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27

제발, 이제 그만두고 싶어. 시작도 한 적 없는 일을. 내 것이 아니었던 시작을.

물컵의 액체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먼지들을 삼킨 뒤, 앨리스는 말한다. 이건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글쓰기일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연기요. 자기가 사랑하고 살해했던 소녀들을 사진으로 박제하는 살인자처럼. 살인자의 카메라를 죽어가는 눈으로 응시하는 희생자의 불가능한 시선처럼.

그 둘의 차이는 뭐죠? 청중이 질문한다. 그는 석고로 만들어진 마네킹이다. 그의 벌어진 석고 입술에서 말이 새어나온다. 살인자의 연기와 당신의 연기의 차이 말입니다. 잠시간의 침묵. 당신은 대답해야 할 겁니다.

앨리스는 마네킹의 하얀 눈구멍을 바라보며 그녀가 준비해온 대사를 또박또박 읽는다.

나는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뭘 말해도 좋은지 모르겠고 가장 불온한 순간에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다. 그래서 무례해진다.

히스테리 배우들은 꺽꺽거리면서 말한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 될 수 없는 말들을 구토한다. 그들을 듣던 사람이 포기하고 돌아간 뒤에도 그들은 창자까지 토해놓을 듯 말한다. 의미화 될 수도, 말이 될 수도, 결말을 가질 수도 없는 히스테릭한 비명들. 그들은 누군가 그들을 들으러 오기를 기다린다.

무리 지어 놀던 아이들이 그들을 무시하고 등을 돌려 떠나간 뒤에도 그들은 토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들은 끔찍한 굴욕과 슬픔 속에 웅크린 채로 말을 구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원하므로 원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으므로. 있지도 않은 말을, 말이 되지 않는 말을, 원하므로 원하므로 너무나 원하므로. 미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미친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말을 하고 싶어서 미쳐버렸다는 걸 안다.

마네킹의 무표정한 얼굴이 조명을 창백하게 반사시킨다. 그러니까, 당신은 살인자인 희생자, 혹은 희생자인 살인자를 연기한다는 말이군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살인자인 희생자와 희생자인 살인자를 동시에 연기하는 여배우에 대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연기하고 있는 여배우가 당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말한다. 너는 나쁜 애야. 이기적인 년이라고. 너 같은 애가 끔찍하게 싫어.

앨리스는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임으로 그녀는 말한다. 듣고 있어요. 선생님.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난 당신을 거부할 생각이 없어요. 반박할 생각도 없고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학교가 끝나고 그녀는 가방을 챙긴다. 김진아가 앨리스를 부른다. 너 집이 어디야? 앨리스는 B초등학교 앞이라고 대답한다. 김진아가 웃는다. 침에 묻어 번들거리는 하얀 이들이 드러난다. 같이 가자. 김진아가 말한다.

그들은 함께 걷는다. 침묵. 긴 침묵. 앨리스는 김진아에게 물어도 좋을 것과 물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머릿속에 나열한다. 고양이를 괴롭혀본 적 있어? 자해해본 적 있어?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일주일에 몇 번이나 죽으려고 해? 빨간색과 파란색 중 어떤 게 더 슬퍼? 선생님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어? 몸 속에 이상한 걸 넣어본 적이 있어? 좌약을 입으로 삼켜본 적이 있어? 병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대 본 적이 있어? 연약한 피부가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저녁 내내 지켜본 적 있어? 넌 어떻게 그렇게 친구들이 많아? 걔들은 왜 너를 친구라고 불러? 걔들은 왜 너를 쫓아내지 않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자주 인사해? 안 무서워? 아무도 너를 무시해본 적이 없어? 아무도 네게 이상한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어? 어떻게 나하고 같이 가자고 말할 수 있어? 난 절대 너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야. 사람들은 왜 너를 좋아해? 사람들은 왜 서로를 좋아해? 왜 나는 안 좋아해? 왜 나는 네 친구가 아니야? 그때 걔가 나한테 휴지를 던지라고 하는 걸 들었어? 운동장 멀리 던진 공을 나한테 개처럼 주워오라고 하는 걸 들었어? 자기들끼리 놀던 보드게임을 나보고 정리하라고 명령하는 걸 들었어? 내가 도망치는 걸 봤어? 나하고 똑같은 짓을 나보다 더 끔찍한 짓을 당하는 애 앞에서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걸 봤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예뻐? 왜 그렇게 기뻐? 왜 그렇게 웃어? 귀신이 너를 안 쫓아오는 게 무서웠던 적 없어? 영원히 죽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절망했던 적은? 넌 왜 그렇게 잘 걸어? 왜 나랑 같이 가? 네 친구들은? 언제 나를 버리고 네 친구들한테 갈 거야? 언제 핸드폰을 꺼내서 네 친구랑 전화할거야? 언제 약속이 있다고 하고 가 버릴 거야? 언제 우연히 네 친구랑 마주치고 그 애랑 같이 걸어가 버릴 거야? 언제 나를 남겨두고 사라져버릴거야?

