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23

영사된 여자의 흰 몸이 흔들렸다. 검은 개의 마스크를 쓴 알몸의 남자아이가 그녀의 마른 척추를 걷어찼다. 여자는 몸을 더욱 움츠렸고 남자아이는 작고 단단한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여자는 헐떡이며 비명을 질렀다.

사물의 뼈를 부수고, 그리고? 뭘 해야 하죠? 여자는 울부짖었다. 사물이 부서지고 죽음이 찾아오고 동공이 풀어지고 유령들이 다가들고 희곡은 끝났습니다. 희곡은 거기까지였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운명을 모르는 채로 눈 먼 손을 더듬거리며 기어갈 수밖에 없어요. 조롱과 치욕과 모멸을 견디면서. 희곡의 마지막 대사를 내뱉은 채로, 우리는 미칠 듯한 무대 위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우리는 하라는 것을 다 했고 지시된 대사를 다 읊었고 죽어야할 것을 전부 죽었고 이제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여자는 헐떡이며 흐느꼈다. 꿈은 이미 결말을 꿈꾸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불안과 예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검은 개의 마스크를 쓴 남자아이는 여자의 음부와 배를 걷어차며 울부짖고 있었다. 여자는 무대의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비명을 질렀다.

정원은 짓뭉개졌고 사과의 으깨진 뼈와 과육이 에덴 곳곳에 남았습니다. 성스러운 새와 파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유의 마지막 달콤함을 빨아먹었고 신은 붉은 사과 혹은 심장을 우물거리며 우리들의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검은 뺨과 입술이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게 움직였고 우리는 신의 뺨에 내려앉은 속눈썹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신은 여자의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백치처럼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델피의 여사제들은 신의 어깨와 자그마한 얼굴을 주무르며 위로하였고 신은 여사제의 하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었습니다. 불안정한 형체들이 공중을 떠돌며 흐느꼈습니다.

여자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내밀한 슬픔을 분비하는 하늘에서는 달콤한 비린내가 진동합니다.

그는 나를 이렇게, 이렇게-여자는 그녀를 발길질하는 검은 개의 마스크를 가리켰다-때렸습니다. 신은 나를 피투성이로 만들었고 신은 내 안에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나는 맨 손으로 배를 찢어 심장을, 신을 끄집어내었고 신은 붉은 피를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신은 우리에게서 훔쳐낸 사과와 심장을 게걸스럽게 물어뜯었습니다. 신은 신의 고기를 먹었고 우리는 신을 벌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에게 영원과 무한의 벌을 부과하였습니다. 무한한 슬픔과 무한한 죄와 무한한 아픔과 무한한 삶으로 신은 출혈하였습니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 암사슴 가죽 마스크를 벗어내었다. 그녀의 맨얼굴은 땀과 눈물로 젖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여자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여자는 벌거벗은 남자아이의 배를 걷어찼다. 남자아이는 바닥에 쓰러졌고 여자는 남자아이의 사타구니와 배를 짓밟으며 비명을 질렀다. 남자아이는 붉은 피 혹은 초콜릿을 토해내며 구역질을 해댔다.

여자는 환호성을 지르며 웃었다. 이 애는 내 귀여운 남동생입니다. 남동생은 천사 같은 아이였습니다. 남동생은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는데 내가 죽은 뒤로 남동생은 중병에 걸려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는 할머니의 간호를 홀로 해냈습니다. 난 간혹 할머니의 잠 옆에 앉아서 남동생의 슬프고 푸른 그림자를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의 입술은 마비되었고 사지는 나무토막 혹은 대리석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렸지만 피투성이 내부는 모든 고통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남동생이 할머니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나는 고아야, 할머니, 나는 불쌍한 아이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 내 홍체가 사랑으로 붉게 젖었다는 걸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 어제 아냐를 봤어. 아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 애는 창녀야, 할머니. 그 애의 음부는 당신 것처럼 검고 더러울 거야.

그 애는 미인대회에 나갔어. 목이 거북이처럼 주름진 남자들 앞에서 희고 부드러운 배와 허벅지를 고스란히 내보였어. 그 애는 도살을 앞둔 암소처럼 천천히 걸었어. 그리고는 정육점에 걸린 붉은 고기처럼 축축하고 신선한 혀를 내밀어 보이며 웃었어. 남자들은 그 애가 최고급 고기라는 걸 인정했고 그 애에게 상을 주었어. 나는 그 애가 붉고 신선한 고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걷는 걸 보았어. 나는 울었고 그 애는 이해하지 못했어.

