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홀로 남은 언어의 물방울

소녀는 쥐처럼 역병을 몰고 온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소년과 사내. 유령과 살. 죽음과 삶. 그녀가 악몽 속에서 불러들여 끌어안은 푸른 꽃의 뿌리에서 그녀가 원한 바 없이 딸려온 검고 축축한 내장을.

코코펠리의 군인들은 기어이 그 검은 숲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름답고 기묘한 언어가 흘러나오는 목들을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소녀만은, 황금빛 머리칼과 검은 눈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틔워내는 소녀만은 죽이지 못했다. 그들은 소녀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저마다 푸르고 붉은 유령의 손을 붙잡고.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언어로, 오직 그들을 현혹시키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아름다운 언어로 속살거리는 환상만을, 물처럼 찰랑이는 젖은 입술만을 데리고. 그들은 꿈속을 헤엄치며 각자의 소녀를 겁탈하였다. 소녀의 살결이 그들의 피부 위에서 젖어드는 사이 그들은 그녀의 목 아랫부분을 움켜쥐고 그녀가 흘리는 매혹의 언어를 집어삼켰다.

홀로 남은 소녀, 마을에서, 그 붉고 어두운 폐허에 홀로 남은 소녀는 부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소녀는 사무치는 고독에 허덕이며 글을 썼다. 다행히 무수한 서적들과 종이들, 펜이나 필기구 같은 것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소녀는 텅 빈 유령들의 마을을 이리저리 헤매며 그곳에 있는 피부들을, 텅 빈 살갗들을 헤집고 그곳에 고독을, 죽음을 새겨넣었다. 소녀는 글을 썼다.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고독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텅 빈 동공에 대고 말을 퍼붓지 않으면 도저히 지독한 삶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에. 소녀는 나날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유예된 죽음의 불안을, 그녀에게만 도래하지 않은 절정의 약속에 대한 불안을 버텨내기 위해 글을 썼다. 그녀의 언어, 이제는 그녀만의 내밀한 밀어로 변해버린 언어로. 한때는 그녀의 고장 사람들이 나누던 햇볕 내음 풍기는 일상의 언어였던, 하얀 빨랫감 사이로 쏟아지는 축축한 이슬의 냄새, 삶의 냄새, 분유의 냄새, 입술의 냄새, 수다의 냄새였던 언어로. 이제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암호가 되어버린 언어로. 누구도 읽어낼 수 없을, 어떠한 마주침도 보장받지 못할 밀어로 소녀는 글을 썼다. 그녀가 조각조각 분리해낸 목소리들을 뒤얽어가며. 소녀는 다른 목소리를 섞어 대화하기 위해서 수십번, 수백번을 깨어져야 했고, 부서진 파편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그 날카로운 모서리로 종이의 피부를 찢어내며 글을 써야 했다. 바스라진 유리조각들은 소녀의 얼굴을, 망가진 언어를 아름다운 광채로 반사해냈다. 소녀는 그 빛무리에 약속된 죽음의 도래만을 기다리며 그녀에게 찾아들 축복에 대해, 그녀에게만 찾아오지 않은 유령들의 노래에 대하여 적었다. 소녀가 써내려간 기나긴 비가는 오직 소녀에게만 간절한 것이었고 오직 소녀에게만 비참한 것이었다. 아무도, 아무도, 그녀가 떠난 뒤에도 아무도, 그것을 읽을 수 없을 것이었다. 소녀가 누설하기 위해 거울처럼 투명한 몸을, 얼어붙은 몸을 산산조각내어 적어낸 비밀은 누구의 얼굴도 적시지 못할 것이었다. 소녀는 그녀만의 비밀을 만끽했다. 소녀는 더 이상 일상에 대해, 고향에 대해, 모어에 대해 쓰지 않았다. 소녀는 일상의 말로, 고향의 말로, 모어로 오로지 절망과 고독, 죽음에 대해서만 적었다. 그것은 소녀만을 위한 성서였고 소녀만을 위한 기도였다. 죽음이 그녀를 잠식할 때까지 그녀는 언제나 그녀에게 찾아들, 그러나 도저히 그 확실한 도래를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약속에 대해, 이미 한 번 그녀를 배신했던 죽음의 약속에 대해 썼고 그것은 그녀의 기나긴 유언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소녀는 죽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소녀는 그 필연적이며 보편적인 약속으로부터 배신당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죽음을 너무도 사랑하고 너무도 원했기에. 간절한 이에게는 그의 욕망이 주어지지 않는 법이니까. 소녀의 절실한 밀어를 함께 꿈꾸어줄 사람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소녀는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죽음조차 소녀에게 반드시 찾아들지 않는다고 해도. 소녀의 비밀만은, 소녀가 그토록 호소하고 소리치며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던, 다시 일상의, 햇볕의, 비누의, 음식의, 웃음의, 소문의 언어로 바꾸고 싶었던 언어는 소녀의 절망적인 시와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아니, 사라지지 못한 채 영원토록 해갈되지 못할 고독을 곱씹으며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 소녀와 함께. 여기, 다시는 푸르러지지 못할 시퍼런 폐허에서.

