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22

오래전에,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꿈꾼 적 있어. 그 꿈에서 나는 순진한 여자아이였고 그는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다정한 남자였어. 그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였어. 우리 반은 아니었고 옆 반의 교사였지. 아이들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그 남자를 사랑했어. 나 역시 그를 사랑했어. 웃을 때, 그는 어린 소년처럼 보였어.

우린 옛 교정의 버려진 미술실에서 함께 만났어. 미술실의 열쇠는 그와 나만이 가지고 있었어. 우리는 그곳에서 서로의 길고 희미한 그림자를 끌어안았어. 그는 내가 고아이며 학교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는 간혹 밤을 떠도는 나를 발견했고 우리는 텅 빈 복도나 별의 그림자들 앞에서 사랑을 나눴어.

남자는 내가 몇 년 전에 옥상에서 뛰어내린 여자아이를 닮았다고 말했어. 그래서 그는 나를 처음 마주쳤을 때 내가 그 여자아이의 유령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지. 놀랍게도 그 여자아이와 내 이름은 같았어.

그는 내게 종종 미안하다고 했어.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괜찮다고 말했지. 미술실에서 사랑을 나눈 뒤에 그가 갑자기 내 목을 졸랐을 때 그는 나보다도 더 놀랐지.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어.

그는 나를 죽이려 한 게 아니라고도 말했지. 그는 그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해 줬어. 여자아이는 학교를 떠도는 고양이들을 잡아 죽이는 버릇이 있었다는 거야. 여자아이는 종종 피투성이로 나타났고 그는 여자아이에게서 풍기는 죽음의 악취를 견딜 수 없다고 했어. 그런데 그 애는 남자가 고양이를 때리고 죽인다고 비난했다고 했어. 그는 여자아이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어느날 이 미술실에서 그는 거울을 보았고 피투성이인 그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했다고 했어. 그의 얼굴은 고양이의 발톱 자국으로 엉망이었고 목과 셔츠까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린 채였어. 그는 비명을 질렀고 여자아이의 목을 졸랐어. 여자아이는 죽어가는 고양이의 신음소리를 냈고 그는 여자아이의 목이 고양이의 것처럼 뜨겁고 가느다랗다고 생각했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는 여자아이를 옥상에서 집어 던졌다고 내게 말했어. 난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는 채로 그의 한탄 같은 읊조림을 들었어. 난 그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할 수 없었어. 입술은 마취된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고 혀도 마찬가지였지.

그는 내게 입을 맞추며 내 이름, 혹은 죽은 여자아이의 이름을 애틋하게 속삭였어. 그게 내 첫 번째 죽음이었어.

암도마뱀은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여자는 시체 안치소가 우주처럼 추웠다고 속삭였다. 그는 두 번 다시 나를 꿈꾸지 않았어. 내 이름은 출석부에서 영원히 지워졌고 내 책상에는 하얀 꽃 한 송이가 놓였지. 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 음험하고 절망적인 갈빛으로 변해버렸고 그걸로 끝이었어.

하지만 삶과 꿈은 죽음 뒤에도 끝나지 않았어.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내 앞에는 천사의 고기가 있었어. 남자는 나와 함께 먹어주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검게 부패해가는 고기를 홀로 다 먹어야 했어.

암도마뱀은 천사들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천사들은 모두 얼어 죽었어.

여자는 속삭였다. 너는 나아갈 거야.

어디로?

삶으로, 혹은 죽음으로. 혹은 무한한 꿈으로. 꿈의 경계로. 꿈의 경계 밖으로.

내가 뱉지 못한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 암도마뱀은 늙은 여자의 목소리로 외쳤다. 난 늙은 여자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지만 발전과 진보라는 말만큼 악한 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우리는 각자의 퇴락을 설계하기 위하여 나아갈 뿐이죠, 정신을 고양하고 글을 쓰고 음악을 하고 철학을 하는 그 모든 소용은 각자를 더 효율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퇴락시키기 위한 방책일 뿐이에요 삶은 정신을 망쳐놓고 현상을 망쳐놓고-물론 세계를 망칠 순 없겠죠 우린 세계에 대해 유령과도 같아서 조금의 물리적인 영향도 끼칠 수 없을 테니까 불합리하지만 그래요 선생님 난 내가 세계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 내 움직임과 구토와 오열이 세계를 망치고 일으킨다는 말을 조금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만큼 허황되고 악질적인 거짓도 없죠 세계는 나와 철저히 무관해요 기껏해야 현상만이 나를 허용할 뿐-모든 것을 복구불가능하게 퇴락시키기는 과정에 불과하죠 우리는 기껏해야 목을 매달 높이만큼만 상승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이외의 비상, 비상에 대한 헛된 믿음은 모두 죄악이라는 것, 아직도 세계의 변증법적 진보를 믿는 자들, 선을 믿는 자들에게 난 흉측한 구더기와 같겠죠 풀 한 포기 갉아먹지 못할, 나무 한 그루 훼손하지 못할, 철저하게 무력한 기생생물. 암도마뱀은 숨을 몰아쉬었다.

