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12

어떤 날은 다른 꿈을 꾸기도 하지. 여자는 남자아이가 여자의 꿈에 대해 질문을 했다는 듯, 언제나 파리의 꿈을 꾸느냐고 묻기라도 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긴 복도 위에 서 있어. 복도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공중을 부유하고 있음을 나는 느껴. 난 중심을 잃지 않고 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서 서 있지만, 내가 고착되어 있는 바닥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나는 느껴. 어떻게 그런 느낌이 가능한지도 모르는 채로. 복도는 수많은 다른 복도들과 교차되어 있어. 십자 모양의 평행한 복도들이 수백, 수천 개 교차되어 있어. 나는 내가 걸어가는 복도가 수직으로 이어져 있는 주복도라고 느끼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 모든 복도는 모든 수직을 가지고 있어. 평행하거나 교차하는 복도들은 점과 점의 공간에서 접하더라도 결코 합류하지는 않아. 나는 교차하는 지점들, 연결점들을 통과하더라도 다른 복도로 넘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하나의 복도에서 다른 복도로 넘어가는 일은 하나의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고 느껴. 하지만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이동은 당연히 가능해야 한다고 느끼기도 해.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의 복도만을 계속 걸어가.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처럼. 그래, 노인의 말처럼, 차라리 길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처럼. 그러나 다른 길들은 분명하게 있어. 그것은 실재하는, 그러나 현상이 될 수는 없는 사실들이야. 눈을 감고 상상하는 옷장 속의 세계처럼. 내가 옷장을 보지 않는 동안에도, 심지어는 옷장을 상상하지 않는 동안에도 옷장은 분명히 실재하지. 관념이 아닌 옷장은 실재해. 설령 그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신의 존재를 믿듯, 생명의 조악한 고기를 씹어삼키듯 그것을 믿어. 그래, 나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믿어.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동안 존재하지 않는 옷장의 사실-아님을. 복도들의 사실-아님을. 복도들의 잠재적인 불가침성을. 그러나 언제든 복도들을 건너갈 수도 있다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고 느껴. 내가 지나치게 긴 꿈을 꾸고 있다고. 타들어가는 갈증이 목을 짓눌러 와. 나는 내 키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음을, 내 그림자가 끔찍하게 길어지고 있음을 느껴. 나는 그림자가 나를 삼켜버리는 것을 느껴. 내가 소진되어가는 것을 느껴. 그림자는 나를 집어삼킬 거야. 중요한 건 내가 그림자에 삼켜져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홀로 남은 내 그림자는 그림자를 갖지 못하리라는 사실이야. 그림자 없이 걷는 건 너무나 가혹하고 쓸쓸한 일이야.

복도 내부의 공기는 점점 소진되어가고 있어. 끔찍하게 갑갑한 내부에서 나는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여. 오래 걸을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영원을 걸을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생각해. 한없이 0으로 접근해가는 산소의 희박함 속에서 한없이 죽음으로 접근해가는, 그러나 결코 0과 죽음에 합류하지 못하는 숨을 쉬며 걸어간다는 것, 새벽의 우물 속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바래진 걸음을 영원히 이어간다는 것, 영원히 굴러떨어지는 바윗덩이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생각해. 시시포스의 유령 같은 그림자가 실어나르는 운명이 얼마나 빠르게 0으로 접근해가고 있는지, 그 무자비한 속력이 얼마나 서서히 0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지, 블랙홀에 돌진하는 작은 유성이 얼마나 기이한 통로를 지나가고 있는지, 통로를 구성하는 괴상한 도형들이 얼마나 서글픈 기하학으로 서 있을지, 그 도형들이 얼마나 느리게 비틀거리고 있을지 생각해.

결국 나는 복도와 복도 사이의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고 느껴. 나는 검고 아득한 0으로 뛰어내리고 그곳으로 영원히 떨어져내려. 그리고 나는 깨어나. 하지만 0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나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느껴.

혹은 나는 아주 평범한 건물의 꿈을 꿔. 그곳은 도서관인데 여러 열람실들이 벌집처럼 있고 그 열람실들을 경유하는 복도들이 이어진 구조야. 내가 걸을 때마다 열람실에 앉아 있는 검은 등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느껴져. 도서관의 공기는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갑갑하고 나는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고 생각해. 하지만 복도를 아무리 지나쳐도 나는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어. 다른 층과 연결되어 있는 계단조차 찾을 수 없어.

몇 시간을 계속 헤매다가 나는 졸도할 듯 끔찍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하는 수 없이 열람실 책상에 앉아 절망적으로 두꺼운 법학 서적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를 불러. 몇 번을 불러도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아. 마치 내가 유령이라는 듯 그는 나를 무시해.