한때 그들의 말간 빨랫감이었던 언어, 사람들의 몸과 때를 입고 다시 맑아지던 햇빛과도 같았던 언어는 이제 썩지 않을 플라스틱처럼 절망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영원히 변하지 못할 황폐한 언어. 누군가의 눈빛 속에, 피부 속에 섞여들어 더럽혀지고 뭉개져 새로운 빛깔로 재생되었어야 할 언어는 이제 오로지 유리처럼 얼어붙은 소녀의 눈 속에서만 지진한 죽음을 이어가게 되었다. 누구도 소녀를 오독하여 주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홀로 남은 비참한 언어를, 악취도 향기도 없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붉은 플라스틱을 눈치채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집단수용소에서 절망에 질려 죽어간 유대인들의 고독에 대해, 물 속에 잠겨 질식하며 죽어간 아이들의 고독에 대해, 스스로 타 놓은 불에 질려 어느 때도 빛나지 못했던 몸을 단 한차례 찬란하게 밝히며 죽어간 청년의 고독에 대해, 우주에서 미아가 되어 아늑하고 숨막히는 미미한 죽음조차, 달들을 붙들어두는 헐거운 중력조차 찾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아다니는 남자의 고독에 대해 썼다. 소녀는 메마른 눈으로 그들의 고독을 느꼈다. 아니, 그들의 최후까지 집요하게 타들어간 소녀의 고독을 느꼈다. 소녀는 무참한 희생자들의 역사를, 평소 농지거리를 재잘대던 언어로는 감히 쓰지 못했을 당사자들의 고통에 대해 마음껏 썼다. 그것은 더 이상 그들의 고독이 아니라 소녀의 고독이었고, 그들의 고통이 아니라 소녀의 고통이었으므로. 소녀가 앓고 애도하는 죽음은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아직 찾아들지 않은 그녀의 죽음, 그녀가 사랑하고 추모하는 모든 자들을 관능적으로 감싸안으면서도 그녀에겐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은 죽음의 물결치는 투명한 가슴뿐이었으므로. 그녀는 그들의 고독에 대해 쓰며 그녀의 고독을 느꼈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쓰며 그녀의 고통을 느꼈으며 그들의 죽음에 대해 쓰며 그녀의 죽음을 느꼈지만 모든 이들의 결말로 찾아온 아름다운 물거품은 그녀에게만은 찾아들지 않았다. 소녀는 그들의 죽음을 질시하기에 이르렀다. 고통이 잔혹한 것은, 고독이 아픈 것은 그녀에게 끝이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순수한 목적, 고통과 고독의 종착지인 삶을 이끄는 죽음의 안락한 중력이, 모든 삶과 그를 위한 정동들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중력이 그녀만은 삼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블랙홀의 찬란한 어둠 바깥으로 내몰린 채 홀로 광막한 우주를, 그녀만의 사적인 언어를 떠돌고 있었다. 이제는 상징도 대상도 없는. 오로지 고독과 절망, 죽음뿐인 언어를.

당신이 틀렸어요. 페터. 세상은 그렇게 붉지 않아요. 난 이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아요. 시퍼렇게 죽어버린 호숫물과 유령의 거죽으로 뒤덮인 하늘, 난 이 하늘에서 홀로 살고 있어요. 그들이 숲을 불태우고 나서 난 가장 먼저 어디로 달려갔을까요? 시꺼멓게 타들어간 재와 시신들, 여직 불이 붙어 시뻘겋게 문드러지고 있는 살의 쿱쿱한 비린내, 짐승과 식물이 함께 타들어가고 있는 이 평등한 학살의 현장을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고민했었죠. 당신의 시신도 보았어요. 그들이 불을 놓은 숲 반대편에서 당신은 옅은 불의 열기와 연기를 견디지 못하고 아주 서서히 죽어간 것 같았어요. 난 그날의 순서를 더 이상 똑바로 기억해낼 수 없어요. 하나의 선 위에서 달려나간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이제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렸어요. 난 더 이상 과거와 미래, 현재의 순간들을 분리해낼 수 없어요.

