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20

Delusion level 10.0.

페이디피데스는 달렸다. 아테네는 승리했고 그는 끔찍하게 목이 말랐다. 그는 달렸다. 달리다가 마침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목이 말라서 그곳에 왔는지 아니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죽었고 그가 한 말은 이후의 사람들이 정해 주었다.

안녕, 친구들. 오늘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 먹방을 할 거야.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으려면 우선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어야 해.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려면 딸기와 생크림과 케이크가 필요한데 지금은 딸기도 생크림도 케이크도 없어. 그러니까 딸기랑 생크림이랑 케이크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Act. 28.

부모가 그녀를 회유하고 보채고 나아가 그녀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는다면 방 안에 쉽사리 쌓이게 될 쓰레기의 목록을 그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오뚜기와 CJ 사의 컵밥 용기들, 씻지 않은 컵들(립스틱 자국이 컵 윗부분에 둥글게 남고 바닥에는 늘러붙은 물때가 누렇게 층을 이루고 있다), 과도할 정도로 길어진 뒤에야 자른 손톱들과 발톱들, 머리카락 뭉치, 찢어버린 페이지들, 깨진 화분 조각, 뚜껑을 열고 방치해둔 인스턴트 커피, 어디에도 활용되지 못한 메모들,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한 초상 혹은 낙서들, 출판되지 못한 시들을 넣고 돌리느라 망가져버린 믹서기와 거의 완전히 파괴된 시의 페이지들, 지나치게 크거나 작은 눈이 카메라를 기묘한 방향으로 응시하고 있는 셀카 폴라로이드 사진들, 눈물과 질액, 콧물, 피지와 소량의 혈액, 짓뭉개진 날파리가 엉겨붙은 휴지뭉치들, 제로 칼로리 코카 콜라의 반만 마신 캔들과 눈알이 후벼파인 마론인형들, 진통제의 빈 껍질들, 리스트 컷을 한 뒤 씻지 않고 놓아둔 커터칼 조각들(그녀는 피가 묻은 그것을 조각조각 잘라내는 걸 즐겼다), 정기적인 의식에 사용한 붉은 포도주가 담긴 와인잔, 뚜껑이 벌어진 화장품들, 그녀를 멍하니 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검은 얼룩들.

E는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내부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부의 고립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그녀는 물론, 다른 곳을, 완전히 다른 곳, 망상만큼이나 다른 곳을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다른 곳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을 상상하고 그것의 표면과 굴곡, 모서리를 더듬거리고 그 속에 간혹 머리를 쑤셔넣고 무호흡 상태에 빠져들면서도 그랬다. 그녀는 환상에 완전히 매혹되지 않을 만큼 건강했고 꿈꾸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을 만큼 병적이었으니까. E의 부모는 E가 칩거한 지 2년이 지나서부터는 딸을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들은 함께 식사하지 않았고 간혹 방문을 통해 힘이 빠진 훈계와 반항을 교환하거나 E의 방문을 억지로 열고-방의 잠금장치가 망가졌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를 바깥으로 끌어내 무언가를 이야기해보려고 하기도 했으나 그 이야기라는 것은 방문을 사이에 두고 교환하던 모호하고 무력한 레퍼토리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E의 고립 상태에 점차 적응해갔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지는 못했으나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그녀의 망상과 연결되어 있는 시를 쓰고 그것을 파괴하는 일에 집중했으나 그것들의 잔해는 그녀의 엄마가 직접 20L 쓰레기 봉투에 넣고 내다 버렸다.

간혹 거리에 나가 울부짖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거리에 나가 그녀의 슬픔을 토한다면 아무도 그녀를 달래지 않을 것이다. 유튜브에 종종 올라오는 몰래 카메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길을 가던 사람이 멈추어서 E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E의 등을 토닥이고 함께 벤치에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몰래 카메라의 슬픈 배우와 E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까. 그건 영상에 나오는 배우는 미치지 않았으며(적어도 미치지 않은 슬픔을 연기하고 있으며) E는 미쳤다는 사실이다. 거리에서 비둘기를 향해 비명을 지르고 꽃을 보며 절규하고 벽을 보고 기도문을 외고 어디서부터 흘러넘쳤는지 모를 물로 흠뻑 젖은 채 바닥에 대고 몸을 비벼대는 미친 여자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봐. 너도 정확히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 거야.

