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20

하지만 맹세를 하면서 그 애는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어요. 오, 그 애는 정말 다정했어요. 나를 위해서 독방에 있는 숨겨진 통로를 알려주기도 했답니다. 선생님,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당신들이 그 통로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로로 진입하는 방법은 순전히 관념적인 것이므로 꿈을 사라지게 만들 수 없는 자들은 비밀스러운 통로로 진입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통로는 관념적이며, 심지어는 망상적인 것이기도 하죠. 어쨌든 그 애는 내게 통로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나는 비밀 통로로 들어가 간수들의 침실과 감시실, 죄수들의 방들을 하나씩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통로는 바깥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을 탈출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의 독방보다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을 하나 간신히 갖다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들, 구멍들, 그 무한한 구멍들을 통해 나는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손가락 하나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지만 그런 틈은 너무도 많았기에 다른 죄수들이나 간수들이 구멍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구멍들은 내 전유물이었고-내게 그 통로의 존재를 알려준 간수를 통로 내부에서 마주친 적은 없습니다-구멍들을 통해 검거나 희거나 푸르거나 녹색이거나 붉거나 노랗거나 파란 짐승들의 눈들과 마주친 적은 없습니다. 두 개의 마주보는 거울들, 두 개의 겹쳐진 눈들과 두 개의 영원한 반영들, 그러한 증폭을 마주했다면 나는 완전히 미쳐버리고 말았겠죠. 나와 눈을 마주한 가여운 짐승 역시 미쳐버렸을 겁니다. 다행히도 아직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한 죄수의 독방에서 나는 스타킹을 신은 긴 다리를 보았습니다. 그는 밀반입한 스타킹을 허벅지까지 올려 신고 자기 다리를 게걸스럽게 바라보면서 수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난 그가 성기를 갈무리하고 스타킹을 벗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았어요. 어둠 속에서 스타킹을 신은 그의 다리는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스타킹을 벗었을 때 드러난 건 남자의 평범한 다리일 뿐이었죠. 그는 자신의 맨다리에는 아무런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지저분하게 늘어진 스타킹에도 마찬가지였죠. 그는 오직 살로 채워진 스타킹, 팽팽하게 당겨진 스타킹과 그 속에 희게 채워진 살에만 욕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구멍들, 구멍들, 구멍들, 나는 세상만큼이나 많은 구멍들을 보았습니다. 무한의 일부가 무한보다 더 클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감옥의 구멍들에는 세상보다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더 많은 것입니다. 그게 중요해요. 세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많은 것. 왜냐하면 그들은 내게 알려진 세계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틈 없이 난 그 어떤 내밀한 장면도 훔쳐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의 내밀함을 나와 함께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틈 없이는. 난 TV 채널을 돌리듯이 틈을 넘나들며 엿봐요. 채널과 채널과 채널 배우와 배우와 배우, 배우들이 채널들을 넘나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채널들이 배우들을 넘나드는 경우도 있어요. 죄수들은 유희를 하듯 방을 바꿉니다. 그래요.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죄수들은 감옥 내부에서 방을 바꿀 뿐이니까요. 밖으로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방을 바꾸고 혹은 방은 그들을 바꾸어요. 그것뿐이죠. 난 틈으로 그들을 엿보고 독방에서는 책을 읽습니다. 책을 더 많은 책을 읽어요.

초록은 비명을 지르며 죽은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다.

뭐가? 여자는 되물었다.

초록은 이층 침대 위쪽, 보라가 잠들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죽은 것 같지 않아?

여자는 모두가 그렇다고 말했다.

초록은 불룩 튀어나온 원피스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입구가 좁다란 유리병의 안쪽에는 큼지막한 푸른 나비가 들어 있었다. 나비는 날개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초록은 속삭였다. 이건 작고 가느다란 애벌레였어. 입구로 들어올 때만 해도 입구로 나갈 수 있었지. 하지만 유리병 안에서 탈태하면서 이 애는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어.

두 개 혹은 네 개의 날개들과 하나의 감금. 여자는 초록의 손에서 유리병을 잡아채어 바닥에 던졌다. 유리병은 산산조각났고 그 속에서 날아오르는 것은 없었다. 한 마리 나비와 하나의 유리병. 너무 많은 유리병과 너무 많은 0. 여자들은 좁은 방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그녀들의 맨발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여자는 웃었다.

초록은 여자가 나비를 죽였다고 소리 질렀다. 이 애가 나비를 죽였어! 네가 나비를 죽였어! 그녀가 나비를 죽였어!

하지만 나비는 죽지 않았어. 여자는 말했다. 나비들은 결코 죽지 않아. 식물에게 죽임이 없듯 나비에게도 죽음은 없어.

초록은 발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바라보면서 그렇지 않다고 네가 나비를 죽였다고 말했다.

