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19

여자는 맞다고, 정말로 TV는 짐승들을 미치게 만든다고. 즉, 신을 망각했던 짐승들을 신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고 말했다. 녹색 바다의 왕은 천체 망원경에 광적인 시간 혹은 망상이 들어 있다고 믿어서 천체 망원경들을 사형에 처했죠. 사형 집행자들은 천체 망원경을 가장 더러운 구둣발로 밟아 모욕하였고 망가진 기계장치를 불태웠어요. 망원경의 잔해에서는 역겨운 기름 냄새가 진동했는데 태우고 남은 재를 왕은 가장 먼 바다에 던져버리도록 명령했죠.

천체 망원경들이 녹색 바다의 인근에서 모두 사라진 뒤 사형 집행자들과 왕은 검은 별들의 꿈을 꾸었어요. 검게 빛나는 별들, 세부를 잃어버린 사물처럼 공포스러운 암시로 번들거리는 별들의 꿈을요. 왕은 검은 별들이 천체 망원경들의 원혼이라고 믿었어요. 사형 집행자들과 왕의 꿈 속에서 검은 별들은 점진적으로 가까이 다가들고 있었죠.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의 렌즈를 가득 메운 별의 형상처럼 별의 기묘한 실루엣은 점차 커지고 있었어요. 그들은 언젠가 검은 별이 시야를 모두 잠식할 만큼 커지면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어요. 꿈이 꿈의 시계를 뒤덮고 나면 꿈은 현실로 비집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왕은 재앙을 막기 위해, 검은 별이 그들의 바다를 집어삼키는 꿈을 꾸기 직전에 독약을 마셨고 이제까지 중 가장 커다란 검은 별과 눈을 마주치게 되었죠.

검은 별은 죽어가는 짐승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어요. 별에는 눈이나 입이라고 할만한 틈이 없었는데도 그렇게 미소 짓고 있었죠. 별을 따라서 왕도 다정하게 웃었어요. 별은 왕을 집어삼켰고 왕은 별의 내장 속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어요. 왕은 별의 내장이 자궁임을 알기 전에 죽었어요.

사형 집행자들은 왕보다 오래 버텼어요. 그들은 별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 별의 검고 뜨거운 육체를 물어뜯었어요. 별을 모두 집어삼키면 그들은 별을 초과하는 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예요. 그러나 별을 아무리 물어뜯어도 별은 사라지지 않았고 점점 가까이 다가드는 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어요. 별에 대한 공포 꿈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들은 오래도록 불면했지만 악몽은 꿈의 모서리마저 으스러뜨리고 그들을 집요하게 쫓아갔어요. 그들은 백 년이 넘도록 살았지만 단 한 순간만을 산 것처럼 느끼며 죽었어요. 그들은 별의 음험하고 기이한 시간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백 년과 한 순간은 그들에게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여자는 내장에 온통 화상을 입은 것처럼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기침했다. 부패해가는, 그러나 아직 싱싱한 심장이 그녀의 상처 밖으로 비져나오고 있었다. 판사는 그녀의 발언을 막지 않았다. 방청객들도 그다지 지루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지나치게 오래 말한 것 같다고 느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재판정에는 시계가 없었고-적어도 여자가 확인할 수 있는 시계는 없었다-여자는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없었으므로, 미래의 불길한 목소리에 사로잡힌 예언자처럼 그녀는 계속 이야기했다.