나는 끔찍하게 숨이 막혀서, 그리고 오기가 생겨서 점점 더 큰 소리로 그를 불러. 마침내 내가 비명처럼 큰 소리를 지르고 나자 열람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봐. 그들은 모두 친족인 것처럼 닮았고 그들의 눈은 모든 빛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것처럼 검은 빛이야. 그들은 차가운, 심지어는 증오에 찬 것처럼 느껴지는 검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어.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만 그곳에서 도망치지는 않아.

내 앞의 법학도는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어. 그는 아주 이상한 안경을 쓰고 있는데, 두 겹의 두꺼운 렌즈가 얇은 틈을 사이에 두고 겹쳐져 있는 모양의 안경이었어. 안경의 위쪽은 길고 날카로운 철사로 그의 귀 뒤쪽에 고정되어 있어. 렌즈들은 균일하지 않은 굴곡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눈은 보는 각도에 따라 지나치게 커 보이기도 하고 작은 틈처럼 작아 보이기도 해. 그가 들여다보는 법학 서적은 곤충의 다리처럼 작은 한자어들로 빼곡이 차 있어. 나는 그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경악해. 그 미세하고 불가해한 언어들을 실제로 읽어나가고 있는, 그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멀미나는 눈동자가 페이지의 끝까지 다다른 뒤 다음 페이지를 예고하듯 한곳에 가만히 정지되어 있는 그 순간 나는 불가해한 거북함을 느껴.

그는 페이지를 넘긴 뒤 나를 올려다보며 내가 무례하다고 지나치게 무례하고 오만하다고 말해. 그의 목소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휘발성의, 침착한 소리야.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모두가 이곳에서 헤매지만 뻔뻔스럽게 다른 이의 도움을 구하려 하지는 않는다고 말해. 게다가, 그는 야릇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돕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걸 알면서도 오만하게,

그는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어. 당신은 불가능한 도움을 구하고 있어.

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끔찍한 수치심을 느껴. 난 그가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내 목소리는 그의 것과는 달리 절망적으로 떨리고 있어. 모두가 나의 목소리를 비웃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어. 사람들은 각자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난 그들이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아.

이곳에선 너를 도와줄 이를 찾을 수 없을 거야, 하고 그는 말해.

난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머리가 저려오는 걸 느껴. 난 비틀거리며 열람실을 지나쳐 복도로 나가고 결국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해. 그것은 일반적인 건물이며 얼마든지 계단을 통해 내려갈 수도 있지만 난 영원히 아래층으로, 혹은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찾을 수 없으리라고 느껴. 그리고 아무도, 아무도 나를 위해 길을 안내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를 데리고 다른 층으로 가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 난 너무나 숨이 막혀서 눈물을 흘려. 얼굴이 찢겨나가는 것을 느껴. 나는 복도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꿈에서 깨어나. 내 턱에는 차가운 물이 흠뻑 고여 있어. 난 그제야 내가 울고 있었음을 깨달아.

남자아이는 여전히 말 없이 걷고 있었다.

난 가끔 꿈과 현실을 혼동해. 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길어지고 있어. 나는 영원과 같은 꿈을 꿔. 꿈은 꿈과 꿈 사이의 현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길어. 꿈은 또 다른 현실이야. 복도와 복도 사이에 가로놓인 끔찍한 심연이야. 하지만 심연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꿈의 행간을 잴 수 없어. 뛰어내리지 않으면 하나의 사실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로처럼 계속 이어져. 하지만 뛰어내린 후에도, 낙하선은 닿을 수 없는 것에 무한히 접근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어. 꿈에 남겨두고 온 사실은 계속해서 산소가 희박한 복도를 헤매고 있으며 그것은 다른 꿈의 불가해한 곡선으로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남자아이는 참담하게 젖은 얼굴로 웃는 척했다. 돌아갈 때도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남자아이는 말했다. 여자가 이야기한 긴 꿈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그러나 여자는 남자아이의 젖은 등이 그녀의 속삭임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모습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며 흐느끼는 모습을 보았다.

영원을 원하는 건 아니야. 여자는 갑작스럽게 중얼거렸다. 다만 한 순간만이라도 전염병처럼 퍼지기를 바라는 거야.

남자아이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고 여자는 시, 혹은 연극에 관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여자는 빼내려고 했지만 남자아이가 너무도 절박하게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교도소는 재판장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꼭대기 층에는 사형집행소도 있다고 남자아이는 이해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 투로 속삭였다. 교도소는 구불구불하고 낡은 건물이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처럼 보일 정도였다. 쇠창살로 둘러싸인 외벽 울타리에서 남자아이는 진동벨을 눌렀다.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끔찍한 진동이 울려퍼지고 곧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아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교도소 외벽의 문이 열렸고 그들은 운동장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장에는 하얀 스커트를 목련처럼 펼치고 모래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무리가 있었다. 소녀들이 죄수냐고 묻자 남자아이는 아니라고, 그녀들은 법정에 속한 여자아이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여자는 물었다. 죄수들도 같은 운동장을 쓰지?

