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16

촬영이 끝났을 때, 여자는 처음부터 모든 카메라들이 꺼져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부터. 유령 같은 이미지들 유령같은 배우들 유령 같은 방송들. 여자와 스텝들과 우주복을 입은 배우들은 미동도 없이 마네킹처럼 정지해 있었다. 그들은 촬영의 끝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촬영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여전히 무대 주위를 돌고 있는 소녀들을 하나씩 불러세웠다. 여자가 소녀들에게 촬영이 끝났다고 이야기하자 소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세트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소녀들은 유령처럼 창백하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스텝들에게 방송이 언제 송출되느냐고 그녀들은 언제 다시 방송국에 오면 되느냐고 물었다. 소녀들은 언제든 촬영에 임할 수 있다고, 그녀들은 심지어 방송국에서 잠을 잘 준비도 되어 있다고 열렬히 소리쳤다.

하지만 소녀들에게 명확한 대답을 들려주는 스텝들은 없었다. 스텝들은 소녀들의 말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불명확하고 모호한 고갯짓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소녀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아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소녀들 사이에 섞여들었거나 화장실을 가려다 길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여자가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상담사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자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여자는 사실이 아닌 것이 거짓은 아니라고, 심지어는 사실이 거짓일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상담사는 야릇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하지만 지금은 진실이나 거짓에 대해 생각할 때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건 신경쓰지 마. 그저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만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편해질 거야. 상담사는 여자에게 텔레비전을 자주 보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종종 TV를 틀어 놓지만 그렇게 신경써서 보는 편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는, 상담사가 말했다. 유명인이야. 그렇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아직 재판 중이야. 소송인들은 결코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어. 그러니까 너는 여배우는 아니야.

여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몇 개의 생활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라고 말했다.

상담사는 여자를 위로하듯 여자의 손등 위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너는 너무 긴 꿈을 꿨어. 꿈을 꾸는 건 피곤한 일이란다. 다른 꿈을 꾸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이기도 하지.

꿈은 병적인가요?

여자의 물음에 상담사는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말했다. 하룻밤에 하룻밤을 넘어서는 꿈을 꾸는 건 병적이란다. 다른 경우라면, 그러니까 최악의 고통을 겪고 죽어가는 꿈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간이 잠을 자는 시간에 정확히 상응한다면 그건 독을 마시는 것처럼 피로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병적이지는 않아. 하지만 네 경우처럼 하룻밤에 그 시간을 초과하는 꿈을 꾸는 건 충분히 병적이란다. 네겐 휴식이 필요해. 꿈을 꾸지 않는 휴식.

당신은, 여자는 상담사의 붉고 엷은 입술을 보며 말했다. 마치 당신이 꿈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마치 당신이 꿈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상담사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는 혼동하고 있어.

뭘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재판의 내부에 있는 것과 재판의 바깥을, 무대의 내부와 무대 바깥을, TV 내부와 바깥의 세계를.

혼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요? 여자는 의아한 듯 물었고 상담사는 웃으면서 물론 대부분의 사람, 혹은 짐승들은 혼동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주 잘 훈련받은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덜 혼동하고 심지어는 예외들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예외들이요?

그래, 예외들. 상담사는 여자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여자는 꿈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고 대답했다. 힘든 건, 여자는 주저하듯 말했다. 오래 사는 거예요. 꿈의 경계가 흐려질 만큼, 꿈을 꾸기 전과 꿈 이후를 혼동할 만큼.

상담사는 여자의 증상이 전형적이며 여자뿐 아니라 많은 TV 출연자들이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당신은, 여자는 물었다. 왜 구하지 않았나요?

상담사는 짐승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혼자였고 모두 갇혀 있었으니까.

여자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니체가 도달했지만 다른 이들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어요. 니체가 도달하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은 도달한 곳이 있어요. 모두가 마찬가지예요.