난 몇 개의 꿈 속에서 지하실에서 죽은 소녀의 눈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난 죽어가는 소녀의 눈으로, 죽음의 몇몇 원인들을 확인했어요. 하지만 그 영상들이 이 재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물론 관련이 아예 없다고도 단정할 수 없죠. 하나의 죽음은 무한한 죽음과 동시적이므로 지하실에서 죽은 소녀는 다른 죽은 소녀들로 무한히 확장되므로, 어떻게 보자면 한 소녀의 죽음이 다른 소녀들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소녀를 반영하고 있던 악마적인 거울들이 소녀의 죽음을 무한히 증폭시켰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이 신성한 재판정에서 문제가 되는 건 거울들의 차가운 평면-혹은 곡면-이 아닌 소녀의 따뜻하고 가느다란 육체를 파고들던 날카로운 칼날 혹은 소녀의 기도를 조이던 뜨거운 손이겠죠. 판사님, 안타깝게도 소녀는 그녀를 죽인 이를 알지 못했어요. 그것은 그녀에게만 금지된 문이었어요. 소녀의 최후는 빛 없는, 눈 먼 불에 타버린 한낮의 꿈과도 같았죠. 왜냐하면 소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소녀의 손이었기 때문이에요. 손은 소녀의 목처럼 희거나 붉거나 노랗거나 검었고 피는 소녀의 내부처럼 붉고 검었기 때문이에요.

방청객들은 깔깔거리며 웃고 박수를 쳤다. 여자는 방청객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호응을 즐기듯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는 여자의 발언이 모순된다고 소리쳤다. 방청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변호사는 끔찍하게 피로해 보였다. 그는 당장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법정에 서 있었다.

검사는 말했다. 당신은 방금 죽어가는 소녀들의 눈으로 죽음의 직접적인 몇몇 원인을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소녀들이 그녀들의 죽음의 원인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말을 뒤집고 있군요.

여자는 검사가 맞다고,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 모순을 고칠 계획도 능력도 없다고 말했다. 늑대는 여자를 노려보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웃었다. 그래요. 검사님, 정말 저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판사는 물고기처럼, 혹은 물방울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검사는 여자가 심장을 꺼내어 진실만 말할 것을 맹세했다고 이야기했다.

여자는 여전히 웃으며, 정말 그렇다고, 하지만 다시 맹세하건대-여자는 심장이 흘러나오는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붉은 피가 엉겨붙은 왼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방청객들은 피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검사는 여자가 교활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소리쳤고 판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물고기 혹은 물방울처럼.

여자는 불현듯, 소녀를 죽인 것은 그 애의 오빠라고 소리쳤으나 여자의 옆자리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떠는 남자아이 이외에는 그 말에 특별히 반응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여자의 발언이 모두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그녀의 주장과는 달리 이 재판과는 무관한-장광설이라고 믿고 있는 듯 했다. 남자아이마저도 여자를 유심히 살펴 보더니 곧 그녀의 말이 일종의 과장되고 무모한 농담이라고 여기는 듯 여자의 피투성이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긴장하지 말라고 다정스럽게 속삭였다. 여자는 라이브 카메라로 촬영된 화면에 비추어진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혹은 정지하고 있는 자신의 망상적인 환영을 바라보았다. 판사는 눈을 뜬 채 잠든 것처럼 혼몽한 눈빛,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재판정을 실제적인 장소라고 믿지도 않는 듯했다. 소년 판사는 세계가 허구적인 과거를 기억한다고 믿는 무수한 광인들의 집합에 불과함을 깨달은 이단적인 철학자처럼 무감각해 보였다.

반대로 여자는 점점 페이지가 늘어나는 책을, 불가능으로 도약하고 있는 순간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처럼 점점 열띤 눈으로 판사를 바라보았다. 298페이지였던 책은 다음 순간 4페이지가 늘어 302페이지가 되어 있었고 다음 순간에는 10페이지가 늘어 312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늘어난 4페이지의 언어를 여자는 첫 순간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었으나 늘어난 10페이지의 언어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뒤 다시 이전의 4페이지를 읽었을 때 여자는 단 하나의 구절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곧 그녀는 처음부터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첫 페이지조차 이해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여자는 천천히 책을 읽으면서 책의 끝 페이지를 확인하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그녀는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했고 다시 12페이지가 늘어나 324페이지가 된 책의 일시적-물론 이후에도 책의 끝 페이지는 무한히 증식되었으므로- 마지막 페이지를 발견했다. 여자는 추가된 12페이지를 읽었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고 또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갔을 때 여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페이지가 늘어날 때마다 정지되어 있는 앞쪽의 언어, 기실 하나의 글자나 여백조차 바뀌지 않은 이미 인쇄된 페이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읽혔다.

