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옷장 속 남자(맹아원4)

아이들에게는 환상이 있다. 환상은 현상이다. 소녀는 몽상가가 아니었지만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옷장 속 남자와 처음 마주친 것은 혼자 하는 술래잡기라는 기묘한 놀이에 대해 들었을 때였다. 소녀는 학습방 한구석에 앉아 소녀들이 이상한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들은 모두 그 놀이를 해보았다고 말했다. 곰인형의 배나 눈을 식칼로 찌르고 이제 네가 술래라고 말한 뒤 옷장 속에 숨으면 곰인형이 다가오는 소리를, 입이 찢어진 귀신처럼 웃는 곰인형의 얼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물론 그녀들 중 절반은 형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지만-. 그 놀이에 별다른 규칙은 없지만 반드시 혼자 해야 한다고 소녀들은 말했다.

소녀는 기계적으로 점자를 훑어나가며 소녀들의 속닥거림을 들었다. 처벌방에 다녀온 뒤부터 소년은 소녀에 대한 열의를 잃고 조용했다. 셀 수 없었던, 그러니 일주일인지 열흘인지도 알 수 없었던 처벌방에서의 침묵이 소년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은 것 같았다. 소녀는 가끔씩 그가 정말 자신의 소년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유달리 커다란 검은 눈과 개처럼 둥글고 작은 코, 길고 엷은 입술, 끝이 뭉그러진 귀와 살짝 굽은 흰 목은 소녀의 기억과 소년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었으나 지금의 소년은 어딘가 풀이 죽었고 시무룩했으며 싸늘했다.

어린 아이 특유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사라져버린 소년은 갑작스럽게 그의 직분에 맞는 사람으로, 직분에 전형적인 인물로 변모해버린 것처럼 피로해 보였다. 소년은 더 이상 소녀에게 잘못의 정기적인 고백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차라리 처벌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 같았다. 처벌방 바깥을 처벌방 안보다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처벌방이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것 같았다. 소녀가 그의 옆에서 대담하게 진짜 책을 읽어내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타자기로 글을 써도 소년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정말 소년은 소녀에게 둥글고 신맛나는 사탕을 쥐어주던 짖궂은 손을 가진 그 소년이 맞을까? 무기력한, 권태보다도 깊은 피로와 무력에 젖은 노인과도 같은 두 눈. 처벌방의 무엇이 소년을 이토록 병들게 만든 것일까?

소녀들이 말한 술래잡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냐고 소년에게 넌지시 물을 때도 소년은 조숙한 어린아이처럼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홀로 소녀들의 이야기에 대해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 실밥이 뜯어잔 다리로 절룩거리며 쫓아오는 곰인형. 이미 헤어진 몸을 찢어낸 죄를 묻기 위해 쫓아오는 집요한 얼굴. 사물의 얼굴. 그러나 모든 곰인형들은 같은 최후를 맞지 않던가? 낡고 헤지고 질려버려서 쓰레기장에서 소각되어 공기중에 유독한 체취로 흩어지는 것이 인형들의 숙명이 아니었던가? 이제 소녀는 사물에게도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걸까?

맹아원에는 인형들이 많았다. 성탄절, 생일, 어린이날, 온갖 기념일마다 소녀들과 소년들은 인형을 하나씩 선물 받았다. 간혹 영악한 소년 소녀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인형, 질려버린 인형을 일부러 찢어내 훼손시키고 새 인형을 요구하기도 했다. 맹아원에서 마음껏 구할 수 있는 것은 무해한 솜으로 가득 채워진 말캉한 봉제인형이 전부였으므로. 아이들의 연약하고 무방비한 피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단단한 로봇 장난감 같은 것은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소녀 역시 크리스마스에 선물받은 곰인형의 귀를 자르고 배를 갈라 그 속에 구겨진 종이를 감춘 적이 있었다. 인형의 가죽을 얼기설기 얽어놓은 성긴 실밥을 뜯어내어 속살을 까뒤집은 적도 있었다. 장기 하나 없이, 희고 부드러운 솜만으로 가득찬 내부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헤집고 비틀고 긁어내리면서 소녀는 새로운 인형을 바랐다.

저녁 식사 후 취침방으로 이동하며 소녀는 그녀의 뒤를 은밀하게 쫓아오는 뒤뚱거리는 발걸음을 느꼈다. 곰인형의 헐겁고 헤픈 미소를. 그러나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씹다 뱉은 껌처럼 미적지근하고 끈끈한 것이 소녀의 가슴에 늘러붙었다.