너는 창녀야, 나는 그렇게 말했어.

아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어. 나는 그 애를 끌어안으려 했고 그 애는 도망치면서 비명을 질렀어.

할머니, 그 애는 썩은 고기일 게 분명한데도 난 사랑으로 홍채가 붉게 변해서 그 애가 가장 신선한 고기처럼 붉게 보여. 누구나 고기를 먹잖아, 할머니. 그런데 왜 나는 먹을 수 없지? 할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내게 고기를 먹여줬을 거야.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 애는 당연히 내게 붉은 살을 맛보여 줬어야 해. 그게 고기의 천명이니까. 고기는 먹히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 도살장에서 얌전히 축축한 눈을 감고 도끼를 기다리는 어린 송아지처럼 그 애는 내게 고기를 내어주었어야 해.

나는 그 애의 뺨을 때렸어. 여자가 그렇게 하듯이 손바닥으로. 그 애는 비명을 지르면서 울었어. 나는 그 애의 팔을 끌고 공터 뒤쪽 숨겨진 지하창고로 들어갔어. 그곳에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어. 병자의 긴 팔처럼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초록 잎사귀들이 우리의 벌거벗은 호흡을 매만졌어.

나는 그 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 아냐, 사랑해.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아냐는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속삭였어.

그년은 교활하게도 결코 사랑을 입에 담지 않았어. 그래도 나는 괜찮았어. 나는 그 애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 애의 맨발은 흙투성이었지만 암소의 혓바닥처럼 축축하고 부드러웠어. 나는 그 애를 안았고 그 애는 비명을 질렀어. 나는 그 애를 먹었고 그 애는 눈물을 흘렸어. 그 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붉었어. 나는 매일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어. 암소들은 지구를 무너뜨릴만큼 많고 붉은 고기들은 매일 도축되는데 어째서 내게 남겨진 고기는 이토록 작은 것일까. 나는 그 애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쥐면서 생각했어.

그 애는 울었어. 그 애의 부드러운 허벅지와 엉덩이는 피투성이였어. 내 몸에도 피가 조금 묻었어.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애를 내 심장처럼 끌어안았어. 그 애는 작은 새처럼 울부짖으면서 바르작거렸고 나는 피투성이가 된 세상을 보았어. 세상은 사랑으로 피투성이었어, 할머니. 그 애의 음부는 검고 더러울 테지만 나는 최고급 암소 스테이크를 먹듯이 그걸 빨았어. 그런데도 그 애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 교활하고 비열한 암소는 울고 바르작대고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그대로 내빼고 말았어.

임신했을지도 몰라. 그럼 다시는 미인대회에 나갈 수 없겠지. 배가 나온 암소에게 아무도 1등상을 주지 않을 테니까. 난 그 애를 다시는 볼 수 없었어. 할머니, 그 애의 오빠는 그 애가 집을 나갔다고 했어. 아마 돈이 많고 주름투성이인 파충류 같은 남자를 따라서 도망간 걸 거야. 그 남자애게는 사랑한다고 말하겠지. 그 남자가 그 애의 어깨를 물어뜯고 뼈를 핥을 때도 그 애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암소처럼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겠지.

여자들은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여자애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어째서 나는 고기를 먹을 수 없어? 나는 고기를 좋아하고 고기를 원하는데 어째서 고기는 나를 원하지 않아? 할머니라면 그 애를 잡아왔을 거야. 그렇지? 그 애를 잡아와서 부드러운 살을 먹기 좋게 해체해서 내게 주었을 거야. 살집 있고 상냥한 암소를 내게 구해다주겠다고 할머니는 몇 번이고 약속했으니까. 암소들이 나를 위해 뼈가 굵고 튼실한 수캐들을 낳을 거라고 말했잖아.

나는 늙은 여자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헐떡이는 남동생을 보았습니다. 남자아이는 늙은 여자의 몸 속에서 보이지 않는 평행선을 따라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쳤습니다. 남자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구역질을 하면서 출구를 찾는 듯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습니다. 늙은 여자는 박제가 되어버린 몸으로 그 모든 움직임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늙은 여자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검은 눈으로 껍질을 벗겨낸 소처럼 붉게 달아오른 남자를 보았습니다.

