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19

Act. 2.

초인종 소리. 앨리스가 문을 연다. 택배 배달원 남자가 그녀를 밀치고 현관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낡은 운동화에서 질척질척한 흙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살해당하고 있어. 남자가 울부짖는다.

뭐라고요?

살해당하고 있어. 나, 살해당하고 있다고.

남자가 갑자기 실어증 환자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거샌 숨을 내뱉는다. 앨리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입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와줘.

혹은 왔어.

혹은 갈래.

혹은 살려줘.

혹은 죽여줘.

혹은 안아줘.

앨리스는 오래도록 빨지 않은 걸레처럼 쉰내가 진동하는 남자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그는 기겁을 하며 여자를 밀쳐낸다.

Act. 3.

그녀는 항상 빼앗길 것이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그녀가 그것을 가져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마치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앨리스가 거리를 걷고 있다. 사물들의 암묵적이고 비밀스러운 이름들이 그녀를 스쳐지나간다. 지하철역 앞에서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

– 안녕하세요.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 다름이 아니라, 저희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 뭘요?

– 저희가 뭘 물어볼 건데 짧게 답해주시면 돼요.

– 그래요.

(침묵)

– 언제 물어보실 건데요?

– 잠시만요.

인터뷰어가 벌거벗은 물고기처럼 헐떡이며 얼굴을 찡그린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렸어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잊어버렸어요. 앨리스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린다. 그녀는 인터뷰어들이 쌍둥이처럼 닮았음을 깨닫는다.

– 자기소개 좀 해 주세요.

인터뷰어가 확신 없는 말투로 말한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듯이. 앨리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 어려운 질문이에요. 그렇죠?

식은땀이 맺힌 인터뷰어의 얼굴이 햇빛 아래 번들거린다. 그는 축축하게 젖어서 곧 돌이킬 수 없이 허물어져버릴 것 같다.

– 대답해줘요. 짧게라도.

앨리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인터뷰어가 끔찍하게 당황해하며 쌍둥이처럼 닮은 다른 인터뷰어에게 눈짓을 보낸다. 인터뷰어들은 긴 침묵 속에 서 있다가 갑작스럽게 웅얼거린다.

– 아, 당신은 유명한 여배우죠. 그렇지 않나요?

– 침묵.

– 당신을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앨리스는 고개를 젓는다. 인터뷰어들은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다가 곧 당황스럽게 울먹이기 시작한다.

– 미안해요.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그녀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정말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당신은 여배우가 아니에요.

인터뷰어들은 그녀가 그들을 속이기라도 했다는 듯 갑작스럽게 악의에 찬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다.

Act. 27.

텔레비전에서 짙은 색의 얼룩들이 춤을 추듯 일렁거린다. 끔찍하게 메스껍다.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을 끌만한 기력이 노인에게는 없다.

끝까지 저걸 끌 수 없을 거야.

오렌지쥬스를 빨면서 노인은 생각한다. 두서없는 사유파편들을 그녀는 오렌지쥬스 방울을 기침하듯이 중얼거린다. 그녀가 쓰고 있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녀는 이제 휘발성의, 복원할 수 없는, 사라지는 말로 시를 쓰고 있으므로. 그것은 관객 없는 퍼포먼스이고 하나의 절망적인 모순이다.

그녀는 점점 더 오래 혼잣말하고 점점 더 오래 멍하다.