난, 여자는 헐떡이며 속삭였다. 출혈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알아요. 그는 정신병원에 있었어요. 그는 식빵 써는 나이프로 손바닥을 그었고 믿을 수 없이 붉은 피로 침대 시트에 자기 얼굴을 그렸어요. 그는 침대 시트에서 그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피의 꿈을 꾸었어요. 피는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냈어요. 피는 썩어가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간호사들은 그의 시트를 정리했고 병원 청소부들은 그의 침대 시트를 빨았어요. 피는 깨끗이 지워졌고 그는 병실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했어요. 하나의 그림에는 하나의 자살이 있어요. 모든 그림은 자살이에요. 뜨거운, 울컥거리면서 출혈하는 악몽들이 있어요. 가장 무서운 건 언젠가 악몽을 잊어버리게 되리라는 거예요. 악몽들의 피가 멎어버리고 나는 악취조차 없는 텅 빈 방에서 웃고 있으리라는 거예요.

그런 일은, 상담사는 다정하게 말했다. 없을 거란다.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사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악몽은 계속될 거란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재판 중에 악몽에서 완전히 깨어난 사람과 짐승들은 없단다.

당신은, 여자는 흐느꼈다. 확신하지 못하는군요. 꿈이 끝날 때까지 출혈하고 있을 수 있을까요?

상담사는 여자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여자는 군복을 입은 채로 투명한 벽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상담사는 그들이 2차 세계대전 중에 실종된 영국 해병들일 거라고 답해 주었다.

여자는 그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상담사는 불가능하다고,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괴담에 불과하단다. 그 자들이, 심지어는 전쟁이 실재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 이들이 많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상담사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주 밖에서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행성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여자는 상담사가 미쳐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그녀들이 모두 미쳐버렸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말했다. 말이 되지 않는, 의미도 결론도 없는 말들. 미치지 않은 사람들은 그녀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친 사람들은 그녀들이 아무것도 아닌 말을 하고 싶어서 미쳐버렸다는 걸 안다.

여자는 피곤하다고 속삭였고 상담사는 전화기를 들었다. 노크소리가 들렸고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은 쥐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자는 그의 팔을 붙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상담사는 꿈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꿈은 조악한 예언 혹은 기억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여자는 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고 경찰차의 딱딱한 시트에 머리를 기대었다. 수갑은 달처럼 은근한 은빛으로 반짝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직도 연극을 하고 있느냐고, 그 빌어먹을 독백을 아직도 중얼거리느냐고 물었다.

쥐는 그렇다고, 심지어 가끔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너무나 완벽한 연기를 하기도 한다고 대답했다.

완벽한 연기요? 여자는 경멸하듯 비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쥐 경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미러로 그의 검은 눈이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완벽한 연기, 난 그 어느 배우보다도 완벽한 연기를 하고 그 직후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음을, 유령조차도 나를 외면하고 있었음을 깨달아. 그러니까 내 연기는 가장 완벽한 것이지만 사실은 아니지.

여자는 그가 미쳤음을 아느냐고 물었다.

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쥐는 나지막하게 찍찍거렸다.

여자는 그렇다고, 그가 맞다고.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며 여자아이를 혹은 소녀들을 살해한 것은 그녀라고 말했다.

범죄적인 소음들, 전율스러운 착오, 내장에서 들끓는 화상자국들, 영원히 같은 문장을 반복하지않는 것은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다. 같은 문장만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의 시어로 하나의 시구로 하나의 형용사로 하나의 어휘로 모든 허공을 채우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여자는 생각했다. 우리는 미쳐가고 있어. 영원히 다른 방향으로. 우연치 않게 합류하여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얼굴가죽 위로 포개진 석양의 신비스러운 이미지만을 응시하면서 웃겠지. 마치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그게 빌어먹을 기적이 아닌 것처럼.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은 것처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처럼. 찢겨지고 있음을, 튿어지고 문드러져서 피를 흘리고 있음을, 염증이 번져가고 있음을 잊지 않은 것처럼. 진실의 내장을 직접 찢어 확인하지 않은 것처럼. 진실의 속에서 출혈하는 거짓의 붉고 축축한 내장을 확인하지 않은 것처럼.

