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24

Act. 1.

결국 그녀는 혼자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죽음들을 낳으려는 광기. 그녀의 연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로 걸어가는 남자아이. 횡단보도에는 어떤 삶이 있었다. 트럭은 그것을 짓밟고 지나갔다. 아이의 뼈와 내장을 뭉개고 지나가면서 트럭기사는 무엇을 느꼈을까. 트럭은 그것을 완전히 박살내고 지나갔다. B는 죽었다.

B는 죽었다. B의 죽음은 그녀의 존재보다도 확실한 것이다. B는 결국 성공한 인생을 살지 못했고 부자가 되지 못했고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다. 그러므로 앨리스는 B를 사랑한다. 그 애의 확고한 불가능성을, 변하지 않는 실패를. 그녀가 B를 괴롭혔다면 그 애는 유령이 되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앨리스는 B를 괴롭힌 적도 없었다. 그녀는 그 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그녀에게 쏟아붓던 그 많은 말들에 그녀가 응했다면, 그녀는 그 애의 장례식에 초대받을 수 있었을까. 아무도 그녀와 B가 마주앉아 급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B에 대해 묻지 않았다.

어쩌면, B는 그녀가 사귄 최초의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에게 최초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치류를 닮은 얼굴과 커피색 피부. 그녀는 아직 B를 기억하고 있었다. B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늙은 할머니-앨리스는 소문을 통해 그걸 들었다. 가엾기도 하지. 할머니랑 단둘이 살았다며.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착한 아이였는지. 이제 그 할머니는 어떡한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녀는 손자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살아있지 못할 테니까.

앨리스는 생각한다. 온몸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슬픔을 잊을 수는 없을 거라고. 숨구멍을 틀어막아 질식시키는 슬픔을 사라지게 만들 기쁨은 없을 거라고. 슬픔은 그녀의 피부다.

밤보다 어두운 횡단보도에 녹아들었을 피를 그녀는 보지 못했다. 인간의 형태를 닮은 하얀 선이 덧그려졌고 횡단보도는 다른 자리로 옮겨졌다. 시체를 덧그린 하얀 선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앨리스가 이미 여러 차례 B를 연기했지만 그것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최초의 죽음을 느끼면서 앨리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B는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B는 두 번 다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삶 속에서 무수히 죽고 죽음들 속에서 무수히 태어난다. 앨리스는 생각한다. 이제 다시 봄이고, 절망처럼 아름다운 꽃들은 피지 않았어,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애틋한 사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보다 더 오래 살았다면 넌 친구를 사귈 수 있었을 거야. 네게는 내가 가지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었을 거야. 너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다정한 애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인형에게 말하듯 그 애에게 마음대로 말을 토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인형을 흉내내듯 마음대로 그 애를 연기할 수 있다. 마치 그녀가 B의 친구였던 것처럼 슬퍼할 수 있다. 마치 그녀가 B를 알고 지냈던 것처럼, 마치 B가 살아 있었다면 무엇인가 변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앨리스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친구가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는데, 그때 그녀가 원했던 친구는 B가 아니었다.

B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정한 아이를 원했지만 B는 아니었다. 내성적인 아이를 원했지만 B는 아니었다. 같이 급식을 먹을 아이를 원했지만 B는 아니었다. 같이 수업을 들을 아이를 원했지만 B는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잡담을 나눌 아이를 원했지만 B는 아니었다.

B가 원하는 친구도 앨리스가 아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만약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면 B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B는 다정하고 같이 급식을 먹고 같이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잡담을 나누고 함께 하교하고 휴일에 같이 영화관에 갈 친구를 원했지만 그건 앨리스가 아니었다. 다만, 그 교실에서 유일하게 혼자인 아이가 그녀였으므로 B는 앨리스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 교실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게 그녀뿐이었으므로.

완고하고 확고부동한 죽음에 최종적으로 갇히게 되는 순간, 그녀는 B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B의 죽음을 떠올리고 영원히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이다. B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그 실패 이후의 친구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B라면 가능했을 미래를 그녀가 직접 살며 망쳐놓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랑스러웠다.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게. 실패에는 어딘지 처절하고 아름다운 구석이 있으니까. 여전히 그녀는 그녀의 마지막 죽음이 산업적이거나 통계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마네킹 위에 꽂아 놓은 사람의 머리처럼. 사람의 얼굴뼈를 조이고 있는 짐승의 벌거벗은 피륙처럼. 아, 하고 모음이 열린다.

아,

너를 질투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너를 질투할 필요가 없어서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네가 나를 죽일 수 없어서, 네가 나를 비웃을 수 없어서, 네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아서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친구를 사귈 수 없어서, 네가 다시 죽을 수 없어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어.