여자는 남자를 아직도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너를 죽인 남자를?

여자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그는 나를 죽인 게 아니야.

암도마뱀은 말했다. 하지만 죽은 건 너였어.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여자는 속삭였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서로를 죽일 수는 없었어. 서로를 낳기 위해 서로를 죽일 수 없었던 거야. 그는 아직도 학교의 교사로 일하고 있어. 난 가끔 꿈에서 깨어날 때, 혹은 다른 꿈으로 옮겨갈 때 그를 봐.

암도마뱀은 왼손을 들어 줄을 잡아당겼다. 종소리가 길게 울려퍼졌고 곧 길고 음산한 그림자를 가진 간호사가 들어섰다.

간호사는 여자를 노려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여자는 간호사를 볼 수 없었다. 여자는 오직 간호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주저하며 말했다. 여기 파리떼가 있는 것 같아.

암도마뱀은 작게 웃었다. 파리?

아니, 파리떼. 파리가 수백, 수천 마리는 있는 것 같아. 그것들은 울고 있어.

암도마뱀은 파리는 울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고 여자는 울며 애원하듯 말했다. 파리들이 울고 있어. 그것들은 배를 갈라낸 어미처럼, 아이들을 잃고 자궁을 잃고 날개가 뜯겨나간 것처럼, 이제 다시는 어디로도 날아갈 수 없을 것처럼 울고 있어.

암도마뱀은 여자의 눈을 내려다보며 그건 단 한 마리의 벌이라고 했다. 페트루솁스카야의 암벌. 살충제에 녹아가는 날개를 붙들며 황급히 돌아가버린 수천 마리의 벌떼와 홀로 남은 한 마리의 여왕벌을 떠올려 봐. 독에 젖은 날개를 미친 듯이 펄럭이며 알들을 살리기 위해 최후의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던.

간호사는 바닥을 짜증스럽게 닦고 열리지 않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려 애쓰고 있었다. 간호사는 여자에게 빨리 나가달라고 소리쳤지만 여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는 슬픔으로 비틀거리며 속삭였다. 수업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복도에서 들여다볼 때면 행복으로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져나가는 것 같았어. 미술실 복도를 울리는 창백하고 서글픈 발소리를 들으면서 난 눈물을 흘렸어. 교무실에서, 복도에서, 급식실 앞에서, 운동장에서 그는 내게 눈짓했고 나는 기쁨으로 얼어붙어서 숨을 멈추었어.

그는 우리 관계를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어. 사실 그는 그럴 말을 할 필요도 없었어. 나는 우리의 관계를 누설하고 노출해서 닳게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어. 언어는 사실을 훼손시키니까. 입술의 열기와 경련, 슬픔과 고통스러운 포옹 같은 것들을 모두 반들반들하게 망쳐버리니까.

간호사는 벽의 곰팡이 자국을 없애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걸레로 벽을 닦았고 걸레에 들러붙은 파란 곰팡이 자국을 보고 헛구역질을 했으며 분무기에서 알 수 없는 액체를 분사해댔다. 곰팡이는 검게 녹아 흘러내렸다.

여자는 흘러내리는 곰팡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에 능숙했어. 나는 그를 사랑했고 내가 그걸 잘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어. 가끔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 사실 그는 없었고 사랑도 없었고 나는 아직 순수하며 심지어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는 생각을.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죽지 않았다는 생각. 단 한 번의 재판조차 없었다는 생각. 혹은 모든 일들이 이미 일어났다는 생각. 어떤 꿈에서 이미 나는 나의 최후에 도달했고 이후의 꿈들은 영원히 그 이전의 사건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 따라서 미래는 과거이고 과거는 반복적인 미래인 셈이지.

이런 병실에 드러누워서 죽어가는 늙은 여자인 나는 이렇게 하얀 천장을 보면서 꿈들을 영사해. 꿈의 이미지들은 미래인 동시에 과거야.