예술은 자살이다. 삶은 자살이다. 생존은 자살이다. 삶은, 심지어 다른 어떠한 은유보다도 즉각적인 형태의 자살이다. 새처럼 활공하는 파리들의 검은 점이 희미한 잿빛으로 문드러진 하늘 위를 떠돌고 있었다.

쥐는 앞 유리창을 응시하며 말했다. 식물들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의식조차 없이 마비된 육체로 시간을 계산할 언어조차 없이 어떻게 그토록 살아 있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여자는 식물들은 아마 자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명한 곡예사를 둘러싸고 있는 군중들. 원형의 내부에서 걷어차이는 어린 임산부. 녹아내리는 얼굴들. 지방층과 근육의 누르스름한 살점. 연출된 웃음소리와 경쾌한 배경음.

여자는 쥐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쥐는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웃었다.

쥐는 웃지 않았다. 쥐는 그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여자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렇지만 쥐의 말이 질 낮은 농담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신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쥐는 울고 있었다. 쥐는 오이디푸스에 대해 말했다. 전형이 되는 단 한 명의 오이디푸스와 그와 같은 삶을 반복하는 수억 명의 오이디푸스들에 대해. 오이디푸스들의 알려지지 않은 방랑에 대해, 사막에 대해, 멀어버린 눈들에 대해.

여자는 오이디푸스가 되고 싶냐고 물었고 쥐는 은근하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여자는 속삭였다. 나를 죽여요.

쥐는 서글프게 고개를 저었다.

나를 강간하고 나를 죽여요.

쥐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왜요? 여자는 백미러에 비추어진 검은 눈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쥐는 그녀를 죽이더라도 리 하비 오스월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새의 비밀스러운 푸른 깃을 숨기고 있는 수억 마리의 비둘기들, 보물을 숨기고 있는 땅과 알려지지 않은 은하를 숨기고 있는 검고 짙은 대기.

여자는 사실 남자가 그들이 함께했던 날 이후로 한 번도 연기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도 여자가 알아차릴 방법은 없었다. 증거가 남지 않는 예술, 증거가 남지 않는 연극과 증거가 남지 않는 울음들, 여자는 어쩌면, 남자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리라고 짐작했다. 그들은 너무도 오래 숨겨져 있었고 깊은 암반에서 태어나 홀로 썩어버린 유충의 생애를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땅조차도 유충의 삶을 잊는다.

여자는 아스테카의 희생의식에 대해 말했다. 마체테를 손에 들고 숙련된 도살자처럼 제물들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는 사제에 대해서. 사제의 이마에서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땀이 흘러내리고 희생자들은 멍하니 뜬 눈으로 사제의 젖은 얼굴을 올려다본다. 사제의 손은 피투성이이다. 그의 손과 칼날 끝으로 수천 마리의 파리떼가 엉겨붙는다. 그러나 죽음의 대기자들은 일렬로 그의 앞에 줄 지어 서 있고 사제에게는 파리떼를 쫓아내거나 손을 씻을 만한 여력이 없다.

태양이 가장 어두운 날 그는 수천 개의 심장들을 꺼낸다. 피에 검게 그을른 손이 움켜쥔 심장은 맥동하고 있다. 끔찍하게 뛰고 있다. 심장을 경유하는 두터운 혈관들이 어지럽게 늘어진 배선 위에서 사제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다. 사제의 그림자가 텅 빈 심장의 위로 어른거린다. 심장을 빼앗긴 희생자는 심장 없이도 조금 더 살아있다. 그는 제단 아래 아득한 계단 너머로 굴러떨어지고 사제는 새로운 희생자의 심장을 꺼낸다. 줄의 먼 뒤편에서부터 심장을 잃을 자들은, 그러나 아직 심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심장을, 심장의 부재와 심장의 출현을. 무엇보다도 심장의 출현을.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을 보고 처음으로 피투성이 심장의 달콤한 악취를 맡는다.

여자는 희생자들의 줄이 무척 빨리 준다고 이야기했다. 나무를 베어내며 땀을 흘리는 벌거벗은 목수들. 토막난 나무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나무들. 여자는 TV 보는 일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여자는 울고 있었다. 29번 채널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을 그녀는 멍하게 보고 있다고. 돼지들은 아직도 늑대를 기다리고 있고 늑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고. 약속은 잊혀지고 천사들은 심장이 꺼내어진 채 아스테카의 제단 너머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고.