초록은 침대 맡으로 걸어가 커다란 깃털 베개를 품안 가득 안아들고 파랑에게 던졌다. 파랑의 헝클어진 머리칼에서 베개가 떨어져내렸다.

파랑은 야릇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며 너희가 자기 어린 딸들처럼 군다고 말했다.

여자는 파랑의 앞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들고 초록의 배를 향해 던졌다. 그녀들은 깔깔거리며 서로에게 계속해서 베개를 던졌다. 베개가 찢어졌고 그 속에 가득 차 있던 깃털들이 방 안에서 흩날렸다. 죽은 새의 깃털이 여자들의 발에서 흘러내린 피를 머금고 투명한 붉은 빛으로 젖어들었다.

여자는 숨을 몰아쉬면서 같은 장면을 본 적이 있다고 속삭였다.

초록이 되묻기도 전에 여자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야. 내 상담사가 말해준 영화 이야기였는데 어쩌면 그녀가 직접 지어냈을지도 모르지. 그건 수학여행을 간 여자아이들의 이야기였어.

초록은 숨을 몰아쉬면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여자는 선 채로 초록을 내려다보며 헐떡였다. 파랑은 여전히 TV를 보고 있었다.

중부지방에 장마전선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습니다.

수학여행을 간 여자아이들은 베개싸움을 했어. 하지만 어떤 여자아이는 한 번도 베개를 맞을 수 없었어. 수학여행을 간 여자아이들은 음료수를 나누어 마셨지만 어떤 여자아이는 한 모금도 음료수를 마실 수 없었어. 수학여행을 간 여자아이들은 손을 잡고 비밀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속삭였지만 어떤 여자아이는 잡을 손도 말할 수 있는 비밀도 없었어. 여자는 흩날리는 깃털에 기침하며 말했다. 수학여행 기념사진에 찍힌 그 여자아이를 알아보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어. 교사조차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지. 하지만 여자아이가 함께 수학여행을 떠났다는 건 분명해 보였어. 그 애는 수학여행에서 찍은 모든 단체 사진에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그래. 초록은 젖은 입술로 웃으며 말했다. 아주 쉽네. 그 여자아이는 우주를 떠도는 작은 먼지 혹은 빛의 조각이야. 그 애는 수학여행에 동행했지만 그렇지 않기도 해. 그 애는 모든 사진들에 찍히길 원했고 그래서 사진이 찍히는 모든 순간들에 렌즈에 들러붙은 거야. 왜냐하면 그 애는 작은 먼지 혹은 빛의 조각이니까.

여자는 말했다. 그건 너다운 대답이네.

초록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말을 이었다. 혹은, 그 애는 아주 구체적이고 집요한 곰팡이야. 수학여행에서 사용한 카메라 혹은 필름이 그 독특한 곰팡이에 감염되었고 그래서 모든 사진에 그 애의 얼굴 모양의 균류가 피어난 거야.

혹은, 하고 여자는 말했다. 그 애는 유령이었어. 특정한 광학적 장치에서만 효과를 발하는 빛의 결절점 같은 것이었어. 반의 다른 여자애들은, 초록은 말했다. 그 애의 손을 잡지 않았어. 학교의 복도를 걸을 때도 리조트의 복도를 지날 때도 그 애의 손은 언제나 비어 있었어. 여자 아이들은, 여자는 말했다. 그 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어. 그 애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레몬맛 캔디를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어. 그 애의 온기와 체액과 슬픔, 우울과 기쁨을 누구도 훔쳐가지 않았어.

그뿐만 아니야, 하고 초록이 말을 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병 속에서 너무 자라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비를 오래도록 관찰했어. 수십 쌍의 검은 눈들이 나비의 푸른 보석 같은 날개를 들여다보고 있었어. 나비는 살고 싶었어. 하지만 나비는 물고기처럼 침묵했고 여자아이들은 날개를 찢어버리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말해주지 않았어. 말해주었더라도 나비는 알아들을 수 없었을 거야.

여자애는 얼굴들에 둘러싸인 유리병을 오래도록 훔쳐보았어. 여자아이는 나비의 날개를 볼 수 없었어. 하지만 여자아이들의 지나치게 많은 머리들은 볼 수 있었어. 여자아이는 생각했어. 천국에는 나비가 없어. 나비들은 지상에서 너무 자라났고 지상은 무수한 유리병들이므로 나비들은 결코 천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나비들은 너무 무거워졌고 나비들의 날개는 지상을 통과하여 영과 무한의 세계로 가련한 생물을 데려가기에는 너무 보잘 것 없지. 천국에는 단 한 마리의 나비도 없어. 지나치게 늙고 무거워진 짐승들은 신에게로 돌아갈 수 없어. 어린아이가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늙어버리면 절대 천사가 될 수 없어. 지상에서 너무 오래 지낸 유령들, 지나치게 오래 방랑한 실종자들은 결코 돌아갈 수 없어. 천국은 빌어먹을 곳이고 지상도 마찬가지야. 지하도, 우주 바깥도, 먼 은하도 다를 게 없어. 여자아이가 우는 동안 그 애를 위로해주는 아이는 없었어. 그 애의 울음을 들은 아이조차도 없었지.