나는 내가 그 이상한 이미지들을 이미 살아보았다는 것을 잊고서는 마치 처음 보듯이 그것을 생경하게 감상해. 하지만 서글픈 예감이 이미지 틈새로 치밀어 오르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역행하는 물방울들을 떠올려. 우주에서 아이를 낳은 개는 공중을 수놓는 붉고 축축한 꽃들을 봐. 양수와 피는 꽃잎처럼 공중 가득 퍼지고 아이는 탯줄에 연결된 채로 개의 몸 위로 날아올라. 개는 붉음을 모르면서도 그 모든 것이 눈부시게 붉다고 생각해.

난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어. 남자는 그래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었어. 그는 내게 그를, 그리고 나를 낳는 것을 허락해 주었어! 하지만 그가 허락한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고 모든 미래를 폐기했어. 아이와 공중을 부유하는 불투명한 양수 방울들과 벌거벗은 팔다리와 피투성이 주둥이 그 모든 것을.

남자는 내게 임신했느냐고 묻지 않았어. 묻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을 거야. 그때 나는 끔찍하게 말랐고 사실 초경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자궁벽에서 녹아내린 피를 처음 흘리던 날, 나는 버스 자리에 남은 동그란 피 얼룩을 보았고 깜짝 놀라 뛰쳐나왔어. 내 뒷모습을 향해 수군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어. 그들은 내가 남겨두고 간 피투성이 좌석을 보고 욕을 내뱉으며 즐겁게 웃었겠지.

나는 허벅지 사이로 핏방울을 흘리면서 등교했어. 난 그와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어. 나는 생식기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더럽다고 생각했어. 피는 오줌보다 짙고 검었고 따라서 오줌보다 더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어.

나를 보고 수군거리며 웃던 짐승들 누구도 나를 멈춰 세우지 않았어. 골목에 주저앉은 남자애들은 내게 휘파람을 불어보이며 미친 여자처럼 웃어댔고 난 곧장 학교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울었어. 맨다리에는 타르 얼룩 같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치마는 곰팡이처럼 불길한 갈빛 얼룩으로 젖어 있었어.

갈아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난 교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 의자에 앉은 채로, 피를 흘리면서, 자리가 젖어드는 걸 느끼면서 나는 수업을 들었어. 의자가 내 피로 젖는 걸 느끼면서. 난 다리 사이로 흥건히 흘러내리는 피를 느꼈어. 복도 바닥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검은 피를 보았어. 하지만 사실 피는 그렇게 많이 흘러내리지 않았어. 동전 크기 만한 작은 얼룩 두어 개. 그게 전부였어. 하지만 나는 교실 바닥을 적시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검은 물을 보았어. 물에서는 물고기의 내장처럼 비린 악취가 났어. 달콤하고 비린 생의 악취. 나는 책상에 고개를 묻고 흐느껴 울었어.

교사는 나에게 경고했어. 수업 시간에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나는 내가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울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소리 높여 울부짖었어.

교사는 수업 시간에 울어서는 안 된다고 했어.

교사는 내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했고 나는 자리에 엎드린 채로 완강하게 버텼어. 나를 응시하는 시선들이 느껴졌어. 나는 죽고 싶었어. 눈과 코와 입과 귀에서, 옆구리에서, 무릎 안쪽에서, 절개된 피부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서 내게서 새어나간 더러움을 잔혹함으로 뒤덮고 싶었어. 검음을 붉음으로 감추고 싶었어. 하지만 그 모든 건 같은 피야! 같은 혈관을 지나고 같은 몸을 돌고 같은 몸에서 나간 같은 피야. 더러움과 순수함은, 붉음과 검음은 같은 사물이야. 나는 오줌을 지린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두려워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 피를 보여주고 웃을 수 없었지만 피와 같은 액체로 이루어진, 피만큼이나 붉고 검은 눈물을 흘렸어. 눈물은 얼굴을 타고 내려와 책상 위로, 내 손등 위로 떨어졌어. 눈물은 놀랄 만큼 차갑고 생경했어.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몸인 것처럼.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살이 내 위로 떨어지는 것처럼. 종아리 사이로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어.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것 같았어.

교사는 당장 일어나라고 소리쳤고 난 개미들에게도 자궁이 있을지 생각했어.

교사는 내 책상 앞까지 다가왔어. 그의 발소리가 들렸어. 지면에서 울리는 거인의 발소리. 악몽을 부수며 다가오는 지진 같은 발소리.

