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16

Act. 17.

B는 비둘기처럼 쉽게 믿었다. 그녀가 그 애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결정적인 순간 그 애는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애를 배신할 수 없었다. 앨리스는 이제 B의 존재를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 애는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일지도 몰랐다. 모르겠다. 그 애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녀의 텍스트와 기억뿐이었으니. 초등학교 졸업사진에도 B는 없었다. B는 졸업하기 전에 죽었으니까.

너를 보는 나를 본다. 나를 보는 너를 본다. 너를 봤던 나를 본다. 나를 봤던 너를 본다. 나를 보지 않을 너를 본다.

그녀는 B를 보고 있지만 B는 그녀를 보지 않는다. B는 유령처럼 사라져버렸다. 증거조차 없이.

앨리스는 악몽 속에서 히틀러를 강간하려 한다. 벌거벗은 그녀는 고기처럼 붉고 히틀러는 눈처럼 하얗다. 그가 도망친다. 그의 몸이 축축한 흔적을 남기며 멀어진다. 그녀는 가볍게 도약하며 그를 쫓는다. 그녀는 피로 가득찬 수조 속으로 뛰어들어 잠수하면서 그를 찾는다. 그녀는 그의 운명을 질투한다. 그녀는 먹히기를, 강간을, 물어뜯기기를 즐기므로. 그녀는 그의 운명을 질투한다. 알 수 없는 운명들을 열어젖혀 서로 녹이고 혼합되는 핏속에서 그녀는 무감정한 열광을 느낀다. 꿈에서 깨어난 직후 그녀는 (강간) 실패로 관통당한 몸, 선혈이 울컥울컥 솟아나는 상처를 상상하며 자위했다.

노인의 웅얼거리는 목소리. 그녀는 압박하는 벌어짐을 느끼며 피의 환상으로, 불결한 순수로 속죄한다. (무엇을? 사실 속죄는 장난이다. 농담이다. 빌어먹을 욕설이다.)

여자는 노인의 옆에 앉아 노인이 거울 같은 눈으로 응시하는 TV 화면을 함께 응시한다. 등산용 배낭을 멘 청년이 지저분한 모텔 거리를 지나간다. 짙은 화장을 한 중년 여자가 그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보인다. 청년은 사랑에 빠진 것인지 경멸하는 것인지 모를 얼굴로 여자를 바라본다. 다음 장면, 그들은 모텔 방에 있다. 여자가 먼저 샤워하러 들어가고 곧이어 청년이 화장실로 들어간다. 카메라 렌즈에 습기가 어린다. 앨리스는 희미한 빗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다시 침대 위에 있다. 청년이 중년 여자의 유달리 하얀 어깨를 움켜잡고 삽입한다. 카메라는 그들의 흔들리는 상체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중년 여자는 고통을 감내하듯 몸을 웅크린다. 울부짖는 얼굴. 앨리스는 그들의 대사를 상상한다.

(중년 여자 : 개새끼. 너는 내가 창녀라고 생각했겠지. 난 처녀야. 씨발. 넌 속은 거야. 속은 거라고. 너는 처녀랑 한 거야. 난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일 거야. 나를 죽인 뒤에도 내가 완전히 죽어버리지 않으면 너를 죽일 거야. 너를 죽인 뒤에도 네가 완전히 죽지 않으면. 그러면 어떡하지? 난 처녀가 아니야. 씨발. 창녀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라고. 씨발. 오랫동안 빌어먹을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아. 꿈 속에서 나는 마리아였어. 나는 신을 낳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을 낳아서 강간당할 날만을, 신에게 강간할 날만을, 신에게 사랑받을 날만을, 신을 사랑할 날만을, 그래서 씹할 천국에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나는 처녀가 아니야. 넌 신을 죽인 거야. 넌 지옥에 갈 거야. 씨발, 웃겨, 너무 웃겨. 난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지옥에 가기를 원했어.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지만 네가 아니라도 좋지만, 누군가 나 때문에 지옥에 가기를 원해. 그게 내 꿈이야. 신을 낳는 것보다, 신을 사랑하고 신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그걸 더 원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나를 위해 지옥에 가는 거야. 너는 나 때문에 신을 잃는 거야. 너는 내 희생자가 되는 거야. 너는 나 때문에 살해자가 되는 거야.)