사제의 손은 굳은살과 피와 땀이 엉겨 절망적으로 더러워요. 여자는 말했다. 사제는 도축자와 다를 바가 없어요. 처음으로 심장을 꺼내던 순간, 사제의 손은 마체테의 칼날에 베어 피를 뿜어내었고 그의 아래 누워 있던 희생자는 사제의 피를 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희생자는 사제에게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사제는 울면서 아프다고 말했고 희생자는 그가 피투성이라고 소리쳤어요. 피투성이에요. 당신 피투성이에요.

뽑혀나간 심장은 태양을 위해 맥동하는 동안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심장의 내부에서 무력하게 쏟겨나가는 피들이 유리로 된 피라미드의 제단을 적시고 그 순간 태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데, 사실 태양은 최초의 피 이전부터 빛나고 있었죠. 태양은 생명 없이도 빛나고 있었으며 생명들이 모두 사그라든 뒤에도 계속 빛날 테죠. 이곳의 태양이 숨 멎는다 해도 다른 곳의 태양들은 계속해서 빛나고 있을 테죠. 밤하늘을 빼곡이 채운 흰 구더기들 전부가 태양이라는 사실을 아스테카의 제사장은 알지 못했어요. 심장과 피투성이 손과 아무런 관련 없이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어요. 하지만 심장을 꺼내고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심장을 꺼내야 했던 거예요. 피에 젖어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피투성이이지 않으면 하나의 낮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거예요.

쥐는 그래서 여자아이를 죽인 거냐고 물었다.

여자는 숨죽여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건 아스테카와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도로는 여느 때처럼 끔찍하게 정체되어 있었다. 남자는 아마 오늘도 이곳에서 밤을 지새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여자는 이뿌리를 잡아당기는 날카로운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의아한 듯, 네가 괜찮든 괜찮지 않든 이곳에서 밤을 지새울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눈을 감았고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암오소리는 텅 빈 도로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여자는 암오소리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암오소리는 꿈을 꾸었느냐고 물었다. 여자가 잠꼬대를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이상한 말을 했어요. 암오소리는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 개의 낮과 밤에 대해서요.

여자는 세 개의 태양을 가진 행성에 대해 말했고 암오소리는 아니라고, 행성이 세 개의 태양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세 개의 태양이 하나의 행성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이곳이 그렇느냐고 물었고 암오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동생들은, 암오소리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잠들었어요. 지친 것 같아 보이더군요.

여자는 소녀들이 울었느냐고 물었고 암오소리는 그렇다고, 소녀들은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하지만 가장 많이 운 것은 남자아이였다고 말했다. 여자는 그녀도 자면서 울었느냐고 물었고 암오소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알려지지 않은 궤도들과 주기에 의해 서서히 해체되어가는 밤.

여자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암오소리는 거의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로 외곽에 위치한 낡은 병원이었다. 소녀들은 말없이 트럭에서 내렸다. 남자아이는 여자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나섰다. 여자는 소녀들이 방송국에 머물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어쩌면 그들이 아직 방송국에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병원 앞은 커다란 죽은 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늘어진 풀들이 여자의 벌거벗은 종아리를 쓸어넘겼다.

암오소리는 그녀의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어머니의 친구인 다른 간호사가 그녀가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의 외벽은 거대한 덤불과 풀 그림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누런빛의 외벽 곳곳에는 검고 흉측한 이끼들도 피어 있었다. 군데군데 이가 나간 벽 틈으로 달빛이 고여들었다.

목이 긴 소녀는 이곳이 악몽이나 시 같다고 중얼거렸다. 다른 소녀들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남자아이는 불안스럽게 여자의 왼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언제쯤 돌아갈 것이냐고 속삭였다. 마치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재판이 열리지 않을 것처럼.