교사는 내 머리채를 잡았고 나를 억지로 끌어올렸어. 수면 위로 끌려나온 나는 사막의 물고기처럼 헐떡거리며 울부짖었어. 교사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어. 검은 고리 같은 구멍. 왜냐하면 나는 그의 얼굴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의 얼굴은 오려낸 것처럼 텅 비어 있어.

나는 비명을 지르며 제발 교사가 나를 내버려두기를 간절히 바랐고 교사는 내 머리채를 잡아당겨 나를 억지로 일으켰어. 그리고 모든 것이 드러났어. 피, 검음, 얼룩, 개미들과 액체, 경련, 수치, 두려움, 절망, 가려움, 미칠 듯한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

교사는 말 없이 교단으로 돌아갔고 왁자지껄한 웃음이 울려퍼졌어.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소리쳤어. 선생님 유리는 죽어가는 건가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기 위해 교실 뒷문을 향해 달려갔어. 아이들은 나를 보고 있었어. 내 얼룩을 보고 웃고 있었어. 개미들은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어. 개미들은 내게서 내려가고 있었어. 영원히 내려가고 있었어.

난 필사적으로 뒷문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어. 문틈도 문 손잡이도, 자그마한 균열조차도 보이지 않았어. 난 필사적으로 창문을 더듬었지만 창문은 마분지를 오려붙인 것처럼 열리지 않았어. 손톱이 벗겨질 때까지 창문을 밀어댔지만 창문은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투명한 피부로 응시하고 있었어. 앞문도 마찬가지였어. 아이들은 연극배우를 보듯이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어.

누군가 그건 출구가 아니라고 소리치며 어린아이답게 장난스럽고 잔악한 폭소를 터뜨렸어.

교사는 칠판에 도형들을 그리면서 수업을 이어나가고 있었어. 난 다섯 개의 각을 가진 도형과 두 개의 직선이 무한한 선과 무한한 점에 대한 어설픈 상징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교사는 무한한 면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해 설명했어.

나는 운동장 쪽의 창문을 향해 달려갔고 아이들은 내가 수조에서 건져낸 금붕어라도 되는 양 웃어댔어. 발목뼈를 따라 흘러내리는 붉은 피와 창문. 나는 창문을 열어젖혔고 멀리 공중에 멈추어선 까마귀가 보였어.

까마귀는 거미줄에 매달린 작은 파리처럼 정지한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어. 날갯짓도, 흔들림도, 날아오름도, 추락도 없었어. 까마귀는 공중에 박힌 작은 점처럼 보였어. 그 애는 내게 묻고 있었어. 할 수 있겠어? 나갈 수 있겠어? 돌아갈 수 있겠어?

난 곧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고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거대한 붉은 장미를 보았어. 무한한 장미들을, 현기증 나는 속도로 증폭되고 있는 꽃잎들을 보았어. 난 내 머리가 깨지고 나면 그 누구도 내 다리에서 흘러내리던 검은 피를 신경쓰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어.

난 깨어났고 교사는 내게 수업 중에 꿈을 꾸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고 나는 나를 뒤덮은 갈빛의 얼룩들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어.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떠다니는 비린 생의 냄새를 의아해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 다리를 닦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끌어안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비웃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밀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죽이지 않았고 아무도 나와 함께 살아가지 않았어. 얼룩은 손톱만큼 작은 크기였어. 그렇게 피를 흘리는 여자아이들은 너무 많았고 누구도 그것을 별다른 일로 여기지 않았어. 교사는 내 종아리를 매질하면서도 말라붙은 핏자국을 발견하지 못했어.

교사는 매를 맞고 자리에 돌아가는 내게 배설과 배출의 차이점에 대해 물었고 나는 무한한 오각형들에 대해 말했어.

아이들은 그제야 왁자지껄하게 웃었고 교사는 마치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처럼 나를 무시하며 다른 아이에게 질문을 돌렸어. 내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정답을 어떤 아이는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완벽하게 읊었어.

교사는 아이의 말을 그다지 집중해서 듣는 것 같지 않았지만 아이가 대답을 마쳤을 때 교사는 웃으면서 잘했다고 말했어.

그때 공중에 정지해 있던 검은 점과 같은 까마귀가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게 보였어. 나는 비명을 질렀고 까마귀는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져내렸어. 불그스름한 얼룩이 창문에 남았어. 나는 참지 못하고 흐느꼈어. 아무도 내게 신경쓰지 않았어.

