고 잔혹하게 벼려졌고 우리는 이 추위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들과 맞닥뜨렸죠.

교실에 앉아서 텅 빈 칠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날 갑작스럽게 울려퍼지던 날카로운 비명과 깊은 현기증처럼 울렁이며 들어오던 쥐들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선생님. 난 종종 중요한 것들을 잊고 끔찍이 무의미한 것들을 잊지 못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죠, 선생님.

쥐들은 당황스럽게 웃고 있었어요.

균형이 맞지 않게 올라간 삐뚤빼뚤한 아가리. 삐뚤빼뚤한 치열. 그들의 이는 눈처럼 희었고 겨울처럼 날카로웠어요.

쥐들이 나무 바닥을 폭설처럼 뒤덮었고, 찍찍 비명을 질렀고, 소년들은 소녀처럼 높은 소리로, 소녀들은 소년처럼 쉰 소리로 비명을 질렀어요. 쥐들이 눈사태처럼 떨어져내리고 추락한 쥐들이 깨진 머리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그러면서도 쥐들이 더 밀려들고 점점 더 점점 더 많이 밀려들고 깨진 유리창이 깨진 전등이 깨진 책상이 깨진 바닥이 깨진 대기가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는데도 쥐들은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어요.

쥐들이 책상 위로 밀려들고 책상 다리를 갉아먹고 살려달라는 듯 애달픈 몸짓으로 경련하며 앞발을 흔들고 우리는 의자 위로 올라갔는데도 쥐들은 우리의 발치로 쌓여들었고 우리가 책상 위로 올라갔을 때 이미 책상 위에 깨진 유리조각처럼 널브러져 있던 죽은 쥐들은 꿈틀거리며 구역질을 해댔고 우리는 그제야 그들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았어요.

결국에는 쥐들을 밟을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눈처럼 쌓인 희고 검은 쥐들을 짓밟고 창가로 문가로 흩어졌어요. 역겨울 정도로 따끈하고 물컹한 살이 실내화의 얇은 밑창 너머로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한없이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어요.

참지 못하고 아래로 고개를 숙였을 때, 발 아래 짓밟힌 작은 쥐는 아가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어요.

난 그들이 전부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어요.

쥐들은 나를 따라서 갑작스레 울부짖기 시작했고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날 보면서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로 흐느꼈고 몇 달 내내 우리는 쥐들에 시달려야 했죠.

그녀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바깥에 나갈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어요. 실내에는 쥐들이, 바깥에는 고양이들이 들끓었으니까. 버려진 쓰레기처럼 쌓인 고양이들. 지구의 물컹한 심부를 겉도는 대륙처럼 떠도는 고양이 무리. 쥐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을 때도 고양이들은 여전히 바깥에 남았죠. 굶주린 고양이들이 처음으로 소년과 소녀들을 공격하기 전에 우리는 일시에 마법처럼 죽어버린 쥐들을 위해 기도하고, 먼지처럼 쏟아져나오는 쥐들을 빗자루로 쓸어내 운동장에서 태웠어요.

남자애들은 빗자루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가느다란 몸을 폭력적으로 던져내며 뛰어다녔죠. 고소하고 달콤한 악취가 매캐한 연기와 함께 지상과 하늘로 침잠했어요. 고양이 몇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대부분은 아름다운 눈을 붉게 일렁이는 마지막 매혹으로 태워내며 불 바깥에서 서성거릴 뿐이었죠.

소외되었던 간호사 한 명이 은근슬쩍 여자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은밀하게 소곤거렸다. 선생님은 자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꿈꾸듯 부드럽고 몽롱한 손길로 보이지 않는 서랍들을 열었다 닫고 있었다. 선생을 부축하고 있는 두 명의 간호사들은 의뭉스러운 눈길로 의사의 검게 뜨인 눈을,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투명한 눈물만을 나지막이 출혈하고 있는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검고 축축하기만 한 세계에는 어떠한 암시도 없었다.