여자는 문득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원하는 어떠한 재판은 집요함 없이는 시작조차 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천 장의 탄원서와 청원서, 항소와 끈질긴 방문 없이는 무엇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 장의 탄원서와 청원서는 모두 반려될 것이고 끈질긴 방문들은 어떠한 접촉이나 마주침, 기적과도 같은 우연하게 마주쳐 물질화되지 못한 채 사그라들고 말 것이다. 소송인이 체념과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잊고 잠들지 않는 한 어떠한 재판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기적은 기다리지 않는 자들에게만 찾아오는 법이므로. 늑대를 기다리는 동안 돼지는 영원히 늑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며 신을 기다리는 자에게 신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은 결코 죽을 수 없을 것이며 삶을 기다리는 자들은 삶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육체를 늙게 만드는 산소, 부패와 죽음을 가져오는 산소,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산소들을 모조리 녹여버릴 수 없을 것이다.

병원의 입구는 열려 있었다. 그들은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여자는 이곳에 아직 환자들이 있느냐고 물었고 암오소리는 그렇다고, 의사들은 모두 떠났으며 간호사들은 몇 명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환자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직 이곳에 있다고 말했다. 몇 명밖에 안 되는 간호사들이 그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암오소리는 환자들은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들은 대부분 죽은 상태였던 것이다.

간호사들은, 하고 암오소리는 복도를 지나치며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꼭 필요한 일들만 선별적으로 하죠.

그녀의 목소리는 개미 굴처럼 열려 있는 환자들의 방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스며들지 않은 목소리는 다시 반향되어 메아리처럼 복도를 울렸다. 열린 방문에서는 끔찍한 냉기가 새어 나왔다.

간호사들은 간병인이 아니므로 환자들을 위해 다정하게 말을 걸거나 그들을 위해 애도할 필요가 없어요. 욕창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환자들의 몸을 매 시간마다 뒤집어 놓을 필요도 없죠. 환자들이 지나치게 부패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방 안의 냉기를 유지하고 환자 주변에 들끓는 벌레들을 잡는 일이 간호사들의 주업무예요.

그들은 복도 끝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비상계단은 어둡고 서글펐다. 소녀들은 멀미에 시달리듯 비틀거리며 힘겹게 계단을 걸었다. 남자아이는 여전히 여자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여자는 간호사들이 몇 명이나 있느냐고 물었고 암오소리는 다섯, 혹은 일곱 정도일 거라고 말했다.

여자는 죽은 간호사는 없는지, 간호사들은 어디에서 봉급을 받는지, 에어컨과 관리비는 누가 내는 것인지 물었으나 암오소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암오소리는 아마 간호사들도 그 많고 집요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투덜거렸다.

여자는 어째서 환자들을 시체 안치소로 보내지 않느냐고 물었고 암오소리는 그들이 이곳의 환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시체안치소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다소 두서없이 답했다.

그러니까, 여자는 확인하듯 되물었다. 시체 안치소에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남았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암오소리는 불그죽죽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여기예요. 그녀는 2층의 복도 끝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묵도록 해요.

여자는 암오소리가 포주, 혹은 하숙집 주인처럼 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암오소리에게는 그녀와 소녀들과 남자아이를 책임질 의무가 없었다. 방은 침대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한쪽 벽 구석에 화면이 그리 크지 않은 구식 브라운관 TV 하나만 덩그라니 놓였을 뿐이었다. 방은 끔찍하게 하얬고 미끄러운 재질로 되어 있었다. 암오소리는 방의 한쪽 구석으로 비척대며 걸어가 맨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눈을 감았다. 불이 켜진 상태였음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TV 리모콘을 찾아 헤매다가 포기하고 먼지 쌓인 TV의 전원 버튼을 직접 손가락으로 눌러 켰다. TV가 음소거 되어있었기에 여자는 우선 능숙하게 볼륨 버튼을 찾아 누르고 TV 옆면의 채널 조정 버튼을 눌러 채널들을 확인해 보았다.

녹색의 큼지막한 글씨가 화면 우측 상단에 떠올랐다. 1, 3, 4, 5, 29, 40, 49, 50, 53.

Series Navigation<< 엔젤 스테이크 15엔젤 스테이크 17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