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14

문지기는 적어도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을 수 있었어요. 시골 사람은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거미 서기는 이렇게 말해요. 그것은 합법적인, 그러나 동시에 범죄적인 예속관계라고요. 그리고 이렇게도 말하죠. 끔찍하고 불가능한 노력을 통해 당신은 문지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희망은 개연적이며 심지어는 현실적이기도 하죠.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그래도 우주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확률이니까요.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행운으로 당신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문지기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시골 사람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는 첫 번째 문지기의 문을 지나 두 번째 문지기의 문으로 갈 수 있었을 거예요. 문지기는 그를 막거나 막지 않았겠죠. 문지기는 그가 자신의 문으로 들어갈 때이거나 그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거예요. 어찌 되었든 문지기들은 자신의 법 앞에 서 있는 시골 사람보다는 열등한 위치에 있으므로 끝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시골 사람이 지금이 자신의 때라고 선언하면 문지기들은 시골 사람을 쥐어패고 빈사 상태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죽이거나 들여보내는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시골 사람에게 기적과도 같은 운이 주어진다면 그는 세 번째 문지기를 만날 수도 있겠죠. 그곳이 바로 첫 번째 문지기가 도달한 한계치이죠. 하지만 세 번째 문지기를 넘어 그 안쪽으로 들어가더라도 첫 번째 문지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기껏해야 자신의 문을 찾아온 문의 주인에게 들려줄 무용담의 수위가 더 높아지는 것뿐이겠죠. 그는 조금 더 자신만만해지겠지만 결국은 그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가 영원히 차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예요. 문지기는 백치가 아니니까요. 그는 다만 끔찍하게 지쳤고 그 피로와 우울을 감내하기 위해 과장된 자만함으로 치장했을 뿐이지, 실제로 그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건 아니에요.

예컨대, 그는 두 번째 문지기나 세 번째 문지기, 그리고 그 안쪽의 문지기들이 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인하죠. 물론 진짜 문제는 그 두 번째 문지기나 세 번째 문지기조차도 사실 지극히 열등한 위치에서, 법의 테두리에서 남의 법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하잘 것 없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이에요.

시골 사람이 첫 번째 문을 너머 들어가고 난 뒤 문지기는 홀로 남을 거예요. 그는 문 안쪽으로 경박하게 고개를 들이밀고 시골 사람의 뒷모습과 두 번째 문지기의 우람한 인영을 훔쳐볼 거예요. 그는 시골 사람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거나 먼 곳으로, 그 자신의 직분이 더 이상 그를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해요. 홀로 사막의 문 앞에 서 있는 게, 텅 빈 걸상을 바라보는 게 끔찍하게 외롭다고도 생각해요. 심지어 그곳은 그의 문조차도 아닌데! 그곳이 시골 사람의 문이라는 것, 그리고 문의 안쪽에 다른 문지기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가장 외곽의 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그에게 알려진 법에 대한 지식의 전부에요.

그는 사실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 가까워요.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지금 막 법의 내부로 진입하는 시골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보다 나을 게 없죠. 아니, 사실 그의 지식은 시골 사람의 지식보다 한없이 열등해요. 왜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타인의 법에 대한 지식이며 그 자신의 법에 대한 지식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의 법은 시골 사람의 법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죠. 이곳의 법은 적어도 첫 번째 문부터 세 번째 문까지는 한 명의 문지기가 하나의 문을 지키고 있는 구조이지만 그의 법은 나선형, 혹은 미로 형태로 이루어진 끝 없는 길일지도 몰라요. 문지기들의 배치도 아마 다를 것이고 어쩌면 문지기들이 아마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르죠.

그런 생각을 하면 첫 번째 문지기는 피부가 뜯겨져나가는 아픔을 느껴요. 자신의 법이 텅 비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게다가 그 누구도 자신의 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심지어 그 자신마저도, 자신의 법보다 시골 사람의 법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으며 심지어 시골 사람의 법을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그는 죽을 것처럼 괴로워요.