비밀스럽지만 상품가치가 있을 정도로 희귀하지는 않은 절규 속에서 사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아니었다. E는 나날이 질식할 정도로 비좁아지는 방 안에서 허공을 부유하는 은근한 절규(심지어는 어느 정도 침착하기까지 한)를 들으며 살아 있었다. 어떤 날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잠들었고 어떤 날은 사형 집행인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끔찍하게 긴 침묵 속에서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길게 늘어난 초침 사이의 간격을 세어야 했다.(세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세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젠가 E가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개념적인 규준들은 물에 젖은 종이상자처럼 점차 허물어졌다. 그녀는 시간 감각을 잃어갔고 추상적으로 뭉그러져 풀어졌다가 다시 모이고는 하는 점액질의 관념 속에서 깨어나고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깨어난 뒤에 잠드는 대신 곧바로 깨어나고 잠든 뒤에 깨어나는 대신 다시 잠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들의 수와 이름들, 그들을 구분하는 차이점들과 그들을 친족으로 만드는 언어적, 형태적 유사성들을 혼동했다. 예컨대 그녀에게 언니나 오빠가 있었는지, 고모가 있었는지, 증조할머니가 살아 있는지, 동생들이 몇 명인지(혹은 없는지), 이모할머니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그녀는 혼동했다. 특히 외가 쪽과 친가 쪽의 가족들을 서로 혼동하고는 했는데 어느날 그녀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이모와 고모가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홀로 경악하기도 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학급 친구들(실제로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과 친척들의 이름을 혼동하였고 소설에서 읽은 에피소드와 그녀의 가족에게 실제로 일어난 에피소드를 혼동하였으며 실제로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과 그녀가 망상한 것을 혼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중 어느 것도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킬 정도로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살아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변함없이 살아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우스꽝스러운 죽음의 아름다움에 대한 병적인 기호를 가지고 있었다. 유머, 농담, 미끄러짐 같은 죽음. (그것은 그녀의 예술관과 정확하게 상응했다. 왜냐하면 예술은 진지할수록 실패하는 아이러니이므로. 예술은 유머, 농담, 미끄러짐, 무엇보다도 실패 이외에 무엇도 아니므로.) 그녀의 기호에 대한 리스트 일부는 다음과 같다. :

– 웨딩드레스를 입고 히치하이킹 하여 남미를 일주하는 프로젝트를 하던 예술가 여자. 그녀는 프로젝트 도중 납치, 강간, 살해당한다. 그녀를 촬영하던 역할을 맡았던 동료 예술가는 살아남았지만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살아남았다면 적지 않은 수의 관객들이 새하얗고 풍성한 웨딩드레스-남미의 더러운 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혹은 극적으로 어울리는-를 입은 젊고 건강한 여자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승합차에 올라타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 남아 있을, 혹은 분실되었을 영상 작업은 영원히 발표되지 않았다.

– “나는 천국에 간다, 개새끼들아”라는 유언을 남긴 유명한 스님.

– 개그 콘서트를 보고 폭소하다가 질식사하는 중년 여자. 그녀는 연속극의 등장인물로, 며느리와의 오랜 갈등 끝에 극적인 화해를 이루어낸 날 저녁, TV를 보고 고통스럽게 웃다가 그날 방영분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얗게 질려 쓰러진다. 그 뒤 그녀는 두 번 다시 같은 극에 등장하지 않는다.

– 떡을 빨리 먹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다가 떡이 목에 걸려 생방송 도중에 질식사한 유명 개그맨. 그의 사례 이후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녹화 편집을 거친 뒤 송출되었으며, 방송 작가가 출연자들의 안전을 위해 몇 번의 자문과 검토를 마친 대본대로만 촬영되었다. 위험한 촬영을 해야만 할 때는 출연자들의 동의서를 받았으며 구급대원들이 촬영장에서 대기했다.

– 수백 번의 좀도둑질로 기소당해 감옥에 갇힌 재벌. 그는 그에게 불필요한 물건들의 자리를 강제로 이탈/위반시키는 황홀감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감옥에서도 다른 죄수들의 소지품들을 훔칠 수 있는 기회를 만끽하기 위해 괴상한 로비를 하여 독방이 아닌 일반 감실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는 어떤 마피아의 애인 사진을 훔치다가 발각당해 날카롭게 벼려 놓은 칫솔 손잡이 부분을 복부에 삽입당해 살해된다.