소녀는 곰인형에게 변명하고 싶었다. 네가 살아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널 찢고 가르고 훼손시킨 건 단지 네가 상처입을 수 없기 때문이었어 네게 고통도 증오도 원망도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만약 고통과 증오와 원망과 상처가 생의 부속물이 아니라면, 생 없이도 고통과 증오와 원망과 상처가 깊은 얼룩처럼 떠다닐 수 있다면, 소녀의 것이 아닌 고통과 증오와 원망과 상처를 곰인형이 가지고 있다면.

소녀는 잠든 소녀들의 흰 눈꺼풀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소녀들은 대체 어디에서 홀로 그 놀이를 해보았다는 것일까? 소녀들은 그녀들을 따라온 것이 곰인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왜냐하면, 하고 검은 머리가 속삭였다. 그녀들이 찢고 훼손하고 더럽힌 게 곰인형이라는 걸 그 애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곰인형도 아픔을 느낀다는 걸, 곰인형도 고통스럽다는 걸 그 애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생은 악한 거야 살아있는 걸 비난할 수 없다면 악한 것을 책망할 수도 없어. 어둠을 짓물러놓은 희멀건 빛은 그렇지 않다고 속삭였다. 아픈 건 아픈 거야, 그게 더 나쁘기 때문도 더 부당하기 때문도 아니야 살아 있는 건 더 살아 있는 건 아픈 거야.

소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무력한 것, 그녀보다 약하고 가련하고 사랑스럽고 비참한 것을 비틀어 훼손시켜야 했다. 생에 그녀가 닿는 모습을 그녀의 여운이 고통으로 으스러지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아무도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을 비난할 수 없었다.

소녀는 눈 멀지 않은 소년들과 소녀들이 눈 먼 소녀들과 소녀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두 보았다. 눈 먼 소년들과 소녀들이 곰인형의 눈을 파내고 다리 사이를 가위로 헤집어 찢어내는 것을 보았다.

처벌방은 어두웠다. 그러나 눈 멀지 않은 소년과 소녀는 희미한 빛으로 방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이 보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소년 역시 소녀가 보는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무엇을 보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녀들이 소녀들의 팔꿈치와 가슴을 꼬집어 비트는 모습을 보았다. 소녀들이 소녀들의 식판에 아직 산 채로 꿈틀거리는 작은 나방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국그릇 속에서 잘려나간 반신을 허덕거리며 도망치기 위해 이미 불가능한 삶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비참하게 펄떡대던 날개들, 눈 먼 소녀가 구토하는 동안 등을 두드려 주고 입가를 닦아준 것 역시 그 소녀였다. 깨끗한 물로 입술을 축여주고 흘러내린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준 것도.

그녀들을 경악하여 바라보는 소녀에게 교사 소녀는 소녀가 밤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보았다고 했다. 젖은 수건을 문 밑에 끼우고 남몰래 불을 켜고 얼마나 비열한 짓을 하는지.

교사 소녀는 착각하고 있었다. 소녀는 소녀들의 적도, 밀고자도 아니었다. 소녀는 사랑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고양이의 목을 비틀어 죽이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소녀는 제발 다른 곳으로 도망가라고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아, 난 너희들을 봤어. 음울하고 비속하고 벌거벗은 애정을,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비난할 수 있겠어? 난 이미 불을 켜고 소녀들의 어둠을 빼앗고 그들의 결핍을 강탈하며 글을 쓰고 있는데.

소녀는 그들의 범죄가 용서를 요구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었으므로. 상처 입기 위해, 자비롭고 신랄한 헌신을 내맡기는 눈 먼 소녀들, 소녀는 눈 먼 소녀들이 교사 소녀들에게 예속되어 있듯 교사 소녀들 역시 눈 먼 소녀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눈 먼 소녀들은 교사 소녀들만큼 눈 멂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다. 교사 소녀들은 눈 먼 소녀들의 눈 멂을 바라보고 있기에,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소녀들의 눈 멂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감긴 눈, 은밀하게 감추어진 흰빛에 다리를 밀어넣은 소녀들은 맹아원을 빠져나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들은 눈 멀지도 않았음에도, 교사 소녀들은 맹아원에 살고 있었다. 눈 먼 소녀들과 함께. 그녀들은 눈 먼 소녀들이 읽는 것을 읽었고 눈 먼 소녀들이 듣는 것을 들었고 눈 먼 소녀들이 만지는 것을 만졌으며 눈 먼 소녀들이 보지 못하는 것만을 보았다.