시골 사람의 뒷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아요. 시골 사람은 세 번째 문지기에게로 갔고 머지않아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거예요. 시골 사람이 첫 번째 문지기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도달했음이 명명백백해지는 순간, 문지기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요. 사막을 영원히 떠도는 자살과도 같은 방랑에 대해. 그의 목을 물어뜯는 광폭한 햇빛과 그의 피를 들이마시는 전갈들에 대해. 열병 걸린 붉은 눈으로 문지기는 계속 울어요. 그는 결국 남의 법의 표면에서 죽게 될 것임을 직감해요. 그는 시골 사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그의 법 안쪽으로 안내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것임을 깨달아요. 시골 사람이 그의 문을 넘어선 순간, 그에게는 어떠한 의무도 직분도 주어져있지 않음을, 그는 빌어먹을 자유임을 깨달아요. 그는 영원히 실직하였고 그의 서 있음은, 그의 존재는 이 문에서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함을. 우화 속 문지기는 이런 사실을 명시적으로는 모르더라도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직감하고 있어요. 시골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가 문을 막고 있었던 것은 시골 사람이 그의 문을 넘어가는 순간 그는 죽은 채로 살아 있는 것과, 유령과 다름없게 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시골 변호사는 의아한 듯 물어요. 어디서 알게 되었습니까? 그는 삼백스물네 번째 눈을 세면서 그가, 혹은 비서가 미쳐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해요.

비서는 쉭쉭거리며 웃으면서 말해요. 당신이 운 좋게 문지기가 되면, 당신의 시골 사람을 절대 문 안쪽으로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법과 관련된 이들은 모두 아는 규칙이에요. 당신이 변호사 시험을 볼 거라면, 그리고 합격할 작정이라면 그걸 명심해야 해요.

솔직히 말하면 난, 시골 사람은 서글프게 말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서는 낙담한 듯 웃으면서 시골 사람에게 다가가요. 거미는 시골 남자의 거친 입술을 물어뜯고 그 속에 비밀스러운 액체를 주입해요. 시골 사람은 역겹고도 아름다운 환각을 보고, 비서는 문지기들이 사실 알고 있다고 말해요.

시골 사람은 절정의 미칠 듯한 욱신거림에 헐떡이면서 물어요. 무얼 알고 있단 말인가요?

거미는 나비의 날개처럼 벌어진 입으로 대답해요. 시골 사람이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들이 문을 막고 서 있는 일이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것, 시골 사람은 결국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설령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시골 사람의 최후의 순간에, 문의 주인과 함께 깨닫게 되리라는 것, 문들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고 시골 사람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직분은 망상과도 같았다는 것을.

시골 변호사는 눈물을 흘리며 물어요. 당신은 어느 쪽에 속하죠? 문지기인가요, 아니면 문 앞에서 빌어먹을 세월을 허비하는 가련한 시골 사람인가요?

거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해요. 문지기 역시 문 앞에서 빌어먹을 세월을 허비하는 가련한 자에요.

거미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어요. 난 문지기도 시골 사람도 아니에요. 나는 집행인이에요.

시골 변호사는 섬뜩한 공포를 느끼며 몸을 떨지만 거미의 체내에 삽입한 성기를 빼내지는 않아요.

시골 변호사는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물어요. 법 안쪽으로 들어갔다면, 시골 사람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거미는 대답해요. 법 안쪽에서, 세 번째 문지기와 네 번째 문지기, 수십 명의 문지기들을 넘어서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면 시골 사람은 텅 빈 구멍을 보았을 거예요. 숲 속에 숨겨진 향기로운 동굴처럼 깊고 검은 구멍을. 그는 구멍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을 거예요. 그걸 보았다면, 태연하게 문들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그의 눈은 동굴처럼 검고 아득하게 함몰되었을 것이고 문지기들은 눈 먼 남자의 향기롭고 음울한 걸음걸이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어야 했을 거예요. 눈 먼 남자는 사막을 방랑했을 것이고 그의 운명은 그의 눈처럼 텅 빈 구멍과도 같았을 거예요.