그래. 남자아이는 검고 반들거리는, 풍뎅이의 등과 같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죄수들이 소녀들을 공격하면?

그럼, 소녀들은 죽거나 다칠 것이고 죄수들의 형량은 늘어나겠지. 남자아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아냐, 어쨌든 소녀들은 죽을 거야.

소녀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그들을 뚫어지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교도소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소녀들은 즐겁게 수군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유달리 창백한 소녀가 남자아이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거렸고 소녀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 애가, 남자아이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우리를 안내해주겠대.

헤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머리가 긴 소녀는 아니라고, 방문객들은 반드시 길을 잃고 말 거라고 소리쳤다.

남자아이는 그가 이미 수십 번을 이곳으로 면회왔으며 그 동안 길을 잃은 적은 없었다고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소녀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소녀들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전혀 다른 사람을 면회해 온 것이었다. 교도소와 법원의 관리들은 끔찍하게 바쁘기 때문에 면회객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기울일 수 없으며 따라서 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확률은 원하지 않는 사람과 대면하게 되는 경우보다 훨씬 적고, 심지어는 0에 수렴할 정도로 적기 때문에 그는 엉뚱한 사람을 유리 너머에서 보고 자기가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무릎이 새까맣게 변한 소녀는 아마 남자아이가 면회를 하려던 사람은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면회가 시작되기 전에 죄수는 면회실에서 계속 기다리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는 그녀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물었고 무릎이 검은 소녀는 신중하게 생각하더니 아마 남자아이가 기다리던 사람은 남자아이가 아닌 다른 방문객을 맞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정정했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법과 면회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고 말했다.

난 여기서 태어났어요. 우리 모두 마찬가지예요. 소녀들은 하나의 몸에 연결된 샴쌍둥이인 것처럼 말을 이어받았다.

끔찍한 태양이 그들을 할퀴어대는 탓에 그들은 법원 건물 앞 그늘로 이동했다. 남자아이는 늦기 전에 면회를 하고 돌아가야한다며 초조해했지만 여자는 소녀들의 말을 더 듣고 싶었기에 소녀들의 권유에 순순히 따랐다.

면회는 모두 그런 식이에요. 목이 긴 소녀가 속삭였다.

소녀들의 속삭임은 유달리 선명하게 울려서 그들은 그 모든 말들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하나의 면회가 끝나기 전에 다른 면회가 시작되죠. 면회는 마치 미로와 같아서 방문객들이 어느 면회실에 도달하게 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해요.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모든 짐승들의 신원이 확실했으며 그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여겨졌을 때는 지금보다 나았죠. 적어도 면회자들은 죄수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할 수 있었고 죄수들 쪽에서는 반대로 면회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물론 그런 시스템에서도 문제는 발생했죠. 우연하게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과 대면하게 되는 경우 그 누구도 면회의 오류를 지적할 수 없었어요. 심지어는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면회가 진실된 것이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은 죄수들 혹은 면회인들을 마주치게 되는 일은 그리 드문 게 아니에요. 우리는 대부분 이름을 갖지 못했으며 생년월일은 추산된 숫자일 뿐이므로. 지금은 아무도 그런 허위에 가까운 숫자와 문자들을 점검하지 않아요. 그 때문에 문제는 더욱 자유롭게, 활개를 치며 발발하게 되었죠.

우린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이 면회를 하며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을 여러번 봤어요. 소녀들은 키득거리면서 속삭였다. 우리는 그들이 그 짓을 하는 것도 봤어요! 간수 하나가 문쪽에서 지키는 동안 면회인은 죄수의 방을 정리해 주는 거예요. 굳이 독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요. 독방인 경우에는 비교적 깨끗한 방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쓸어내는 척 하고 일반 감실의 경우에는 대부분 그런 시늉조차 하지 않아요. 그들은 곧 옷을 벗고 불을 켠 채로, 간수가 보는 앞에서 그 짓을 하는 거예요.

물론 옷을 벗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뒤쪽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소녀 하나가 불쑥 말했다. 옷을 벗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간수도 그들도 그리고 우리도 그들이 모든 것을 마쳤음을 알 수 있죠. 그들은 끔찍하게 절망적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그 시선 속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져요. 일이 끝난 뒤 그들은 얼굴과 살점과 근육, 지방층이 모두 떨어져나간 두개골처럼 지친 채 인사도 없이 헤어져요. 어쩌면 그들은 마지막 순간 서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타자들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르죠.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한 번의 섹스뿐이며 어쩌면 그들은 영원히 다시 마주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면회인은 간수에게 죄수의 이름을 묻고 간수는 죄수의 수형번호를 알려주지만 면회인은 알아듣지 못해요. 물론 기억도 하지 못하죠. 개중 기억력이 비상하거나 절박한 면회인은 기억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노력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수형번호는 새로운 죄수들이 들어오고 다른 죄수들이 사형당하거나 사면당하거나 출소하여 나갈 때마다 계속 갱신되니까요. 한 달에 서너 번, 많을 때는 서른 번이나 심지어는 쉰 번까지도 바뀌어요. 죄수들조차도 자신의 수형번호를 외울 수 없어요. 심지어 간수가 면회인에게 불러주는 수형번호는 이미 효력이 다한, 지난 달이나 지난 주에 바뀐 옛 번호일 가능성이 커요. 간수는 면회인이 어차피 그 길고 불가해한 수열을 외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옛 번호를 불러주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죠. 간수가 즉석에서 숫자들을 지어내서 불러주는 경우도 있어요. 운이 좋은 경우 그 즉각적인 수열이 죄수의 실제 수형번호와 일치할 수도 잇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죄수를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죠.

