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13

너는, 남자아이는 여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죽음을 내게 맡겼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내가 죽을 작정이었다면 난 나의 죽음을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는 나 자신의 운에도 맡기지 않고 너에게 맡겼을 거야. 네 작은 손이 내 목을 잘 조를 수 있도록 난 네 손 위에 손을 얹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아마 실패로 끝났겠지. 나는 졸도에 가까운 지경에서 결국 손을 놓았을 거고 너는 내 손 없이 내 목을 끝까지 조를 수는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난 할 수 있었어. 네가 졸도한 뒤에도, 네 손이 내 손 위에 겹쳐지지 않아도 네 목을 조를 수 있었어. 너는 처음 들어보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냈어, 아냐. 난 무서웠지만 끝까지 참았어. 왜냐하면 그건 우리의 죽음이었으니까. 난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나 아빠는 완전히 믿지 못했어.

엄마는 네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했어. 신은 천국에 도달한 아이들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뇌의 얼룩을 지워내는 표백제를 강제로 마시게 만든다고 했어. 신은 탐욕스러운 어린아이이므로 천국으로 흘러든 모든 천사들을 새장에 가두고 노래를 부르게 만든다고 했어. 새장에 갇힌 천사들은 대개 신과 같은 무한을 그곳에서 보내야 하며 우연치 않게 새장에서 탈출한 천사들도 날개가 부러지거나 잘렸기 때문에 지상으로 날갯짓해 내려올 수는 없다고 했어. 천사들이 지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옥상에서 자살하는 아이들처럼 추락해야 하며, 천국에서 지상으로 추락하는 시간은 상상할 수도 없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천사들은 그만큼 더 오랜 고통과 두려움을 견뎌야 한다고 했어. 추락하는 동안 천사들의 부드러운 피부들은 벗겨져나가고, 속살과 내장과 지방층과 근육, 피의 막까지 모두 벗겨져나가서 남는 것은 흰빛의 뼈밖에 없을 거라고 했어.

밤마다 나는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는 천사들의 부드러운 뼛조각들을 보았어. 흰 뼈들은 여름철의 초콜릿처럼 부드럽게 녹아 있었고 뼈들을 반죽처럼 내 얼굴 위에 펴바르면서 네 냄새를 맡았어. 네게서는 부식되어가는 지하실의 냄새가 났어, 아냐.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어.

남자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자줏빛으로 달아오른 눈에서 진물같은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아빠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 완전히 미쳐버렸어. 아빠는 너를 죽인 게 자기라고 말했어. 네가 하얀 시트 위에 누워 잠든 동안 아빠는 네 얼굴 가죽을 벗기고 그 속에 면도날을 쑤셔넣었다고 말했어. 면도날로 찢어진 너는 너무나 달콤하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고 말했어. 아빠는 네가 갓 태어났을 때를 떠올렸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했어. 벗겨진 입술 아래로 드러난 네 이들은 너무나 작고 하얬고 아빠는 네가 아무것도 연기하고 있지 않은 하얀 모래와도 같다고 생각했다고 했어. 무수한 얼굴들이 그려졌다가 지워지는 모래사장의 해변, 위장하는 체 하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위장하지 않는. 아빠는 너를 내려다보며 랭보의 시를 읊었다고 말했어. 군인들에게 강간당하며 면도날과 같은 성기에 찢겨나가며 심해처럼 아름다운 시구들을 속으로 중얼거렸을 어린 랭보를 떠올렸다고 했어. 하지만 아빠도 너도 랭보가 아니었으므로 그 다정한 웃음이 바깥으로 노출될 일은 없을 거라고, 미소를 독점하는 일은 끔찍하게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고 아빠는 말했어. 아빠는 네게 미안하다고 말했어. 홀로 웃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고, 특히 밤에, 돌이킬 수 없는 미소로 벌어지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고 아빠는 미친 듯이 소리질렀어.