여자는 검은 개의 마스크를 쓴 남자아이의 멍든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여자애들은, 하고 남자아이는 헐떡이면서 속삭였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 애들은 내게 고기를 주지 않아. 그 애들은 내가 고기를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붉은 고기를 원해. 나는 사랑으로 썩어가고 있고 사랑으로 피투성이야. 할머니, 나는 수만 마리의 암소들을 산 채로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배가 고파. 할머니가 약속했잖아. 가장 크고 매끈한 암소는 내 몫으로 돌아갈 거라고. 암소들은 나를 기다리며 몸을 씻고 있을 거라고. 암소들은 수만 마리의 수캐들을 내게 낳아줄 거라고. 하지만 남은 건 늙어빠진, 병든 암소뿐이야. 할머니, 썩은 고기뿐이야.

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번식해서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꿈들을 낳고 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여자를 훔쳐보고 있었다. 여자는 영사막의 표면 위에서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는 남자아이의 알몸과 여자의 벌어진 입술을 보았다.

여자는 말을 이었다. 늙은 여자를 겁탈하는 남동생은 천사처럼 투명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암소들이 얼마나 그 애에게 무례하게 굴었는지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나는 늙은 여자의 곁에서 역겨운 헐떡거림을 전부 들어야 했습니다.

할머니, 그 애들은 자기들이 암소가 아니라고 말했어. 암소처럼 부드럽고 붉은 몸을 가지고서는 자기들이 암소가 아니라고 했어. 아냐도, 피투성이의 고기로 기어가면서 자기는 암소가 아니라고 말했어. 하지만 보물은 발견한 사람의 것이야.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보물을 소유해야 해. 나는 사람이고 그 애들은 암소니까 나는 당연히 내가 발견한 암소들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보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소를 소중히 여기는 목동은 당연히 보물과 소를 가져야 해. 별은 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니까. 그러니까 아냐는 당연히 그 애를 내게 주어야 했어. 그 애를 그렇게 붉게 보는 건, 그 애를 그렇게 사랑하는 건, 그 애를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보물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보물이 아니라고 말했고 소들은 목동을 거부하면서 비명을 질렀어. 식물들은 짓이겨져 녹빛 피를 흘리기를 거부하였고 제물들은 가슴 위로 가느다란 팔을 뻗어 제사장의 단단한 손을 밀어내었어. 제물들은 살고 싶다고 말했어. 제물들은 그녀들의 심장을 가슴 속에서 키워나가며 자라나고 싶다고 작지만 결연한 목소리로 속삭였어. 제사장은 비명을 지르며 울었고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어.

한 송이의 장미조차도 나를 거부했어. 장미는 수줍고 아름다운 붉은 꽃잎들로 백조처럼 떠내려갔어. 장미는 어린 왕자의 손을 뿌리치면서 그녀가 고통스럽게 뽑아낸 뿌리로 걸어갔어. 작은 별의 중력을 떠나 우주를 떠돌았어. 장미는 더 이상 어린왕자의 것이 아니라고 했어. 별은 더 이상 별을 꿈꾸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고 했어. 우물은 더 이상 사막의 별이 아니라고 했어.

나는 아스테카의 텅 빈 유리제단을 멍하니 내려다봐. 그곳에는 심장도 피도 없어. 나는 제단에 직접 눕고 내 가슴에 흑갈색의 칼을 박아넣고 심장을 꺼내. 심장은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어. 심장은 장미처럼 부드럽고 축축해.

할머니가 죽고 나면 나는 내 심장을 꺼내 삼킬 수밖에 없을 거야. 할머니, 할머니의 안은 썩은 고기처럼 메마르고 역겨워. 나는 제단에 눕고 싶지 않아. 나는 내 심장을 혼자 꺼내고 싶지 않아. 여자애들은 까치발을 하고 꽃송이를 꺾어 입에 물고 웃고 있어. 암소들이 도살장에서 뛰쳐나가고 나면 나는 어디에서 고기를 찾지? 하지만 고기들을 먹는 남자들, 거북이처럼 주름진 목을 하고 웃는 남자들은 아직도 많잖아. 그들은 아냐에게 미인대회 상을 주었어. 그들은 아냐보다 더 신선하고 불그스름한 암소들을 수백 수천 마리 더 맛볼 수 있을 거야.