서랍들에는 약이 있어요. 하고 간호사는 소곤거렸다. 약들은 모두 나방과 나비로 만들어요. 전부 죽은 나비로 죽은 나방으로 만드는 거예요. 하고 간호사는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그러나 여자는 듣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묻지 않은 말, 의사가 대답하지 않은 말을 여자는 이미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의사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져 쓰러지고 만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머리 아래에는 단단하고 비교적 높은 철제 테이블이 버티고 있었고 간호사들은 번갈아 그의 이마를 두툼하고 커다란 손으로 문질러 준다. 간호사들은 만류하듯 여자를 향해 눈짓하지만 여자는 폭력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선생님, 결과적으로 선생님은 아무것도 치료해주지 못했어요. 우리는 끔찍한 오해에 시달리다 죽어버렸고 또 살아버렸어요. 아빠는, 아니 당신은, 아니 아빠는 그녀의 목을 면도칼로 도려내면서 울었어요. 이제 만족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고 난 살아남았던 거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한 고통에, 독립과 자유를 위한 불가피한 고통,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자멸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웃었어요.

난 어쩔 수 없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어요. 살아남은 건 그녀가 아니라 나고 죽은 건 그녀라고.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죠. 살아남은 건 그녀이고 죽은 건 너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이곳이 지옥이나 악몽이 아니라면 죽은 건 그녀이고 살아남은 건 나죠. 선생님. 단순히 거울이 깨진 게 아니에요. 거울이 깨진 건 모든 것이, 모든 세계가, 모든 그녀가 깨져버렸다는 말이에요. 어떠한 암시도 메타포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깨져버렸다는 거예요.

선생님. 당신이 아직 잠들기 전에 당신의 죽음을 본 적이 있어요. 끔찍하게 외로웠지만 아무에게도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죠. 당신의 죽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만 거울은 깨지지 않았고 시계는 여전히 정지한 채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당신은 갑자기 일어나 부서진 이마를 가리키면서 우리가 당신을 살해했다고 했죠.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당신은 나비의 날개처럼 푸른 알약을 삼키고 다시 잠들었고 우리는 당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죠.

그녀는 죽은 쥐를 두 팔로 끌어안고 울었어요. 우리 품에 비해 너무 작은 쥐가 흘러내려 끝없이 많은 쥐들 속에 뒤섞여 사라져버리고 난 뒤에도 그녀는 이름 모를 쥐를 부르며 울었죠.

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아직 죽지 않은 엄마를 사랑하듯이 죽어가는 연인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한다고요.

하지만 그녀는 내가 엄마를 창녀라고 부른 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대답했죠.

아빠가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순간 난 그가 엄마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난 엄마의 품에 안겨 있고 엄마의 따끈하고 부드러운 배에 등을 붙인 채로 그녀의 죽음을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있다고. 마치 그녀의 죽음에 내가 속해 있듯이 그렇게 가깝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만 아빠는 죽어가는 게 그녀도 엄마도 아닌 나라고 말했죠.

어린아이처럼 크고 깨끗한 의사의 눈이 여자를 마주보았다. 여자는 의사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가 헤어날 수 없이 깊고 애틋한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간호사들은 의사가 죽었다고 소리치며 좁은 진료실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지만, 여자는 그들이 너무 이르게 죽음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가만히, 죽어가는 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이야기가, 의사에게는 아직 악몽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죠. 그녀가 죽었다면, 죽은 게 그녀라면 그녀는 처음부터 죽음에 속해 있었던 것이고, 살아남은 게 나라면 난 처음부터 삶에 예속되어 있었던 거예요.

난 현실을 바꾸길 원하지 않아요. 그걸 수치스럽게 여기지도 않고. 난 현실에 속해 있지 않으니까. 이 악몽은 당신들의 현실-그래요 진짜 현실. 내 것은 언제나 거짓이고 환각이고 망상이고 병증일 뿐이죠. 나도 잘 알고 있어요-과는 무관하니까. 당신이 우리의 결별을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당신에게 매달리지 않았죠. 당신에게 묻기 전부터, 당신이 거절하기 전부터 우리는 당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이 우리를 돕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우리의 부모도 연인도 친구도 아니었으니까.

선생님. 하지만 아빠는 연인을 죽이듯 그녀를 베어내었죠. 면도칼은 너무 예리하고 가늘어서 사람의 목을 베어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어요. 아빠는 손을 끔찍하게 베었고 깊게 갈라진 손바닥에서는 그녀와는 달리 한없이 붉기만 한 피가 흘러내렸어요. 마치 손바닥에서 그녀의 죽음을 낳듯이. 끔찍하게 찢겨나간 손바닥 깊은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

하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삶에 속한 사람은 끝까지 삶에 머물고 죽음에서 태어난 사람은 끝내 죽음으로 돌아가요. 하지만 아빠는 죽은 사람이 나고 살아남은 사람은 그녀라고 말했어요. 아빠는 실수하지 않았다고. 실수는 없었다고.