그곳의 간수는 당신과는 달라서, 남자아이는 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빠가 우는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빠가 미쳐가는 걸 그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나는 아빠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어. 아빠는 다정하게 웃는 네가 그의 앞에 서 있다고 말했어. 나는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분명 아냐는 돌아올 거지만 지금은 그곳에 없다고 말했어. 하지만 아빠는 아냐는 하나이며 지금 그곳에 있으므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고 말했어. 아빠는 네가 얼마나 예쁘게 웃고 있었는지 말했어. 면도날은 달빛처럼 창백한 은빛으로 빛났고 네 미소에서는 장미처럼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말했어. 아빠는 네가 지금도 웃고 있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아빠를 면회하던 그 순간 말이야.

아빠는 네가 아빠의 앞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 알려지지 않은 순간부터 0까지. 0에 도달하는 순간 너는 사라질 거라고 말했어. 아니, 0을 세는 순간 너는 더 이상 웃지 않을 거라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짐승과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질 거라고. 아빠는 네가 웃지 않는 게 죽음보다 두렵다고 말했어. 지금도 아냐는 세고 있어, 하고 말하는 아빠는 유령처럼 창백했어. 아빠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어. 아빠의 머리칼은 중독자처럼 젖어 있었어. 아빠는 계속해서 경련하면서 허공 어딘가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어. 어디까지 셌냐고 아빠는 중얼거렸어. 어디까지 셌어, 아냐? 어디까지? 하지만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아빠는 말했어. 아빠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어. 제발 어디까지 셌는지 알려달라고. 면회실의 유리 너머로 아빠의 젖은 머리카락이 언뜻언뜻 보였고 아빠는 발작하듯이 알려달라고 울부짖었어. 어디까지 셌어, 아냐? 어디까지? 하지만 너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고, 어쩌면 입술이 사라졌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시간이 지나 조금 진정된 뒤 아빠는 말했어. 아냐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내가 말해도 소용없었어.

아빠는 네가 복수할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어, 아냐. 아빠는 네가 더 이상 웃지 않을까봐 그리고 네가 0을 셀까 봐, 아빠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네 카운트다운을 잊어버리고 잠든 순간에, 무방비하게 다른 것들을 상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예기치 않게 0을 알리는 네 마지막 목소리를 듣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거야. 아빠는 오랫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 언제 0을 알리는 네 목소리가 들릴지 몰라서 아빠는 끔찍하게 긴 시간 동안 불면했어. 하지만 아빠의 말에 따르면 네가 0을 세고 나서도 아빠가 알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어. 카운트다운의 다른 모든 숫자들은 알려지지 않더라도 0만은, 그 결정적인 귀착점만은 반드시 아빠에게 알려질 거라고 했어. 너는 0을 셀 거고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혹은 모든 끝이 사라져버릴 거라고 아빠는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말했어. 아빠가 기다리던 게 복수였다면 더 나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빠는 네가 복수할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

아빠는 가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던 순간 사이에 끔찍한 간극이 있는 것 같았어. 아빠는 나를 다른 사람과, 심지어는 너조차 아닌 다른 사람과 혼동하기도 했어. 언젠가 나는, 남자아이는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렸다. 아빠가 정말 여자아이를 죽인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어. 그러니까 네가 아닌 다른 여자아이 말이야.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혹은 이름이 없는 여자아이. 아빠가 정말 그 여자아이의 얼굴가죽을 벗기고 얼굴 내부의 은밀한 미소를 본 것이 아닌지. 간혹 아빠는 정말 다른 남자처럼 보였어. 감옥에서 말랐기 때문인지 키도 예전보다 작아 보였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해서 인상이 날카로워 보이기도 했어. 아냐, 너도 알겠지만 아빠는 살집이 있는 사람이었잖아. 덩치도 큰 편이었고. 하지만 면회실 유리 너머의 아빠는 정말 다른 사람처럼 날카로워 보였어.

여자는 소녀들의 말을 떠올렸으나 굳이 남자아이에게 상기시키지는 않았다. 암쥐는 어느새 깨어나 검은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도, 남자아이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만큼이나 힘들어했어.