교사는 기묘하고 구불구불한 미로와 같은 도형들을 검은 칠판 가득 그려넣었고 그것들이 심장, 대장, 소장, 방광과 자궁이라고 말했어.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의 길고 구불구불한 글자처럼 보였고 도저히 하나와 다른 하나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어. 난 끔찍한 어지러움을 느꼈고 헛구역질을 했어. 어떤 것들은 다른 사물보다 쉽게 깨져. 사람들은 단지 그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연약하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깨뜨리려고 해. 쉽게 깨지는 것들은 폭력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믿으려 하지만 그들이 깨진 건 단지 그들을 깨뜨리려 하는 손들이 있기 때문이야. 검은 피나 불결함과 슬픔 같은 건 깨어짐의 원인이 아니야.

나는 창문에 남은 연한 피의 얼룩을 오래도록 바라봤어. 내가 그것을 집요하게 관찰하면 언젠가 새가 다시 날아오를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난 쓰레기통 근처에 떨어져 있던 물티슈를 주워서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닦아냈어. 의자에 남은 피 얼룩도. 그것은 놀랄 만큼 쉽게 닦여나갔어.

쉬는 시간에 교사는 나를 불렀어. 나는 교사의 검고 기다란 그림자 같은 뒷모습을 묵묵히 따라갔어. 복도 끝에서 교사는 텅 빈 교실로 나를 이끌었어.

먼저 들어가렴. 교사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어.

우리는 둥글고 하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교사는 내게 투명한 기포들이 떠다니는 보랏빛의 음료를 건네주었어.

교사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어. 널 때려서는 안 됐어. 날 용서해 주겠니?

교사는 준비해 놓은 대사를 읊듯이 어색한 어투로 말했어. 나는 교사를 용서해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화를 내거나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수치도 상처도 요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어. 그는 내게 용서를 요구했고 나는 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어.

교사는 고맙다고 중얼거렸어. 그의 텅 빈 고리가 일그러지면서 웃었던 것 같아. 그의 구멍이 웃음 지었고 나는 그가, 혹은 그녀가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그를, 그녀를 용서했기 때문에 그는, 그녀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걸. 사실 남자와 사랑할 때 나는 그때보다 훨씬 많은 피를 흘렸어. 미술실의 나무 바닥은 피로 검게 젖어 들었고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었어. 호흡과 경련과 공중을 떠도는 비린 냄새와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살결. 그는 내 위에서 울었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어. 남자는 흐느끼면서 조용히 하라고 애걸했어.

조용히 해, 유리.

그는 어린 소년의 유령처럼 창백하고 슬퍼 보였어. 그의 눈물이 내 귓속으로 흘러내렸어. 눈물은 굴처럼 미끄럽고 따뜻했어.

그는 미안하다고 흐느꼈어. 미안해, 미안해, 유리, 미안해.

그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찢어졌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금속성의 피부 조각들이 공중을 떠다녔고 내 얼굴과 턱밑과 가슴에 부딪혔고 끔찍하게 깊은 생채기를 냈어. 나는 그가 나를 목졸라 죽이기를 바랐어. 그가 공중을 떠도는 천사의 깃털들이 내 심장에 꽂혀버리기를. 이후로 무엇도 슬퍼할 필요가 없게. 찢겨나가는 빌어먹을 통증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게. 피와 살과 정액과 체액의 비릿한 냄새가 달콤한 분홍빛으로 내 위를 떠다녔어. 생일파티의 투명한 유령들처럼. 피에로의 팔 위로 날아오르는 자그마한 공기 새들처럼. 새들은 울지 않고 짖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아. 새들은 산소로 가득 차 투명하게 부풀어 오르고 새들의 속에서는 어떤 생명도 자라나지 않아. 새들은 텅 빈 채로 날아오르고 있어.

나는 남자가 제발 빌어먹을 울음을 그치기를, 빌어먹을 미안하다는 소리를 그만두기를 바랐어. 난 그에게 죽고 싶었고 그를 죽이고 싶었어. 하지만 난 영원히 그를 죽일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어. 왜냐하면 난 그가 나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난 그를 죽이는 대신 어리고 사랑스러운 연약한 여자아이를 죽였지. 축제의 풍선처럼 살구빛으로 부풀어오른 연약한 아이의 얼굴에 나는 날카로운 비명을 박아넣었고 아이는 더 이상 사랑을 느낄 수 없을 것이었어.