정상 체위. 중년 여자가 몸을 뒤로 젖힌다.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가 식은 땀으로 반들거린다. 히스테릭한 오르가슴. 폭소하는, 혹은 울부짖는 얼굴.

노인은 혼잣말하듯 낮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것들은 불륜을 하는 거야. 남편하고 애인을 두고 놀아나는 거라고. 불륜 씹질만큼 기분 좋은 것도 없지. 저것들은 짐승이고 그래서 더 기분 좋은 거야.

앨리스는 노인에게 불륜 씹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노인은 이해하지 못한 듯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냥 혼잣말을 한 거라고 변명하듯이 웅얼거렸다.

앨리스는 기이한 잠 속에서 생각했다. 꿈은 현실의 변형이고 왜곡이지만 어찌되었건 현실이라고. 그러니까 B도 없음보다는 있음에 더 가까운 무언가라고. 꿈 속에서 그녀는 상스럽고 열정적인, 그러나 어딘가 슬픈 사랑을 겪는다.

청년은 중년 여자 앞에서 허공에 손을 짚어가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중년 여자는 무표정하게 들리지 않는 노래를 듣는다. 청년은 오직 무표정할 때만 그녀가 관능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이한 잠, 기이한 열광들, 기이한 꿈들, 액체로 된 태양이 그들의 틈 속에 스며든다. 인간과 물고기의 혼합물인 물고기 아이들이 입구멍을 혐오스러운 맹목으로 뻐끔거린다. 그들은 살아있음에 전념한다. 그들의 얼굴이 인간을 닮았기 때문에 그 맹목이 더욱 상스럽게 느껴진다.

앨리스는 노인 냄새 속에서 구역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낀다.

중년 여자가 청년이 느끼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청년이 중년 여자가 느끼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그들은 각자의 속도로 죽어간다.

각자의 언어로 죽어간다.

Reality 0.75. 자기 자신에 대한 입맞춤의 불가능성

Act. 25.

김현경은 사랑받고 싶었다.

더, 더, 더, 더, 더 사랑받고 싶었다. 그녀는 스타가 되고 싶었다. 29번 채널에 출연해서 그곳에 뜬 거대한 태양보다도 더 눈부신 배우가 되고 싶었다. 김현경은 돼지들이 그녀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TV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일, 그것(만)이 그녀가 기다리는 내일이었다.

그녀는 노력했다. 매일 TV를 켜고 화면 속을 부유할 은밀한 문자열들을 찾아내려 눈물이 흐를 때까지 화면을 바라보았다.

개하고 말도 고추가 있어. 근데 식탁이랑 의자에는 없어.

금발의 서양 남자아이가 소리친다.

그래. 그게 사물과 사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란다. 구부정한 남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고추가 있어. 남자아이가 유치한 만족감을 과시하며 말한다.

김현경은 점멸하는 화면 어딘가에 그녀를 위한 비밀스러운 암호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오직 그녀만을 위한 초대장이. 그녀는 TV에 속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김현경은 TV에 등장하는 꼬마 한스와 늙은 고목과 양철지붕과 더러운 비둘기와 포동포동한 아기 돼지들, 무엇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길고 어렴풋한 그림자와 그녀 자신 사이의 유사성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유사한, 그러나 무의식적인 집요함으로 베개 귀퉁이를 빨아대면서. 베개 한쪽이 그녀의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녀는 물고기가 물을 믿듯, 어린아이가 영원한 행복을 믿듯, 그네의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계속될 한낮의 꿈을 믿듯이, 그렇게 끈질긴 확신을 가지고 TV를 보았다.