곧 그녀는 완전히 멈춰버릴 것이다. 그녀의 유언은 어디에도 닿지 않을 것이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모서리 위에 몸을 대고 앉아서, 갈라져 벌어지는 채로, 점점 뜯어지는 채로, 그녀가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오직 그녀만이, 그녀를 알고 있다. 오직 그녀만이, 그녀를 듣고 있다. 오직 그녀만이, 그녀가 얼마나 빌어먹게 오랜 시간 유언했는지 알고 있다. 가장 위험한 이미지들로 목을 베면서. 그러나 그녀는 살아남았고 아직도 침에 젖어 눅눅해진 혼잣말을 유언하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집요하게 그들을 원했는지,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그녀는 그들을 쫓았다. 키스할 수 있는 입술, 접촉하여 마찰시킬 수 있는 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각자의 방식으로 결여되어 있는 영원성을 밀고 나가는 심장들을. 그녀는 어휘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크게 뜨인 눈동자를 가져다대고 자해하며, 부드러운 눈알을 다 베여가면서 그들을 끈질기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시였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갈 때마다 그들은 그녀를 두고 더 먼 곳으로 갔다. (아예 닿지 않을 곳으로 떠나버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닿을 수 없었다. 그들을 사로잡는 방법은 오직 끔찍하고 강제적인 폭력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끝내 그것을 강행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어떤 나비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곤충학자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 나비는 그다지 희귀한 것이 아니므로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마치 무지개처럼, 나비는 잔혹하리만치 흔하게 보인다. 그녀는 나비를 찾아 다가간다. 나비는 그녀가 근처에 다가올 때까지, 그래서 그것의 부드럽고 연약한 날개에 손끝이 닿기 직전까지 기다린다. 그러다가 날아가버린다.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지는 않지만 닿지는 않을 거리까지. 그녀는 따라간다. 나비는 도망간다. 그녀는 따라간다. 그녀는 나비가 오직 그녀를 절망시키기 위해, 그녀를 파멸시키기 위해 도망간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비가 오직 그녀를 살게 하기 위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비가 오직 그녀를 살해하기 위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비의 도주, 혹은 출현과 그녀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나비를 쫓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나비를 쫓지 않는 동안에도 나비를 원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그녀는 망가졌고 망가진 기계장치가 그러하듯 똑같은 말의 내부만을 집요하게 맴돈다. 인류학자의 불결한 눈길이 닿았기 때문에, 오직 그 때문에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자살하여 그들의 천국으로 도망간 부락에서 번져나오는 끔찍한 소외의 공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인류학자처럼, 그녀는 그녀의 입술과 그녀의 침, 그녀의 언어와 그녀의 갈망으로 더럽혀진 세계의 눅눅한 그림자가 그녀를 피해 서서히 자리를 옮기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한다. 그렇게 밤이 오고 TV 화면 속의 하얀 귀신이 웃는다.

하얀 얼굴을 가진 여배우는 오래된 전 연인인 사진가를 찾아가 그녀의 결정적인 순간-그녀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녀가 살해당하는 순간-을 촬영해줄 것을 부탁한다. 누르스름한 얼굴의 사진가는 한참 망설이다가 여배우가 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고는 마지못해 수긍한다. 그날부터 사진가는 여배우의 은밀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여배우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다. 사진가는 좁은 원룸을 정리하고 여배우의 2층 저택에 들어가 여배우와 동거하며 그녀의 일정을 매니저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사진가는 여배우가 그에게 미련이 있어 이런 의심스러운 요구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배우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사진가는 나이든 그녀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는 못한다. 여배우는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어떠한 추가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래도록 함께 기다린다. 늑대가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혹은 죽은 아이가 검은 강을 건너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부모처럼, 혹은 너무 오래 기도해서 닳아버린 언어가 형상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시인처럼. 그들은 기다린다. 그들은 어떠한 성적인 접촉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가는 여배우가 그에게 어떠한 미련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강박적인 의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여배우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기를 기다리는 만큼이나 그녀가 그에게 고백하기를 기다린다.

노인은 소리 없이 흘러가는 멜로 드라마를, 높은 가능성으로 그녀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일 대화를 꿈을 꾼 뒤의 음부처럼 벌어진 눈동자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듣는다.

Act. 1.

앨리스는 그녀가 쓴 것을 읽으면서 끔찍한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달콤하게 죽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그녀가 쓴 평론의 내용과 그녀 자신, 그리고 영화의 여배우가 너무나 닮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닮았다. 물방울처럼. 나보코프의 『절망』처럼. 『절망』의 주인공은 자신과 놀랍도록 닮은 남자를 살해하지만 주인공과 그 남자 사이의 유사성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발견되지 않을, 그러나 심연의 얼룩처럼 집요하게 남을 유사성들이 그녀를 죽고 싶을 만큼 슬프게 했다.