난 당신의 고기를 먹었어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닫혀버린 피부와 눈의 창으론 이제 아무것도 느끼고 지각할 수 없는 건가요? 당신의 살을 먹어도 붉은 소의 고기맛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저 지독히 쓸 뿐이었어요. 겨우 그런 고기 때문에, 그런 살 때문에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몰락해야 했던 건가요? 겨우 그런 살이 당신을 그토록 오래 살아남게 만들었던 건가요? 겨우 그런 맛이 당신을 그토록 오래도록 죽어가게 한건가요? 우린 더 일찍 죽었어야 했어요. 당신도 나도. 이렇게 오래 살아남아선 안되었어요. 당신은 도축된 소들을 잃었고 난 내 푸른 개의 유령을 잃어버렸으니까. 해방된 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난 이 숲에 살면서 한 번도 소를 본 적이 없어요. 동화책이나 생물사전에서 형편없이 가는 획들로 그려진 납작한 형상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죠. 사전에서 정의한 추상적인 어휘들은 내게 어떤 인상도 남겨주지 못했어요. 뿔은 없거나 있고 풀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먹으며 사는 동물 솟과의 포유류. 뿔이 있어도 소고 없어도 소이며, 풀을 먹어도 소고 풀이 아닌 것을 먹어도 소라면, 소를 소로 만드는 본질은 어디에도 없는 걸까요? 소를 동물 솟과의 포유류로 만드는 것, 동물 솟과의 포유류를 소로 만드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걸까요? 혼자 남겨지고 난 뒤 난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지만 갈수록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들이 많아져요.

난 시체를 먹었어요. 타들어간 인육을. 금단의 살은 그리 맛있지는 않았어요. 그저 타들어간 고기의 씁쓸한 맛, 그것뿐이었어요. 검은 고기는 금단의 고기이므로-우리에게 고기는 모두 금단의 살이지만- 난 저주받아 죽고 말거예요. 내게도 곧 저주가 찾아오겠죠. 난 오래 살지 않을 거예요. 페터, 당신이 틀렸어요. 난 끝까지 살아남진 않을 거예요. 잠깐 시간이 어긋난 것뿐이에요. 조금만 기다리면 죽음의 사자들이 날 데리러 올 거예요. 고수머리의 사내가 내 목을 조르고 내 몸에 불을 질러 이곳에 남은 모든 살들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말 거예요.

소녀는 한순간에 부랑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그녀에게는 집과 가족이, 무덤이 될 공간과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줄 소년들이 있었다. 숲에서의 어린시절, 뱀과 함께 새들을 쫓아 나무로 달겨들었던 추억과 숲에서의 삶을 이어나갈 잠재태로서의 미래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계를 단단하고 견고하게 뭉쳐오던 검은 혹성의 핵이 순식간에 풀어헤쳐진 지금, 소녀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잃은 채 끊임없이 영속하는 현재의 일순 속에 사로잡혀 그 거대하고 기묘한, 불가해한 물방울 속을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래도록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어왔던 질긴 탯줄이, 세계와 소녀, 숲과 소녀, 숲과 세계를 이어주던 견고한 끈이 한순간에 불타버린 지금, 질량과 중력의 사슬로부터 튕겨져나와 한없이 유랑하는 그녀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무엇을 걸어야 하는가? 그녀의 발 아래에는 더 이상 그녀를 든든하게 지탱하는 지상이 없었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는 그녀를 푸근하게 감싸주는 붉은 대기가 없었는데. 모두 그녀가 인육을 먹었기 때문에 닥쳐온 재앙인 것일까? 그녀는 행성과 행성, 우주와 별의 질서로부터 쫓겨난 것일까? 붉고 비릿한 선악과를 삼켰기에. 아니, 아니다. 소녀는 그녀의 발에 묻은 짙은 먼지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검은 숲에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그리 붉지도 않았으며 나무들이 다 타버린 황량한 공간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검었으며 여전히 질량과 중력의 법칙으로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녀는 중력에 묶여 있는 지독한 살, 지독한 유령, 지독한 실존이었다. 아직 탯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얼굴들은 검은 숲과 그들을 연결하던 보이지 않는 탯줄을 잃고 물방울처럼 소녀의 기억 속에서 날아가버렸지만, 그래서 소녀는 그녀의 엄마와 아빠의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지만, 소녀는 여전히 이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거울상은 거울 바깥에서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는 유령을 마주보았다. 그녀에겐 빼앗을 몸도 빼앗길 몸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무참한 결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픔을 이루는 범위는 어디인지, 살과 삶 없이도 아플 수 있는 것인지 유령과 거울은 모두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흐릿한 허공을 짓누르는 둔중한 고독의 감각을 그들은 아픔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몸 속에서 독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변질된 세포는 그녀를 고독으로 몰아붙이는 암세포였지만 어쩌면, 그건 소녀의 행복보다는 훨씬 매혹적인 비밀을 지니고 있는 소녀의 본질이 아닐까? 소녀는 불가해한 병을 지워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도 깨물어 깨뜨릴 수 없는 병의 내부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짐승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병이 그녀를 물어뜯고 불구로 만들 때까지. 병이 그녀를 죽음으로, 소년의 품으로 내몰 때까지. 먼지투성이 푸른 유령이 소녀를 배웅하러 그녀의 입 속에서 걸어나올 때까지.