넌 정말 말이 없구나. 김진아가 말한다. 앨리스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무엇을 말해야할지 모른다. 앨리스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너도 말하지 않았잖아. 내가 말하지 않는 동안, 내가 말하지 못하는 동안 너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잖아. 네 친구들이랑은 그렇게 많이 말하면서. 그렇게 즐겁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하면서. 나한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잖아.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지루해할 거잖아.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친구가 없는 이유를 알아차릴 거잖아. 그리고 다시는 나랑 같이 집에 가지 않을 거잖아.

앨리스는 김진아의 구릿빛 옆얼굴을 보며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늘 수업 있잖아. 과학 수업. 재밌었지. 그런데 힘들었어. 수행평가 잘했어? 난 모르겠어. 못하겠어. 그래도 오늘은 수업이 일찍 끝나서 잘했어. 아니 잘됐어. 아니 그래도 힘들었어. 너는 어때 너는 괜찮아 너는?

김진아는 의아해하며 앨리스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앨리스가 입을 다물고 김진아의 보폭에 맞추어 걷는 동안(앨리스는 계속 뒤처진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앨리스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로 옆을 흘긋대며 걷는다.) 지하철역 앞 토스트 가게에서 김진아는 멈춘다. 그리고 앨리스를 구원한다! 아줌마, 햄치즈 두 개 주세요. 김진아가 살갑게 웃어보인다. 아줌마라고 불린 여자와 몇 마디를 살갑고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 너무나 매끄러운 대화라서 앨리스는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김진아가 기름에 절은 샌드위치 하나를 앨리스에게 건넨다. 종이 포장지 밑으로 소스가 줄줄 새어 앨리스의 손을 적신다. 김진아는 앨리스에게 먹으라고, 자기가 쏘겠다고 말한다. 앨리스는 김진아의 옆에서 걸으며 끈적하고 축축한 소스와 기름에 절은 빵을 입 속으로 우겨넣는다. 그것을 전부 먹어야만 한다. 맛있지? 김진아가 묻는다. 앨리스는 입속을 공장 냄새가 나는 햄과 기름이 뚝뚝 흐르는 빵으로 가득 채운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김진아가 웃는다. 앨리스는 그것을 전부 먹어치운 뒤 끔찍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 하교길이 몇 차례 반복된다. 앨리스는 김진아가 언제라도 그녀와 하교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어느 날 김진아는 다른 아이와 하교하기 시작했고 앨리스는 그들 뒤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야만 했다. 결코 그들을 앞지르지 않도록. 그들의 눈에 띄어 굴욕감을 느낄 필요가 없도록. 그러나 김진아와 그녀의 친구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은 앨리스를 발견하지 못한다.

어느 월요일 앨리스와 김진아가 지하철역에서 마주친다. 정확히 말하면 앨리스가 먼저 김진아를 발견했고 김진아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동안 김진아가 앨리스를 발견하였다. 김진아는 앨리스를 알아차리자마자 앨리스를 불렀다.

김진아에게 걸어가는 동안, 앨리스는 고통스러운 설렘을 느낀다. 그녀는 그녀와 함께 하교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진아는 앨리스에게 만원을 달라고 말한다. 앨리스가 지갑을 꺼내는 동안 김진아는 그건 빌리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김진아가 앨리스에게 사 주었던 샌드위치 값을 갚는 거라고.

내가 많이 사 줬잖아. 그치?

앨리스는 김진아에게 만원을 건넨다.

김진아는 근처에서 기다리던 친구들과 합류한 뒤 다른 곳으로 간다. 앨리스는 지나치게 실망하거나 기뻐하지 않으려 애쓰며 아주 천천히 걸어간다.

설탕물이 흘러내리는 얼굴. 끈적거리는 얼굴을 벌리며 그녀가 기침한다. 구토하거나 혼잣말하거나 기침하거나 신음하는 입. 정신과 의사는 그녀에게 입원을 권유했다. 그녀가 수줍어하며 거절하자 의사는 미소지으며 그럼 그만두라고 했다. 수십 명의 애인들에게 동시에 프로포즈한 남자처럼.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이제 그녀도 모른다.