언젠가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김현경은 생각했다. 베개를 물어뜯으면서. 베갯잇의 부드럽고 차가운 면이 그녀의 혀를 자극했다. 그녀는 더 깊이, 질식할 정도로 깊이 삼키고 싶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형성된 인간관계 이외에 김현경에게는 어떠한 외부도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도 김현경은 TV 속 영상들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추상적인 이미지로 남은 영상의 기억들을 갖가지 방식으로 세분화하고 재조합하고 무너뜨리고 뒤섞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부세계를 샅샅이 훑어보는 그녀의 눈은 과거의 과장된 조각들을 탐욕스럽게 쭙쭙 빨아대는 노인의 것처럼 멍하게 풀려 있었다. 아이들과 선생님은 그녀가 머릿속의 다채로운 관념 대신 즐길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인 자극을 주지 못했다. TV 이외에, TV가 불러일으키는 집착적인 환상과 희망 이외에, 그 무엇도 김현경을 유혹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를 적극적으로 유혹하려 했다면 그녀는 놀랄 만큼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늘 목이 말랐으니까. 끔찍하게 목말랐으니까.) 반 아이들은 김현경을 내부 세계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구해내는 대신 완전히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편이 훨씬 간단했으니까. 낮은 김현경에게 길고 기이한 잠-백일몽을 음미하는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등하교길에서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듣지 않았고 보지도 않았다. 만지지도 않았고 만져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듣는 것과 보는 것, 만지는 것과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을 갈급하게 상상하면서 그 끔찍한 욕망을 벌충했다. 어린 돼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맞추기를. 분홍색의 매끈한 살이 그녀의 내부로 밀려들어오기를. 그것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너를 기다렸다고, 우리는 너를 기다렸어, 네가 필요해, 하고 말하기를, 가장 불쾌한 쾌락이 그녀를 황홀하게 하기를. 그녀는 무표정하게 칠판을 향해 불투명한 눈동자를 열어젖힌 채로 상상했다.

교실에 처음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예감했다. 그녀를 두고 무리 지으며 유치하고 잔혹한 자만으로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녀를 남겨둔 채 엉겨붙고 마찰하고 이어지는 피부를 보는 순간. 아니, TV 속에서 그녀를 버려두고 서로의 입 속에 삽입되어 점막을 애무하는 한 쌍의 혀를 발견한 순간, 그녀가 아닌 이름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순간부터, 그녀는 예감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입맞출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유혹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유혹에 아무도 응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의 부름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의 혀를 아무도 삼키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피부에 끈적하고 친밀한 자극이 와닿기를 절박하게 바라면서 그녀는 예감한다. 아무것도 그녀에게 입맞추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낯선 말도 그녀의 입속 점막에 마찰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낯선 몸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젖은 언어와 섹스하지 않을 것이다. 김현경은 예감했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가능한 예민하고 어렴풋한 언어로, 그녀는 예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현경은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영원히, 이 문장들은 집요하게 반복될 것이다.)

김현경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현경은 가장 소심하고 조용해 보이는 아이를 골라 매일 그 애에게 다가가 인사를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조용한 아이는 그녀에게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을 이어나가려 해 보아도 그랬다. 김현경은 조용한 아이가 그녀보다 더 대화에 서툴다고 생각했다. 김현경은 조용한 아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끈질기게 그 아이의 책상으로 찾아갔다. 김현경이 화장실에 다녀 오는 사이, 보다 활기찬 아이가 조용한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조용한 아이는 환한 얼굴로 작은 새처럼 수다를 떨었다. (김현경은 뒷문을 막고 선 채로 그들의 대화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김현경은 끔찍하게 상처받았다.

급식실에 모여 앉은 아이들 틈에 일부러 끼어들어가 말을 걸어본 적도 있었다. 그들은 김현경을 재밌어했다. 귀엽고 괴상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그들은 김현경의 머리칼과 블라우스를 더듬거리고 김현경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김현경이 언어와 목소리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대답을 마쳤을 때, 김현경이 앉아 있던 급식실 테이블 주위는 텅 비어 있었다.

김현경은 그런 짓거리가 모욕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이들의 친밀하고 내밀한 언어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잣말로 증폭된 머릿속 동굴의 메아리들과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의 혼합물을 풍경을 감상하듯 멍하게 듣고 있을 때에야 김현경은 교실에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머물 수 있었다. 절망적인 굴욕과 체념 속에서 내부세계의 색채 멍울들을 유령의 부드러운 손으로 휘저으며 쉬고 있을 때, 속하려 하지 않을 때, 그녀는 비로소 교실에 가장 근접한 방식으로 속했다. 아이들은 구태여 김현경을 모욕하러 찾아오지 않았고 김현경은 아이러니-냉소의 거리 속에서 편안하게 망상의 세계를 항해했다.

Act. 23.