여자아이는, 하고 초록은 말했다. 곤충학자의 서재에서 박제된 나비들을 본 적이 있었어. 나비들은 얇고 가느다란 핀셋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빛났어. 여자아이는 나비들의 색채에 매료되었고 곤충학자는 여자아이가 원하면 박제 하나를 선물로 줄 수도 있다고 말했어. 여자아이는 살아 있는 나비를 갖고 싶다고 말했고 곤충학자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어.

하지만 여자아이는 결코 살아 있는 나비를 가질 수 없었어. 여자아이는 이사를 갔고 곤충학자의 집으로 다시는 놀러 갈 수 없었어. 이사 간 집의 거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여자아이는 공중을 새처럼 활공하는 나비들을 떠올렸어. 밤에는 나방들을 떠올렸지. 밤의 나방들은 검은 밤 유일하게 빛나는 여자아이의 눈을 향해 달겨들었어. 여자아이는 눈이 멀었고 밤보다 더 많은 나비들을 볼 수 있었어. 하지만 다음날 깨어났을 때 여자아이는 벅차오르는 연한 빛을 볼 수 있었고 그녀는 나비들을 잃어버렸어. 여자아이는 그녀가 눈 멀지 않았음을 깨달았어.

여자아이는 학교 화단에서 나비들을 촬영했어. 곤충학자가 죽은 나비들을 수집하듯이 여자아이는 살아 있는 나비들의 영상들을 모았어. 투명한 빛의 줄무늬들, 여자는 기침하며 말했다. 줄무늬들은 얇고 날카로운 칼날들이야. 빛에 산산조각난 나비는 너무 아름다웠어. 여자아이는 눈물을 흘렸어. 여자아이는 엷은 피막을 파고드는 칼날들을 느꼈어.

여자는 초록을 향해 무릎으로 기어갔다. 유리조각이 여자의 무릎을 파고들었다. 여자는 초록의 목을 졸랐다. 초록은 헐떡이며 웃었다.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어. 여자는 말했다. 사실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어. 수학여행 사진도 나비 영상들도 전부 거짓말이었어. 여자아이는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어. 왜냐하면 여자아이는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실종되었기 때문이야. 여자아이는 죽기 전에 실종되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영정사진조차도 없었어. 웃음도 나비도 밤도 눈멂도 없었어. 여자아이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어딘가에 있었어. 투명한 빛살들에 갇힌 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나비처럼. 여자아이를 아무도 찾을 수 없었어. 여자아이를 아무도 찾지 않았어. 유리병에 갇힌 나비는 자살할 수 없어.

여자는 초록의 목을 세게 짓누르며 헐떡거렸다. 유리병에 갇힌 나비는 유리병을 깰 수도 없어.

바닥에 내려앉은 희고 붉은 깃털들. 날아가지 못한 새들의, 실종된 새들의 깃털들.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어. 초록이 소곤거렸다.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어. 아무도 사라진 여자아이를 촬영하지 않았어. 의사들은 살아 있었어.

초록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파란 약을 먹고 나니 죽은 의사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어. 시체들, 잘려나간 목들과 푸르거나 붉은 출혈도 모두 사라졌어. 의사들은 죽지 않았어. 담당의는 내게 약을 잘 챙겨먹으라고 말했어. 약을 먹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거라고 말했어.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잃어버릴 거라고 말했어. 가지지 않은 걸 잃어버리는 건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고통스러울 거라고 말했어.

선생님, 초록은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씨발 날 고소해 줘요. 날 강간해 줘요. 날 죽여요. 내가 당신을 죽였으니까 내가 당신들을 전부 죽였으니까 나를 죽일 거라고 말해줘요. 하지만 의사는 아니라고 그는 내가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했어.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고 다만 악몽을, 너무 많은 악몽을 꾼 것뿐이라고 말했어. 보다시피, 그 새끼는 웃으면서 말했어. 난 멀쩡히 살아 있다고 그가 말했어.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씹할 나조차도 죽이지 않았다고. 나는 살아 있었어. 그들은 전부 살아 있었어. 내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 있었던 거야. 내가 살아 있어서.