그녀는 쓴다. 그녀는 그녀가 쓴 것에 대해 쓴다. 그녀는 그녀가 쓴 것을 모방한 것을 쓰고 그것에 대한 비평을 쓰고 그것에 대한 슬픔을 쓰고 그것을 찢어버리기 위해서 쓰고 그것을 울기 위해 쓰고 그것을 냉담하게 관찰하기 위해 쓰고 그것에 대해 쓴 것에 대해 쓴 것에 대해 쓴다. 그녀는 쓴다. 그녀는 영원히 쓴다. 합치되고 분기하며 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 안으로 구부러져 되돌아오며 다시 이상한 틈새로 파고드는 미로의 강박적인 언어들 :

가령, 그녀는 그녀의 은밀한 초상을 노골적이리만치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비평을 열지만, 아무도 그녀의 비평에서 그녀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한다. 새까만 퍼즐 위에서 분홍색 튀튀를 입고 푸앵트를 하는 흰 생쥐. 딸기 생크림 케이크 요리법 : 토핑 위에 어린아이의 삶은 눈알을 올리세요. 아, 가령, 그녀는 그녀의 은밀한 초상을. 삶은 눈알 위에 허브를 올려서 쌉쌀한 맛이 나게 하세요. 아무도 그녀의 유사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늙은 난쟁이를 저며 만든 잼을 스펀지 사이에 바르세요. 그러나 심연의 얼룩처럼 집요하게 남을 유사성들이 그녀를. 베어물면 베일 만큼 충분히 날카로운 주사위들을 딸기 주위에 데코레이션으로 박아 넣으세요. 죽을 만큼 슬프게 했다. 가령, 그녀는 그녀의 은밀한 초상을.

감독님 안녕하세요.

감독님은 제 친구도 연인도 아니지만 저는 감독님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감독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감독님은 저를 모르시지만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죠. 감독님이 돌아가라고 했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말은 아무 말도요. 저는 초인종을 누르면서 어떤 식으로 제 죽음을 연출해야 찍힐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번화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적어도 바닥에 늘러붙은 살점과 체액, 내장과 피가 완전히 지워지기 전까지는 제 냄새가 나겠죠. 많은 사람들이 그걸 맡을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초인종을 누른 뒤에 감독님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려 했습니다. 엘리베이터로 돌아가니 가장 높은 층이 18층이더군요. 그래서 18층에 올라갔습니다. 감독님. 그런데 비상구에서 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17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만 있었죠. 저는 17층에서 다시 18층으로 올라가고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절망적으로 헤맸습니다. 비상구의 하얀 벽을 손톱으로 긁어댔고 두드려도 보았고 발로 차고 비명을 질러보기도 했습니다. 벌어진 손톱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한참이 지난 뒤 집에 돌아가고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계속 긁었고 계속 두드렸고 계속 절망했고 계속 찾으면서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 비명을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감독님의 집과 제가 있던 곳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감독님은 아마 듣지 않았을 겁니다. 그곳에 있던 누구도 저를 듣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가 완전히 망가져버리기 전에 엘리베이터로 돌아가 웅크려 앉을 때까지도 저를 쫓아내기 위해 저를 만나러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감독님의 아파트에는 정말 옥상이 없나요?

이제 어느 건물에도 옥상은 없나요? 저는 아파트 현관을 나가서 올려다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분명히 꼭대기가 있었습니다. 검은 허공으로 노출되어 있는 긴 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떨어지기 위해 사람이 마지막으로 거쳐갈 수 있는 충분한 공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로 갈 수 있는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감독님, 그날 이후로 저는 수족관이 있는 건물과 백화점과 레스토랑과 영화관과 쇼핑몰과 초등학교의 옥상에 도달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감독님. 저는 어디에서나 옥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옥상에 도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저는 어디의 옥상에도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하얗고 거칠거칠한 벽에 단단히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미쳤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고 저는 미쳤기 때문에 그곳으로 갈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미쳤기 때문에 끔찍하게 벌어져 있는 그곳을 볼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감독님. 정말로 저는 옥상에 도착할 수 없을까요? 추락하기 위해서는 새처럼 날아올라 그곳에 다다를 수밖에 없나요? 감독님. 그건 끔찍하게 잔인한 일입니다.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제게는 은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날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감독님. 감독님의 옥상을 열어주신다면 저는 언제든 그곳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당신의 환상적인 여배우, 앨리스 드림.