여자는 이전의 해석을 기억하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글을 읽어나갈 수 없었고 독서를 포기할 수조차 없었다. 여자는 소녀를 죽인 건 그녀의 오빠라고 다시 말했다.

그녀의 집요한 농담에 법정 안의 짐승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그녀가 몇 번을 반복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완전한 거짓, 불완전한 농담이 되어버렸다. 거울과 거울의 경계에는 무한한 장미들이 있다. 꿈과 꿈의 경계에는 무한한 장미들이 있다. 구멍투성이 레이스 심장. 여자는 구멍들로 짜여진 굵고 붉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비누 인형의 목에 칼을 쑤셔넣는 아이들. 아이들의 손에서는 부드러운 지방질이 녹아내리고 인형의 속에서 은밀하고 다정하게 움직이는 칼날,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인형의 속을 헤집어놓는다.

여자는 이 재판이 본질적으로 결석재판이라고 말했다. 중심이 모든 곳에 분산되어 있는 독특한 도형, 혈관을 둘러싼 구멍투성이 피막, 여자는 악의적인 기쁨으로, 죽은 아이는 이곳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여자는 낙담한 듯 중얼거렸다. 죽은 아이는 이 재판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죠. 적어도 그 애는 피고인이나 검사 혹은 판사 그 어느 쪽도 아니니까요.

아이는 잘려나간 손톱을 비누 인형의 목에 쑤셔넣은 채 긁어내리고 있었다. 천사의 음부처럼 길고 끔찍하게 벌어진 틈. 다정하게 웃고 있는 틈. 여자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확장된 동공을 바라보았다.

초록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불이 났어!

여자는 혼몽한 채로 깨어지는 소음을 들었다.

불이 났어. 씹할년아 나머지 년들은 다 불타 죽었어. 초록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여자는 정말 다 죽었느냐고 물었고 초록은 체념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초록의 앙상한 뼈가 여자를 짓누르고 있었다. 불의 흔적은 없었다. 미칠 듯한 열기도 자욱한 연기도 없었다. 타들어가는 사물의 냄새조차 없었다.

여자는 지금이 몇 시냐고 물었고 초록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정말 그게 궁금하느냐고 물었다.

그래. 아니, 아닐지도 몰라. 여자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불이 났어. 다 타들어가고 있다고 다 뒈졌다고 헤이, 너는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보여? 초록은 울먹이며 빠르게 속살거렸다.

여자는 그렇다고, 정말 자신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갔어?

초록은 다들 불 타 죽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여자는 곧 이층 침대에 누워 잠자고 있는 파랑과 보라의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멀쩡히 숨을 쉬고 몸을 뒤척이며 잠들어 있었다.

파랑은, 하고 여자는 나직하게 읊조리듯 말했다. 쥐들을 죽였다고 했어.

초록은 파랑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여자는 침대 위쪽을 가리켰고 초록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그곳은 비었다고 말했다.

비었어. 거기엔 아무도 없다고. 봐! 초록은 허공에 손을 집어넣고 휘저으며 소리쳤다. 아무것도 없잖아. 빌어먹을 아무것도 없잖아!

여자는 파랑은 그녀가 파랑이라고 부르는 여자이며 쥐들을 살해한 여자이고 미친 여자이며 이곳에서 그녀와 함께 잠드는 여자라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초록은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헐떡이며 속삭였다. 그녀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어.

여자는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초록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그건 파랑은 아니야. 헤이, 그건 개 같은 애새끼들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유치한 이름이야. 그렇게 늙은 여자가 가질 법한 이름은 아니지.

여자는 초록에게 너는 초록이고 다른 아이는 보라라고 말했다.

초록은 몰랐다고 중얼거렸다. 네가 죽은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지 몰랐다고.

여자는 그녀들이 아직 죽지 않았으며 설령 언젠가 죽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초록은 비명을 질러댔다. 기근에 순박한 농민들이 뭘 했는지 알아? 초록은 여자의 어깨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긴 손톱이 여자의 벌거벗은 어깨를 파고들었다. 끔찍하게 커다란 소리가 여자의 귀를 할퀴어댔다. 사람을 잡아먹었어.