난 남자를 죽이는 대신 그 애를 죽였어. 그 애는 내가 남자를 사랑하듯 나를 사랑하게 되었고 내가 삶을 사랑하듯 죽음을 사랑하게 되었고 내가 그 애를 죽였듯 인형들의 얼굴에 문구용 가위를 박아넣게 되었어. 어쩌면 다음 번에는 시체 안치소의 행운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요즈음에는 얼어 죽는 짐승들이 많고 짐승의 사체를 시체 안치소로 데려가는 이들은 극히 드무니까. 창문에 부딪혀 추락한 까마귀의 시체는 사막의 모래에 파묻혀 썩어갈 테지. 깊고 텁텁한 흙 속에서 까마귀는 다시 살아날 테지. 까마귀는 건조하고 부드러운 모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오랜 세월 몸부림쳐야 할 거야. 사막 아래 매장된 혹등고래는 어쩌면 영원을 헤매야 할지도 몰라. 시체 안치소의 희고 붉고 검은 발들. 발들은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어.

남자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 그는 나를 잊어버리려 했고 실제로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어. 시체 안치소에서 나는 그가 나를 데리러 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어.

두 번째 죽음 이후 검시관은 내게 돌아가라고 말했고 나는 냉동고 문을 스스로 열고 나와 맨발로 시체 안치소를 떠났어. 하루 동안 냉동되어 있던 몸이 미친 듯이 차갑게 느껴졌지만 검시관은 타월 한 장 주지 않았어. 난 그가 입고 있던 흰 가운을 내게 덮어주길 바랐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난 춥다고 중얼거렸고 그는 못 들었거나 못 들은 척했어.

모든 시체들에게 옷을 주다가는 그 자신이 벌거벗고 말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어.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많이 입고 있었고 나는 지나치게 벌거벗었어. 그는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있지만 나는 단 하나의 옷도 입고 있지 않아. 피부, 내게 남은 건 끔찍하고 피투성이인 피부뿐이야. 가면의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보르헤스는 말했지. 하지만 가면의 안에는 피부가 있어! 가면의 안을 빼곡이 채우고 있는 수백 겹의 가면들 안에는 빌어먹을 피투성이 피부가 있어. 피부를 벗겨내고 나면 끝이야. 피부 안에는 절망적으로 붉은 살이 있어. 살, 사라지지 않는 살. 벗을 수 없는 살. 가장 벌거벗은 이들의 화상 입은 속살.

꿈 속에서 나는 성대한 생일파티를 했어. 새들은 내게 푸른 강보에 싸인 아이를 내밀었고 나는 봄의 신부처럼 수줍게 내 아이를 받아들었어. 난 선물을 뜯어보듯 조심스럽게 강보를 벗겨냈고 붉은, 피투성이 발을 보았어. 거인의 발이었어. 가장 거대한 아이보다도 더 거대한 발이었어. 난 애처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거인의 발을 끌어안았어. 발은 피로 축축했고 내 가슴은 검붉은 얼룩으로 젖어들었어. 나는 심장을 적출해낸 여자처럼 피투성이였어. 하지만 심장은 내 안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었어. 나는 거인의 발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었어.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고 새들은 부드럽고 투명한 날개를 펼쳐서 나를 끌어안았어. 새들의 작은 머리가 내 이마에 맞닿아왔어. 새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들을 내밀었어. 나는 슬픔으로 비틀거렸고 발은 여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어.

발이 잘려나간 타르타로스의 거인들은 땅에 무릎을 대고 기어 오고 있어, 누군가 말했어. 거인들의 발목에서는 붉은 늪들이 태어나고 있어. 거인들은 무한한 붉은 세계를 낳고 있어. 거인들은 구원을 기다리는 세계들을 낳으며 다가오고 있어. 거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낳기 위해 돌아오고 있어.

나는 거인의 발을 애틋하게 안아 올렸어. 거인의 발은 작고 희미한 소리로 울고 있었어. 새처럼 아름답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새들은 거인의 피투성이 발을 늙은 요정들처럼 축복했고 나는 새들에게 다리를 구부려 인사했어. 새들은 거인의 발과 함께 울었어. 우리는 흐느끼고 울부짖었어. 거인의 발은 애처로운 흐느낌으로 오래도록 울었어. 난 발을 잃어버린 거인이 갓 태어난 붉은 발을 찾아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땅은 희미한 흐느낌으로 울리고 있었고 우리의 발은 붉은 생리혈로 젖어들었어.

남자는 나를 끌어안으면서 미안하다고 속삭였어.

내 어깨는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어.

남자는 나를 죽여서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입술이 굳었고 혀가 굳었고 눈은 점점 멀어가고 있었어. 나는 내 심장이 멎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었어. 그는 검은 그림자처럼 번져가고 있었어.