그녀는 그녀가 해야만 하는 말, 그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메일을 보낸다. 한 시간 뒤, 그녀는 그녀가 보낸 메일 주소의 서버 문제로 메일이 발송되지 못했다는 자동 메일을 받는다. 그녀는 몇 번 더 같은 주소로 같은 메일을 보내지만 그것들은 어김없이 “발송 실패”라는 문구로 되돌아온다.

Act. 28.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E는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민증을 발급받고 난 뒤에도 그랬다. 그녀의 추론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관계의 절대적인 부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아파트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아주 가끔, 부모를 대신해 먼지가 쌓인 공과금 관련 서류들을 챙기러 아파트 현관의 우체통까지 내려가기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까지만 해도 아파트 주위의 화단-거북스러운 색으로 번들거리는, 무엇보다 인조적으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생화인 붉은 자줏빛 꽃들이 게걸스럽게 자라난-과 놀이터-폭력적으로 무리지은 아이들이 외부인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매몰차게 내쫓아버리는-를 산책하던 일도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그런 일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아파트 현관 바깥의 세계는 그녀가 태어났을 무렵부터 경험해온 그대로였고 매일 반복해서 나가든, 몇 달의 간격을 두고 나가든 그녀를 경악하게 할 만한 매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네를 타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완벽한 이해자 혹은 그녀에게 미친 듯이 빠져들 매혹적이고 완벽한 갈색 머리의 남자를 기다리는 것도 그녀는 열 살 이후로 그만두었다. (물론 그들에 대한 환상은 이삼 년 정도 그녀 의식의 불분명한 중얼거림으로 이어졌다.)

a. 그녀의 완벽한 이해자 a는 그녀의 모든 고민과 우울과 슬픔과 얼룩을 이해한다. 심지어 그녀가 말하기 전에도! 심지어는 그녀가 말할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녀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한다.

a는 그녀가 만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a는 마치 그녀를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a는 그녀를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a는 그녀를 경멸하지도 연민하지도 않는다. a는 그녀를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잘나지 않았고 그녀를 불운에 전염시킬 정도로, 혹은 그녀를 역겨운 자선가로 만들 정도로 절망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a는 그녀의 절망에 완벽하게 공감한다. a는 그녀의 반으로 전학온다. 그녀는 언제나 a와 함께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을 보내고 짝을 지어 체육 수행평가를 하고 모둠 활동을 한다. 수학여행에서도 그녀와 a는 함께다. a에게 그녀는 가장 은밀한 비밀들을 털어놓는다. a 역시, 그녀가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망치지 않을 만한, 그러나 가장 충실한 이해자들 사이의 유대가 돋보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깊은 비밀들을 털어놓는다. 그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다. E가 아무리 끔찍한 농담을 던져도 a는 결코 E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고 자위 행위와 에로틱한 환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평생 함께할 것을 그 말이 거짓으로 비추어지는 대신 감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약속한다.

그들 주위의 모두가 a와 E의 관계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사실 아무도 그들 사이의 관계를 질투하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의 관계는 견고하다. 그들은 온갖 모략과 험담과 술책과 음험한 함정들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들은 그들의 우정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확신한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군가 죽거나 실종되거나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쳐버린다고 해도 그들이 나누었던 말들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세계의 어딘가에 남을 것임을, 혹은 그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고 해도 그 슬픈 사라짐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울 것임을 확신한다.

a와 E는 언제든 서로의 집에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들에게는 초대와 승낙의 과정조차 필요없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열려 있으므로. 그들은 울고 싶을 때 서로의 품에서 운다. 그들의 방에는 반짝이는 은밀한 어휘들이 널브러져 있다. 서로의 방의 찾아갈 때, 그들은 주변에 어지러진 어휘들을 손바닥으로 더듬거리며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들은 온갖 낯간지러운 언어와 스킨십과 의식(ritual)들을 거리낌없이 주고받을 수 있다. 그들의 방에는 우정을 맹세하는 징표들-우정링과 우정목걸이 우정을 약속하는 작은 석상들과 종이학, 수업시간에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쪽지들,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 그들 서로의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으면서도 취향의 외연을 확장시켜주는 책과 음반 선물들, 그들 둘만 알아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b. b는 어리고 다정하며 어른스러운 그녀 또래의 남자아이로, 그들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꿈 속에서다. 꿈 속에서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서슴없이 가까워진다. 그들은 비극 드라마에 나오는 연인처럼 애틋한 시간을 보낸다.