암쥐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어. 엄마는 간혹 너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어. 하지만 엄마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너를 잊은 동안에도, 엄마는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암쥐는 대답하지 않았다. 뱀은 교도소의 입구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와 달리 다섯 명 정도의 간수들이 교도소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사막 같은 황금빛으로 달아오른 운동장을 걷는 동안 소녀들이 뛰어와 그들을 붙잡았다. 소녀들은 꼭대기층에서부터 뛰어내려온 듯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소녀들은 여자를 보며 여배우가 아니냐고, 헐떡이며 물었다. 소녀들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당신을, 소녀들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기다렸어요. 우리는 당신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줄 수 있어요. 제발 가지 마요.

소녀들은 숨을 몰아쉬며 울 듯이 애타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제발요.

여자는 소녀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소녀들은 하나같이 열렬히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여자는 그 누구보다도 그녀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남자아이는 어리둥절하여 그들을 번갈아 둘러보았다.

우리 방으로 가요. 목이 긴 소녀가 애원하듯 말했고 다른 소녀들이 여자의 팔을 끌어당겼다.

남자아이는 시간이 늦어서 안 된다고 말했다. 아냐, 빨리 가자. 남자아이는 마치 이 소동이 모두 여자의 탓이라는 듯 짜증스럽게 말했다. 밤이 되기 전에는 터널을 건너야 해.

그러면, 검은 머리의 소녀는 묘안을 떠올렸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방에서 자요. 그리고 내일 가면 되잖아요.

소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애원했다. 남자아이는 초조한 듯 보였지만 결국 소녀들의 애원에 따랐고 그들은 소녀들의 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교도소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간수들은 소녀들을 막지 않았고 소녀들과 함께 올라가는 그들에게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간수들은 마네킹처럼 무감각하고 정적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그 간수들이 그들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제지하지 않을지도, 어쩌면 오직 그곳에 서 있기 위해 서 있는 것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녀들은 계단을 올라가며 간혹 발작하듯 번갈아 기침을 해댔다. 작고 가녀린 어깨와 가슴이 흔들리는 모습이 버거워 보였지만 소녀들은 꿋꿋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여자는 시체들로 뒤덮인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거북스러웠지만 특별히 소녀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끔찍하게 지쳤기 때문에 소녀들을 따라 순순히 올라갔다. 시체들은 여전히 벽 구석자리로 밀린 채였다.

소녀들은 원형의 빈 공간 한가운데 서서 춤을 추었다. 소녀들은 황홀경에 접어든 신도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소녀들의 흰 원피스 자락이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소녀들은 울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떠도는 유령들이에요. 입술이 붉은 소녀가 말했다.

우리가 떠도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 장소예요. 푸른 눈의 소녀가 말을 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우리는 춤을 춰요. 목이 긴 소녀가 말했다.

소녀들은 마치 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사를 이어 받았다.

선원들은 우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봐요. 긴 머리 소녀가 말했다. 선원들은 희끄무레한 물안개를 봐요. 그리고 우리를 봐요. 소녀, 소녀, 그리고 소녀들. 선원들은 우리가 익사한 영혼들이라고 생각해요. 바다에 목을 매고 죽은 어린 여자아이들이라고 생각해요. 고기잡이 배의 반란에서 살아남지 못한 선원들이라고 생각해요. 등대에서부터 떠밀려온 흰 상념들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선원들이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을 지켜봐요.

소녀들은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선원들은 유리병에 담긴 좀 먹은 편지를 보아요. 편지의 내부에는 바닷물이 밀려들었지만 편지는 유리병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물에 젖어 녹아내린 언어가 춤추는 모습을 선원들은 봐요. 선원들은 아침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햇빛에도 훼손되지 않고 계속해서 춤을 추는 우리들을 보고 있어요. 선원들은 옷을 벗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요. 하지만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선원들은 우리를 찾지 못해요. 우리는 바다의 내부에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소녀들은 노래하듯 속삭였다.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우리를 찾지 못해도, 선원들은 바다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원망이나 슬픔보다도 더 갑작스럽게 검은 체념이 선원들의 구멍들 속으로 밀려들어요. 선원들은 울음도 절망도 없이 검은 심해로 빨려들어가고 영원히 우리를 찾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는 같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우리는 계속 춤을 추고 있어요. 간혹 춤을 멈출 때조차 우리는 춤을 추며 흔들리고 있어요. 하지만 결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다른 곳이고 다른 곳들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며 우리가 춤을 추는 곳이니까요.