여자는 초록의 목을 세게, 더 세게 짓눌렀다. 초록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난 그들이 마시는 커피에 청산가리를 탔고 의사들은 기도가 부어올라서 켁켁거리며 죽었어. 얼굴이 붉고 푸르게 변해갔고 끔찍하게 부풀었고 난 그들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들도 나를 마주보며 다정하게 웃었어.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그들이 마신 게 무엇인지 알았을 거야. 왜냐하면 그들은 유능한 의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나는 홀로 살아 있었고 나는 홀로 남았고 나는 외로웠어. 난 순서가 바뀌었음을 깨달았어. 먼저 나를 죽이고 그 다음에 그들을 죽여야 했던 거야. 그렇지 않아? 헤이, 왜냐하면 맛 좋은 걸 먼저 먹어야 하니까. 중요한 걸 먼저 해야 한다고. 난 먼저 나를 죽여야 했고 그 다음에는 실패해도 별 상관없는 일들을 처리해야 했던 거야. 그들이 죽고 나서야 난 그들이 나를 죽이러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 죽은 사람들은 살해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그들은 죽었고 살인자는 죽지 않았으니까. 심연에서 밧줄을 타고 올라간 사람에게 구멍 안에 남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어? 구멍 안에 함께 있을 때야 동지고 친구고 연인이지, 바깥에 나간 뒤에 그들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거야. 하지만 의사는 안심해도 좋다고 말했어. 그들 누구도 죽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들의 죽음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했어. 그럼, 나는 내 담당의에게 말했지. 당신들도 내 죽음에 책임지지 않겠군요. 그 빌어먹을, 염병할 웃음.

여자는 초록에게 입을 맞추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비는 한 마리도 없어. 천국에는 새의 깃털들과 나비의 관념밖에 없어. 어린아이들은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병 속에서 자라나고 있어. 그들의 몸은 점점 자라나고 입구는 점점 작아져 가.

초록은 날벌레들의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전등 갓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불완전한 나선과 구. 살인범을 연기하는 희생자와 훌륭한 여배우를 연기하는 3류 배우와 3류 배우를 연기하는 무명배우. TV 채널을 조정하듯이 악몽의 종류와 깊이를 바꿀 수는 없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초록은 젖은 얼굴로 킬킬거리며 속삭였다. 그 새끼들은 웃고 있었어. 불어 터진 얼굴로 웃고 있었어. 하지만 없었어. 알겠어? 죽음은 없었어.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어. 어쩌면 내 죽음조차도 내게 속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엿같은 생각이 들었어. 달은 너무 멀리 있고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데 나는 달을 향해 빌어먹을 폭탄들을 던지고 있어. 총을 쏴갈기고 폭탄을 던져대도 달에는 닿지 않아. 달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들은 전등 갓 속에 감금되어 굶어 뒈질 뿐이야. 대체 몇 개의 죽음을 통과해야 단 하나의 죽음에 닿을 수 있는 건지 이젠 모르겠어. 밤에는 달이 떠 있고 현실에는 끔찍한 초현실들이 멀거니 빛나고 있어. 하지만 아무도 달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 달은 지나치게 밝고 지나치게 둥글고 지나치게 아름다운데 아무도 달을 무서워하지 않아. 그 누구도 달을 산산조각내려 하지 않아. 나만, 오직 나만 빌어먹을 달을 참을 수 없어. 달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면 아무것도 찍히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무서워져. 그 누구도 나 대신 달을 죽여주지 않아. 의사들은 달이 죽지 않았다고만 말해. 달이, 그토록 거대하고 음탕한 구멍이 하늘 위에 둥둥 떠있는건 너무나 이상한데 빌어먹을 삶처럼 무서운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여자는 초록의 젖은 턱을 깨물며 속삭였다. 시인들과 폭군들은 달을 무서워해.

초록은 웃으면서 그런 건 다 좆같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 새끼들은 달을 사칭할 뿐이야. 달을 두려워하는 척할 뿐이야.

너도, 여자는 초록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달을 무서워하는 척할 뿐이야.

초록은 여자의 얼굴에 대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초록은 바닥을 미친 듯이 헤집었고 그녀의 손바닥은 유리조각에 베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파랑은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속인 A씨는 5월 21일 여동생을 강간하고 살해하였습니다. A씨는 여동생을 스토킹하던 죽은 남성의 원령이 A씨에게 빙의되어 그녀의 여동생을 강간하고 살해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A씨는 A씨의 여동생의 원령을 불러 증인신문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A씨의 증인 신청이 기각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달은, 달은 아무것도 아니야. 초록은 울부짖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달은 빌어먹을 눈 먼 여자야. 달은 아무것도 볼 수 없어. 하지만 달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달에 착륙한 사람도 있어. 저 빛나는 원 위에 서 본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야. 난 영원히 달에 가지 못할 테고 저게 실재하는지 확인해볼 수도 없을 거야. 달의 비밀을 현실로 만든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야. 내가 원하는 걸 가진 사람들은 너무 많아. 그들은 달이 정말 있다고 그리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말해. 하지만 난 달이 무서워. 알겠어? 달이 나를 해칠까봐 무서운 게 아니야. 달이 나를 보고 있어서 무서운 것도 아니야. 달이 나를 해치지 않기 때문에, 내게 닿을 수도 없기 때문에, 나를 보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달을 보고 있고 달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서운 거야. 한 명만, 초록은 헐떡이면서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 한 명만 죽일 수 있었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사라졌을 거야. 하나의 모래알과 사막, 하나의 빗방울과 강, 하나의 나뭇잎과 숲, 하나의 나뭇가지와 영원히 뻗어나가는 구부러진 미로들,