눈 먼 소년들과 소녀들은 교사 소년들과 소녀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은근한 괴롭힘을 받아들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가 맹아원으로 찾아오는 날, 교사 소녀들은 눈 먼 소녀들의 곁에서 말갛게 웃으며 그녀들을 쓰다듬었고 눈 먼 소녀들은 줄에 묶인 흔적과 멍자국을 스스로 가렸다.

소녀의 부모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소녀의 두 눈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운 것이리라. 눈 멀지 않은 소녀와 대면하는 것이, 눈 멂의 확고한 빈자리를 바라보는 것이 미친 듯이 두려운 것이리라. 소녀가 눈 멀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은 소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소년이 주저하면서 소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을 때, 소녀는 그의 검은 눈을 쳐다보았고 소년은 붉은 고기처럼 상기된 얼굴로 흐느끼며 울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후로 소년은 다시는 소녀를 만지지 못했다. 소년은 소녀의 눈 멀지 않음을 눈 멂의 고요하고 날카로운 결핍을 사랑하지 못했다. 소녀가 소년을 원하는 만큼 소년은 소녀를 원하지 않았다. 아니, 소녀가 소년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소년 역시 소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소년은 국 속에서 헤엄치는 나방을 으스러뜨리는 소녀의 입술을 똑바로 응시해야 했으므로, 소녀를 사랑하기 위해 소녀가 응시하는 것을 마주해야 했으므로.

그는 소녀가 밤마다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눈 먼 소녀들, 무력한 소녀들을 얼마나 비열하고 역겹게 이용하고 있는지. 그녀들의 순결한 잠을 어떻게 희롱하고 있는지.

교사 소녀가 길게 기른 손톱으로 눈 먼 소녀의 겨드랑이를 누르는 동안, 소녀의 흰 살에 유치한 분홍빛 무늬들을 새기는 동안 소녀는 어째서 그들과 함께 남아 있었던 것일까.

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이미 물거품처럼 바스라졌다. 소녀는 교사 채용 시험에 합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녀의 언어는 글쓰기의 언어이지 교육의 언어가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직관적으로 이해한 뭉텅이 단위의 기묘한 언어를 간결한 숫자와 답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그녀는 몰랐으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소녀에게는 모의시험 문제집의 답이 없었으므로. 소년은 소녀가 틀린 답을 했다는 사실을 끝내 몰랐지만 답을 가지고 있는 채점자들은 소녀의 독해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알아차릴 것이었다.

소녀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가 과거에 눈 멀었다는 기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착오였다. 눈 멀었던 소녀는 더 이상 지금의 소녀가 아니었다. 눈 멂을 잃어버린 이후, 소녀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소녀는 전혀 다른 현상을 느꼈으며 그녀의 세계는 시각을 주축으로 재편성되었다. 소녀는 이전에 사랑하지 않았던 것들을 사랑했고 이전에 사랑했던 것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소녀가 눈 멀었다면 밤의 곤충처럼 불안하게 떨리는 소년의 목소리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소년의 아이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앞으로 살짝 굽은 매혹적인 목선을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소년을?

그리고 소녀는 부모를 잊었다. 눈 먼 그녀의 온 세계와도 같던, 어둠과도 같던 부모를 소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포기했다. 그들이 소녀를 보러 오지 않아도 소녀는 속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소녀의 과거, 소녀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파편과도 같은 추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맹아원은 소녀의 새로운 세계였다. 눈 멂과 시각 사이의 깊은 심연과도 같은 불연속성이 한 번 더 소녀를 관통하지 않는 이상 소녀는 맹아원을 떠날 수 없을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모어를 벗어나지 못하듯, 소녀는 눈 멂의, 유년의 흔적이 남아서 숨쉬고 살고 있는 곳을 떠날 수 없을 것이었다.

눈 먼 소녀들을 볼 때만큼 소녀가 강렬하게 시각을 경험하는 순간은 없었다. 잠 든 소녀들의 흰 눈꺼풀을 내려다보며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상상할 때만큼. 그 어떤 찬란한 풍경도 이보다 더 황홀한 광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눈 먼 소녀들의 몸 구석구석 새겨진 끔찍한 분홍빛의 흔적들. 소녀는 소녀들의 헐렁한 원피스 잠옷 아래를 더듬어 내었다. 그녀들이 보지 못하는 상처를, 오직 소녀만이 갈취할 수 있는 최초의 이미지를 소녀는 게걸스럽게 훑어내었다.