택배배달원이 배송하는 택배 상자 속에는 그녀의 머리통이 들어 있다. 그녀의 머리통이 택배상자 내부의 습한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호흡한다. (들이쉬는 호흡이 내쉬는 호흡보다 길다) 택배배달원은 택배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그것을 열어보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머리통이 상자 속에서 메말라가는 것을, 혹은 습기로 질식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순진하고 무고하다. 그는 무죄다.

그는 무죄다. 그는 그녀의 머리통이 죽어가며 살아 있는 택배상자를 단단한 품 안에 끌어안은 채로 우주비행선에 오른다. 우주선 운전자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혼자만의 공상에 빠진다.

달에 도착한 뒤 그는 다시 간단한 인사와 함께 우주선에서 내린다. 택배상자가 축축해져도 그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신음, 혹은 비명 소리가 들려도 그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는 무고하다.

주소지에 해당하는 집이 불에 타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난 뒤에야 그는 당황한다. 그러나 그는 무고하고 그러므로 폐허가 된 집의 현관문이 있던 자리 앞에 택배상자를 놓아둔다. 그가 누구를 죽였는지 모르는 채로. 그가 무엇을 배달했는지 모르는 채로. 그는 살인자이고 무죄다.

그는 무죄다 그는 무죄다 그는 무죄다

그녀는 죽은 채로, 얌전히 그녀의 자리에 돌아간다. 그녀의 살인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모든 섹스는 근친섹스다. 모든 죽음은 자살이고 모든 살인은 자기살해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없을지도 모르지. 전부 내가 한 말이니까. 앨리스는 생각한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모래사장에서 그녀를 에워싼다. 그녀는 그들을 따라 바보처럼 웃는다. 아이들이 햇볕에 탄 작은 손들로 그녀를 모래 깊숙이 묻는다. 부드러운 압박감이 그녀를 애무한다. 그녀는 기분좋게 키득거린다. 그리고

아이들이 떠나간다. 그녀는 모래구덩이에 파묻힌 채 옴짝달짝하지 못한다. 그녀는 생각한다. 이건 벌이 아니다. 이건 벌일 리가 없다. 그럼 이게 뭐지?

뭐지?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그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아이들이 떠나갔고 살인자가 떠나갔다. 아이들은 그녀의 아이가 아니며 살인자는 그녀의 집행인이 아니다. 그들은 여자에게 속해 있지 않다. 그러나 앨리스는 그들에게 속해 있다. 마비된 채,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면서 그녀는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으므로.) 어느날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처럼 그녀는 모래사장 속에 처박힌 채로, 피가 흥건한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생각한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이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이라면? 제자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TV에서 방청객들이 낄낄거리는 소리. 유명한 연예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끄덕인다. 절망을 비웃는 웃음소리. 비극의 절정에서 참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소리.

아이의 얼굴을 적시고 있는 끈적끈적한 사과주스. 아이가 입을 벌린다. 아이가 얼굴을 벌린다. 아이가 벌린다.

나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났고 매일 근친상간을 해요. 나는 매일 나를 벌리고 나를 쑤셔박아요. 나는 매일 벌어진 나를 할퀴고 문지르고 그리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요.

맛있나요? 돼지 소녀가 늑대에게 묻는다.

늑대는 돼지 소녀의 심장을 우물거리면서 말한다. 그래. 예전에 네가 소설로 썼던 그대로야. 아주 달아. 역겨울 정도로 달구나.

늑대가 피투성이 살점을 검고 긴 손톱으로 잡은 채 돼지 소녀에게 권유한다. 어때, 조금 먹어 보겠니?

돼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돼지 소녀가 그것을 먹는다.

어때? 늑대가 묻는다.

돼지 소녀가 말한다.

아무 맛도 안 나요.

아무 맛도 안 나요.

아무 맛도 안 나요.

앨리스가 말한다. 아무 맛도 안 나.

그녀와의 섹스 그녀와의 포옹 그녀와의 입맞춤 그녀와의 살인 그녀와의 잠 그녀와의 꿈 그녀와의 싸움 그녀와의 식인 그녀와의 대화 아무 맛도 안 난다.

아무 맛도 안 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받지 않는다. 사랑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것도 사랑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그녀를 씨발 사랑하지 않는다. 달의 표면을 적시며 흘러넘치고 있는 앨리스의 머리통.

어린 A는 인형들이 무서웠다. 친구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그 곁에서 인형을 사랑하는 척하면서도 A는 인형이 소름끼쳤다. 그것들의 눈이 깜빡임도 없이 A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인형들을 전부 쓰레기장에 갖다 버리면서 A는 언젠가 저주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가 버린 인형들이 전부 집에 돌아와 있을 거라고. 그러나 인형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주 같은 것도 없었다.