아빠는, 초록은 숨을 거칠게 들이내쉬며 중얼거렸다. 눈이 멀고 나서도 글을 썼어. 소설이라고 했지만 난 한 번도 읽지 못했어. 아빠는 매일 아침 여섯 시가 되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오전 열한 시까지 글을 썼어. 글을 쓰고 나면 아빠는 내게 당신이 쓴 글을 확인해 달라고 했어. 아빠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을 확인할 수 없었으니까. 난 알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단 한 번도 읽지 않았어. 한 번도 읽지 않았다고. 아빠는 살아 있는 내내 글을 썼는데 난 하루도 글을 읽지 않았어. 아빠는 유언으로 그가 쓴 소설들을 출판해 달라고 말했어. 그게 유일한 소원이라고 했어. 아빠가 죽고 난 뒤에 나는 아빠의 소설 파일을 처음으로 확인해 봤어.

그건, 초록은 속삭였다. 비어 있었어. 빈 페이지가 오백팔십육 페이지, 삼백이십오 페이지, 이백육십칠 페이지, 팔백구십육 페이지, 육백삼십칠 페이지, 백오십삼 페이지, 오백오십구 페이지, 육백칠십삼 페이지 있었어. 8개의 작품, 8개의 빈 파일. 나는 매일 오전 여섯 시부터 열한 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타자를 치는 아빠를 보았고 페이지는 텅 비어 있었어. 그 하얗고 징그럽게 많은 페이지들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나는 영원히 읽을 수 없을 테지. 여자는 초록이 고아인 줄 알았다고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초록은 울고 있었다. 텅 빈 페이지에 무언가를 채워넣고 있다고 믿는 눈 먼 짐승들. 어떤 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생을 초월하지만 어떤 작품은 작가의 생을 넘어서지 못해. 작가가 죽으면 작품은 끝이고 텅 빈 페이지를 채우고 있던 무한한 언어들도 완전히 끝나버리는 거야.

여자가 물었다. 너희 아빠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어?

여자는 초록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초록의 맨어깨를 파고들었다.

그야 모르지. 초록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난 고아니까.

나도, 여자는 말했다. 마찬가지야. 어떤 작품은 단 한 순간도 작가를 초월하지 못해. 어떤 보물은 영원히 발견되지 않아. 어떤 희귀한 식물은 단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로 모래먼지 속에서 사그라들어. 썩어 문드러진 채 먼지가 되어버린 식물은 더 이상 희귀하지 않아. 먼지는 무한히 많으니까. 사막의 모래먼지를 보물이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여자는 생각했다. 썩어 바스라진 은색 장미, 재가 되어버린 아름다운 육체는 정신병원의 광증만큼이나 흔해 빠진 거야. 의사들은 정신병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아. 하지만 달을 무서워하는 여자나 살인범을 연기하는 희생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어린아이보다도 모르지.

초록은 여자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빠는 목을 매달아 죽지 못했어. 아빠는 눈이 먼 뒤로 죽을 때까지 매듭을 묶을 수 없었고 차마 내게 자살할 올가미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는 못했던 거야.

내가 너희 아빠였다면, 여자는 속삭였다. 창문으로 뛰어내렸을 거야.

아빠는, 하고 초록은 야릇하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몇 층에 사는지 잊어버렸어. 난 15층에 산다고 말했지만 아빠는 믿지 못했어. 아빠는 우리가 3층 혹은 4층에 사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어. 1층이나 15층, 18층, 20층은 상관없지만 3층이나 4층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어. 1층으로 뛰어내리면 큰 부상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만 3층이나 4층에서 뛰어내리면 모든 게 끝이지. 더 이상의 자살시도도 불가능해. 아빠는 평생 병원과 불구의 몸에 감금된 채로 지독하게 오래 살게 되었겠지. 아마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거야. 하지만 다행히도 아빠는 참았고 실패한 자살자보다 덜 오래 살 수 있었어.

넌 고아잖아. 여자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초록은 그렇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빠 이야기는 진짜야. 몇 개의 호칭들만 바꾸었을 뿐 상황은 정말이라고.

처음부터 백지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여자는 말했다.

뭐라고?