b는 E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갈망한다.(그것이 그 관계의 핵심이다. 기울어진 천칭, 언제나 항고한 비대칭을 유지하면서도 양자가 그 비대칭에 만족하는.) 그는 E의 꿈을 꾸기 위해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하루종일 잠에 빠져든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그는 그가 더 이상 E를 꿈꿀 수 없음을 깨닫고 끔찍한 고통으로 울부짖다가 E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한다.

E는 그녀의 학교 앞에서 막 절망적인 꿈에서 깨어난 환자처럼 상기되어 헐떡이는 b를 마주친다. E는 b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b는 그에게 필연적으로 안배되어 있는 속성에 따라 E를 한 눈에 알아본다. b는 잃어버린 개를 찾은 아이처럼 갈라지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E에게 말을 붙이려 한다. 교실에 가는 길을 안내해 줘.

그건 얼토당토 않은 부탁이지만, E는 순순히 승낙한다. 그들은 함께 E의 교실로 들어온다. b가 학기가 시작할 때부터 그 반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클래스메이트였다는 사실이 곧 밝혀진다. b가 꿈 속에서 만난 운명의 상대였음은 그보다 더 시간이 흐른 뒤 밝혀진다. (그런데 과도하 비대칭과 갈망으로 구성된 이 환상에는 치명적인 결손점들이 있다. E와 b가 같은 반 학생이었다면, b가 학기 중간에 E를 갑작스럽게 ‘한 눈에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E는 환상이 순식간에 미지근하고 지루하게 변해버릴 위험을 감수하고 구체적인 파열점들을 복원하는 것보다는 b와의 만남을 더욱 매력적으로 구성하는 데 집중한다.)

모든 비밀들이 알려진 뒤 그들은 다시 서로의 꿈을 꾸는 것처럼, 비극의 위기 단계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결정적이고 파멸적인 애정을 나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면서도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느낀다. b는 E가 가진 모든 결점들을 그녀가 가진 흔한 장점들보다 더, 병적으로 사랑한다. b는 E를 위해 얼마든지 자살할 수 있음을 그녀의 앞에서 떨리는 손에 들린 은색의 장식적인 나이프와 창백해진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로 시연해보인다. E는 그녀가 그의 열정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b는 환희에 벅차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그들 사랑의 모호한 성격을 느끼면서도 오직 그 모호함 때문에 그 사랑이 특별하고 유일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쉬는 시간이나 하교 시간, 등교 전의 짧은 시간마다 체육실 창고, 불이 꺼진 과학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복도, 급식실 뒤 공간에서 입맞춤과 열렬한 감염성의 눈맞춤을 나눈다.

E는 어느날 그녀가 기다리던 것이 그녀를 기다리지 않음을 깨달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 강박적으로 잠을 청하거나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현관 바깥의 길고 구불구불한 인도와 고무 타일이 깔린 놀이터에서 느릿느릿 움직이거나 돌진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뜀을 뛰거나 한가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손뼉을 치거나 장난스럽게 춤을 추거나 웃거나 흐느끼고 있는 그 누구도 그녀와 마주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다음날 태양이 뜨지 않을 가능성이 있지만 태양은 거의 반드시 매일 뜬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되듯이, 그녀는 그 모든 항시적인 불가능에 젖어들게 되었으므로. 생은 과격하고 파멸적인 매혹이라기보다는 자기 사진을 찍는 자신의 모습을 찍고 있는 피사체 혹은 사진가의 영속적인 착란, 혹은 일생을 할애해 그린 거대한 그림을 표백제를 풀어 놓은 수조에 천천히 담가 그것이 사라지는 모습을 감상하는 시간, 혹은 거의 사라진 그림에 남은 약간의 얼룩 같은 것임을 그녀는 알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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