남자아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너희는 정말 똑똑하구나. 이 모든 게 지어낸 말이겠지만 그래도 너희는 똑똑해. 너희는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정도밖에 안 되어보이는데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해.

소녀들은 거미처럼 서글프게 웃으며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믿지 않는 건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너희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남자아이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난 분명히 이 교도소에서 엄마를 만났고 다른 교도소에서는 아빠를 만났어. 한 번도 빠짐없이.

소녀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그게 진짜냐고 물었다. 소녀들은 심지어 작은 비명을 지르며 서로의 어깨를 꼬집어대기도 했다.

믿을 수 없어요. 간수가 그걸 두고 보던가요?

남자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너희는 오해를 하고 있어, 하고 말했다.

다행스러운 건, 유달리 속눈썹이 긴 소녀가 말했다. 당신이 만난 게 당신의 부모님이 아닐 거라는 사실이에요. 난 부모를 면회오는 자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에요.

여자는 말 없이 소녀들의 부드러운 그림자가 바닥에서 너울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지쳐 보였다. 소녀들은 남자아이를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그의 어깨와 가슴, 배와 등, 턱을 맴도는, 마른 가지 같은 가느다란 흰 손들.

남자아이는 고집스럽게,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너희가 면회실이나 감옥 안을 어떻게 본다는 거야?

우린, 소녀들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새벽의 나무 위나, 깨진 세면대 속, 달의 천장이나 숨겨진 동굴 같은 곳을 우리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요. 감옥이나 면회실은 심지어 불가능한 장소도 아니잖아요.

내가 너희였다면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여자는 갑작스럽게 중얼거렸다. 난 곧장 죽음으로 갔을 거야. 더 이상 다른 장소들을 상상할 필요도 없는 곳으로 갔을 거야.

소녀들은 목련처럼 웃으며 속삭였다. 우리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어요.

소녀들은 그들을 데리고 교도소 내부로 들어갔다. 교도소 건물 앞을 지니던 중년의 남자는 소녀들에게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소녀들은 유령처럼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군데군데 이가 나간, 더러운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은 소녀를 따라갔다. 남자아이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침묵하고 있었다. 여자는 끔찍하게 높은 계단 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했다. 소녀들은 저들끼리 쉴 새 없이 무어라 속삭이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의 중간중간 좁은 복도와 복도를 따라 서 있는 수십 개의 철문들이 보였다. 계단의 끝까지 올라갔을 때, 소녀들은 여전히 쾌활하고 즐거워 보였지만 여자와 남자아이는 지친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했다. 감옥 내부의 공기는 지나치게 탁했으며 알 수 없는, 역겨운 악취가 진동했다.

꼭대기층은 방과 기둥 없이 넓게 트인 방이었다. 녹색 방수포에 덮인 사람, 짐승들의 인영이 방바닥에 일렬로 누워 있었다. 시민 강당에 급하게 마련된 시체 안치소의 풍경처럼 보였다. 그들의 맨발들만이 방수포 바깥으로 비져나와 있었다.

소녀들은 짐승들의 몸을 발을 이용해 한쪽 구석으로 밀어낸 뒤 가운데 공간에 주저앉으며 여자와 남자아이에게도 그곳에 앉으라고 권했다. 여자는 소녀들 사이에 끼어 앉았으나 남자아이는 계단 옆 벽에 붙어 선 채로 소녀들을 향해 바닥에 있는 짐승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소녀들은 마치 남자아이가 그런 것을 궁금해할 줄 몰랐다는 듯 격양된 목소리로 죽은 죄수들이라고 대답했다. 얼음처럼 파란 눈을 가진 소녀는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죽은 죄수라고 덧붙였다.