그래, 여자는 차분하게 속삭였다. 사람은 간혹 사람을 잡아먹어.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듯이.

초록의 젖은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여자의 얼굴에 초록의 눈물이 떨어져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은 여자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초록은 말했다. 하나의 사람을 먹기 위해 농민들에게는 두 개의 죽음이 필요했어. 그들은 소를 죽였고 희생된 소의 머릿가죽을 희생자의 머리에 씌웠어. 그리고 그들은 소의 얼굴을 한 사람을 죽이고 먹었어. 그들은 소를 죽이듯 사람을 죽였고 사람을 죽이듯 소를 죽였어. 아니, 소를 죽이듯 사람을 죽였고 빌어먹을 인형을 죽이듯 소를 죽였어. 소의 얼굴은 몇 번 재활용되기도 했어. 머릿가죽은 몸에서 몸으로 떠돌았어. 사람의 머리와 얼굴 위로 덧씌워졌어. 농민들은 마침내 소의 머리를 쓴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어.

소의 눈알은 제거되었는가? 예스. 이빨은? 예스. 빌어먹을 귀는? 두개골은? 혀는? 영원히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물은? 혈관들은 모두 예스. 씹할 예스, 모조리 예스. 남은 건 얇고 축축한 얼굴가죽뿐이었지.

역겨운 악취가 진동하는 소의 머릿가죽 안에 감금된 사람의 머리는 비명을 질렀어. 살려달라고 자비심을 가지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씹할 살려달라고 사람의 언어로 울었어. 혹은 사람의 언어로 침묵했어.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겠지. 어떤 희생자는 희생되지 않고 희생된 소의 가죽 안의 끔찍한 악몽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꾸었겠지. 어떤 살해 기도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악몽으로부터 벗어났겠지. 그들은 죽어가면서 소 머리의 안과 밖의 악몽을 꾸었겠지. 그들은 마지막 순간 굶주림을 잊고 잠들었겠지.

하지만 어떤 살해자들은 정말 살인을 저질렀어. 소 머리에 갇혔던 어떤 사람들은 수억 번의 악몽으로부터, 환멸나는 반복으로부터 벗어나는 대신 소의 피가 묻은 도끼에 목이 부러지고 도축업자의 칼날에 식도와 기도가 잘려나가고 굵고 얇은 혈관은 훼손되어 피를 뿜었겠지. 도축업자는 송아지들에게 그리했듯, 잘려나간 혈관 위, 망가진 전선들을 너절하게 내놓은 희생자의 가슴 위에 발을 얹어놓고 천천히 체중을 실으며 눌러댔겠지. 심장은 아직도 계속해서 펌프질을 하고 있고 놀랍게도 희생자는 여전히 절망적인 감옥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을 거야. 도축업자는 희생자의 가슴을 애무하듯 맨발로 지긋이 누를 것이고 그러면 몸 속을 빌어먹게 맴돌던 피는 땅 속으로 유출되었겠지. 검게 빛나는 악마적인 출혈이 계속되고 마침내 희생자는 죽음을 맞이하겠지. 이후의 과정은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일과 똑같이 처리될 거야. 다만 희생자는 여전히 소의 머리 안에 감금되어 있을 테지. 소의 머릿가죽은 희생자의 관 혹은 무덤과도 같겠지.

초록은 여자의 어깨에 손톱을 더 깊이 박아넣으며 새된 소리로 외쳤다. 오, 빌어먹을 신을 경배하라! 빌어먹을 죽음 빌어먹을 소고기 빌어먹을 사람고기. 도축업자들은 소나 돼지를 넣고 삶았던 거대한 통 속에 소 머리를 쓴 사람을 넣고 삶았을 거야. 역겹고 끈적한 죄악의 증기가 밀폐된 작업실을 가득 채울 것이고 피에 목마른 농민들은 구역질을 하면서도 침이 분비되는 걸 느낄 테지. 삶은 소-사람의 피부는 희게 변할 것이고 도축업자는 부풀어오른 피부의 겉부분을 부드럽게 긁어낼 거야. 그러면 소-사람은 천사처럼 하얗게 변할 거야. 도축업자는 정강이살과 엉덩이살, 복부와 목뼈를 섬세하게 분리해낼 거야. 소에 비해 먹을 부분은 그리 많지 않겠지. 희생자는 비쩍 곯았고 별로 먹을만한 부분도 없을 거야.