우리는, 창백한 소녀는 울먹이며 속삭였다. 그 구멍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 구멍에 빠져 죽고 싶은 거예요. 문 밖에서 목 말라 죽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첫 번째 문지기를 벗어나는 시골 사람, 혹은 시골 사람을 벗어나는 첫 번째 문지기가 되고 싶은 거예요.

시골 변호사는 죽었어요! 목이 긴 소녀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거미는 시골 변호사를 물어뜯었고 그의 심장을 으깨 먹었어요. 거미는 시골 변호사의 알들을 낳았고 그 알들은 자라서 거미를 먹었어요.

혹은, 파란 눈의 소녀는 말했다. 거미는 시골 변호사를 죽이지 않았어요. 시골 변호사는 도시에서 법을 다시 공부했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는 법의 외곽선을 지키는 문지기로 평생을 살았어요. 하지만 그는 그 법이 자신의 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는 거미 여자의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었어요. 그는 자신의 법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소송인들의 노력을 집요하게 저지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변호사로, 최외곽의 문지기로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그가 봉사하고 지키고 있는 법이 자신의 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법은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에 홀로 방치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어요. 그는 그의 법의 독특한 기하학을 영원히 발견하지 못한 채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의 법의 역학과 그의 법의 도형과 그의 법의 텅 빔을, 그는 끝내 찾아나설 수 없었어요.

그는 간혹 거미 비서를 재판정에서 만났고 재판이 끝나고 나면 그녀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법의 우화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슬퍼 보였어요. 어쩌면 그녀는 시골 변호사가 그의 법을 찾아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방랑을 하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몰라요.

우리는, 붉은 입술의 소녀가 소리쳤다. 문을 찾아 나설 거예요. 우리를 위한 오디션장을 발견할 거예요. 별의 내부가 텅 비어 있음을 확인할 거예요. 우리는 우리를 위해 마련된 심연에 떨어져 죽고 싶어요. 소녀들은 흐느꼈다.

여자는 약속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살인자야.

소녀들은 울면서 말했다. 알아요.

너희들은 살인자와 공모하고 있어.

그것도 알아요. 하지만, 소녀들은 말했다. 그런 건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당신은 여아 살인자로 성공한 배우고 우리는 당신이 가진 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요.

남자아이는 여자의 왼손을 은근하게 잡으며 집으로 가자고 속삭였다.

그 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있던 소녀는 소리를 지르며 안된다고 외쳤다. 우리와 약속하기 전에는 어디에도 못 가요.

여자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소녀들을 노려보았다. 난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소녀들은 울며 애원했다.

좋아요.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있어요. 소녀들은 여자를 향해 점점 가까이 접근하며 속삭였다. 우리가 달콤하고 비밀스러운 동굴에서 홀로 죽게 되리라는 말을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어요. 검푸른 숲의 동굴에는 오래 전부터 비가 흘러들고 있어요. 동굴은 넘실거리는 와인잔처럼 차올랐고 우리는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려요. 우리가 당신에게 죽게 되리라는 말을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말을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게요.

목이 긴 소녀는 젖은 얼굴로 속삭였다. 당신이 우리를 사막에 묻고 사라지게 되리라는 말을, 우리는 넘실거리는 검은 숲의 동굴 속에서 당신을 기다리게 되리라는 말을, 우리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어요.

여자는 씹할, 씹할, 중얼거렸다. 난 너희를 죽인 적이 없어.

소녀들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아직 우리를 죽인 적이 없어요.

너흰 내가 너희를 죽인 살인자라도 되는 양 굴고 있어.

소녀들은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당신이 결국 우리를 죽이게 되리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어요. 당신은 우리를 우리의 문 앞까지 데려다줄 것이고 우리는 검은 물이 차오른 동굴 속에 빠져 죽고 말 거예요.

동굴은, 푸른 눈의 소녀가 말을 이었다.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요.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 한없이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에는 물을 삼키고 폐에 물이 차올라 죽어가게 될 거예요.

가라앉으면서, 검은 머리의 소녀가 속삭였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깊은 곳을 보게 될 거예요. 숲이 감추고 있던 은밀한 도형들을 마주하게 될 거예요. 우리는 행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최고의 순간이 될 거예요.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정말, 소녀들은 입을 모아 속삭였다. 당신 말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여자는 물방울처럼 닮은 소녀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를 방송국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어.