우리는 춤을 추며 꿈을 꿔요. 거대한 붉은 고래가 해변에서 마을까지 기어가는 꿈이에요. 고래의 배는 처참하게 문드러졌고 뱃속에서는 부패의 가스가 차오르기 시작해요. 하지만 고래는 기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아요. 고래의 연약한 피부를 둘러싼 물의 피막이 닳아 없어지고 고래는 온 피부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해요. 하지만 고래는 따뜻한 노란 불빛이 흘러나오는 마을을 향해서 기어가요. 가엾은, 미친 고래는 마을이 바다라고 믿어요. 한밤에 홀로 기어가는 고래를 해변에서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 누구도 고래의 처량하고 절망적인 여정을 막아서지 않아요. 그래서 고래는 마을까지 기어가고 말아요. 고래는 기어갈 수밖에 없어요. 고래는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아름다운 바다가 메마른 전기의 불빛들임을 확인할 수밖에 없어요. 아침이 밝아오고 마을 사람들은 광장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붉은 고래를 발견해요. 고래는 피투성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경악하지만 곧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고래는, 죽어가는 검은 눈을 끔찍하게 천천히 깜빡거려요. 마을 사람들은 고래를 둘러싸고 춤을 춰요.

소녀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노래하듯 읊조렸다. 피투성이의 고래 주위로 파리떼가 달겨들어요. 파리들에 뒤덮인 몸은 검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배처럼 반짝여요. 고래가, 고래의 내장과 지방층과 피부와 고래를 둘러싸고 있던 작고 미미한 천사들이 폭발하기 전까지 마을사람들은 고래를 둘러싸고 춤을 추며 고래의 피냄새를 맡아요. 폭발에 휩쓸린 마을에는 고래의 절망적인 육체의 애액이 영원히 스며들어요. 마을 사람들은 고래의 피와 지방과 근육과 피부의 냄새 속에서, 비누처럼 두툼한 살점들 속에서 살아가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마을에는 모래가 뒤덮이고 마을사람들은 모두 유골이 되어 그 위로 사막이 쌓였지만 고래의 거대한 육체 조각들은 아직도 완전히 썩지 않고 남아 있어요. 우리는 그곳을 붉은 사막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붉은 사막의 아이들이에요. 사막이 모두 얼어붙은 뒤에도 우리는 그곳을 붉은 사막이라고 불러요. 사막이 침수되어 바다가 된 뒤에도 우리는 그곳을 붉은 사막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붉은 사막을 떠도는 고래의 핏방울들이에요. 우리는 이제는 사라진 장소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미래의 장소를 떠도는 고래의 흔적들이에요. 고래는 하나의 도시가 끝나고 하나의 사막이 돌아올 때, 하나의 사막이 끝나고 하나의 불빛이 돌아올 때 황금빛의 마을로 기어가 영원히 폭발할 거예요. 우리는 고래의 바다 위를 떠도는 미래의 유령들이에요.

소녀들은 한쪽 다리를 뒤로 한 채 원피스 자락을 양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발레 무용수의 정중한 인사를 했다. 연극이 끝나자 소녀들은 수줍게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녀들은 검거나 푸르거나 녹빛이거나 갈빛으로 반짝이는 눈들로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목이 긴 소녀는 여자에게 배우가, 그것도 아주 유명한 배우가 되어서 유명해지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별처럼 반짝이고 싶어요!

소녀들이 재잘거렸다. 스타요, 우리는 스타가 되고 싶어요.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 연극을 보여줘요. 하지만 우리를 캐스팅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없어요. 우리는 정말 뭐든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우리는 더 이상 시체들과 같이 잠들고 싶지 않아요.

소녀들은 울고 있었다. 우리는 유령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우리와 잠든 짐승들은 우리에게 부족한 건 획기적인 아이디어도 아름다운 육체나 얼굴도 아니라고 했어요. 우리에게 부족한 건 아주 사소한 운이나 영향력 있는 짐승이나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걸 주었는데! 검은 머리 소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아주 뒤늦게야 우리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들은 그만큼 영향력 있는 이들이 아니라고요. 사실 그들은 TV나 영화, 심지어는 연극의 말단 관계자들과도 아무런 연이 없는 자들이었어요. 우리는 철저하고 끔찍하게 사기당했던 거예요.