그래도 농민들은 모두 나누어 먹겠지. 다음 번의, 아직 예정되지 않은 희생자조차도 앞선 희생자의 고기를 나누어 먹을 거야. 콩 한 쪽도 나누어먹으라는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희생자의 고기를 강박적으로 정확하게 나누어 먹으려 할 거야. 임의의 각을 삼등분하는 방법은? 십등분 이십등분 오십육등분 하는 방법은? 이백칠십삼등분 하는 방법은? 길거리 수학자들은 나름대로의 확신 혹은 불확신을 가지고 뼈와 살점을 나눌 것이지만 도축업자는 수학자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결국 도축업자는 그가 늘 하던대로 살과 뼈를 부위별로 분류하면서 사람과 소의 신체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거야. 그리고 무척 닮았다는 것을. 사람의 벗겨낸 살은 마치 소나 돼지의 돌연변이처럼 보인다는 것을.

오, 빌어먹을 소고기 사람고기 빌어먹을 육식주의자 신들. 고기는 맛이 없을 거야. 그건 끔찍하게 역겨울 거야. 대부분의 육식동물 살점이 고무처럼 질기고 역겨운 것처럼 사람의 살도 그렇겠지. 오, 아니야, 아니야. 평생 남의 살을 먹을 일이 없었던 가여운 희생자의 살은 초식동물의 것처럼 고소할지도 몰라. 그의 창자는 소의 것처럼 길고 구불구불하며 맛이 좋을지도 몰라. 갈라낸 배 밖으로 비어져나온 창자는 거인의 탯줄처럼 보이겠지. 그들이 내게 고기 맛을 보여주겠다면 예스, 예스, 그들이 나를 잡아먹겠다면 예스, 그래 물론 예스. 나는 예스. 난 검은 피가 흐르는 소의 눈구멍 속에서 나를 잡아먹는 사람들을 똑똑히 보겠어. 회칠을 손톱으로 파내듯이 나는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볼 거야. 예스, 예스, 나는 소처럼 음메 하고 울 거야. 그러면 그 작자들은 내가 소라고 믿게 될까? 그럴 리가! 살해자들은 내가 소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느끼게 될 거야. 내가 살려달라고 말하는 대신 음메하고 울었기 때문에. 내 울음소리가 소와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그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더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 어쩌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살해자는 소의 머릿가죽을 벗겨낼 수도 있어. 그러면 나는 붉은 피 범벅이 된 얼굴, 가죽을 한 겹 더 벗겨낸 것 같은 피투성이 얼굴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그들에게 음메 하고 울어보일 거야. 그들은 울겠지. 혹은 내 농담을 알아듣고 웃을지도 몰라. 나는 다시 그들에게 다정하게 음메, 하고 울 거고 그러면 농담을 알아들은 이들은 다시 내 얼굴 위에 소의 머릿가죽을 뒤집어 씌우겠지. 그리고 그들은 나를 먹을 거야. 나를 먹은 이들은 음메 하고 울 거야.

잠에서 깬 파랑은 사다리를 타고 비척거리며 내려와 TV를 켰다. 폭발하듯 커다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여자는 몸을 움츠렸다. 초록은 비명을 지르며 여자의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어깨에는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귀신이야. 빌어먹을 귀신이야.

초록은 흐느끼고 있었다. 파랑은 끔찍하게 느릿하게 TV 음량을 줄였다. 음량은 최대로 설정되어 있었다.

로드킬당한 짐승들이 도로를 떠돌고 있습니다. 유령을 본 운전자들의 사고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사고 차량의 운전자들은 대부분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졸음 운전에 유의하세요. 엄습하는 유령들 날카로운 유리처럼 출몰하는 유령들에 주의하세요.