처음부터, 여자는 천천히 다시 말했다. 백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글자들이 글자들을 잡아먹고 투명한 피까지 핥아먹고 굶주리고 잡아먹고 부패하고 뒤섞이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는 사라졌을지도 몰라.

초록은 격렬하게 몸을 떨며 웃었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 모두가 모두를 죽이거나 그렇지 못하니까. 글자들은 서로를 살해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야.

사형 집행장의 틈도 훔쳐본 적이 있습니다. 일그러진 반달 문신, 남자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형 집행실에는 사형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형수는 홀로 사형 집행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꿈의 그림자처럼 길고 푸른 그림자가 사형수의 발 밑으로 쏟아졌고 사형수는 침착하게 기다렸습니다. 내가 사형 집행인을 기다리는 사형수를 지켜보는 동안 사형수는 자신의 길고 짙푸른 그림자를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사형 집행실에는 교수형을 위한 밧줄-혹은 가죽끈-과 의자, 혹은 아래쪽 바닥이 열리는 장치 같은 것도 없었으며 전기의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사형 집행인이 도끼를 들고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도 도끼도 없었습니다. 사형수는 텅 빈 최후의 밀실에 선 채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형수는 괴로워 보였습니다. 아마 죽음 직전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끔찍하게 길게 느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사형수와는 무관한-물론 죽음과는 무관하지 않지만-내게도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느껴졌어요.

사형 집행인은 오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는 홀로, 나는 그와 함께 기다렸죠. 사형 집행인은 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사형이 어떤 식으로 집행될지 알 수 있었어요. 아마 사형수도 알아차렸겠죠. 사형수가 갈증 혹은 산소 부족 혹은 절망으로 죽기까지 나흘 동안 나는 매일 두 시간에서 세 시간 동안-시계가 없었으므로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습니다-사형수와 함께 사형 집행인을 기다렸어요. 그건 나의 죽음만큼이나 긴 시간이었어요. 아마 그 시간 동안 사형 집행인이 날 선 도끼를 들고 밀실로 들어갔다면 사형수는 웃고 울면서 그를 반겼을 겁니다. 사형 집행인을 끌어안고 도끼로 그의 심장을 갈라달라고 애원했을 겁니다. 사형 집행이 최악의 질병을 안고 밀실로 들어온다고 해도 사형수는 기꺼이 사형 집행인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축복의 언어를 속삭였을 겁니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은 끝까지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사실 처음 한 시간 혹은 두 시간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죠. 사형 집행인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렸습니다. 나는 하루에 두세 시간을, 사형수는 하루 이십사, 혹은 이십오, 혹은 오백 칠백 수억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사막의 대신은 왕을 기습하여 왕의 얼굴에 염산을 끼얹고 왕과 옷을 바꾸어 입고 왕의 가면을 쓴 뒤 왕의 행세를 했습니다. 얼굴이 염산에 녹아내린, 증오받은 왕의 몸이 언제 그를 습격할까 두려워 사막의 왕-대신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반란군에 쫓겨 사막 한복판을 여행하면서 그는 얼굴이 끔찍하게 문드러진 건장한 남자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폐위된 대신은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흘렸지만 얼굴이 문드러진 남자-이전의 왕은 대신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전의 왕은 눈이 멀었고 대신은 그의 눈이 멀지 않았더라도 그가 대신을 알아보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신은 갈증에 시달리며 사막을 떠돌다 죽었습니다. 죽은 대신이 쓰고 있던 왕의 가면 위에는 사막의 황금빛 먼지가 내려앉았습니다.

사형수는 빌어먹을 대신처럼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그는 집요하고 서글픈, 사실 그에게 끔찍이 냉담하고 무관심한 망상에 시달리다 죽었습니다. 사형 집행인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갈증이 사그라들지 않으리라는 걸, 집요하고 잔혹한 복수나 원한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광적인 망상조차 없이는 밀실을, 사막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겁니다.

난 젊은 시인인 간수가 나를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날, 내가 그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끔찍하게 기다리고 끔찍하게 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무한한 사막의 갈증 없이 살 수는 없어요. 사는 것은 갈증을 견디는 일입니다.

초록은 속삭였다. 달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어. 우리에게는 사라질 장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 천국에는 나비가 없고 심해의 차가운 열대어들은 공기방울들을 우주로 운반하고 있어. 무한히 확장되는 원의 중심에 홀로 고립된 어린아이는 원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어. 아이가 아무리 뛰어도 원은 그 애를 중심으로 멀리 더 멀리 확장되고 있어. 우주는 절망적으로 넓어지고 있어. 아무도 이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우주는 계속 넓어지고 있어. 더 많은 백색왜성과 더 많은 초신성과 더 많은 행성과 더 많은 궤도와 더 많은 위성과 더 많은 먼지들. 우주에서 별들은 모두 혼자야.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하는 세 개의 태양들은 혼자야. 세 개의 눈을 가진 머리는 혼자야.