그래도, 창백한 소녀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계속 연습했어요. 우리는 아직 어렸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싱싱하고 유용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는 시체들의 성기를 빨 준비도 되어 있어요. 실제로 몇몇 사기꾼들은 우리에게 그짓을 시키기도 했어요.

가장 끔찍한 건 그들이 나중이 되어서 우리에게 울면서 미안하다고 흐느끼는 일이었어요. 그들은 자신들도 사기를 당한 희생자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TV 방송국이나 영화 촬영장, 연극 무대 뒤쪽의 대기실에서 몇 주 혹은 몇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가서 기다렸고 그곳에서 그들과 마주친 관계자는 아주-재능-있는 소녀들인 우리를 기꺼이 무대에 세우겠다고 약속했다고 했어요. 관계자는 연락처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관계자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해나가기 위해 매일같이 그곳으로 찾아가 관계자를 기다렸고 간혹 관계자를 만나 대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어요.

관계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갑게 그들을 맞았고 몇 번이나 우리를 무대에 올릴 수 있다고, 우리가 아주 유명해질 수 있다고 약속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관계자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관계자 혹은 관계자와 구분할 수 없이 무척 닮은 누군가가 그들과 마주친 뒤에도 관계자 혹은 그와 닮은 이는 그들을 모르는 것처럼 지나쳤다고, 그들이 관계자를 소리내어 불러도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떠나갔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가슴이 찢어진 짐승처럼 울면서 말했어요.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그러니까 시간을 빼앗겼다고요. 시간은 순결이나 명예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어요. 왜냐하면 시간은 육체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흐르는 검은 물질과도 같으므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육체의 심부를 뜯어내는 것과 같으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괴롭다고,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몇 주 혹은 몇 달을 고스란히 소모했고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위해 그 어떤 일도 해 줄 수 없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끔찍하게 울어젖히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성기를 빨아주거나 그 짓을 해주기도 했어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직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우리를 위로해줄 이는 없었어요. 우리는 너무 지쳐서 서로를 위로할 수도 없었어요. 우리는 그 관계자 혹은 관계자와 구분할 수 없이 닮은 그 자들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대체 그들이 아무런 기약도 없이 무엇을 허비하고 온 것인지 정확히 알 방법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들이 너무 시끄럽고 진저리나게 울어댔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푸른 눈의 소녀는 비명을 지르듯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확인한 뒤에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우린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해요. 우리는 아직 데뷔조차 하지 않았고 오디션도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오디션에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오디션에 응시하고 오디션에 합격하고 데뷔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들은 없었어요. 오디션 접수 창구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오디션이라는 게 실재하기는 하는 건지, 우리는 법원과 교도소 곳곳에 수소문해 봤지만 그치들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어요. 혹은 아는 척 위장하며 우리를 꼬여낼 뿐이었어요.