Act. 30.

한민아가 휴대폰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인다.

추워

춥다고?

추워 추워 너무 추워 한낮인데 이렇게 추울 수가 있나 너무 추워

나도 추워

나는 추워 추워서 죽고 싶어 너도 그렇게 추워?

모든 사람들이 추워.

추워 추워 추워서 슬퍼

괜찮아. 모두가 그래. 너는 약간 비정상이지만 대수로울 정도는 아니야.

그래?

그래. 넌 조금도 특별하지 않아. 모두가 너 정도는 추워.

그렇구나 추워 추워 너무 추워

넌 좀 과장하고 있는 것 같아. 너만큼 추운 사람들은 많지만 너처럼 칭얼대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렇구나 그런데 추워 추워 춥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말하지 추운데 너무, 정말 너무 추운데

심호흡을 하고 열까지 천천히 세 봐. 그러고도 안되면 따뜻한 차를 마시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계획을 세워.

그래도 추우면?

말했잖아, 하고 그는 다정하게 말한다. 모두가 그 정도는 추워.

아, 그는 정말 다정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전화가 끊긴 휴대폰에서 발산되는 열기를 느낀다. 그가 다정하니까 그녀는 곧 춥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다정하니까, 그녀는 곧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제발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줘. 제발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날 사랑해줘. 난 사랑받기 위해서 널 사랑하는 거니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널 사랑하겠어?)

한민아는 느낀다.

바퀴벌레들이 날아오른다. 마치 천사처럼. 그녀는 천사처럼 날아오르는 바퀴벌레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하고 위험한 비유다.

그녀의 삶이 무엇의 표절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감미로운 고통 속에서, 그녀는 그녀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잃어버릴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이미 잃어버린 것조차도 다시 잃어버릴 수 있다.

그녀는 그를 연기하고 싶다. 그녀는 죽은 여배우의 해골을 입에 넣고 씹어 삼키고 싶다. 흡입하고 싶다. 뼛조각들이 그녀의 입 안을 찢어내고 침과 섞여 부드러워질 때까지 머금은 뒤 삼켜버리고 싶다. 그것은 그들이 그녀에게 강탈당한 유산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그들로부터 계승한 범죄가 될 것이다.

그녀는 그녀가 무엇을 먹어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인육 같은 공기. 여기에 뭐가 더 남아 있지. 칵테일 바에서 그녀는 혼자 앉아 주스 맛이 나는 술을 마신다. 몇몇 사람들이 들어오고 대화를 나누고 떠나가는 동안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다. 그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원형 테이블 속에서 대화한다. 그녀만을 위해 준비한 기름지고 값비싼 초콜릿 케이크를 선물하는 부모님이 없으므로, 그녀는 그들을 위해 그것을 다 먹을 필요가 없다. 그녀는 끈적끈적한 칵테일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경민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한다. 아주 부드러운 구토다. 변기물을 내리고 화장지로 입술을 닦은 뒤 그녀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돌아옴, 그에 대한 기다림, 그의 애정, 그의 관대함, 그의 온정과 그의 연민.

한민아는 생각한다. 전부 줘버려. 줘버리라고. 그러면 되는 거야. 그가 네 삶을 원한다면 줘버려. 네 취향을, 수긍을, 상냥함을, 성실함을 원한다면 줘버려. 그가 원하지 않으면 변기에 넣고 흘려버려.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가꿔왔던 개인적인 리얼리티도 전부 줘버려. 받지 않는다면 버려. 먹다 남은 고기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듯이 그렇게 줘버려.

Act. 3.

차갑고 고요한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앨리스는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 언어의 유일한 생존자다. 그녀는 그녀의 유일한 생존자다.

그녀가 그녀 자신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조차 잘 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가 할 수밖에 없는 말을 했다. 그녀를 향해 열려 있지 않았던 카메라 렌즈 앞에서, 그녀의 말 혹은 침묵을 건성으로 기다리고 있는 어린 심판관들 앞에서, 그녀가 자신의 증상을 철저하게 묘사하고 해명하기를 기다리는 정신과 앞에서, 그녀는 입을 벌린 채 그녀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언어가 그녀를 할퀴며 나오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할 수밖에 없던 말들. 앨리스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변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오줌을 싫어하지 않듯이.