소녀는 눈 먼 소녀들의 몸 어디에 어떠한 형태의 분홍빛이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 배꼽 위, 가슴 아랫부분과 어깨 밑, 갈비뼈 인근과 둔부, 소녀는 상처를 남긴 손톱들과 공범이었다. 그 비열하고 역겨운 박해와 치욕의 이미지를 소녀는 전부 훔쳐내었으므로.

가위는 원래 반입이 금지된 물품이었다. 교사 소녀들이 가위를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소녀는 알 수 없었다. 학습실의 책상에 무방비하게 올려진 흰색 문구용 가위를 훔쳐낼 때만 하더라도 소녀가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소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 치명적인 무기로 소녀는 곰인형의 사지를 뜯어내었다.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서커스단에서 공중곡예를 하던 아이의 이야기를 구겨넣었다. 소녀들이 복수하는 곰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소녀는 곰인형의 내부에서 망가진 몸을 운반하는 곡예사 아이를 떠올렸다.

그러나 곰인형은 소녀를 따라오지 않을 것이었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눈 먼 소녀들이 교사 소녀들을 밀고할 수 없듯, 교사 소녀들이 눈 먼 소녀들을 졸업시킬 수 없듯, 찢겨나간 곰인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혼수상태와 같이 음울하고 병적인 죄악감은 소녀의 내부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곰인형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소녀가 억지로 밀어넣은 이미지들은 그녀의 내부에서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곰인형은 소녀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이다. 곰인형은 병균과도 같은 이미지들을 퍼뜨리지 않을 것이다. 눈 먼 소녀들은 눈 멀지 않은 소녀들의 무릎 옆에 무방비한 흰 이마를 드러내고 누워 잠들 것이다. 악독한 애정, 가장 비열하고 끔찍한 삶을 벗어나서 그들은 무얼 붙잡을 수 있을까. 찢어내고 상처내지 않고 무엇을 만질 수 있을까.

곰인형의 부드러운 배를 쓰다듬을 때 그들은 행복했다. 곰인형의 배에 입맞출 때 그들은 꺄르륵 웃었다. 곰인형의 배를 찢어낼 때 그들은 살아 있었다.

교사 소녀들이 떠나가면, 맹아원의 밀폐된 공기를, 건물 내부를 점령한 눈멂의 만연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눈 멀지 않은 자들의 도시로 돌아간다면 눈 먼 소녀들은 또 다시 눈 멀지 않은 소녀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교사 소녀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곳을 견디기 위해서는 눈 멂을 만끽할 수밖에 없다고, 눈 멀지 않은 소녀들은 눈 멂에 가장 가까이 근접할 수밖에 없다고. 끊임없이 눈 멂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봤어, 하고 눈 멀지 않은 소녀의 작은 입술이 속삭였다.

눈 멀지 않은 소녀들은 눈 멂의 공간에서 부수적인 존재였다. 눈 먼 소녀들의 광활하고 풍요로운 눈 멂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을 만큼. 교사 소녀들이 얼마나 비열하게 눈 먼 소녀들에게 진실을 감추고 있는지, 소녀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 오로지 눈 먼 소녀들과 소년들의 공간이라는 사실, 눈 먼 소녀들과 소년들 없이는 맹아원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 그러나 눈 멀지 않은 교사들은 언제든지 내쫓길 수 있다는 사실, 눈 멀지 않음이 눈 멂에 치명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눈 먼 소녀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 멀지 않음의 공범이었으므로. 소녀들의 부드럽고 발긋한 상처마다 입을 맞추었으므로, 발각되지 않은 상처, 가장 신선하고 깨끗한 상처를 빼앗기 위해 교사 소녀들의 범죄를 묵인하였으므로. 소녀들의 범죄적인 갈망과 사랑은 악몽처럼 매혹적인 검푸른 어둠으로 가득찬 풍요로운 눈멂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흰 석회 벽면마다 빼곡이 들어찬 소녀들의 그림자, 삶을 갈망하며 불어나는 헐벗은 그 많은 그림자들 앞에서 소녀는 꽃잎들을 세었다.

소녀가 발견한 것은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잠든 소녀들 곁에서 원한에 사로잡힌 곰인형의 일화를 떠올렸을 때 소녀는 곰인형이 쫓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안쪽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축축하고 끈적한 무언가는 곰인형이 아니라 눈멂의 잔재라는 것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소녀들의 발치에 옷장이 있다는 것도 옷장 속에는 옷밖에는 없다는 것도.