관계자들과 접촉한 조력자들의 말에 따르면 오디션은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신인 배우들은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고 있다고 해요. 심지어 오디션은 비밀리에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진행되며 선발 절차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죠. 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오디션을 추적할 수 없어요. 오디션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오디션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오디션을 구성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오디션의 발표는 언제 났는지 단 하나도 아는 게 없죠. 하지만 조력자들은 관계자들이 오디션은 분명히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장담한다고 말해줘요.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요. 관계자들은 우리가 오디션에 응시하기만 하면 힘을 써 줄 수 있다고 장담해요. 물론 아무런 기약도 없이 사라지거나 사라진 척하기 전에 말이에요. 우리는 조력자들에게 확실한 서류-계약서 같은 것 말이에요-를 요구하지만 조력자들은 있는대로 젠체하면서 그런 은밀한 계약에는 서류가 오가지 않는 거라고 말해요. 화가 치밀고 그 빌어먹을 좆같은 치들의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지만 우리는 꾹 참고 그들을 상대해요. 그들은 느글거리면서 그들이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죠. 적어도 그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서 관계자들이 입을 씻고 그들을 무시하면 그들은 한 순간에 빈털터리가 되는 거죠.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도 파산의 흔적은 남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심지어 가진 적조차 없으니까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건 그런 치들뿐이에요. 우리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끔찍하고 역겨운 하수구에 허투루 쏟아부은 것과 다름없죠. 그 시간에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서 수다나 떨며 놀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게 아니면 연극 연습을 더 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벌써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새로운 연극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춤을 추고 대화를 하고 연극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오디션과 데뷔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어요.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는 건 단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다른 짐승들을 우리의 방으로 끌어들였고 그들을 우리의 조력자로 만들었어요. 그들이 끔찍하게 무능력하다는 걸 알면서도요. 그들은 전혀 영향력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진짜 법에 접근하려는 시골 변호사처럼 무력하죠. 시골 변호사는 그의 마을에서 가장 큰 책방에 있는 법전을 사서 공부해요. 그는 수십 년 동안 법전을 공부하고 마침내 법을 알았다고 믿어요. 하지만 그가 법전을 공부하는 수십 년 동안 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요. 시골까지는 새로운 법전이 전해지지 않은 거죠. 시골의 책방에 있는 것은 옛날의, 이제는 아무런 효력도 가지지 못한 법전일 뿐이고, 시골 변호사가 공부한 법전은 환상이나 미신과도 같아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아주 특정적인 시대의 법률만을 공부한 역사도쯤 될 거예요. 어느모로 보나 법조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죠. 그렇지만 그는 마을에서 그보다 법에 대해 더 잘 아는 이는 없음을 알아요. 시골에 사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죠.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그 자신은 모두 그가 변호사라고 믿어요. 법률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그러니 물론 진짜 법률 관계자들이 법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전혀 없는-시골 변호사는 마치 작은 마을의 재판관처럼 굴어요. 그는 마을 사람들의 법률 문제를 예전의 법으로 해결해주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믿고 법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안이 생길 때마다 그를 찾아가요. 그는 마을보건소의 복지 의사처럼 아무런 돈도 받지 않고 그 모든 사건들을 해결해줘요. 물론 그는 무면허 변호사예요. 현행법에 비추어 보자면 그는 불법 변호사인 셈이죠. 하지만 그는 예전의 법, 그러니까 변호사 시험과 변호사 면허 관련 법이 생기기 이전의 법을 공부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 없이 그가 합법적인 변호사라고 믿어요.

무면호 변호 활동, 심지어는 재판관 사칭은 불법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그에게 진짜 법이 개입해요. 그는 난생 처음으로 진짜 경찰과 진짜 검사와 진짜 판사와 진짜 변호사를 보게 돼요. 그는 법정에 서서 자신의 변호사가 무능하다고 생각해요. 그에게 유리한 법률 조항들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검사의 끔찍하고 불가해한 비난을 감당하고만 있는 변호사 대신 그는 직접 자신의 변호를 하러 나서요. 검사가 말을 끝나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성급히 일어나 그가 알고 있는 과거의 법률 지식들을 쏟아내요. 수십 년 전의 법률 지식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법조인들은 거의 없어요. 그 자리의 누군가는 분명 아직 그게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을지 몰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죠.

법정 안의 짐승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려요. 시골 변호사는 자신이 모욕당했음을 느껴요. 판사는 그에게 어디 산에서 도를 닦다 왔나 보군, 하고 농담을 하고 짐승들은 더 큰 소리로 웃어젖혀요. 시골 변호사는 자신의 불행이 일종의 3류 희극, 코미디쇼로 변해버렸음을 알아요. 웃느라 기분이 좋아진 판사는 시골 변호사에게 집행 유예 처분을 내려요. 그런 처분마저도 시골 변호사에게는 끔찍한 조롱처럼 느껴져요. 그의 진짜 변호사는 시골 변호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잘 되었다고 축하하지만 시골 변호사는 가슴이 찢어진 채로 울부짖어요. 변호사님, 난 이제 더 이상 변호사가 아닌가요?