소녀들은 어린아이처럼 울어젖혔다.

여자는 소녀들로부터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당장 소녀들을 방송국까지 데리고 가려고 일어났다. 남자아이는 이제 집에 갈 거냐고 반색하며 물었다. 여자는 말 없이 소녀들을 이끌고 교도소의 계단을 내려갔다. 층계를 내려가며 그들은 비로소 꼭대기층의 공기가 얼마나 답답하고 역겨웠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교도소 건물을 빠져나가면서, 여자는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걸어서 방송국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걸어서 길을 찾아갈 자신도 없었다. 그녀가 외출할 때는 언제나 쥐 경찰이 보디가드나 운전수처럼 그녀와 대동했기 때문에 그녀는 사실 방송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송국에 가기 원할 때 언제든 그곳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성공한, 훌륭하거나 존중받지는 않더라도 주목받는 여배우였으므로.

남자아이는 여자의 왼손을 당기면서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신호하면 뛰는 거야, 아냐.

남자아이는 소녀들을 빨리 떼어내 버리고 싶은 듯 초조해 보였다. 하지만 여자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여자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소녀들은 끔찍하게 즐거워 보였다. 교도소 입구에서 그녀는 뱀 간수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교도소 내부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교도소를 나가 무작정 걸었다. 큰 길이 보일 때까지 걸을 작정이었다. 남자아이는 절망적으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자와 소녀들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다. 남자아이가 여자를 끌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하면 소녀들은 살인이라도 감행할 눈치였다. 비밀스러운 도형들을 은폐하는 암녹색 구름이 점액질의 끈적한 흔적을 하늘의 유리천구에 남기며 질주하고 있었다. 도형들은 구름의 등에 숨겨진 채 함께 움직였다. 여자는 멀미 때문에 구역질이 치밀어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길가에서, 이토록 많은 눈들 앞에서 구토를 해대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남자아이는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소녀들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소녀들을 방송국 입구에 데려다 놓고 떠나가는 것이 훨씬 빠를 터였다. 법의 입구가 개별적인 것이라면 여자가 아는 방송국이 소녀들의 입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여자는 이미 입구의 상당한 내부까지 들어섰고 그곳은 결코 다른 누군가를 받아줄 수 없을 것이므로.

새들이 목을 매단 것처럼 보이는 울적한 나무들을 지나쳐 그들은 큰 길가에 도달했다. 택시들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텅 빈 도로를, 오직 속도만이 남은 검은 길을 주파하고 있었다. 소녀들은 도로를 향해 하얀 팔을 뻗어 손을 흔들었고 곧 한 대의 차량이 그들 앞에 멈추었지만 분명히 택시는 아니었다. 트럭이었다.

운전수는 중년의 암컷 오소리였는데 소녀들을 내려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소녀들은 물고기처럼 입술들을 뻐끔거리며 오소리의 자그마한 귀를 향해 얼굴들을 붙이고 방송국이요, 하고 속삭였다.

오소리는 소녀들을 귀여워하며 데려다줄까? 하고 물었다.

소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트럭의 짐칸에 타게 되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와 함께 있고 싶어했지만 소녀들이 여자에게 운전수 옆자리를 강권하는 탓에 남자아이는 여자의 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사양않고 운전수의 옆자리에 올라섰다.

여자의 손을 놓으며, 남자아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속삭였다. 우리는 너를 기다리고 있어, 아냐. 우리는 너를 결코 잊지 않았어.

여자는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절망적인 피로를 느꼈다. 가슴이 무거웠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현기증과 멀미가 그녀 주위를 어지러이 돌고 있었다.

암오소리는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어디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냐고 주저하듯 물었다.

여자는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눈만 돌려 암오소리를 바라보았다.