남자는 소녀의 단편을 받아들였어. 눈 먼 소녀의 백지가 세계 곳곳에 인쇄되고 사람들은 소녀의 흰빛을 보았어. 아빠는 내게 8편의 지긋지긋한 백지들을 유산으로 물려주었고 난 그걸 전부 삭제해버렸어. 혹은 출력해서 전부 불태워 버렸어. 카프카가 원했던 것처럼. 막스 브로트가 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의 백지들을 전부 태워버렸어. 뭐, 내게 아빠가 없다고? 내가 고아라고?

여자는 그렇다고 말했다.

초록은 웃으며 소리쳤다. 우린 전부 고아야! 아빠도 엄마도 엄마의 엄마도 엄마의 아빠도 전부 고아야. 고아가 아니면 미치광이지. 별도 달도 하늘도 풀도 우주도 전부 고아야. 신의 자궁은 검고 신은 신이 아닌 그 무엇도 낳지 않아. 신이 낳은 신과 신은 같은 존재야. 오직 신만이 고아가 아니야. 신만이 신을 부모라고 부를 수 있어. 신들은 고아들에게 큰 관심이 없어. 한결같고 유명한 무관심으로 신은 침묵하거나 오직 신들에게만 그들의 혈족에게만 들리는 전언을 속삭여. 짐승들, 짐승들, 너무 많은 짐승들. 너무 많은 신들과 너무 많은 고아들.

아빠는 짝수날 저녁 6시에 규칙적으로 우주에 남겨진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어.

어머니 우주는 어떤가요?

오늘은 좀 춥구나. 하지만 대체로 살 만 하단다. 싱크대에서 물이 새는데 나도 그이도 어떻게 고쳐야할지 모르겠다.

어머니 새 싱크대를 보내드릴까요?

글쎄, 찾아올 수 있겠니 아가?

저는 갈 수 없어요. 어머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너무 먼 곳까지 떠내려가셨으니까요.

네가 왔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하면 난 좀 외롭구나.

아버지는요?

네 아버지는 잘 지내. 간혹 나를 살해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살아 있고 네 아버지도 살아 있단다.

그거 큰일이군요.

뭐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게?

그것도 그렇지만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면 전 고아가 될 테니까요. 어머니는 웃고 있군요. 왜 웃는 거죠?

그야 너는 이미 고아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렴. 네 아버지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나를 죽일 테니까. 네 아버지가 나를 죽일 때 네 아버지는 나를 위해 나를 죽이게 될 테니까.

그런 건, 남자는 이렇게 말해. 망상에 불과해요. 어머니 식사는 잘 하고 계신가요? 섹스는? 잠은?

솔직히 말하면 전부 그만둔 지 오래되었단다. 넌 어제 전화를 하지 않은 것처럼, 어제 내게 같은 걸 묻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구나.

어머니는 어제와 같은 대답을 하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말, 말, 말, 얘야 이곳에는 너무 적은 말이 있어 그래서 너무 많은 언어가 있단다.

언어요.

그래. 언어.

어머니, 지금이 며칠인가요?

잘 모르겠구나.

어머니 그곳은 많이 춥나요?

그래.

어머니, 아버지는 주무시나요?

아니, 옆에서 듣고 있다.

어머니, 울어요?

그래. 네 아버지는 너를 죽이지 못해서 안타까워한단다. 너는 우리보다 더 오래 살 거고 더 오래 떠내려가야 하겠지. 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거야. 그러면 네 아버지는 나를 죽이고 너를 죽이고 당신은 죽이지 못한 채 홀로 떠돌았을 테니까. 그러면 나는 너와 함께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 그러기에 당신들은 너무 멀리까지 가셨어요.

그래. 여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해. 네 아버지는 칼을 쓰겠다고 했어. 우주선 내부에서 총은 위험할 수 있으니까. 총이 폭발하고 나면 모든 게 끝날지도 모르니까.

곧 모든 게 끝날 거예요.

그렇지 않아. 얘야. 죽음 뒤에도 삶은 계속된단다.

죽음 뒤에도, 남자는 말해. 어머니는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우리는 이제 삶이 그다지 간절하지 않으니까. 삶은 더 이상 우리를 배신할 수 없단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싱크대가 고장났어. 바닥에 물이 흥건해. 여자는 흐느끼면서 말해. 여기에는 나비가 없어. 얘야, 우주에는 나비도 없고 죽음도 없어. 하지만 싱크대에서 새어나오는 물은 있단다. 목성의 달에는 없는 상온의 물이 여기에는 있단다.

그리고 어머니 몸속에도요.