그녀는 그녀의 유일한 여배우다. 앨리스는 생각했다. 화면도 무대도 없이, 그녀는 병적인 침묵을 연기하고 있다. 그녀는 바닥에 누운 채 그녀의 피가 머리칼을 적시고 두피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한다. 머리를 감아야 해. 계속 살려면 감아야 할 거야. 이렇게는 살 수 없으니까. 역겨운 피를 묻힌 채로. 악취 속에서 파리들에 물어뜯기면서,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변기물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내리는 거야.

그런데, 앨리스는 생각한다. 꼭 씻어야 하는 건 아니야. 꼭 깨끗해져서 다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니야. 이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누운 채로, 이미 피투성이인 채로 다음 번 죽음을 맞겠지. 그뿐이야.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어.

앨리스는 일어나서 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는다. 피에 젖은 옷의 깨끗한 부분으로 바닥을 훔치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온몸으로 빨아들인다. 그녀는 그녀가 씻겨 내려갈 때까지 서 있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그녀의 시체를 힘겹게 정리하고 난 뒤, 앨리스는 이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자기 시체를 정리하기 위해 사는 것 같지 않은가. 그녀를 죽인 남자는 그녀를 두고 가 버렸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시체와 함께 남겨졌고, 매일 몸을 씻고 배설물을 떠내려보내던 습관대로 자신의 시체를 치웠다.

그녀는 사물들에, 그녀 자신의 몸에 폭탄을 설치하기에는, 그래서 그녀의 여기를 돌이킬 수 없이 오염시키기에는 너무 여기에 있었으니까. 그녀는 여기를 정리하고 여기를 연장한다. 그날 밤 그녀는 늑대의 꿈을 꾼다. 늑대는 정장처럼 검은 털로 뒤덮인 배를 드러내며 이족보행한다. 그가 그녀의 집 창문을 열고 들어온다. 창문은 잠겨 있지 않다. 부드럽게 열리는 유리창, 밀어닥치는 한기와 허공을 떠다니는 늑대의 황금색 눈동자. 그가 앨리스의 얼굴에 손톱을 박아넣고 그녀의 혀를 찾아 헤매는 동안, 그녀는 그에게 입을 벌려 혀가 어디 있는지 보여주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가 찢기 전에도 그녀의 입이 찢겨 있었음을, 벌어지기 쉬운 상처 속에 혀가 들어 있음을 그에게 알린다면 그는 굴욕을 느낄까? 그는 그녀의 얼굴 곳곳을 찢어내고 헤집어대지만 끝내 혀는 찾지 못한다. 그가 그녀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병약한 아이처럼 천천히 씹어 먹는 동안 그녀는 감미로운 슬픔을 느낀다. 혀는 아직 그녀의 입 속에 숨겨져 있다. 그녀는 언제든지 그것을 누설할 수 있다. 그녀는 비밀이 그녀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에, 그녀의 비밀을 찾아 헤매는 이가, 그녀를 요구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끔찍한 기쁨을 느낀다. 그것은 아직 그녀에게 있다. 그녀는 언제든 그것을 줘버릴 수 있고, 혹은 들키기 전까지 간직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아직 그녀의 입 속에 들어 있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간직해온 상처 속에. 늑대는 침울한 얼굴로 그녀의 분홍색 창자를 질겅질겅 씹는다. 그는 약간의 구역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아직 찾지 못했다. 늑대의 무능함이 애틋할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앨리스는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한다. 선물을 주듯이 그의 주둥이 속에 혀를 밀어넣으면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까?

그가 아직도 그것을 원한다면, 그녀는 그녀의 것으로 그를 질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비밀이 그녀에게 그를 연민할 권리를 줄지도 몰랐다. 그래, 그녀의 창자를 우적우적 씹는 늑대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뻐근한 애정을 느꼈다. 그는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가진 비밀을 갖지 못했으므로, 그녀가 아는 미래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는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지금만큼 그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오기만을 절망적으로 기다리던 동안에도. 그녀는 당장이라도 혀를 그의 목구멍 속에 삽입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그녀의 창자가 검게 비어버릴 때까지, 그녀의 하반신이 그의 몸 속으로 사라져버릴 때까지, 상처 투성이 얼굴과 목, 가슴 일부만 찬 공기 속에 남을 때까지 비밀을 머금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뒤 앨리스는 거실로 나간다. 노인이 있는 거실로. 노인은 남녀 배우가 키스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다. 앨리스는 아무 생각 없이 노인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요즘 그녀는 거의 읽지 못하고 간혹 쓰기만 한다. 그녀는 옷장 속에서 노트북 화면을 밝히는 갈색 페니스와 음부를 멍하니 본다. 그녀와 평생 만날 일 없을 타인들이 섹스하는 모습. 클로즈업된 성기들. 그들이 화면 밖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들의 발가락이나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이 성기를 삽입하고 삽입 당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두 개의 성기가 삽입하고 삽입된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그 국소적인 이미지뿐이다. 앨리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그녀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나서 촬영에 들어갔을지, 조명은 얼마나 밝을지, 하얀 별장으로 보이는 세트장에 창문은 몇 개나 있을지, 지나가다가 그들을 발견할 행인을 그들도 발견할지 생각한다. 성기들은 놀랍도록 유사하게 생겼다. 안면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성기와 성기를 구분할 수 없듯이 인간의 얼굴과 얼굴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잡다한 사물들 앞에서 굳어버린 아이처럼. 그녀는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다. 그녀는 아무것도 분류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을 갖지 못할 (그러나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요구하는) 극본을 그녀는 왜 계속 쓰는 걸까. 그것을 전부 연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읽는 것보다 많이 쓴다. 읽을 수 없게 되었음에도 쓴다.