뉴스 진행자는 유령과 졸음이 동의어라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초록은 파랑을 가리키며 유령이라고 소리쳤다. 유령들은 증언을 번복하기 위해 오는 거야. 염병할, 너는 네가 불타 죽었다는 내 말을 거짓으로 만들기 위해 돌아온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파랑은 늙고 멍한 눈으로 초록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히 해.

조용히 해야할 건, 초록은 흐느꼈다. 당신이야. 당신이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잖아. 졸음 운전에 유의하라고 로드킬당한 짐승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잖아.

여자는 말했다. 그건 TV 소리야.

스쿨버스 운전자는 홀로 남은 여자아이를 강간했습니다. 시내버스 운전자는 홀로 남은 여자를 강간했습니다. 운전자들은 운행 시간이 지나서까지 불법으로 차를 운전하며 희생자들을 강간했습니다. 동료 운전자들이 교대로 운전을 하였으며 운전하지 않는 운전자들은 희생자들을 강간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변조된 음성. 그들은 창문을 깨고 들어오지 않았어요. 총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요. 그들은 강도나 테러리스트가 아니었어요. 처음에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는데 그들이 평범한 버스 운전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어요. 비명을 지르면 모든 악몽이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어요.

운전사들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어요.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내게 음료수를 주었고 비스킷도 선물했어요.

난 나중에 먹겠다고 했고 그들은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어요. 난 울면서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들은 나를 끌어안았어요. 내 바지를 벗겼고 다시 내게 음료수를 내밀었어요. 난 마시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들은 내 블라우스를 벗겼고 다시 내게 음료수를 내밀었어요. 마시고 싶지 않아요. 난 울면서 그렇게 말했고 경찰은 왜 내게 비명을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버스 창문들은 열려 있었고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는데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음료수를 마시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난 울었고 경찰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음료수를 마시고 싶지 않았어요. 난 다시 말했지만 다시 말하고 다시 말하고 또다시 말했지만 경찰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내게 정신 치료 이력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내가 오래전에 미쳤고 어쩌면 지금도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무 상관 없다고 말했어요. 운전사들은 나를 죽였고 음료수를 먹을 거냐고 물었어요. 나는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목이 마르지 않느냐고 물었고 나는 정말 목이 마르다고 갈증이 나서 죽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어째서 음료수를 마시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목이 말라 보인다고 정말 음료수를 마시지 않을 거냐고 물었어요.

그들은 내 앞에서 음료수 캔 뚜껑을 따서 마시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한 캔 두 캔 다섯 캔 스물네 캔의 음료수를 마셨어요. 아니 오백사십육 개 혹은 일곱 개의 음료수를 마셨을지도 몰라요. 버스 운전석에는 백미러가 있었고 그곳에는 쌍둥이처럼 닮은 남자들이 나를 벗기고 있었어요. 그들은 내게 음료수를 먹을 거냐고 물었어요. 그들이 내게 음료수를 건넬 때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그들이 목 마른 나를 두고 끊임없이 그짓을 하는 동안 나는 노래를 불렀어요. 꽃이 없는 화병은 구멍투성이 레이스 심장을 가지고 있어. 구멍들에서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내리고 유리 화병은 투명하게 미소짓고 있어. 경찰은 내게 음료수를 먹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울었어요. 나는 내가 그걸 마시기 전까지 그들이 계속 내게 음료수를 내밀리라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마신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죠. 내가 마셔도 그들은 계속 내게 음료수를 권할 것이고 갈증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경찰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내 음부와 허벅지에 남은 정액을 긁어내야 했어요. 신은 잔혹하고 무자비한 어린아이예요. 신은 어리광쟁이 소년이고 그가 머리채를 잡고 내동댕이친 인형들은 피투성이에요.

나는 버스 뒷좌석 시트에 누워 있었고 앞유리에는 경멸스럽게 증폭된, 너무 많은 얼굴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거울 속에 누워 있는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어요. 유리로 된 캔들은 버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그들은 흐느끼듯 신음했어요. 나는 신음하지 않았어요.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애원하지도 않았어요. 울긴 했지만 간혹은 울지 않기도 했어요. 그들은 내게 경찰에 신고할 거냐고 물었어요. 내가 신고할 생각이라면 나를 죽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요.