난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어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녀의 죽음은 당신이 우리의 운명을 빼앗아가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고, 이미 오래전에, 아빠가 면도칼을 들기도 전에, 우리가 결별을 선언하기 전에, 그녀가 살고 내가 죽기로 마음먹기도 전에, 우리가 태어나던 순간보다 더 전에 엄마가 머리가 두 개인 괴물을 꿈꾸며 죽어가던 그때 이미 발생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모든 암시와 예감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고 우리는 미래의 기억을 잊은 채로 흐릿하고 불길한 미래를 꿈꾸면서 혼란스러워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선생님.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난 아주 나중에 태어날 테지만 시간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시간의 선후라는 건 애초부터 순전히 자의적인 개념, 시간을 한 번에 조망할 수 없는 시야의 근시성 때문에 생겨난 오해일 뿐일지도 몰라요.

난 언제나 태어나고 있고 선생님은 언제나 죽고 있고, 우리는 병적으로 왜곡된 시야로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라면, 모든 미래가 이미 발생한 사건이라면, 그래서 과거를 취소할 수 없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도저히 닦아낼 수 없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순간에 이미 그녀는 죽었던 것이고, 그녀의 푸른 얼굴은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그녀가 처음부터 유령이었고 난 처음부터 삶이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바랐던 걸까요.

나는 그녀를 바랐지만 그녀는 정말 나를 바랐던 걸까요? 그게 아니면 그녀가 아닌 모든 시간을 간절히 기원했던 것인지. 난 끝내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는 날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죠. 인간은 언제나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정신과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조악한 정신 틈에 끼어 살아가니까 그 중간은 없어요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그런 정신은 언제나 혼자죠. 난 갑작스럽게 혼자가 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 살아있는 시간에도 우리는 동시에 혼자였고 혼자를 공유할 뿐이었죠.

간호사들은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보이지 않는 무수한 서랍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오랜 미래에 발견한 약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여자는 의사가 이미 푸른 알약 세 개를 삼켰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 발견할 것이므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이미 죽은 나비의 날개와도 같이 푸른 세 개의 알약을. 의사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쥐들은 없었다. 여자는 갑작스럽게 알아차린 듯 중얼거렸다.

선생님 쥐가 없어요. 쥐는 없어요. 쥐들을 태우던 순간 교실 안쪽으로 끔찍하게 밀려들던 말캉하고 포악한 살들 짓밟혀 부러지던 살들 한밤의 나방처럼 몰려든 고양이들을 일별하듯 불타 사라지던 쥐들의 기억은 아직도 치명적으로 선명한데 여기에는 쥐들이 없군요 한 마리도 없어요 한 마리도.

여자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기억의 부작용이죠. 하고 의사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여자는 의사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죽은 의사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영원히 죽어가고 영원히 죽어버린 의사가 살아있다는 것을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연푸른 미소마저. 그녀는 더 이상 푸른 얼굴로 웃지 않는다. 여자는 그들이 모두 처음부터 지금 태어나서 도래하지 않은 미래만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모든 과거는 미래의 것이고 모든 미래는 과거의 것이다. 과거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고 미래는 오래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여자가 꿈꾸는 모든 예지몽들은 오로지 아직 완수되지 않은 과거만을 예언하고 그녀는 이미 지나친 미래로부터 뻗어나가는 가지에 따라 하염없이 흔들리며 나아간다.

거울은 아직 깨지지 않았으나 여자는 거울이 이미 오래전에 깨졌다는 사실을 안다. 참을 수 없는 현기증에 사로잡혀 여자는 미지근한 눈물을 흘린다. 악몽이 잠 이후까지도 그녀를 쫓아와 푸른 입술로 입맞추기를, 단단하고 노골적인 빛으로 번져가기를 바라지만 여자는 이미 꿈 바깥의 치명적인 공백을 예감한다.

돌이킬 수 없이 텅 비어 있는 어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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