그녀는 간혹 타자를, 희생자들을, 가족들을, 이웃들을 연민하는 체하기도 했고 사랑하는 체하기도 했으며 증오하는 체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가장들이 모두 거짓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누구도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연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투명한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난 채 어둠만을 머금고 반사하는 내장의 물기어린 파편들을 들여다 볼 뿐이다.

시계의 무고하고 투명한 유리를 깨뜨린다고 해서 시간이 멎지 않듯, 출혈하며 흘러내리는 순간들이 식물처럼 희게 굳어버리지 않듯, 시계를 발명한다고 해서 멎어버린 순간이 다시 출혈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놓은 불, 장밋빛 대기를 유령의 파도로 퍼렇게 물들인 절망의 불은 여전히 일렁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영원히 멎지 않는 그 순간 속에서 살았다. 간혹 소년의 유령이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었으나 소녀는 더 이상 그가 소녀에게 내밀던 수줍은 침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소란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부드러운 살결도, 너울치며 소녀의 몸 위를 오르내리던 숨소리도 이제는 없었다. 그녀는 소년의 유령이 악몽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무엇으로도 구현되지 않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악독하고 끈질긴, 그러나 한없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환각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소년이 제 목을 조르고 마지막 푸른 불꽃을 소녀의 뱃속에 심어 주기를 바랐지만 유령의 손은 소녀의 머리칼 하나조차 넘겨줄 수 없었다. 소녀는 푸르게 일렁거리는 불꽃 속에서, 그녀에게 친숙한 일상의 언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지옥 속에서 홀로 남은 언어를 앓아야만 했다.

소년과 소녀의 대화를 부드럽게 감싸며 경청하던 밤마저도 이제는 눈을 감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소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밤에 수놓아진 수천만개의 눈동자들에 닿지 않았다. 밤은 소녀를 잊었다. 소녀는 그 무엇도, 밤과 함께 나부끼며 소년의 침묵을 쓰다듬고 소년의 몰이해 속에서 완전히 이해되던 충만한 절정도, 그녀의 입술 속으로 스며드는 온기의 절절한 대꾸도, 그들을 하얀 빛으로 감싸며 애무하던 벌레들의 노래가 소녀의 이야기와 소년의 침묵을 장식하던 것도, 아무것도 잊지 못했는데도. 소녀가 잊지 못한 모든 것들이 소녀를 잊었다. 소녀는 자신이 잊혔지만 잊지 못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희곡으로부터, 무대로부터, 관객으로부터, 각본가와 연출가로부터 잊혔지만 그는 연기를, 희곡을, 무대를, 관객을 잊지 못해 매일같이 똑같은 연기를 거울 속에서 반복하며 부르짖고 똑같은 함성을 기대하며 똑같은 침묵에 좌절하여 흐느끼는 배우라고. 소녀는 푸른 폐허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매일같이 같은 연기를 했다. 매일 같은 글을, 들어줄 이 없는 언어를 눌러쓰는 그녀는 수천만 개의 감은 눈꺼풀로 이루어진 죽은 밤하늘 아래에서 공연하는 배우였다.