암오소리는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신경 쓰지 말아요, 하고 말했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고 그녀의 목구멍을 열어젖히며 올라오는 신물을 느꼈다. 누군가 그녀의 내부에서 심장을 절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암오소리는 여자가 눈을 감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오랜 외로움에 습관처럼 말을 중얼거리는 운전수들 특유의 체념한 어투로. 오로지 말을 하는 것만이 말의 목적이라는 듯이, 암오소리는 여자에게 그다지 질문도 던지지 않고 계속 말을 해나갔다.

면허를 딴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오소리들은 개체수가 많지 않아서 선거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이런저런 권리들을 요구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우리를 시민의 목록에 추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죠. 우리는 지나치게 소수였고 나날이 사라져가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살아 있었고 불법 체류자, 혹은 망명자의 신분으로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했어요. 하지만 학교엔 갔어요. 담임 선생님은 나를 위해 출석부에 내 이름을 추가해 주셨죠. 물론 그 이름은 다른 이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과 같은 이름은 아니었어요. 서류상의 이름, 실제로 시민권을 가지고 학교에 올 나이인 다른 아이의 이름이었죠. 선생님은 숙제나 시험지를 제출할 때 내 이름이 아닌 출석부상의 이름을 적도록 했어요. 그 이름은 너무 어려웠어요. 메르테유 발몽 콜키스. 난 그 이름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죠. 철자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어요.

여자는 절망적인 멀미에 시달리며 소리쳤다. 지금 날 놀려요?

암오소리는 무고한 검은 눈으로 여자를 향해 슬쩍 눈길을 던지며 아니라고 말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군요. 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이름 말이에요. 여자는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메르테유 발몽 콜키스. 그런 이상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날 알고 있군요.

암오소리는 아니라고, 당신이 낯 익은 건 사실이지만 메르테유 발몽 콜키스라는 이름은 진짜이며 그녀는 학교를 다니는 십수 년 동안 같은 이름을 수천, 수만 번 적어 제출해야 했다고 말했다. 암오소리는 화가 난 듯한 기색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이름은 어렵긴 하지만 이상하지는 않아요. 어떤 이름도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이름들은 모두 이상하고 이상하지 않다면 이름이 아니겠죠.

여자는 다시 눈을 감은 채로 부유하는 흰 점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유령은 옷을 벗고 있어,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느리게 옷을 벗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유령이 옷을 벗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 관중들은 유령이 껍질까지 다 벗어낸 뒤에야 유령을 돌아볼 거야. 어쩌면 유령의 뼈와 내장이 모두 뜯겨져나간 뒤에, 유령을 유령으로 만드는 최소한의 껍질마저도 사라진 뒤에야 유령이 있는 자리를 향해 눈길을 던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도 더 이상 유령을 볼 수 없을 거야. 벌거벗은 유령을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거야. 심지어는 유령 자신조차도. 껍질의 바깥에 남겨진 유령은 내부의 유령을 잊어버리고 말 거야. 유령은 유령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헤매야 할 거야. 그리고 유령은, 결국 포기하고 말 거야. 포기하지 않으면 유령은 영원히 죽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사라질 수는 없어.

이곳은, 여자는 중얼거렸다. 그다지 막히지 않는군요.

오소리는 여자의 중얼거림이 화해의 제스쳐라도 되는 듯 과장된 어투로 소리쳤다. 막힌다고요? 이 길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어요!

여자는 구역질을 느끼며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읊조리듯 말했다. 도로는 언제나 막혀요. 난 한밤 내내 50m도 이동하지 않고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한 적도 있어요. 심지어는 며칠 동안 빗물을 받아 마시고 도로에 정차한 같은 처지의 차량 탑승자들에게 음식을 구매해 먹은 적도 있죠. 여자는 마치 그 모든 경험이 그녀 자신의 것인 듯 이야기했다.

암오소리는 웃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마치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단편 같다고 말했다. 여자는 그런 단편은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겪은 것은 사실이라고 도로는 끔찍할 정도로 막힌다고 말했다. 암오소리는 여전히 여자의 말이 잘 지어낸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암오소리는 남부고속도로라는 꼬르따사르의 단편을 무척 좋아했다고, 특히 간이 응급 차량 안에서 죽어가는 여자 노인을 지키는 수녀들과 여자들이 나오는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고 말했다.