난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어. 하지만 너희 아버지는 지나치게 많이 주무신다. 어제 네가 전화를 할 때도 지금도 아버지는 계속 주무시고 있어. 네 아버지가 간혹 깬 것처럼 말을 할 때도 사실 그이는 잠자고 있는 중이야.

잠을 많이 자는 건 좋은 일이에요.

그래. 잠을 많이 자는 건 잠을 아예 못 자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야. 잠을 자는 중에도 네 아버지는 점점 죽어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잠을 자는 중에도 깨어 있는 중과 다름없이 고통스러운 사실들을 통과해야 한단다. 네 아버지가 나를 죽이면 그이는 꿈에서 나를 살해하는 것이겠지. 예전에 꿈을 꾸면서 내가 수백 번 수만 번 나한테 했던 것을 내게 하는 거겠지. 하지만 요즈음 나는 계속 깨어있고 따라서 나의 죽음은 현실일 거야. 너희 아버지는 나를 꿈 속에서 살해했지만 나는 정말로 죽을 거야. 너희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을 잊게 되겠지만, 나는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런 식으로 우리는 너무 많은 비대칭적인 사실들을 살아온 것 같구나.

저의 삶도요, 어머니, 저의 삶도 누군가 꾼 꿈이었어요.

그런 것 같구나.

최초에 나를 꿈꾼 이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고 나는 홀로 남겨진 채 떠돌고 있어요.

그런 것 같구나.

어머니가 아니었나요?

뭐?

나를 꿈꾼 건 어머니가 아니었나요?

아니야. 태몽을 꾼 건 너희 할머니었단다.

할머니는 잘 지내나요?

너희 할머니는 돌아가셨단다.

어디로요?

꿈으로. 꿈과 꿈이 포개어지는 장소로. 꿈과 꿈의 경계에서 젖어들고 있는 무한한 장미들의 그림자로.

어머니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아니. 나는 너희 할머니를 꿈꿨고 너희 할머니를 낳았지만 너희 할머니를 죽이지는 않았어.

어머니는 어머니를 죽였나요?

아니란다. 얘야. 여자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 우리는 우주만큼 오래 살 거야. 우리의 죽음을 넘쳐흐르는 삶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꿈이란다.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너무 멀리 있어요.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어머니는 이기적이에요. 어머니는 어머니의 죽음 이외에는 관심이 없죠.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사랑해 아가야. 네가 어렸을 때 너는 작은 폭군처럼 굴었어. 네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면서 웃었던 걸 기억하니?

아니요. 저는 어린시절 없이 태어났어요.

아니, 네게는 어린시절이 있었어, 아가. 너는 정말 잔혹하고 귀여운 어린아이였단다. 네가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를 찢어내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잠자리는 핑그르르 어지럽게 돌면서 바닥에 떨어져 미친 듯이 기어다녔고 너는 천사처럼 웃으면서 이것 보라고 그 작은 분홍빛 손가락으로 가리켰어.

잠자리를요?

아니, 너는 나를 가리키고 있었어. 나는 비명을 질렀고 너는 울었어. 너는 잠자리가 팽이처럼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했어.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단다, 아가.

저는 기억나지 않는데요.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어.

어머니, 어머니는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난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단다.

깨어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요. 어머니는 혼동하고 있어요.

넌 나비를 좋아했어. 사랑스러운 아가야. 넌 나비들의 날개를 찢어낸 뒤 사탕을 넣어두던 투명한 유리병 안에 날개가 뜯겨나간 나비들을 모아두었지. 찢어낸 날개는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어. 유리병 속에서 엉겨붙어 바둥거리는 작은 벌레들을 너는 오래도록 집요하게 바라보았단다. 별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얘야. 천체 망원경이 포착하고 끔찍하게 확대해낸, 과거의 별빛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말이야. 난 네가 곤충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전 곤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 취향이나 꿈은 자라나면서 바뀌기도 하는 법이니까.

어머니는 혼동하고 있어요.

사탕 병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나비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순순히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어. 유리병의 바닥과 벽면에는 눈처럼 하얀 설탕가루들이 붙어 있었고 나비들은 절망적으로 경련하면서 춤을 췄지.

아버지는 아직 주무시나요?

그래. 하지만 일어나셨단다. 네 아버지는 지금 면도칼로 내 잠옷을 찢어내고 있단다.

어머니는 지금 피를 흘리고 있나요? 그래. 내 등에서 축축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진단다.

어머니는 곧 죽을 건가요?

잘 모르겠단다. 네가 나를 꿈꾸는 걸 그만두면 난 죽음 없이도 사라질 수 있을 거야.

사라짐은 죽음과 같지 않아요.

맞아. 그러니 사라지기 전에 죽어야 하겠지. 네가 나를 잊기 전에 네가 우리를 더 이상 꿈꾸지 않기 전에. 네가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여자는 초록의 젖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넌 네 아빠를 꿈꾸었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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