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물방울

그녀는 조용함을 훈련받았다. 작은 울타리 내부에서의 세계는 끔찍하게도 고적하였으나 이곳에서의 울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울음을 반향하는 대답도, 사물의 시체들을 되비추는 흔적도, 엄습하는 침묵을 밀어내는 소란도 여기에는 없었다. 울타리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소녀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울타리 바깥의 세계는 진열장 유리에 가로막힌 것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소녀는 투명하게 가로놓인 테두리의 내부와 외부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울타리 외부의 사람들은, 짐승들은, 식물들과 비유기체들은 부드럽게 섞이며 맴돌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반향하는 무언가를 울었으며 서로에게 제 침묵과 얼룩마저도 귀속시켰다. 울타리의 내부에서는 외부가 전부 들여다보였다. 그들은 소녀의 앞에서 수치도 없이 섹스를 하고 살인을 하였으며 도축하고 먹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녀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의 울부짖음, 낑낑거림이나 흐느낌, 비명과 웃음소리는 그들의 표정이나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중력이 약한 지점만을 파고드는 깊은 물빛의 날벌레들도 그녀의 사유나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분명히 느끼고 있음에도. 내부에서 발발하고 찰랑거리는 사유와 행위의 물결이 얼마나 열렬한지. 마치 곧장이라도 새로운 생명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것처럼. 유백색 배와 허벅다리를 수줍게 드러낸 비너스의 발가락을 적시며 맴돌던 제우스의 정충 거품인 것처럼.

소녀는 진열장 밖을 떠도는 사물들의 시체 하나 하나에 제 의식을 밀어넣는다. 강변 다리 아래에 매달려 벌레를 채집하고 있는 거미줄, 호텔 람세스에 출근하는 직원 남자, 호텔 람세스에서의 죽음은 명예로운 일입니다라고 적혀 있는 광고지, 고래를 싣고 강변을 떠도는 서커스 트럭, 소화시키지 못한 나방을 그대로 게워내는 거미, 침에 젖어 반짝이는 입술들, 그녀의 세계는 완전한 자폐일 수 없었다, 그녀를 내버려두고 침투를 이어가는 세계의 소용돌이에서 외따로 배제된 채, 소녀는 타자가 아닌, 눈물과도 같은 솔잎을 떨구는 나무들과 불가해한 언어로 시시덕거리는 퉁퉁한 다람쥐들, 검고 가지런한 외피들의 물결 속에서 바스라지는 개미들, 기꺼이 물밑으로 가라앉는 바위들, 연보랏빛의 익사자들, 죽은 여인의 하얀 원피스자락을 깨물고 바다를 향해 헤엄치는 민물고기들, 발톱을 자를 여유가 없어 발가락을 잘라버리는 작은 새들이 아닌 무언가다. 소녀는 수천 개의 거미줄들이 이름 모를 사물들을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그중 하나도 소녀에게 닿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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