아무 맛도 안 나요.

산타는 늑대에게 잡아먹혔지만 늑대는 산타를 잡아먹지 않았다.

말라버린 무언가 그녀의 안에서 부서져내리고 있다. 잘 됐어. 노인이 웃으면서 말한다. 언젠가 너는 도달할 수 있겠네.

앨리스가 마주 웃으며 말한다. 글쎄요. 저는 믿지 않아요.

가장 마지막에 끝났던 일기를 그녀는 다시 쓴다. 돼지들이 웃는다. 돼지들이 웃으면서 소리친다. 이제 웃고 싶지 않아요. 이제 웃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안 웃겨. 웃으면서 난 죽어가고 있어요. 하나도 안 웃겨. 안 웃겨. 그런데도 웃어야 하나요. 돼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앨리스는 그들에 대해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못한다.

돼지들이 가녀린 목소리로 속삭인다.

말해 줘요. 난 언젠가 죽을 수 있나요. 사형 집행인이 오지 않아도, 그가 길을 잃어도, 그가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나조차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나는 죽을 수 있나요. 아무도 나를 위해 죽여주지 않아도. 나조차 나를 죽이지 않아도.

돼지들의 눈에 붉은 눈물이 맺혀 있다. 그것이 그들의 돼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앨리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죽여본 적 있나요?

돼지들이 묻는다.

죽어본 적 있나요?

돼지들이 묻는다.

살해당해본 적이 있나요?

돼지들이 묻는다.

어떤 꿈에서 앨리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다. 꿈에는 배경도 전경도 없다. 그녀는 가만히 있는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끝맺지 않으며. 그녀는 얌전한 정신병자니까(그걸 신경증자라고 표현해야만 할까?)

사라 케인이 정말 4시 48분에 죽었는지, 수면제를 수백 알 먹은 뒤 손목을 자르고 목을 매서 죽었는지 앨리스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녀는 사라 케인을 연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시험문제를 유서로 남기고 옥상에서 투신한 교사를 연기할 것이다. 혹은, 늑대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돼지 소녀를 연기할 것이다.

넌 남들에 대해 관심이 없어.

선생님, 그럼요. 난 한 번도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없어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가지고 싶어 해본 적이 없어요. 난 착한 아이고 항상 그 내부에서만 사람을 원했죠. 밤에 잠들기 전까지 비밀을 속삭일 수 있을 친구를, 연인을 원했어요. 별에게 소원을 빌었지만 별은 알아듣지 못했죠. 천사에게 소원을 빌었지만 천사는 알아듣지 못했어요. 신에게 소원을 빌었지만 신은 알아듣지 못했어요.

나는 나 자신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아요.

어린시절에 난 어떻게 하면 쟤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내 미숙함을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어요. 너무 많이 말하면, 혹은 너무 많이 침묵하면 들켜버릴 걸 알았으니까. 아이들은 내가 뭘 연기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내가 뭘 연기하지 못하는지 끔찍할 정도로 예민하게 알아차려요. 난 쉬는 시간마다 두려움에 떨었고 점심시간에는 항상 머리가 아픈 척을 했어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주 충실한 모범생을 연기하면서 교과서를 읽는 척을 했어요. 사실 읽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공부하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아무것도 읽지 않았는데. 교과서의 글자들을 눈으로 훑어내리면서 다른 애들이 이야기하는 걸 전부 훔쳐들었어요. 그리고 전부 잊어버렸죠. 하지만 듣는 순간에는 그걸 듣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마지막 수학여행은 장염에 걸린 척하고 불참했어요. 그러면서도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어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기를 빌고 또 빌면서도 그래도 누군가 나한테 뭔가 말하기를 기다렸어요. 언젠가 내가 누구의 말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난 결국 내 병이나 내 욕망 때문에 죽겠죠. 늑대는 오지 않을 거고 나는 아무도 살해하지 않을 거고 아무도 나를 살해하지 않겠죠.

늑대는 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돼지들은 그 약속을 들었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상냥함은 나를 찢어발겼고 나는 그 상냥함을 사랑하는 척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어요. 내게 말을 걸고 내 이름을 묻고 내 하교길을 함께 했던 몇몇 아이들은 결코 내 친구가 되지 않았죠. 나는 그 애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없었고 그 애들이 내게 말을 걸기 전에는 말을 걸 수 없었고 그 애들의 무리에 끼어 있을 수 없었고 그 애들이 내게 인사하는 걸 그만둘 때는 더 이상 마주 인사할 수 없었고 그 애들이 다른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결코 끼어들 수 없었어요. 난 그 애들이 나를 두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다가 그 애들이 사라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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