그러니까 옷장 문을 열었을 때 흰 원피스들 사이에 파묻혀 잔뜩 수그린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던 창백한 사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소녀가 아는 어느 누구도 닮지 않았지만 소녀에게 그의 흰 얼굴과 푸르스름한 입술, 잔뜩 웅크린 앙상한 몸과 둥근 어깨는 낯설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녀는 끔찍하게 놀랐다. 심장이 조각조각 바스라져 속살을 찔러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사내 역시 갑작스럽게 열린 옷장으로 스며들어온 난폭한 흰빛에 놀라 눈물을 흘렸다. 그가 그 순간 눈 멀어버렸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사내는 오래도록 눈물 흘렸다. 투명한 눈을 끔찍하리만치 천천히 끔뻑거리면서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을 축축하게 적시는 흰빛. 그는 유령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경악하는 두 눈, 고통스럽게 젖어드는 얼굴을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그곳에 있었는데, 존재 없이, 죽음도 없이,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는 채로. 사막보다 광활한 아이들의 옷장에, 오로지 찌그러진 흰 알처럼 축축하고 미지근한 삶만으로 그곳에.

소녀는 그를 보는 것이 죽을 듯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녀는 눈 멀지 않았으니까. 사내 역시 그녀가 눈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소녀가 아는 것은 사내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사내는 그녀가 그토록 빨리 갑작스럽게 문을 열어버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소녀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난 이곳에서 끝까지 너희들을 보고만 있을 작정이었어. 하고 그는 소녀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문을 열지 않았으면 이곳에서 먼지처럼 조용히 견뎠을 거야. 사내는 왜소한 몸을 더 둥글게 웅크리며 말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미래에 대한 사소한 예감조차 없이 그는 옷장 안에 앉아 있었다. 소녀에 대한 원망과 고통스러운 발각의 여운만으로, 그는 무언가를 요구하듯 소녀를 물끄러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생명을, 끔찍하고 역겨우며 달콤한 액체를 책임질 수 없었다. 옷장 안에서 숨쉬고 박동하는 존재 없는 생명을,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헐벗고 원형적인 생을, 그는 감히 소녀에게 맡겨버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극단적인 추함을, 갈급한 구석자리를 소녀는 결코 삼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상처 입은 맨눈을 위로하지도 그를 옷장 바깥으로 끌고 나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죄를 고백하기 위해 어둠을 찾아 기어들어간 뒤에 그는 곧장 그가 간직하고 있었던 내밀한 악행을 잊어버렸고 죄의 기억 없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침묵은 구원과도 같았다고 사내는 속삭였다. 그는 구원받았기에 다시 죄의 기억이 도사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그래서 그는 유년도 기억도 삶도 없이 그저 바퀴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생명만으로 살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소녀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달걀처럼 매끈하고 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곤충의 내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 식물의 뿌리를 뽑아내면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는 삶마저 찢겨져나가듯 사내는 죄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삶과 기억이 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듯. 소녀는 옷장 문을 열어놓은 채로 지냈다. 눈 먼 소녀들은 옷장 문 속에 웅크린 채 그녀들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사내의 불길한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문이 열린 뒤에도 사내는 계속해서 은닉되어 있었다. 그의 생명은 불가피한 비밀로 남았다.

소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았고 그의 옆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노골적인 것을 소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생이 악하고 흉측하며 앙상하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소녀는 그를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몇 번을 보아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를 연민하지도 경멸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붙일 자신이 소녀에게는 없었다. 소녀는 이미 그의 노골적인 추함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헐벗은 흰 몸을 보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 물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을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옷장 안에서 그가 무엇을 들었는지, 지금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소녀가 옷장 문을 열어서 그가 행복한지, 혹은 더 불행해졌는지, 바란다면 소녀는 그 모든 것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사내는 기꺼이 답했을 것이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웃음으로.

그러나 소녀는 옷장 문을 열어두는 것만으로, 그의 응시를 느끼면서 그의 목격을 의식하면서 소녀들의 부드러운 상처를 탐닉하는 것만으로, 그러한 모멸을 겪는 것만으로 그를 충분히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였다. 소녀는 만나지 못한 사내를 만날 용기가 없었다. 그가 그토록 헐벗고 연약했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가 지나치게 헐벗었고 지나치게 연약했기 때문에 소녀는 그를 캐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이 죄악일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소녀는 너무 예민했다.