그들은 다시 물었어요. 신고할 생각이냐고.

나는 혈관을 둘러싼 기름층은 구멍투성이라고 했어요. 세상은 구멍투성이이며 오직 구멍들로만 이루어졌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내게 신고할 거냐고 물었어요. 나는 아직 내 출생조차 신고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그들은 웃었어요. 그들은 누구도 내 사망 신고를 할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사실 출생 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짐승은 사망 신고를 할 수 없죠. 그건 어설프고 멍청한 농담이었어요.

그들은 내게 살고 싶으냐고 물었고 나는 음료수를 마시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어요.

그들은 내게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음료수를 마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뉴스 진행자는 졸음 운전을 조심하라고 집요하게 당부했다. 로드킬 당한 짐승들의 유령들이 도로를 떠도는 것은 원한 때문이 아니지만 그들이 의도치 않게 복수하게 될 수도 있다고 뉴스 진행자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죽은 동물 애호가가 아니라면 졸음 운전을 조심하세요. 유령들은 잠의 그림자를 먹고 자랍니다.

왼 볼에 반달 모양 문신을 한 죄수는 격렬하게 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들은 나를 강간했어요. 내 무릎을 꿇리고 바지를 벗기고 내 몸에 나이프를 쑤셔넣었어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들은 내게 농담이라고 했어요.

내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나는 미지수가 없는 방정식에 대해 생각했어요. 난 미친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간수를 불렀고 간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난 내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설명했고 간수는 웃으면서 악몽을 꾼 거라고 말했어요.

그 간수는 내 먼 제자였는데, 천사내장주의 혹은 초현실숭배주의 뭐 그 비슷한 예술 운동의 일원이라고 했어요. 그 어린 시인은 내가 그들의 스승이며 천사내장주의 혹은 초현실숭배주의 밑바닥사실주의 뭐 그런 운동의 창시자라고 했지만 난 모르는 일이었죠.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을 착각했을 수도 있어요. 그는 어떤 위대하고도 미친 시인을 나로 혼동하고 있는지도 몰랐죠. 하지만 물론 그가 숭배하는 시인이 바로 나일 수도 있어요. 그가 내 앞에서 자랑스럽게 암송한 시는 내 작품과 동일했으니까. 하지만 우연히도 그가 나와 혼동한 어떤 위대한 시인이 나와 정확히 같은 작품을 썼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죠. 어쩌면 그의 시인과 내가 의도치 않게 서로를 베꼈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 시인의 삶을, 그 시인은 내 시를 표절한 거죠. 물론 악의 없이, 철저히 우발적으로 말이에요-하지만 철저한 우발이라는 게 대체 뭐죠? 고의적인 우발? 불가능한 우연? 혹은 숙명? 죄송해요 나는 가끔 지나치게 그리스적이 된답니다-어쨌든 그 시인은 나를 존경하고 있었어요. 그는 우리 둘만 있을 때-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죠- 나를 시인님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 여하튼 그가 나를 무시해서 내 말을 믿지 않았을 리는 없다는 말이에요.

그 애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웃었어요. 긴 악몽을 꾸셨나 보군요, 선생님.

나는 아니라고, 그들은 정말 내 창자를 쑤셨으며 내 다리 사이에서는 스틱스처럼 검고 끔찍한 피가 흘러내렸다고 말했어요.

간수는 의아하게 물었어요. 빌어먹을 어리둥절하게 물었다고요. 선생님, 하지만 피 냄새는 나지 않는걸요.

피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내 역겨운 가죽 속은 전부 피로 가득 차 있는데 내 심장과 창자와 목뼈와 빌어먹을 죽음이 전부 피투성인데 그것은 사실 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데!

죄수의 반달 모양 문신이 움찔거리며 경련했다.