남자아이는 초조한 듯 발을 떨며 손톱을 씹어대었다. 속눈썹이 긴 소녀는 확인해보고 싶으냐고 은근하게 물었고 남자아이는 힘 없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죽은 죄수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입술이 엷은 소녀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들은 여기서 기다려요, 하고 대답했다. 죽지 않은 죄수들과 함께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들은 여기에서 형을 채울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중간에 다시 깨어난 죄수는 다시 아래층으로 돌아가지만 형을 지나칠 때까지 죽은 상태로 혹은 죽음을 닮은 상태, 죽음을 위장한 상태로 지내는 죄수도 있어요. 형기가 끝나는 날까지 죽어 있으면 의사를 불러 다시 깨우죠. 모든 것을 잊고 이곳을 어린시절처럼 여기는 죄수들도 있어요. 그들은 정말 징그럽게도 간수나 의사를 아빠라고 부르기도 해요.

우리를 엄마라고 부른 남자도 있어요! 목이 긴 소녀는 치를 떨며 소리쳤다.

여자는 손을 붙잡는 감촉에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남자아이는 어느덧 여자 가까이 다가와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냐, 이제 가자. 남자아이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여기선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남자아이는 흐느끼며 말했다.

소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옥에선, 검은 머리의 소녀가 말했다. 이곳이 가장 평온한 곳이에요. 여기만큼 조용한 곳은 없어요. 심지어는 독방보다도 더 조용하죠. 독방에서 들리는 기이한 흐느낌이나 발작적인 울음소리, 옆 방에서 새어나오는 신음과 같은 소음들이 이곳에는 없어요. 어쨌든, 죽음은 삶보다는 조용하니까요.

하지만, 여자는 물었다. 너희는 아직 죽지 않았잖아.

소녀들은 키득거리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곳에 없는 동안은 여기가 가장 조용해요.

목이 긴 소녀는 자선하는 여주인처럼, 그들이 이곳에서 머물러도 괜찮다고 말했다.

남자아이는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고 대답했다.

소녀들은 이번에는 절박하게,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도와줄 수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소녀들은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보였다. 우리는 당신들이 원하는 죄수 누구든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요. 여기에는 달 테러범도 갇혀 있어요. 그 여자는 독방에 갇혀 있지만 원한다면 그 여자를 면회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어요.

그건, 남자아이는 말했다. 거짓말이야. 너희가 분명 말했잖아. 원하는 죄수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검은 머리의 소녀가 소리쳤다. 그건 우리의 도움 없이 원하는 죄수를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뜻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요. 우리는 당신들이 모든 죄수들의 감실을 돌아볼 수 있게 할 수도 있어요. 당신들은 당신들을 기다리는 죄수를 알아보기만 하면 돼요.

고맙지만, 남자아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린 알아서 찾을 수 있어.

소녀들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아이는 여자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으나 소녀들은 더 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확신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끔찍하게 긴 계단을 다시 내려가 1층으로 돌아갔고 입구의 왼쪽 문 안쪽의 면회실로 들어갔다.

삼각형의 아름다운 머리를 가진 뱀이 그들을 안내했다. 뱀은 남자아이와 친분이 있는 듯 다정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뱀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자친구도 함께 온 모양이구나.

남자아이는 웃으며 아니라고, 이 애는 잃어버렸던 여동생이라고 말했다.

뱀은 입을 다물고 슬픈 눈으로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네겐 여동생이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물론 하나뿐이에요. 남자아이는 뱀의 눈 너머 면회실의 어두운 내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을 켜 줄까? 뱀은 물었고 남자아이는 그래주시면 고맙겠다고 대답했다.

뱀이 형광등을 켜자 면회실의 유리벽이 창백하게 빛났다. 유리 너머에는 창백하고 앙상한 암쥐가 있었다. 여자는 섬뜩함에 어깨를 움츠렸지만 남자아이는 여전히 눈물이 매달린 서글픈 눈으로 암쥐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들은 암쥐 앞의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간수는 미안하다고, 오늘도 너 혼자 오는 줄 알았다고 말했고 남자아이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남자아이는 여자를 의자에 앉혔고 여자는 설치류의 초췌한 머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녀들의 말대로 특별한 신원확인절차는 없었다.

남자아이는 암쥐를 향해 엄마, 하고 불렀고 엄마라고 불린 암쥐는 슬프고 먹먹한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아냐를 데려왔어요, 엄마. 남자아이는 애달프게 속삭였다. 내가 그 애를 찾아가기 전에, 아냐가 우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었어요. 난 골목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아냐를 발견했고 곧장 우리 집으로 데려왔어요. 아냐는 아주 긴 꿈을 꾸었다고 했어요. 아냐는 그다지 울지도 않았어요.

남자아이는 갓 도축한 고기의 신선함을 확인시켜주듯 여자의 옷을 내려 목 아래쪽의 자줏빛 상처를 암쥐의 창백한 얼굴을 향해 보여주며 말했다.

아냐가 왔으니까 이제 됐어요. 변호사를 찾을 계획이에요. 우리는 곧장 항소를 할 거고 아냐가 증언해 주면 엄마와 아빠는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암쥐는 나지막하게 찍찍거렸다. 아냐가 누구지?