그가 살아 있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 그의 고통이 소녀의 고통이 아니며 그의 죄악이 소녀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소녀는 죽을 듯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소녀는 고통을, 죄악을, 사악한 생명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교사 소녀들을 말릴 수 있었다는 말을, 그녀들이 더 이상 서로에게 연루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어느날 훌쩍 떠나가버릴 수도 있다는 말을, 소녀에게서 눈멂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듯이 사랑도, 생도, 악함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내가 범죄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소녀는 두려웠다. 생은 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범죄는 한 번도 저질러진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그가 그녀를 밀고하는 것이, 그가 그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 그가 그녀를 용서하는 것이 그녀는 미친 듯이 두려웠다. 소녀는 사내가 모든 비밀을 누설해버릴 것이 두려웠다. 사내가 알고 있는 소녀의 비밀, 소녀 역시 알고 있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소녀가 손쓸 새도 없이 말해버릴까 봐.

사내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옷장 안에 있었으니까. 소녀들의 옷자락이 밀려올라가는 소리, 소녀의 입술이 그녀들을 더듬고 곰인형의 배가 찢겨지고 그 속에 광폭하고 이기적인 이미지들이 쑤셔넣어지는 소리를 모두 들었을 테니까. 소녀가 들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소리들 역시, 어쩌면 그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부러진 손톱처럼 아픈 깨어남, 사내는 주저함도 없이 소녀의 존재를 알릴 것이다. 사내와 같이 헐벗고 끔찍한 생명이 소녀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소녀가 사내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 지독한 갈증과 고통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려나가고 파헤쳐진 사물의 속에 피와 내장 대신 흰 솜만 있었던 것처럼.

소녀는 눈 먼 소녀들이 소녀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소녀의 범행을 기억하는 것이 소녀 안에서 미친 듯이 울고 있는 사내뿐이라는 말을, 곰인형처럼 고요히 잠든 눈 먼 소녀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을, 수치도 고통도 없었다는 말을, 그 모든 비참하고 비굴한 감정은 오로지 소녀의 내부에서 희미하게 투사된 것일 뿐이라는 말을, 그러므로 모든 곳에는 소녀뿐이었고 존재하지 않는 흐느낌뿐이었고, 실은 눈멂조차도 그녀의 상실을 무표하는 흔적에 불과하다는 말을.

소녀는 사내가 두려웠다. 말없이 말해진 말들이, 당장 소녀를 파멸시킬 수 있는 덫과 같은 말들, 독이 발린 치명적인 날을 품은 말들이. 옷장 문은 열려 있었고 사내는 소녀가 외면하는 모든 형상들을 보고 있었다. 사내의 찡그린 두 눈, 투명하게 일그러진 눈에 담긴 그 모든.

교사 소녀들은 자해라고 말했다. 그녀들은 눈 먼 소녀들과 깊이, 끔찍할 정도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그녀들의 살에 남긴 상처는 교사 소녀들 자신의 상처와 같다고.

그러나 소녀들은 같지 않았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소녀들의 몸은 같지 않았고 소녀들의 상처는 같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충돌하며 상처를 나누어 가졌다고 하더라도 상처의 형태와 깊이, 통증은 끔찍할 정도로 달랐다. 화해는 불가능했다.

교사 소녀들은 눈 먼 소녀들의 검고 짙은 미혹이, 소녀들의 몸에 남은 희고 무결한 상처가 그러한 고통을 열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눈 먼 소녀들은 그 탐욕스러운 허공은 슬픔을 슬픔의 축적을 바라고 있다고.

소녀는 눈 먼 소녀들을 변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사 소녀들에게 완전히 가담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교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옷장 속 사내는 멀지 않은 눈으로, 마치 당장이라도 소녀의 죄를, 소녀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도 모두 용서해버릴 것처럼 두려운 눈으로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옷장 속에는 낡았지만 부드러운 원피스들과 소녀들의 향기롭고 서글픈 체취밖에 없었으니까. 소녀는 소녀들의 피부를 벗겨내고 입을 맞추었다. 소녀들은 눈 감은 채 소녀의 입맞춤을 느끼고 있었다. 용서를 바라듯, 아니 용서하지 않기를 갈망하는 부드럽고 신중한 접촉, 소녀들은 희미하게 웃으며 잠들었다. 소녀를 향해 상처를 열어놓은 채로, 소녀는 그 희고 여린 상처들이 그녀의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달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붉은 살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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