난 배가 고파, 할머니. 할머니는 너무 말랐고 늙은이 냄새가 나. 나는 천사처럼 목이 마르고 신처럼 배가 고파. 난 알고 있어. 할머니. 그 개 같은 자식은 자기 여동생을 먹은 거야. 흰 뼛조각 하나도 남기지 않고 짐승처럼 먹어치우고서는 모른 척하고 있는 거야. 아냐를, 보물을 발견한 건 나인데 어째서 난 그 애의 고기를 전부 먹어치울 수 없었던 거지? 소유하지 않을 거라면 어째서 그토록 붉고 아름다운 장미들을 기르느냔 말이야. 장미를 물어뜯은 어린 왕자의 입속은 피투성이이고 향긋한 짐승의 냄새가 나.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내 엉덩이를 씻기면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짐승 짓을 하는 남자아이들이 있다고 말했어. 그러고 할머니는 나에게 절대 암캐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 암소들은 암캐들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아내니까 내가 암캐 짓을 하면 암소들은 나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암캐 짓을 한 번도 하지 않았어, 할머니. 나는 늙은 거북이처럼 굴려고 노력했고 용감하게도 진짜 고기, 아직 도축되지 않은 질 좋은 고기를 발견했어. 나는 부드러운 은빛 모래사장에서 보물을 발견한 어린 탐험가였어. 난 보물을 주머니에 넣고 입을 맞추려 했는데 보물은 도망가면서 나를 거부했어. 보물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건 끔찍한 일이야, 할머니. 아무도 발견자를 피해 도망가는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 영웅을 피해 도망가는 아름다운 포로들에 대해 할머니는 이야기해주지 않았잖아.

신은 희고 아름다운 암소를 선량한 주민들에게 선물했고 주민들은 암소의 배를 갈라 자궁을 꺼내 제물로 바쳤지. 신은 갸륵한 신자들을 위해 더 많은 암소들을 내려주었어. 암소는 신처럼 아름다웠고 신은 기꺼이 신의 자궁을 먹었어. 할머니한테서 역겨운 냄새가 나. 할머니는 이미 죽은 것처럼 차갑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 조금만 잘못 끌어안아도 피부가 찢어질 것 같아. 할머니도 예전에는 질 좋은 암소였을 거야. 사랑처럼 붉고 따뜻한 음부를 가진, 살집 많은 암소였겠지. 할머니는 자궁을 산 채로 뜯겨 갈취당한 뒤에도 살아남았지. 몇 번의 제사와 몇 번의 하혈과 몇 개의 운명과 몇 개의 태양과 몇 번의 찢어짐, 그리고 할머니는 아이처럼 부드럽게 주름졌고 꽃잎처럼 쉽게 뜯어지는 늙은 고기가 되었지.

난 남동생을 당장이라도 내 늙고 가엾은 할머니의 몸에서 떼어내어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악몽의 길고 음험한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남동생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할머니는 그 애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이미 죽었죠. 나는 모든 것이 빌어먹을 악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와 늙은 여자의 영혼을 흔들고 모욕하고 겁탈하는 움직임을 느끼며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떨고 있었고 미칠 듯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죽은 암소들임을, 그리고 살아남은 암소들임을, 그리고 결코 암소인 적 없는 여자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모든 붉은 꿈들이었고 심지어 어떤 꽃잎들은 조금도 붉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꿈들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여자는 헐떡이며 소리쳤다. 암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송아지들은 도살장에서 눈을 감으며 부드럽고 따뜻하며 상처 입지 않은 살을 떠올렸고 깊고 축축한 풀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암소들은 도망쳤고 아이를 낳았고 그녀들을 찢고 나온 아이를, 그녀들의 학살자를 닮은 아이들을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었던 암소들은 홀로 남겨졌으며 사랑한 암소들은 사랑으로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남자들은 젖소들의 젖을 매일 짜내지 않으면 젖소들이 죽어버린다고 말합니다. 양들의 부드러운 털을 매일 깎아내지 않으면 양들은 털복숭이가 되어 질식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젖소들은 원래 그렇게 많은 젖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양들의 털은 그토록 많이 자라지 않았으며 암탉은 그토록 많은 달걀들을 낳지 않습니다.