여동생이에요, 엄마. 남자아이는 서글프게 속삭였다. 엄마의 어린 딸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암쥐는 초점 없는 검은 눈으로 흐릿한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냐가 증언하면, 남자아이는 좀 전보다 단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을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엄마. 사망신고서를 작성하고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넷이서 함께 살 수 있어요.

암쥐는 물고기처럼 불거져나온 검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넌 유명한 여배우를 닮았구나, 아냐. 난 널 TV에서 본 적이 있어.

여자는 야릇하게 웃으며 그래요? 하고 물었다.

그래. 그 여배우는 아동 살해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전에는 두 번이었던가 세 번, 희생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 감옥에서는, 암쥐는 여자를 집요하게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단다. 난 네가, 혹은 너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여배우가 나오는 프로그램들을 여럿 보았어. 법정에서 너는, 암쥐는 회상하듯 초점을 잃은 눈으로 말했다. 웃고 있었지. 그리고 아주 끔찍한 욕설을 했는데, 그걸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몰라. 그건 즉흥적으로 네가 지어낸 대사였니 아니면 원래 대본에 있었던 거니?

여자는 은근하게 미소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느 쪽이든 너는 훌륭하게 연기했고 어느 쪽이든 네가 천재적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엄마, 아냐는 여배우가 아니에요. 남자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배우가 될지도 모르죠.

그래, 암쥐는 말했다. 아냐는 여배우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았으니까 굳이 여배우가 되지 않아도 여배우를 연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남자아이는 고집스럽게 반복했다. 아냐는 여배우가 아니에요.

암쥐는 체념한 듯 그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고 말했다. 어릴 적에 학교에 다닐 때 눈 먼 여자아이가 전학 온 적이 있었어. 그 애는 눈이 멀었으니 잘 대해주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했지. 우리는 그때까지 한 번도 눈 먼 아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그 애 가까이 다가들었어. 그 애에게서는 부드러운 비누 향기가 났고 그 애의 눈은 우리가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깊은 푸른빛으로 빛났어. 우리는 그 애를 사랑했어. 모두가 그 애와 함께 있고 싶어했지. 우리는 가장 음험하고 슬픈 비밀도 그 애 앞에서 마음껏 노출할 수 있었어. 난 그 애 앞에서 시를 썼고 심지어는 그 애 앞에 잘린 혈관과도 같은 시 노트를 펼친 채로 놓고 화장실에 가는 일도 있었어. 아마 다른 애들도 비슷했을 거야.

어느 날인가 학급 총무 역할을 하던 애가 비명을 지르면서 학급 회비를 잃어버렸다고 했어. 그건 수학여행을 위해 학교에 내야 했던 교통비로 상당한 돈이었어. 선생님은 총무 역할을 하던 아이를 다그치고 또 위로하기도 하면서 교실 앞문과 뒷문을 잠근 뒤 곧바로 우리의 소지품을 검사했지. 돈 봉투는 눈 먼 여자아이의 가방 안주머니에서 나왔어. 우리는 범인이 비열한 악한이라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어.

결국 우리는 범인을 찾는 일을 포기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지.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그 애와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함께 앉아 있었어. 나는 랭보를 읽고 있었고 그 애는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지.

잠에서 깨어난 그 애는 숨겨진 동굴처럼 깊은 눈을 들더니 랭보의 시는 아름다워, 하고 말했어. 나는 끔찍하게 놀랐어. 참담할 정도로 소름이 끼쳐서 나는 그 애를 피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어.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그 애를 볼 수 없었어. 그 애는 학교에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그 애는 그런 거짓말을 했던 걸까? 혹은 내가 착각한 것일 수는 없을까? 그 애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연히 랭보에 대해 생각했고 아무런 비밀도 피치 못할 폭로도 없이 그렇게 말한 것뿐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애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그 애의 유죄가 입증되는 것 같았어. 어쩌면 그 애의 눈멂은 반쯤만 사실이었을지도 몰라. 그 애는 사실 끔찍한 약시여서 사실상 눈이 먼 것과 다름이 없었고 우리가 약시와 눈 멂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 애를 착각했을 수도 있어. 그 애는 그 애의 눈 가까이 들이밀어진 랭보의 거대하고 흐릿한 이름을 알아보았고 그래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어.