끝일까? 이게 끝일까?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어.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어. 나는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어. 드 퀸시의 표백된 양피지가 내 속에서 미미한 열기로 떨리고 있었어. 양피지의 가장 깊은 곳에 인박혀 있는 비밀스러운 문자들이 드러났어. 어린시절의 언어를, 거인의 잘려나간 발을 나는 떠올렸어.

거인이 오고 있어. 나는 생각했어. 불구가 된 거인이 오고 있어. 신들은 불구를 꿈꾸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고향을, 천사를 꿈꾸기 시작했고 불구가 된 몸으로 지옥을 기어오르는 거인들을 꿈꾸기 시작했어.

나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 꿈은 여러 겹의 감추어진 언어를 드러내며 녹아내리고 있었어. 남자는 내 앞에서 축축한, 그리고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눈물을 오래도록 떨구다가 곧 그와 나의 열기와 액체를 벗은 셔츠로 문질러 닦고 나를 들쳐멘 뒤 옥상으로 올라갔어.

옥상은 검고 아득한 밤으로 덮여 있었어. 남자는 옥상에서 나를 떨어뜨렸고, 마치 바람결에 실수로 꽃잎을 놓치듯이, 차 창문 밖으로 쓰레기를 놓치듯이 그렇게 나를 놓쳤고 나는 거인들이 기어오르고 있는 깊은 틈으로 떨어졌어. 그는 벌집에 홀로 남은 여왕벌처럼 울었을 거야. 그는 나와 그의 오래된 허물을 홀로 정리하고 그의 상체와 하체를 적신 피를 홀로 닦아내고 바닥을 긁어내고 피투성이가 된 손을 씻고 씻고 또 씻었을 거야. 그는 처음 생리를 한 여자아이처럼 하혈했을 거야. 그는 울었을 거야. 그의 얼굴은 붉은 눈물로 젖었을 것이고 그는 나를 잊었을 거야. 같은 옥상에서 뛰어내린 두 명의 여자아이를 사람들은 구분할 수 없었을 거야. 그는 슬픔으로 비틀거리며 텅 빈 복도를 지나쳤겠지. 그의 걸음들 사이사이로 젖은 그림자들이 스며들었겠지. 그는 그림자 하나에 하나의 추억을 그림자 하나에 하나의 죽음을 그림자 하나에 하나의 이름을 그림자 하나에 하나의 사랑을 잊어갔겠지. 그림자들은 알 수 없는 중력을 따라 휘어지고 마침내는 흩어졌을 거야. 그는 오랜 악몽의 기원을 잊어버린 채 죄 없이 서글픈 어둠을 만끽했을 거야. 난 그의 우수와 슬픔과 고통의 기원이 되었겠지만 그는 거인의 발을 기억할 수 없었을 거야.

왜냐하면 그는 죽지 않았으니까! 그는 목이 졸려 죽지도 옥상에서 떨어져 죽지도 않았으니까.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그의 것이 아닌 피는 지워내면 그만이었겠지. 그는 오래도록 악몽을 꾸었지만 꿈에서 깨어날 때는 악몽의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렸지. 드 퀸시의 마법 같은 양피지들, 표백되어 드러나는 최후의 문양인 최초의 기억은 아직 그에게 출몰하지 않았겠지.

왜냐하면 그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는 아직 한 번도 죽지 않은 채로 살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에게 복수할 생각은 없어.

여자는 벽을 따라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물기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복수하지 않아. 그는 거인이 아니고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까. 내가 학교로 돌아가면 그는 내가 그가 아는 여자아이와 아주 닮았다고 말할 거야.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믿을 것이고 나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는 내 목을 조를 거고 나를 옥상에서 밀칠 거고 다시 나를 잊을 거고 그는 무수한 여자아이들이 새처럼 그를 에워싸고 노래하는 악몽에 시달리게 될 거야. 하지만 나는 같은 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 난 죽음의 학교로 가게 될 거야.

암도마뱀은 반가운 환호성을 지르며 TV에서 봤다고 말했다. 어느 여선생이 인터뷰하는 걸 봤어. 그 여자는 정말 좋은 선생인 것 같았어.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될지도 몰라!

그래, 여자는 웃으며 속삭였다. 우리는 정말 같은 교실에서 만나게 될지도 몰라. 같은 교실에서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같은 꿈을 기억하게 될지도 몰라.