나는 남동생이 나와 늙은 여자를 겁간하며 흐느끼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습니다. 나는 긴 악몽을 꾸고 있었습니다. 악몽은 셀 수 없이 많은 악몽들을 꾸며 우리는 결코 모든 꿈에서 깨어났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영사막에 펼쳐진 무대는 어느덧 붉은 과육으로 뒤덮인 축축한 땅으로 변했다. 여자는 검은 개를 끌고 붉게 젖은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여자의 맨발이 붉은 과육으로 짙게 젖어들었다. 짓뭉개진 정원에 널브러진 장미들. 장미를 소유하는 폭력과 장미의 관념을 소유하는 슬픔. 여자는 장미의 짓이겨진 육체들을 헤치고 지나가며 음울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영사기에서 쏟아져나오던 빛의 분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교사는 교실의 형광등을 켰다. 교사는 교단에 선 채로 아이들을 내려다보면서 영화에서 무얼 느꼈는지 무엇에 대해 생각했는지 한 사람씩 발표해 보라고 말했다.

가장 왼쪽, 앞줄에 앉은 아이부터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하였다.

첫 번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여행은 실제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고 있으며 또 특수한 경우에는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하기도 합니다. 미래와 과거는 자의적이며 불명확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누군가는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고 짐승들은 정말 현재만을 살며 누군가는 미래만을, 누군가는 과거만을 맴돌기도 합니다. 따라서 꿈은 과거일 수도 있고 현재일 수도 있으며 미래일 수도 있고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꿈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영화 속의 여자가 남동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남동생에게 강간당하는 할머니와 여자의 이야기는 과거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 회상하듯 서술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암소들에 대해 말하며 할머니와 여자를 강간하는 남동생의 일화가 미래의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경우 여자는 예지몽을 꾸는 것이 될 겁니다. 꿈은 과거에서 미래로, 혹은 미래에서 과거로,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저녁과 저녁 사이의 시간여행과 같습니다.

두 번째 아이는 영화가 순전히 심리적인 극장과도 같으며 남동생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고 그래서 강간한 여자아이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여자들과 동일시하여 그녀들을 모두 강간했다는 환상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동생은 죽은 할머니와 누나의 유령을 강간하는 환상에 시달리며 이 모든 끔찍한 악몽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장 악독한 목소리들이 지어낸 환청에 불과하다고 두 번째 아이는 말했다.

세 번째 아이는 두 번째 아이의 말에 반박하며 영화 속 여자가 남동생이 할머니보다 먼저 죽었다고 말한 것을 지적했다.

네 번째 아이는 세 번째 아이의 가설을 받아들이며 여자의 말조차도 정신착란에 의한 혼동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병에 걸린 할머니가 가장 먼저 죽었으며 그 이후에 남동생이 죽었고 여자는 아직 죽지 않은 채로 그 모든 악몽을 상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가장 개연적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아이는 모든 것이 정신착란에 불과하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섯 번째 아이는 아마 감독은 이러한 해석들의 시도 자체를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해 그 누구도 완벽하게 해석해낼 수 없는 영화를 만든 것이리라고 지적했다.

일곱 번째 아이는 여자를 가리키며 영화의 주연 배우가 연기를 매우 잘했다고 은근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여덟 번째 아이는 아마 여배우는 영화를 찍으며 실제로 강간당하고 실제로 죽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영화 내부에서는 환상과 착란에 불과한 행위들이 영화 바깥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아홉 번째 아이는 여자에게 직접 들어보는 편이 가장 확실하지 않겠느냐고 말했고

열 번째 아이는 영화 내부의 서사는 영화 내부의 사실들을 통해서만 해석해야 마땅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열한 번째 아이는 실제로 영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코마 상태의 할머니를 간병하는 남자 청소년의 이야기였는데, 남자아이는 오물을 쏟아낸 할머니의 옷을 벗기고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 씻기다가 할머니를 강간하고 말았다고 해요. 그때 할머니는 사실 깨어 있었고 신음도 흘리지 못했지만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고 해요. 늙은 여자는 젤리처럼 검고 축축한 눈물을 흘렸고 얼굴 위에서 흔들리는 검은 악몽의 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어요.

열두 번째 아이는 삶은 일종의 망상이며 꿈은 다른 차원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들은 달걀처럼 하얀 얼굴을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준비된 관객들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오렌지 껍질을 벗기듯이 동물의 피부를 벗겼어요. 그녀는 동물의 피부를 벗기던 부드러운 손으로 꿈의 껍질을 벗겼어요. 어떤 망상은 다른 망상보다 애틋해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요. 갈라진 피부조각이 떨어져내리고 빈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려도, 온몸이 조각나도, 짐승들이 내 발목을 물고 슬프게 웃어도 난 그 꿈에 남고 싶어요. 꿈을 꾸면서 나는 종종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껴요. 곧 잃어버리게 될 현실이 애틋하고 나는 갈기갈기 찢겨서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상태에서도 영원히 그 현실을 꿈꾸고 싶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여러 개의 불확정적인 방들을 꿈꾸고 있었어요. 오각형, 칠각형, 이등변 삼각형꼴의 방들에서 우리는 악몽을 꾸고 있었어요.