사실 그 애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숨긴 적이 없을 수도 있어. 착각한 것은 그 애의 눈 멂을 너무나 사랑했던 우리들이었을 수도 있어. 그런데도 그 애를 생각하면 끔찍하게 두려워. 암쥐의 눈 안쪽은 잿빛 눈물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본다는 건 위험한 거예요, 하고 여자는 중얼거렸다. 밤의 노래와 익명으로 거칠게 합류하는 울음들의 와해, 갈라지는 소리들, 그리고 나의 목소리, 내가 깨지는 소리를 그 끔찍하게 붉은 소리들을 본다는 건. 듣지 않고 본다는 건. 우리는 언제든 눈을 돌리고 그 붉음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나치게 오래 보기 마련이죠. 하지만 붉음은 시야의 한가운데에 끈적하게 들러붙고 우리는 안구를 빼내지 않는 이상 그 붉음을 지워낼 수 없다는 것을 나중이 되어서야 참담한 심정으로 깨달아요. 듣는 건 그렇지 않죠. 우리는 끔찍한 소음이 귓속을 찢어내는 고통스러운 감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리고 귀를 막아요. 아름다움을 깊이 응시하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그것을 믿는 것, 그것만큼 위험한 건 없어요.

암쥐는 여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녀가 그 여배우와 너무나도 닮았다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았다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면회실의 한쪽 벽에 서 있던 뱀은 암쥐의 말을 듣고 여자를 보더니 깜짝 놀란 듯 몸을 세우며 여자를 불렀다. 남자아이는 소스라치며 여자의 손을 잡고 아냐를 데려가지 말라고 울부짖었고 뱀은 남자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잠시만 이야기하고 돌아올 거라고 속삭였다.

우리는 바로 이 앞에 있을 거란다. 뱀은 면회실 철문 앞을 눈짓하며 말했다.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야. 약속해.

남자아이가 운 자국이 붉게 남은 눈으로 여자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뱀은 여자의 등을 밀려 철문 바깥으로 나갔다.

뱀은 여자에게 여기서 뭘 하는 거냐고 다그쳤다.

여자는 야릇하게 웃으며 당신이 보는 대로라고 대답했다. 게다가 난 자유예요.

대체 누가, 뱀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쉭쉭거렸다. 자유라는 거야? 넌 도망쳤어. 그리고 아직 너는 재판 중이야.

난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어요. 그걸로 끝이에요.

아니, 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진짜 재판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어. 첫 번째 재판은 그저 장난에 불과해. 판결 역시도 가벼운 유희나 농담 같은 것에 가깝지. 첫 번째 판결이 지닌 유일한 의미라면 그 상징성뿐이야. 네 경우, 보호감호 처분은 영원한 심리를 의미해.

당신은,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싸구려 점술사처럼 말하는군요.

네가 뭐라고 말하든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게다가 마침 오늘 오전에, 뱀은 침착하게 말했다. 검사가 항소했단다. 너는 조만간 법정에 출두해야 할 거야.

그런 건,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연극에 불과해요.

하지만, 뱀은 대답했다. 연극이 거짓인 건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극단에 속해 있는 아이이므로 연극이 네게 지시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단다. 설령 네가 연극을 망쳐놓는다고 해도 너는 재판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을 거야. 제발, 너는 네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알아야 해. 뱀은 열렬하게 쉭쉭대었다. 그 무명 배우는 아직도 너를 찾고 있어.

사형을 받기 전엔 재판이 끝나지 않나요? 여자는 물었고 뱀은 불가해한 검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연기냐고 물어보는 듯이.

재판은 연기될 뿐 끝나지는 않아. 언젠가, 뱀은 말했다. 네가 아이를 낳거나 자궁을 도려내기 전까지.

여자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무 진부한 이야기예요.

뱀은 낙담한 듯 중얼거렸다. 18세기의 서구에서는 여자가 임신할 경우 그녀가 출산할 때까지 사형 집행을 보류했지. 아이를 낳거나 죽이기 전까지 여자가 사형당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대개는 10달이면 끝났지만 개중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었어. 18개월이나 30개월, 심지어는 수십 년까지 계속되는 임신 기간동안 여자들은 아주 서서히 죽어갔지. 그녀들이 사형을 애걸해도 집행인이 그녀들을 위해 칼을 드는 일은 없었어.

난, 여자는 말했다. 사형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뱀은 놀란 듯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뭘 바라는데?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탐욕스러운 긍정으로, 여자는 모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뱀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언젠가 그가 여자의 말을 돌이켜 생각하며 웃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뱀을 위해 다른 예를 들었다. 포로모자 섬에서는 35살 이전에 출산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35살 이전에 임신할 경우 고매한 배심원들이 직접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유산할 때까지 짓밟는다고. 재판에 참석한 아이들은 몸 속에 숨겨진 죽음을 목격하며 웃거나 구토한다고.

하지만, 여자는 말을 이었다. 35살과 36살에 걸쳐 있는 여자들, 즉 35살에 임신했지만 36살에 출산할 것이 확실한 여자들은 그런 형벌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요.

어느 정도?

뱀이 묻자 여자는 그렇다고. 그러한 자유는 어느 정도일 뿐이라고. 만일 그녀들이 지나치게 빨리 출산해야 할 경우, 그래서 그녀들의 안에 잠복해 있던 위반의 씨앗을 으깨버리기도 전에 양수가 터지는 경우, 섬의 사람들은 가장 끔찍한 형벌을 내린다고 말했다.