말해 봐. 왜 말 안해? 말해 봐. 말 해보라고. 말을 해. 말을 해야 알지. 말해 봐. 말해 봐. 너 병신이야? 네 할아버지처럼 너도 장애인이야?

앨리스는 할아버지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혹은 처음 알게된 체 했다.) 의자와 김은지, 지우개와 하늘, 비둘기, 선생님, 이준우, 정하경, 슬픔, 지우개 가루 사이를 우아하고 유연하게 오고가는 말들. 말의 선은 그녀를 관통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간헐적으로, 처절하게 켁켁거렸다. 그뿐이었다.

앨리스는 히키코모리다. 그녀는 끔찍한 박치라서 말을 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한다. 예컨대, 어렸을 적 그녀는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다.

유치원 아이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고 왜 말을 안 하냐고 물었다. 왜 말 안 해? 왜?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너 병신이야? 벙어리야? 말좀 해 봐. 말 하라고. 왜 말 안 해?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무리지어 놀던 아이들이 앨리스를 무시하고 등을 돌려 떠나간 뒤에야 그녀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토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굴욕과 슬픔 속에 멍하니 웅크린 채로 그녀는 말을 구토해댔다.

Delusion Level 9.9.

노인이 사라진다면 슬플 것이라고 앨리스는 노인의 왜소한 등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녀들 각자에게는 죽을 만큼 원하는 것들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들에게는 환상과 망상을 제외한 어떠한 인간관계도 없었다. 그녀들은 바깥이었으나 그녀들에게는 바깥이 없었다. 그녀들은 처녀인 채로 지나치게 상상했고 지나치게 원했다. (얼음에라도 그녀들은 맨살을 문질러댔다. 얇은 피부가 얼음의 표면에 늘러붙었고 찢어진 틈에서는 미적지근한 진액이 흘러나왔다. 차가움에 마찰되는 음부들.) 완전히 전락하여 장난감이 되지 않는다면, 사물이 되지 않는다면 그녀들이 세계에 몸을 문댈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장난감도 사물도 아니었다. 그녀들은 그것의 흉내를 내는 데도 미숙했다.

어째서 망상은 현실과 같은 농도와 질감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앨리스는 생각했다. 망상은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가장 선뜩한 꿈에서 그녀는 살해되지 못한 채로 깨어난다. 살인자는 그녀를 향해 식칼을 들고 다가오다가 갑자기 질려버린듯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녀를 두고. 그녀는 빠른 속도로 변색되어가는 미적지근한 공포와 함께, 홀로 남는다.

혹은, 그녀는 질투하던 여동생을 살해하지만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여동생은 아주 아름다웠다고, 그래서 그녀는 여동생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할 수밖에,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고 꿈 속의 그녀는 생각한다. 여동생은 상처처럼 벌겋게 벌어져서 웃고 있다. 여동생은 아름답다. 그녀는 여동생의 미소가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여동생의 출혈이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여동생의 시체가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여동생의 죽음이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환호한다. 여자는 여동생의 죽음이 그녀의 최고의 업적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현관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경찰과 기자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는다. 유사성의 현실이 썩어간다. 부패해가는 여동생은 점점 더 그녀를 닮아간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여동생은 그녀를 더 닮아간다. 여자는 그녀가 기다리는 것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지금까지 그랬듯 그녀를 망상 속에 방치할 것임을 문득 깨닫는다.

앨리스는 깨어난다. 그리고 꿈의 메스꺼운 껍질 조각을 손목에 대고 짓누른다. 벌어지지 않는다. 상처가. 혈관이. 죽음이. 노인은 TV를 향해 지나치게 희박한 시를 읊조리고 있다.

질투만이 그녀가 특별한 대상에게 갖는 특별한 감정이다. 그녀는 질투하는 것마저도 종종 잊어버린다.

그녀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을 미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거나 미워하기에는 너무 지루했다.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앨리스는 숫자를 세듯이 마음속으로 신음소리를 떠올린다. 아, 아, 아, 아, 아, 아, 아.

할머니, 하고 그녀는 말한다. 노인이 그러하듯이 우물거리는 불확실한 음성으로. 나는 여배우예요.

노인은 여자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대답한다. 너를 닮은 여자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정말요? 앨리스는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으려, 그 탓에 배신당하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긴장된 목에서 새어나오는 높고 가느다란, 어린아이의 목소리. 정말요?