하나의 방에는 네 개의 침대가 있었죠. 나와 함께 그 방을 쓰는 세 명의 여자들에게 나는 색깔의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보라, 파랑, 초록이었죠. 파랑은 늙은 여자였고 보라는 내가 죽인 아이 혹은 그 아이와 혼동될 만큼 닮은 어린아이였으며 초록은 내 또래의 미친 여자였어요.

우리는 그 방의 침대에 누워 잠들면서 다른 방을 꿈꾸고 있었어요. 침대 위에서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꿈이 현실이라고 믿었죠. 하지만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펐고 중지 손가락을 뒤로 당겨서 손목에 대 보았어요. 손가락은 부드럽게 꺾여 물처럼 부드럽게 손목에 맞닿았어요. 물처럼, 혹은 식물의 여린 줄기처럼 부드럽게 휘어졌어요.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알겠나요? 그건 최악의 꿈이었어요. 난 모든 걸 잃었고 살인자였고 보호소에 수감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난 그 꿈을 잃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같이 잠드는 어느 여자들에게도 꿈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어요. 하지만 중지 손가락이 손목에 닿는 현실과 닿지 않는 현실 중 무엇이 더 진실에 접근한 현실이죠? 하나의 현실과 다른 현실, 그건 단지 익숙함의 차이일 뿐이에요. 현실감이라는 것은 익숙함이며 비현실감은 익숙함으로부터의 이탈일 뿐이에요. 우리는 수없이 죽었지만 모든 죽음이 선로로부터 이탈된 것은 아니었어요.

강간당하는 여자, 그건 진짜예요. 강간하는 남자아이와 죽음과 근친상간과 죄가 모두 거짓이라고 해도 강간당하는 고통, 그건 진짜예요. 촬영감독은 그 장면을 직접 찍고 싶어 했어요. 나는 늙은 여자의 병든 몸을 연기했고 늙은 여자의 옆에 앉아 그녀의 흐느낌을 듣는 어린 손녀의 유령도 연기했어요. 나, 나, 지긋지긋한 나였죠.

하지만 강간하는 소년은 다른 연기자였어요. 남자아이는 연기와 현실을 혼동했어요. 남자아이는 연기가 또 다른 종류의 현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애의 연기는 진짜 같았죠. 왜냐하면 그 애는 정말 자기 할머니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할머니를 강간하고 있었고 할머니 옆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 여동생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남자아이는 흐느끼면서 어린아이의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입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들-암소, 수캐, 살육-을 지껄였어요. 남자아이는 괴로워했어요. 그 애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어요. 감독이 컷을 외쳐도, 다른 배우-그러니까 내가요-가 가면을 훌훌 털어버리고-혹은 그런 체 하고-일어나 전혀 다른 몸짓과 표정으로 나풀거리며 걸어다녀도 그 애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 흐느꼈어요. 그 애는 할머니, 할머니 하고 소리쳤어요. 우리는 그 애를 보면서 웃었어요. 그 애가 너무 순진하고 귀여웠던 거예요. 하지만 그 애가 맞았는지도 몰라요. 연출된 현실은 마치 꿈처럼 또 다른 현실이고 그 바깥의 현실은 사실 내부의 현실일지도 몰라요. 그 애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건, 그 애가 착각을 했거나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애가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나는 진짜 강간당했고 나는 진짜 그 애의 늙은 할머니였고 나는 진짜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움직일 수 없었어요. 사실 난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애의 끔찍한 연설을 들을 수밖에 없었죠. 왜냐하면 나는 그 애의 병든 할머니였으니까! 내 몸은 마비되었고 나는 모든 음성과 흐느낌과 독이 발라진 면도칼 같은 말들 들을 수 있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으니까. 새의 눈처럼 검고 투명한 렌즈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감독이 컷을 외치기 전까지 나는 감옥 같은 현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착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예요.

배우인 남자아이는 원래 고아예요. 그 애에게는 할머니도 여동생도 없죠. 그 애가 어떻게 오디션장을 찾아냈는지, 감독이 어떻게 그 애를 캐스팅했는지 아무도 몰라요. 언젠가 그 애에게 물어봤을 때 그 애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건 내가 당신의 오빠이고 손자이기 때문이에요.