암도마뱀은 여자의 이름을 물었고 여자는 암도마뱀이 그녀의 이름을 결코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답했다. 암도마뱀 역시 그녀에게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그녀는 곧 잊어버렸다.

여자는 눈을 떴다. 하나의 눈과 하나의 꿈. 오렌지 빛깔로 물든 검은 뺨이 그녀의 앞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백조처럼 공중을 유유히 떠다니는 흰 피부 조각들. 여자는 책상에 앉은 채로 영사기에서 쏟아져나오는 빛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스크린 위에 여자의 그림자들이 올라앉았다. 아이들은 수군거리며 여자를 흘끔 돌아보았다. 여자는 화면 속에서 나체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케이크 자르는 플라스틱 칼로 사과를 꿰뚫었다. 사과를 자르고 할퀴고 손상시키고 꿰뚫었다. 사과는 텅 빈 두 개의 눈구멍으로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검은 뺨이 여자를 향해 돌아갔고 여자는 내밀한 울음을 외쳤다. 죽음조차 삶이다. 여자는 생각했다. 죽음조차 삶이다. 영원히, 경이로운 그녀에게 숭배를.

화면 속 여자는 하얀 암사슴 가죽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로 웃었다. 이제부터 나는 나비입니다. 여자는 말했다.

이것은 나비의 가죽이고 나는 나비의 가면을 쓴 나비의 상징입니다. 여자는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새들은 얼음조각을 물고 가고 있습니다. 새들은 빗방울을, 하나의 나뭇잎과 기이한 도형을 물고 가고 있습니다.

화면 속 여자는 등을 구부리고 사슴처럼 네 발로 뛰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벌레처럼 흔들렸다.

여자는 외쳤다. 작은 벌레들은 눈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투명하고 깊은 홍채 속에 잠겨 익사하는 나비들을 보세요. 새들은 유리로 만들어진 홍채를 물고 가고 있습니다. 홍채는 수만 마리 벌레들의 무덤입니다.

여자는 북받치는 고통을 참으며 속삭였다. 핏속의 피와 핏속의 깃털과 핏속의 초록 잎, 피는 차갑게 끓어 넘치고 있습니다. 나는 거미줄에 매달린 나비의 시체 주위로 달겨드는 파리들을 봅니다. 방사형의 아름다운 건축물에 매달린 나비는 체액이 빨려 미라가 된 채로 죽어갑니다. 파리들은 살이 쪄 흙바닥을 질질 기어갑니다.

여자는 돌연 낫에 베인 듯 쓰러지며 소리쳤다. 나는 암사슴 혹은 나비의 마스크를 썼습니다만 색맹인 맹수들에게 눈 먼 맹수들에게 나의 의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후각의 정밀한 그물로 나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대로 달려듭니다. 나는 의태했습니다만 오직 나를 위해 의태한 것입니다. 나비는 처음부터 비밀이었고 암사슴의 희미한 흔적을, 목성의 고리처럼 어렴풋한 발자욱을 찾아 나서는 사냥꾼은 없었으며 나는 오직 나를 위해 의태하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여자는 소리쳤다. 나는 죽어갑니다만 오직 나를 위해 죽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의 동공이 유리처럼 투명하다고 믿습니다만 사실 꿈의 동공은 텅 비어서 투명한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홍채와 절망으로 일그러진 구멍들과 죽음으로 쪼그라든 가죽들을 보십시오.

여자는 텅 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비명을 질렀다. 보이십니까? 늙고 귀먹은 음악가는 그에게만 들리는 음악이 남들에게도 들리는지 계속 확인합니다만, 그의 몸 속에서 울려퍼지는 끔찍한 흐느낌이 실재인지 확인하려 몸부림칩니다만, 들리십니까? 나는 박제가 되어버린 나비들을 셉니다. 하나 서른, 오십삼, 나비들의 날개는 말라붙었고 쪼그라들었고 황폐한 갈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나비들은 더 이상 젖어 있지 않습니다. 피에 퉁퉁하게 부어오른 파리들만이 바닥을 기어다닙니다. 혈연의 사물들, 연루된 사물들, 성스러운 단순함으로 반짝이는 딱정벌레, 우리는 사물들의 뼈를 부수면서 웁니다.

영사기의 빛이 여자의 등을 향해 쏟아졌다. 여자는 둔중한 가벼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목이 긴 유리병에 갇혀 있는 나방처럼 그녀는 몸을 떨었다. 목소리들은 그녀의 주위를 새처럼 날아다녔다. 여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영사막에 모인 빛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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