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배를 차여서 죽는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아요. 그녀들의 자궁과 내장이 얼마나 끔찍한 형태로 뭉그러지는지 그녀들 이외에는 아무도 직접적으로 알 수 없죠. 그 여자들이 대부분 강간당했음을 생각하면 그녀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두 번, 혹은 세 번의 벌을 받는 셈이에요. 하나의 벌이 다른 벌을 연쇄적으로 불러오는 거죠.

뱀은 그런 말은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뱀은 적대적인 태도로 말했다. 너는 죽이는 쪽이야. 여자들을, 아이들을 죽이는 쪽이야.

여자는 태연하게 태꾸했다. 뱃속에서 눈 먼 아이들을 죽이는 건 임신한 여자들인가요? 임신한 여자들을 죽이는 건 그녀들의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인가요? 어느 쪽이죠?

뱀은 어느 쪽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자가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재판은 무한히 계속되리라는 것,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여자는 물었다. 당신은 간수에 불과한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죠?

그건, 뱀은 말했다. 내가 간수가 아닌 다른 것들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야. 뱀의 눈동자는 끔찍하게 주름진 채였다.

간수들이 뚜쟁이 역할을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뱀은 킬킬거리면서 물었다. 내가 너를 죽이길 바라니?

법적으로요.

그래, 법적으로.

여자는 뱀의 젖은 눈 속 주름들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말을 조금도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은 날 꾀여서 고발하고 싶은 거야. 그게 아니라면 당신에게 돈을 낸 죄수들의 감방에 밀어넣고 싶은 거야. 내가 자궁을 도려내거나 아이를 낳게 만들고 싶은 거야. 목을 매달기 전에 출산하도록 과거의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더러운 감방에서 다리를 벌리고 영원히 알 수 없을 무언가를 낳도록 강제하고 싶은 거야.

뱀은 면회실의 철문을 열었고 남자아이는 당황한 듯 문가에서 뒷걸음질쳤다. 남자아이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암쥐는 유리벽에 하얀 이마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남자아이는 뱀에게 아냐를 잡아갈 거냐고, 두려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란다.

아냐는, 남자아이는 흐느끼며 말했다. 벌을 받게 되나요? 자백을 할 것이기 때문에? 혹은 증언을 할 것이어서? 지금까지의 일을 거짓으로 돌릴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되나요?

뱀은 남자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여동생이 어딘가 잡혀가더라도 여동생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국에 가더라도 말이야, 얘야. 뱀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자는 열병에 걸린 기억들을 생각했다. 계단 아래로 쏟아지는 수백 개의 유리구슬들을, 하염없이 내려가고 있는 깨진 파편들을, 무한히 계속되는 계단들을. 여자는 힘없이, 돌아가고 싶다고 중얼거렸고 간수는 난감해하며 말했다. 너를 찾는 이들이 실종 신고를 하기 전에는 널 데려다줄 수 없단다.

하지만, 여자는 애달프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잖아요.

뱀은 고개를 저으며, 너를 잃어버린 자들이 너를 찾아오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남자아이는 여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괜찮으니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아냐, 잊은 건 아니지? 증언을 해 줘야 해.

남자아이는 울먹이며 속삭였다. 네가 나간 동안 엄마는 너를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고 말했어. 아빠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난 네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지만 엄마는 간혹 완전히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 엄마와 아빠는 따로따로 재판을 받았는데 각각의 재판에서 엄마와 아빠는 번갈아서 피고인과 증인과 변호사 역할을 해야 했어. 물론 오직 피고인으로서의 제한된 발언만 효력을 가지고 있었어. 변호사들은 사건을 맡아주려 하지 않았어. 우리에겐 돈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승산이 없었으니까. 희생자가 등장하지 않는 사건은 철저하게 검사측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판사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며 판결을 내린다는 것을 변호사들은 알고 있었던 거야. 난 엄마 아빠에게 항소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래서 사형이라도 받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고 했지만 엄마와 아빠는 소용 없을 거라고 했어. 희생자가 등장하지 않는 사건은 언제나 같은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아빠는 어쩌면 자기가 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어. 하지만 그건 끔찍한 착각이야. 그렇지, 아냐? 너는 알고 있잖아. 우리가 너를 죽일 때 엄마 아빠는 위층에 있었어. 아빠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 아니, 어쩌면 층계참에서 우리를 엿듣고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네 목을 조르고 네가 내 눈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소리를 들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의 죽음에 엄마 아빠는 개입하지 않았어. 그래, 그건 우리의 죽음이었어. 엄마나 아빠의 죽음이 아니었지. 감옥에서 아빠는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우리의 죽음마저 빼앗으려 한 거야.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너는 아빠나 엄마에게 죽음을 내맡긴 적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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