진짜 변호사는 고개를 저으며 야릇하게 웃어요. 선생님, 적어도 면허 정지 처분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변호사가 아니었으니까요. 선생님은 적어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법을 공부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그러면 선생님은 진짜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시골 변호사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백치처럼 고개를 저어요. 그는 지금까지 변호사였는데 이제는 변호사가 아니라고 하면서, 변호사 자격이 취소된 것도 아니라는 말은 그에게 너무나 이상하게 들려요. 하지만 진짜 변호사가 그를 위로하고 있으며 호의적인 말을 하려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시골 변호사는 이해한 척하며 결국에는 알았다고 대답해요.

그래요, 선생님은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하고 말을 건네며 진짜 변호사는 황급히 법정을 떠나요. 이제 법정 안에 남은 건 시골 변호사와 법정 서기뿐이에요. 법정 서기는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거미인데 그녀는 여덟 개의 다리를 유연하게 놀리며 장난치듯 리드미컬하게 법정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극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데 시골 변호사는 그녀의 배 위까지 퍼져 있는 여섯 개의 매혹적인 검은 눈들을 보아요.

하나, 시골 변호사는 그녀의 눈들을 느린 속도로 세어요. 그녀의 눈을 세기 위해 그는 필연적으로 그녀의 온몸을 훑어내릴 수밖에 없어요. 그는 수치스럽고 야릇한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계속 그녀의 눈들을 세어나가요.

둘, 그녀는 변호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어요.

셋, 그녀는 입을 벌리고 시골 변호사는 그녀의 내장이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떨어요.

넷, 그녀는 시골 변호사에게 법의 문에 대해 말해요. 그건 시골 변호사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카프카의 그 유명한 우화예요. 시골 변호사는 서기에게 그녀가 바로 시골 사람의 법을 지키던 그 문지기냐고 물어요. 그녀는 웃어요.

다섯, 그녀의 날카롭고 섬세한 이빨들이 드러나고 그는 그녀의 내부에서 바스라지는 작고 아름다운 나비의 얼굴을 떠올려요.

여섯, 그녀는 슬프게, 문지기들에게도 자신의 문이 있다고 말해요. 그들은 오래도록 자신의 문을 떠나 왔어요. 시골 남자의 문을 지키면서 문지기는 자신의 문에 대해 생각해요. 아마 텅 비어 있을, 방문객도 주인도 없이 처량하게 열려 있을 자신의 문에 대해서. 문지기들은 자신이 지키고 있는 남의 문을 떠나 자신의 문을 찾아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들의 문이 없다면? 법과의 계약이, 문지기로서의 직분이 그들 자신의 문을 이미 영원히 봉쇄해버린 거라면? 그렇다면 그들은 모든 문에 대한 이방인이 되어버릴 거예요. 그들은 불법 체류자로 문과 문의 섬들을 떠돌게 될 거예요. 도망친 문지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문지기들은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문과 문의 사이는 너무나 멀고 첫 번째 문과 두 번째 문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체적으로 직분에 충실한 문지기들은 알 수 없으니까요.

심지어 이 우화 속 첫 번째 문의 문지기의 경우는 더 심하죠. 시골 사람이 처음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두 번째 문지기, 심지어는 세 번째 문지기를 만나러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어요. 그건 그에게 무시무시하게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그는 점점 더 대담해졌을 것이고 마침내는 시골 사람의 법을 통해 법의 심부까지 들어갈 수도 있었을 거예요. 물론 이 경우 법의 심부라는 것은 그렇게 추측되는 무언가지, 진짜 법의 심부라고는 할 수 없어요. 법의 심부가 어떠한 기계로 되어 있는지 그것이 어떤 모양을 가지고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요. 충분히 높은 직위에 있는 자들도 그들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죠. 심지어는 높은 직위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법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에요.