Delusion level 1.3.

중학생인 앨리스는 책상에 앉아 있다. 김진아가 그녀의 자리로 온다. 김진아는 당당하고 활발한 아이다. 앨리스는 김진아가 어렵다. 김진아는 내킬 때 언제든 앨리스에게 인사할 수 있지만, 앨리스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앨리스는 언제나 김진아의 인사를 향해 대꾸해야만 하지만 김진아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앨리스에게는 김진아의 책상을 방문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 김진아가 다른 곳에 가지 않을 때면, 김진아의 책상은 항상 김진아의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다. 김진아의 친구는 앨리스의 친구가 아니다. 그러니 앨리스는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없다. 또한 김진아는 앨리스의 친구가 아니다. (그러나 앨리스는 김진아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진아가 정하는 일이지 앨리스가 정하는 일은 아니다.) 김진아는 앨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앨리스가 귀엽다고 말한다. 귀여워라. 김진아가 앨리스의 안경을 벗기며 말한다. 귀여워라. 앨리스는 실실거리며 웃는다. 그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이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무표정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김진아는 앨리스가 너무 착하다고 말한다. 너처럼 착하면 안 돼. 김진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잇는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 그것은 김진아가 어딘가에서 그대로 가져온 문장임을 앨리스는 곧바로 알아차린다. 앨리스는 흐릿한 시야에서 둥둥 떠다니는 희멀건 고깃덩이를 바라본다.

이거 줘.

김진아가 말한다.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안 돼. 김진아가 웃으면서 말한다. 김진아는 아직 기분이 좋다. 앨리스는 김진아가 무엇을 바라는지 안다. 그녀는 순종적이고 순진하고 착한 여자아이를 연기한다. 아, 정말 귀여워. 김진아는 감탄하듯이 말한다. 김진아가 무엇인가를 흔든다. 그건 이미 김진아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거절할 수 없다. 앨리스는 생각한다.

싫다고 말해. 어서.

앨리스는 흐릿한 시야로 김진아의 안색을 살핀다. 하얀 고깃덩이, 흐릿한 곡선. 김진아는 지금의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거절하지 못하는 그녀, 안된다고 말할 수 없는 그녀, 쩔쩔매는 소심한 그녀. 그녀는 여배우이므로, 기꺼이 그 역할 속에 머문다.

싫다고 말해. 어서.

김진아가 말한다. 앨리스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안된다고 말해. 그래도 괜찮으니까.

김진아가 다정하게 앨리스를 타이른다. 앨리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싫다고 해.

싫다고 해.

싫다고 해.

김진아가 몇 번을 더 집요하게 추궁한다. 그것이 결코 응해서는 안 될 유혹임을 앨리스는 알고 있다. 신의 유혹을 완고하게 거절하는 악마처럼, 사제의 유혹을, 천국의 유혹을 완고하게 거절하는 병자처럼 그녀는 입을 다물고 참아낸다. 앨리스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못하는 착한 아이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이 룰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고개를 젓고 싫다고 말한다면 김진아는 그녀를 두고 가 버릴 것이다. 그녀의 거부는 이 게임 자체에 대한 거부로 변할 것이다. 놀이는 끝날 것이고 그녀는 어떠한 역할도 연기할 수 없을 것이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김진아는 앨리스에게 유쾌하게 거절을 종용한다.

이따가 다시 올 테니까 연습해.

김진아는 만족한 듯 웃으며 앨리스에게 안경을 돌려준다. 앨리스는 얌전하게 그것을 받아 쓰고 고개를 끄덕인다.

앨리스는 수업시간 내내 다음 장면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김진아를 기다린다. 그러나 김진아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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