노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주 유명한 여배우였어. 어느 채널을 틀어도 그 여자가 나왔지. 그래, 너를 닮은 것 같은데. 아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여자는 너보다 어렸던 것 같은데, 아니야, 나만큼이나 늙었던 것 같기도 해. 잘 모르겠어. 살인자 역할도 하고 희생자 역할도 하던 여자였지. 연기력은 썩 좋은 것 같진 않았어. 난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연기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 마치 세상 모든 것을 확신하는 듯이 그렇게 정확한 발성으로 말하는 건 꼴보기 싫어. 그래도 그 여자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어. 그 여자는 너무 많이 나왔으니까.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 여자가 등장하던 몇몇 장면들은 생각나. 아, 씨발. 노인은 히죽 웃으며 킬킬거렸다. 시체 안치소 장면은 빌어먹게 웃겼어.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녀가 스타가 되는 꼴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시체 안치소 장면에서 그녀는 나를 닮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여자는 너무 오만하고 당당해졌어. 장마철 비를 흠뻑 마셔서 음탕하고 포만해진 검은 꽃처럼 보였지. 그래, 권총자살을 하기 직전 비극 배우처럼 말이야. 그것도 하얀 자개 장식이 있는 고풍스러운 권총으로 그 여자는 자기 자신을 쏴버렸지. 맞아. 넌 그 여자를 닮았어. 그 여자가 자기 자신을 닮은 것만큼은 닮은 것 같아. 그런데, 하고 노인은 불현듯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내가 그 여자인지도 몰라.

침묵.

가끔 그런 생각을 하거든. 그렇게 이상한 여자가 TV를 독차지하는 게 가능한가 하고 말이야. 그 여자는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그렇게 못생기지도 않았거든. 특별히 연기를 잘하지도 않고 말이야. 아무도 오가지 않는 구석자리에서 혼자 피었다가 시들기 딱 좋은 년인데 왜 그렇게 많이 보이는 건가 하고 말이야. 그 여자는 지나치게 많이 보였어. 지나치게. 그런데 내가 TV 화면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거울이고 거기에 그 여자가 비추어진 것뿐이라면, 그렇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나는 그 여자가 꾸는 꿈 같은 거야. 나는 거울에 비추어진 그 여자를 보고 웃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좌절하는 거야. 아주 웃긴 일이지. 뒤지게 웃긴 일이라고.

그럼 내가 아니라 당신이 그 여배우라는 거예요?

그래. 노인은 침울하게 말했다. 노인의 하얀 머리칼 틈새로 분홍빛의 두피가 들여다보였다. 네가 내 반영인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내 반영인 것처럼. 여자는 생각했다. 혹은 말했다. 어느 쪽인지는 앨리스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간혹 머릿속의 목소리는 실제처럼 선명했고 비교할 수 있을 만한 현실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아, 아, 아, 아,

TV 속 남자가 꽃의 오줌을 눈다. 그녀는 검은 눈을 연 채로 남자의 꿈을 꾼다. 남자는 바지춤을 풀어헤치고 꽃에 자지를 가져다대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동시에 그는 달콤한 공포를 느낀다. 그는 어딘가에서 웅크리고 있던 꽃이 그에게 복수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꽃이 자기의 딸이거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꽃의 아래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줌을 누고 난 뒤에도 성기를 내놓은 채로 있다. 꽃의 뿌리가 아이의 말캉한 눈동자를 파고드는 상상, 그의 오줌을 빨아들인 꽃이 아이의 눈동자를 싯누렇게 적시는 상상을 하면서 그는 발기한다. 수음하면서 그는 꽃의 뿌리가 아이에게 매달려 있는 것일지 아이가 꽃에 매달려 있는 것일지 고민한다. 사정하는 순간, 그는 그의 오줌으로 더럽혀진 아이의 머리카락 색깔을 생각한다.

아, 아, 아, 아,

그녀들은 거울 속에 홀로 남겨진 유령들 같다고, 앨리스는 생각한다. 노인의 음침하고 서글픈 비린내. (그러나 노인은 아마 자기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없을 것이다.) 앨리스는 노인에게 언젠가 그녀가 나온 영화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한다. 노인은 다정하게도-아마 앨리스가 나온 영화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텐데도- 고맙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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