– 가짜로밖에 보이지 않는 연기를 위해 실제로 죽은 연극배우. 그녀는 그녀에게 총을 쏠 상대의 소품을 탄환이 장착된 진짜 리볼버로 바꾸어 놓았고 연극 무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녀의 죽음은 다소 전형적으로 보였고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관객들은 그녀의 ‘소름 끼치는 연기’에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그녀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일어나 원수인 옛 연인의 목을 조르는 역할’(물론 이러한 장면은 옛 연인의 꿈 혹은 망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지만, 적어도 연극 무대에서는 그녀가 실제로 움직여서 관객들에게 그 꿈의 형상을 보여주어야만 했다.)을 연기할 수 없었고 연극은 끔찍하게 실패했다. 상대 배우가 당황하여 멍청하게 말을 더듬고 관객들이 야유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커튼콜은 없었다. 다음 무대도 없었다.

E는 무능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찌할 수 없이 무능했다. 무능은 그녀의 은밀한 자랑거리였다. 그녀는 흰 벽지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노란 얼룩을 희망처럼 바라보았다. 보아서는 안 될 검은 얼룩들과 반점들, 신기루들, 끔찍하고 감미로운 망상들을 보고 기능 장애와 정신 장애(우울 장애, 선택적 함구증, 간혹은 거식증, 불면증, 대인 기피증, 반복적인 자해 충동)를 앓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몇 안 되는 위안거리였다. 불투명하고 축축한 웅성거림 속에서 그녀는 난쟁이의 잼을 발라 놓은 정사면체의 다섯 번째 면에 대해, 농담 없이 전부 검은 피스로만 이루어진 퍼즐에 대해, 학생에게 성적 의도가 담기지 않은 교태를 부리는 늙은 선생에 대해, 검게 타들어간 종달새 고기를 씹을 때 튀어나오는 아름다운 노래에 대해, 다른 조각에 연결될 가능성으로 반짝이는 퍼즐의 무수한 절단면들의 정교함에 대해,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자살 키트(A 키트에는 질식 유도제와 관장제, B 키트에는 리스트컷용 은색 나이프와 관장제, C 키트에는 안락사용 약물 주사기와 관장제, D 키트에는 목에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압력이 가해지지 않도록 충분히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된 로프와 관장제가 들어 있다.)에 대해, 어린 양의 거품으로 뒤덮인 윗입술에 대해, 어린 여배우의 희미한 수염 자국과 인터넷 쇼핑몰에서 미래의 연인들을 장바구니에 충동적으로 담아넣는 쇼퍼들에 대해, 모두에게 속하는 공백의 장소와 같은 감미롭고 위험한 이미지들에 대해 생각했다.

눈 먼 벽은 그녀의 응시를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것에게는 그녀를 보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그녀는 목적 없는 탐구를 집요하게 이어나가는 늙은 학자처럼 그녀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가령, 스포츠면에 실리는 모든 대회들에 참가하는 일(모터 사이클 대회, 여자 평형 1000m, 스키점프, 마라톤, 100m 달리기, 장애인 야구 대회), 그녀의 유서를 출판하지 않으면 테러하겠다는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암시를 출판사들에 투고한 뒤, 그들이 긍정적인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실제로 그들의 건물에 설치해둔 사제 폭탄을 터뜨리기, 손가락에서 불분명한 원리로 발사되는 총을 쏘아 달을 산산조각내기, 날카로운 금속 주사위를 음부에 집어넣기, 리모콘으로 모든 현실을 꺼버리기. 그녀는 그녀가 연구한 적도 없는 리바의 유령(혹은 실종자)들과 리바의 기후, 리바의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논문을 국내외의 모든 학술지와 출판사들에 투고한 뒤 거절당할 경우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1. 그녀가 쓴 원고의 유일한 원본을 전부 불태운다.

2. 오직 그녀를 위한 한 권의 책만을 자비출판한다.

3. 모든 학술지와 출판사들에게 스팸처리된 뒤에도 집요하고 강박적으로 투고하고 실패한다. 실패의 병적인 반복 속에서 살아간다.

4. 자살한다.