여자 노인은 힘든 상황에서도 잘 버텼어요. 암오소리는 꿈꾸는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결국 죽었나요?

여자의 물음에 암오소리는 그렇다고, 여자 노인은 결국 죽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의 내부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었을 거예요. 이 이야기는 판타지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여자는 도로에서 낯선 짐승들과 차량들에 둘러싸여 죽는 것과 도로고 아닌 곳에서 죽는 것은 무척 다르다고, 모든 것이 차라리 성스러운 역설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좋아하나 보군요. 여자는 말했고 암오소리는 그렇다고 힘없이 대답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암오소리는 무언가를 고심하듯 유리창 밖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소설이 아니에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일 같은 어지러움이 다시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난 오래 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내가 선생님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 스케치를 내밀었을 때 선생님은 오랫동안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계셨죠. 그리고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어요. 난 내 그림이 그렇게 엉망이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그렇다고, 너는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한 손가락과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어요. 선생님은 다른 방식의 그리기 방법도 가능하다며 추상 미술이나 조형 작품들을 소개해 줬어요. 하지만 나는 울면서 그게 아니라고 말했어요. 나는 소묘를 하고 싶다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내 시력은 끔찍하게 나빴죠. 조상들은 굴 속이나 바위틈 같은 곳에서 숨어 살았기 때문에 수천 수만 가지의 색채들을 구분하고 먼 곳의 사물들을 애써 관찰할 필요가 없었어요. 조상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다녔고 그들이 볼 수 없는 멀고 흐릿한 곳에서부터 천적이 급습하면 그들은 죽은 척을 하면서 연명하곤 했어요. 조상들은 홀로와 색채들과 꿈을 견뎌내기 적합한 어떠한 특징도 내게 물려주지 않았어요. 난 철저히 혼자였어요. 문서에 눈을 들이대고 읽으면 글자들을 구분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니까 나는 문맹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죠.

지금은 많이 치료되었나 보군요. 여자의 말에 암오소리는 의아한 듯 물었다.

뭐가요?

눈 말이에요.

암오소리는 아니라고, 시력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으며 그녀는 결국 전문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 여자는 소리쳤다. 운전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운전은, 암오소리는 대답했다. 어렵지 않아요. 그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표지판은요? 신호등은?

암오소리는 의아하다는 듯 대꾸했다. 난 지금까지 운전을 하면서 한 번도 그런 것들에 방해받아 본 적이 없어요.

여자는 포기한 채 눈을 감았다. 절망적인 현기증 때문에 여자는 암오소리와 말다툼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들은 사고를 당해 늪에 처박혀 죽거나 죽지 않고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다. 암오소리는 그들을 모두 살해하고 굴 속에 파묻거나 그들을 방송국에 얌전히 내려주고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다.

상상은 악몽 속을 질주하는 것처럼 무의미하며 고통스럽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생각으로 글을 쓰는 건 수면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과 같아. 꿈이 집요하게 중얼거리는 광적인 숫자들을 기억하려 애쓰는 일과 같아. 눈을 뜨면 치열하게 기록한 숫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그 숫자들을 주워담으려 애쓰면서 나는 세상이 온통 음험한 숫자들로 뒤덮여 있음을 아는 거지. 하늘과 피부와 눈과 벽을 온통 뒤덮은 붉은 개미들처럼, 혹은 검은 꽃무늬처럼. 점들, 점들, 점들, 0과 1과, 간혹은 2, 혹은 다시 0으로 영원히 돌아가고 있는 숫자들. 사실 0과 1은 없어. 0과 1은 결코 0이나 1이 아닌 숫자들을 위장하는 광학적인 장치들일 뿐이야. 빛나거나 빛나지 않거나, 연결되거나 연결되지 않거나, 작동하거나 작동하지 않거나, 하지만 0과 1은 가장 저열한 은폐술에 불과해. 숫자들, 숫자들, 숫자들. 그리고 0과 1로 은폐된 다른 숫자들조차도 사실은 이중의 은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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