그 애는 언제나 나를 이상스럽게 쳐다봤어요. 마치 내가 그 애에게 벌을 주기를 바라듯이. 하지만 난 그 애를 벌줄 수 없었어요. 나는 그 애의 할머니도 여동생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애에게 강간당하고 모욕당한 늙은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분명, 한편으로 나는 그 애에게 강간당한 늙은 여자였어요. 그 애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나를 강간한 거겠어요. 감독? 연출가? 각본가? 나를 여배우로 만든 모든 짐승들?

오디션장에서 감독은 내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직접 찍어야 할 거라는 말을 해 주지 않았어요. 나는 우리가 함께 본 영화에서처럼 긴 대사를 읊었을 뿐이었죠. 예정되어 있던 모든 장면들을 찍고 나서야 감독은 내게 그 장면을 직접 찍어야 할 거라고 말했어요. 할 수 있지?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았어요. 난 이미 영화에 등장할 모든 장면들을 찍었는데도 무언가를 더 찍어야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어요. 순식간에 나는 아주 늙은 여자가 되었고 노랗고 끈적끈적한 장판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어요. 남자아이는 벌거벗은 붉은 몸으로 울었고 나는 정말 내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어요.

남자아이는 미안하다고 속삭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늙은 여자의 손자에게 늙은 여자는 늙은 암소에 불과했으니까. 그 애가 정말 미안했다면 나를, 아니, 그 늙은 여자를 강간하지 않았겠죠.

난 내 위에서 흔들리는 그 애의 검은 눈망울을 보면서,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 날카로운 짙은 잿빛의 홍채를 보면서 속삭이고 싶었어요.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어. 너는 지금 네 할머니를, 네 여동생을, 너를 모르는 모든 여자들을, 아무 죄 없는 여자들을 강간하고 있어.

남자아이는 내가 무대에서 읊었던 대사와는 다른 말을 했어요. 그 애는 마치 자기가 햄릿이라도 되는 양 연극조로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아스테카의 제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들을 필요로 하고 생명은 신을, 생명을 위하여 다른 생명들의 붉은 심장을 바칩니다.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생명들과 다른 생명들, 그리고 아스테카의 제단들입니다.

나는 생각했어요. 너는 나를, 그리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있어.