예컨대 여왕의 경우가 그렇죠. 모두가 알다시피 여왕은 외국인이며 심지어는 우리 행성 출신도 아니에요. 여왕은 공식적으로는 법적 최고 지위에 있지만 그녀는 어찌할 수 없는 이방인이므로 우리 법의 내밀한 구석까지는 알지 못하죠. 어떻게 보면 여왕은 당신보다도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여왕은 그녀가 알고 있는 법의 표면적인 부분, 우연히 그녀의 눈에 들어온 부분에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거죠. 물론 여왕은 공식적으로 법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녀가 마음먹은 것은 모두 바꾸고 영향을 끼칠 수 있겠지만 그녀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법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간섭할 수 없죠. 물론 그녀가 진짜 법, 내부적인 법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러한 관여는 어디까지나 간접적이에요.

시골 변호사는 놀라서 말해요. 당신은 법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도 시골 변호사는 서기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아요. 그는 그녀의 검고 포악한, 젖은 눈들을 세고 세고 다시 또 세느라 혼미한 상태예요. 그는 그녀가 지나치게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입을 벌릴 때마다 그 속에서 언뜻 들여다보이는 그녀의 투명한 체액에서 어떠한 맛이 날지 생각해요.

서기는 계속 법의 우화에 대해 설명해요. 시골 사람은 문지기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문지기가 시골 사람이 법에 접근하는 걸 막은 게 아니라 오히려, 시골 사람이 문지기가 법에 접근하는 걸 막은 거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양쪽 다 맞다고 보아야 할 거예요. 다만 시골 사람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그렇게 했고, 문지기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면서 그렇게 한 거죠. 시골 사람은 무의지적으로 문지기의 문지기 역할을 했고 문지기는 의지적으로 시골사람의 문지기 역할을 수행한 거죠. 시골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문지기의 생을 파멸시켰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오직 후회와 체념만으로 죽을 수 있었고 문지기는 의식적으로 시골 사람의 법을 가로막았으므로 후회와 체념뿐 아니라 끔찍하고 몸서리쳐지는 죄책감을 함께 안게 되었겠죠. 문지기가 죄책감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그가 지닌 다정한 성품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어요. 물론 문지기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한 것뿐이므로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거나 가졌더라도 미세한 욱신거림만을 앓았으리라고 예측할 수도 있겠죠. 아이히만처럼, 혹은 시오니스트처럼.

하지만 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시골 사람은 그에게 매일같이 부탁을 했고 문 안쪽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며 뇌물을 주기도 했죠. 그는 뇌물에 관심이 없었으면서도-당연하죠. 평생을 문 앞에만 사는 사람이 보물을 가져서 무얼 할 수 있었겠어요? 그건 보물이 시골 사람이 앉아 있는 걸상에 더 가까이 있느냐 문지기의 발치에 더 가까이 있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었어요-뇌물을 받는 체 했어요. 오직 시골 사람이 느끼는 무력감과 서글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었고요. 시골 사람이 문 앞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문지기는 시골 사람이 죽기까지, 그에게도 거의 평생에 가까웠을 시간 동안 문 앞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는 문 앞에 매여 있었어요. 그는 문의 안쪽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시골 사람의 문을 버리고 자신의 문을 찾아 나설 수도 없었어요.

시골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요? 시골 변호사는 여자의 여섯 번째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어요.

정말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서기가 더 오래 말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녀의 입속을 더 주의 깊게 관찰하기 위해서요. 목이 긴 소녀는 여자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헤이, 너흰 날 속이고 있어. 여자는 지폐처럼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난 법이니 죄책감이니 하는 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나는 위반에 목숨을 걸고 날아오르려 애쓰는 피투성이 정신병자도 아니야. 난 하고 싶은 역할을 연기해. 그게 다야.

소녀들은 밤을 빼곡이 채운 곤충들의 비밀스러운 눈들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도, 머리가 검은 소녀는 애걸하듯 말했다. 당신처럼 살고 싶어요.

원하면 너희끼리 연기를 해.

이야기를 더 들어줘요. 푸른 눈의 소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우리는 가엾은 문지기조차 아니에요. 우리는 법의 문턱에조차 가지 못했어요. 법의 입구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요. 차라리 첫 번째 문에서 영원히 매여 있어야 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그렇게 할 거예요.

너희는, 남자아이는 불현듯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를 닮았구나.

소녀들은 남자아이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혹은 듣지 못한 척 하며 여자를 향해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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