5. 출판 관계자들을 미행하면서 그들이 혼자 남았을 때 상투적이고 미개한 방식으로 식칼을 들이대고 협박한다.(그들은 그녀가 결코 살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이므로)

그러나 그녀에게는 리바의 유령들과 리바의 기후, 리바의 유령에 대한 연구 논문이 없고, 그러므로 위의 다섯 가지 방법과 출판되지 않은 연구 논문, 그리고 E 사이의 관계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병에 대한 욕구, 고통과 불구에 대한 만족감은 그녀의 삶에서 집요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출현하는 증상이었는데 그것을 주의 깊게 읽어 해석해줄 만한 주변인은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를 해석하고 교정하는 친절, 혹은 폭력 없이 그녀는 정신착란의 달콤하고 순수한 격양 상태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실패한 비극에 대한 저속하고 열정적인 숭배를 지속하면서.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취향은 점차 깊고 정교해졌다.

그녀는 태어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태어남을 후회할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는 태어나야 하므로 그녀는 태어난 것이다. 그녀는 반복될 수도, 삭제될 수도 없는 그녀 자신의 출생이 자랑스럽지도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받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원죄마저도. 그러므로 그녀는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뒤틀림과 슬픔을 즐겼고 그 누구에게도 그것들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그 축축한 얼룩들, 아름다운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번져가는 멍들, 보석처럼 반짝이는 젖은 붉은색의 상처들을 이유로 원망하지 않았다.

Act. 25.

김현경은 꿈꾸는 그녀를 창백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돼지들의 꿈을 꾸었다. 깨어난 뒤에도 그녀는 그들의 검고 불투명한 눈동자의 잔상을 느낄 수 있었다.

돼지들은 늑대를 기다리고 있다. 29번 채널의 동산에서, 영원과도 같은 사형장에서, 끝과 시작 사이의 무한한 간격 속에서. 늑대는 오지 않는다.

늑대는 오지 않는다. 늑대는 늑대들로서만 실존하므로. 돼지들이 기다리는 환상의 늑대, 일자, 이데아, 단일자로서의 늑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늑대는 언제나 늑대들이다. 그러므로 늑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들은 늑대를 기다리고 있다. 돼지들은 늑대를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사실 돼지들은 늑대와 직접 약속을 한 적도 없을지 모른다. 다만 그들의 부모로부터 약속을 전해들었을 뿐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늑대와 약속을 했단다. 우리는 늑대를 기다리고 있단다. 늑대가 우리의 집을 무너뜨리고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줄 거란다. 늑대는 오지 않는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 그들의 약속도 아니다. 순진한 돼지들, 가진 것은 오직 기다림밖에 없는 돼지들은 약속이 거짓인지 망상인지 농담인지 착각인지, 혹은 일종의 상징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돼지들은 늑대를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늑대만이, 늑대와의 약속만이 그들이 배운 유일한 언어이므로.

김현경은 깨닫는다. 눈물을 흘리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김현경은 깨닫는다. 꿈꾸는 여자를 응시하는 돼지들, 꿈꾸는 돼지들을 응시하는 여자. 무한히 반복되는 응시들 어디에도 늑대는 없다. 그녀는 그 사실을 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늑대는 오지 않아.

김현경은 TV 화면을 보면서 화를 내고 울부짖는다. 늑대는 오지 않아. 늑대는 오지 않아. 늑대는 오지 않아. 늑대는 절대로 오지 않아. 늑대는 오지 않아. 늑대는 오지 않아! 화면에 반사되어 뻐끔거리는 평면의 얼굴. 웅크린 등들. 그녀는 닿지 않을 것을 향해, 불가능한 것을 향해 소리를 높여 고함 지르고 절규한다. 그녀는 마치 그들이 그녀를 듣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녀는 마치 그녀가 들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녹화되어 송출되는 형상들, 데이터의 파동, 색점들의 고정된 움직임, 일정한 시간마다 출력되는 빛의 파동이 그녀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구멍들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를 흡입할만한 공간을, 내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TV 화면은, 빌어먹게 오래 기다리는 돼지들은 닫힌 평면에 불과하다.

돼지들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평면 속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김현경은 멍하니 깨닫는다.

김현경은 TV를 향해, 귀머거리 분홍 형상들을 향해 자폐적으로 중얼거린다. 늑대는 오지 않을 거야. 늑대는 오지 않아. 늑대는 오지 않았어. 늑대는 오지 않아. 늑대는 오지 않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녀는 미친 절규를 토해내며 흐느낀다. 늑대는 오지 않아.

돼지들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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