한때 소녀의 손가락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매만지고 빨랫감의 향긋하고 축축한 살 속을 헤엄치고 그녀의 가슴과 성기를 애무하는 연인의 손짓이었으나 이제 그녀의 손가락은 오직 글을 쓰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소녀는 아무도 듣지 않을 글을 홀로 읽고 공연하는 미친 짓거리, 아무런 효용도 소용도 없는 짓거리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글은 아름답지도 실용적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직 글을 쓸 수밖에는 없었다. 그 외엔 다른 어떤 것도, 소의 젖을 짜 향긋한 스프를 만들거나 테이블을 훔치고 꽃의 목을 따 화사한 얼굴들로 제 음울한 낯을 가리고 악기의 관능적인 침묵을 더듬으며 신음을 끌어내는 일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오직 미친 짓거리를, 그녀만이 아는 언어로 글을 쓰는 짓거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녀가 쓰는 것은 오로지 절망과 죽음에 관한 긴 산문일 뿐이었다. 그녀는 단상들 수천개의 변주로 그녀가 쓰는 어휘와 문장의 배열들을 조심스럽게 흐트러놓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절망과 고독, 죽음에 대한 동음이의의 무용한 언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글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나와 텅 빈 동공을 내리뜨고 있는 달의 죽어버린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흐느끼다 죽어가는 검은 개처럼. 소녀는 언젠가는 그녀가 쓰는 글이, 지독한 절망과 죽음, 고독의 언어가, 누군가의 눈동자와 입술로 건너가지 못하고 그녀의 작은 몸속에서 비등하고 있는 무참한 말들이 그녀를 죽이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갈되지 못한 언어, 언어로서의 기능을 잃고 제 밀실 속에서 자폐되어 폭발하는 언어는 그녀의 속에서 자라나는 독과 같아서 그녀는 마침내 침묵조차 유언하지 못한 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언젠가 소녀는 폐허가 된 마을로부터 벗어나보려고, 그곳에서 다시 하얀 침대보를 빨고 하얀 접시를 닦고 하얀 테이블보를 매만지는 일상의 삶에 스며들어보리라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곳에서 소녀는 절망과 죽음, 고독의 비등하는 감정을 담기에는 너무나 서툴고 조악한 외국어를 배워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 단어들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려고 계획했다. 오직 음식과 오물, 장소와 날씨, 그리고 가끔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데일 듯한 차가운 열기만이 남은 욕설들만을 가지고 살아가리라고, 그러면 그녀는 비참한 모어를 잃고 불구의 단어들만으로 이루어진 파열된 문장 속에서 백치처럼 몽롱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계획조차도 그녀는 절망적인 모어로 비참한 희망으로 바꾸어 글을 썼다. 그녀는 푸른 폐허로부터, 한때는 화롯불처럼 붉고 향기롭게 빛났던 대기, 이제는 시퍼렇게 더럽혀진 숲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곳에 그녀의 언어가, 그녀의 비밀이, 그녀의 고독, 절망, 죽음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숨을 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듯, 글을 쓰지 않으면 죽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글을 썼다. 쓰지 않으면 그녀에게는 아무런 죽음도, 절망도, 고독도 없었으므로. 죽음과 절망, 고독 없이 그녀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쓰며 죽어갔다. 글을 쓰며 살아갔다.

그녀는 가녀린 새들의 목을 꺾어 더 이상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가사도 의미도 갖지 못할 울음뿐인 노래를 부러뜨렸다. 새로운 꽃들의 멍처럼 아픈 개화를 속살대는 나뭇가지들과 함께. 다시는 그것들이 말이 될 수 없는 울음을 짖어대지 않아도 되도록. 다시는 그것들이 시가 되지 않도록. 그러나 그녀의 여리고 질긴 목만은 도저히 부러뜨릴 수 없었다. 날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녀는 제 목을 조르고 숨통을 막고 불태우며 차가운 얼음 호수에 뛰어들었지만 너무 많은 죽음을 반복한 탓에 하나의 죽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헛된 언어를, 이제는 언어조차 아닌 비명을, 하나뿐인 짐승의 울음을, 실현되지 못할 죽음들을 소녀는 살아내야 했다. 숱한 죽음 가운데 오직 그녀의 울음만이 남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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