갓 뽑아낸 피는 거품을 내며 흘러내립니다. 비너스가 잉태된 정액 거품 혹은 망자의 입가에서 솟아나는 거품처럼 말입니다. 난 보이지 않는 구멍들 속에서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거품들을, 오로지 구멍만으로 이루어진 거품들을 느꼈어요. 죄수는 책 속에서 그와 같은 사례를 찾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여자들은 선 채로, 혹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죄수는 예언가처럼 혼몽하고 열띤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감옥 안에서 책을 읽는 건 흔한 미친 짓이죠. 보통은 성경이나 요리책, 문제집 한 권으로 만족합니다. 하지만 나는 수십, 수백, 수만 권의 책들을 필요로 했어요. 감옥에 구비된 도서 목록에는 내가 찾는 책들이 없었고 나는 나를 추종한다고 지껄이는 어린 시인에게 은밀하게 부탁해서 책들을 구해야 했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마약이나 담배, 휴대전화 따위를 밀반입할 때 나는 책들을 밀반입했습니다. 그것들은 특별히 금지된 도서들도 아니었어요. 다만 그 양이 범죄적으로 많을 뿐이었죠. 죄수들에게 그렇게 많은 책들은 허가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감옥 밖에서 난 그렇게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어요. 심지어 감옥에서 읽기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단 한 권의 시집도 읽지 않았어요. 바깥에서는 모든 세계 모든 도시와 모든 길목들과 모든 거울들이 무한한 상징들로 가득차 있었으므로 검고 평면적이며 비좁은 기호들에 굳이 매달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며 감옥 안에서는 끝없이 깊고 검은 악몽에 무한한 기호들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목마른 젊은 시인처럼 혹은 눈이 멀어가는 늙은 학자처럼 읽고 읽고 또 읽었어요. 그 결과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에 대한 몇 가지 개연적인 가설들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이고 만연하게 일어나는 현상인 귀접입니다. 귀신들 혹은 악몽들 혹은 환상들은 원초적인 형태로 희생자를 괴롭힙니다. 그들은 연인처럼 정상적인 결합 방식을 취하거나 내장에 칼을 꽂아넣거나 입에 성기를 밀어넣거나 하면서 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이미지들은 매혹적이고 무척 서글픕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귀신들은 가장 물질적인 존재로 나타나지만 악몽을 꾸는 짐승은 유령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 가설은 보다 사실적인 것으로 간수 혹은 나 둘 중 한 명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수는 그가 존경하는 시인인 내가 강간당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 않았고-혹은 믿지 않는 척했고-나는 그 깜찍한 거짓말에 깜빡 속아넘어갔다는 거죠.

죄수는 잠시 웃었다. 그의 반달 모양 흉터가 일그러졌다. 혹은, 하고 죄수가 말을 이었다. 착각한 쪽은 나이며 나는 순전히 시적인 망상에 깊이 빠져들어 일어나지 않은 관념적인 사실을 물리적 사실로 이끌고 가려고 분투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관념을 물질로 옮기는 것은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만큼이나 신적인 일이므로 나는 허상과 싸우며 고투하고 있다는 거죠.

세 번째 가설은 겁간당함과 겁간당하지 않음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은 언제나 공존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 강간당함의 양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강간당하지 않음의 양태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강간의 성질을 드러내고 어떨 때는 강간-아님의 성질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마지막 가설은 가장 비직관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어느날 간수, 나를 믿고 따르던 그 간수는 내게 욕지거리를 지껄이면서 반말을 하더군요. 아주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난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간수는 아주 이상하게 나를 내려다보면서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더군요.

그는 분명 같은 사람이었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나를 알아보기는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방식대로 나를 알아보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어떤 순간에 그는 내게 무척 친근하게 굴며 선생님, 하고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더군요. 난 왜 내게 무례하게 굴었느냐고 물었고 그는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자신의 시와 삶, 이름과 부모에 대고 맹세하더군요. 설령 그가 최악의 사기꾼이라고 해도, 그가 이름 없는 고아에 시는 한 편도 쓰지 않은 유령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열렬하고 집요하게 맹세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난 독방에서 썩어가는 죄수에 불과했고 그는 간수였으니까요. 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날 속여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건 악의적이며 비열한 작은 즐거움밖에는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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