아스테카의 제단들입니다. 암소들을 죽이고 암소들을 착취합니다. 생명들은 다른 생명들의 제단에 올라가며 붉은 심장들은 제 것이 아닌 제단에서 달콤한 죽어감을 속삭입니다. 법의 문들과 신의 제단들. 자신의 법을 찾아가는 시골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의 짐승들은 제 것이 아닌 생명과 제 것이 아닌 법에 봉사합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어. 너는 우리를 강간하고 있어.)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문에서 태어나 그 문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문의 앞을 집요하게 서성입니다. 문지기는 우리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충고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가 게으르고 태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지기 역시 타인의 문에서 태어나 타인의 문에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문들의 진실을 알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에게는 우리를 올바른 길-만약 자신의 법으로 가는 것이, 자신의 법의 문 앞에서 기만당해 죽어가는 것이 더 나은, 심지어 올바른 길이라고 한다면-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문지기의 직분은 법에 의해 고용된 자들이 아닌 자들, 예컨대 법의 주인이 절대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자신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법의 문 앞에서, 혹은 남의 제단에서 죽습니다. 사실상 모든 생물들이 그렇습니다. 손에 꼽을 수 있는 특별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모두 그렇습니다. 그 소수의 예외들조차도 환상, 혹은 착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어. 너는 우리를 강간하고 있어. 촬영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역겨워. 토하고 싶어. 하지만 토해서는 안 돼. 늙은 여자가 구역질을 한다는 지문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으니까. 사실 내게 주어진 지문은 시체처럼 누워서 숨을 쉬라는 말밖에 없어. 검고 아스라한 시선도, 대사도, 슬픔도 없어. 나는 슬픔조차 느껴서는 안 돼. 하지만 손자에게 강간당하는 할머니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충실한 기계입니다. 나는 감독과 카메라와 관객들의 기대가 투명하게 투영된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나는 당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는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강간당하고 있어.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어. 나는 나를 죽이고 말 거야. 너는 나를 죽이고 말 거야. 나는 살해당할 거야. 나는 구토를 참으려 애쓸 테지만 토사물은 흘러나오고 말 거고 나는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하게 될 거야. 나는 금지되어 있는 신음과 울음을 터뜨리고 모멸적으로 죽어가고 말 거야. 그동안에도 너는 계속 나를 강간하고 있을 거야. 왜냐하면 너는 정말 할머니를 강간한 빌어먹을 수캐니까. 너는 한 마리의 암소가 죽어버린 것을 슬퍼하겠지만 곧 잊어버리겠지. 왜냐하면 암소들은 너무 많이 죽고 그 모든 암소들을 애도하기에 삶은 짧으니까. 모든 죽어가는 암소들에 비하면 영원조차 짧지. 모든 암탉들과 깨져버린 알들과 부러진 뼛조각에 비하면 영원조차 짧아. 삶은 비할 데 없이 짧고 또 절망적으로 길어. 너는 달콤한 억눌림으로 신음하고 있구나. 넌 정말 사정할 것 같아. 경련과 분출, 헐떡임, 고통과 경멸, 모욕, 이 모든 피투성이의 삶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걸까. 감독은 언제쯤 컷을 외칠까. 이 모든 게 빌어먹을 악몽은 아닐까. 손가락을 꺾어 봐야 해. 중지가 손목에 붙으면 그건 내가 어떤 꿈에서 꿈이라고 가정한 현상이야. 하지만 안돼. 여기서 손가락을 움직일 수는 없어. 나는 마비된 늙은 여자가 고개도 까딱할 수 없으니까. 구역질을 하고 신음을 하고 흐느낄 수조차 없으니까.) 희생자들은 다른 이의 꿈 위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연푸른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은 아름다워요, 할머니. 듣고 있나요? 하늘은 모두 우리의 것처럼 보이죠. 우리는 우리가 사는 모든 꿈이 우리의 것이라고 착각하죠. 초대받지 않은 꿈을 서성이면서 우리는 피투성이로 널브러져 있는 꿈의 주인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꿈의 주인은 영원과도 같은 환희 속에서, 악몽 속에서 바르작거리며 울고 있습니다. 너절한 고통이 동물의 뼈로 만들어진 단추 위에 붉게 내려앉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함께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생명과 홀로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만이 우리를 모른 채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해한 꿈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할 것입니다. 간곡한 애원도, 충고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혈관 속에 배양된 악몽은 아름다운 검푸른 꽃을 피울 것이고 우리는 축축하고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열매의 부드러운 조직 속에는 심장처럼 붉게 젖어 있는, 단단한 씨앗이 있을 것입니다. 씨앗은 또 다른 꿈 속에서 번져갈 것입니다. 하나의 꿈과 무수한 꿈, 하나의 다른 꿈과 영원히 다른 꿈들. 할머니, 나는 하나의 암소를 가지고 있어요. 늙고 병든 암소이지만 자궁과 질, 붉은 주둥이를 가진 암컷이죠. 암소를 소유한 자는 반드시 암소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암소의 배를 가를 수밖에 없어요. 배꼽에 박아넣은 칼을 가슴 위까지 올려서 나는 당신의 심장을 꺼내고 있습니다. 보이나요? 할머니, 보여요? (나는 죽어가고 있어.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고 나는 강간당하고 있어. 감독은 영원히 컷을 외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아. 감독은 이 미치광이가 나를 살해할 때까지 지켜볼 작정이야. 나는 살해당하고 말 거야. 도망치지 않으면, 일어서서 욕설을 내뱉고 뛰쳐나가지 않으면 나는 이대로 살해당하고 말 거야. 하지만 지금까지 찍었던 장면들은? 나는 모든 장면들을 연기했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모두 사라질 거야. 내 삶은 폐기될 것이고 내 꿈도 내가 간직했던 현실들,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실들도 모두 폐기될 거야. 감독은 다른 여배우를 캐스팅할 거고 그녀는 나보다 더 잘 강간당하겠지. 이상한 생각들도 무한한 장미의 관념도 서글픔도, 도주도 없이 얌전히 누운 채로 인형처럼 강간당하겠지. 나는 나의 사실을 모두 잃어버린 채 홀로, 나의 생명과 홀로 남겨질 거야. 나의 생명과 나, 불명료한 꿈의 기억만을 가진 피투성이의 심장과 나.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어. 너는 이 빌어먹을 악몽에 공모하고 있어. 너는 새로 캐스팅된 여자를 강간하겠지. 그때도 너는 암소와 아스테카의 제단과 법의 문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그건 네게 부여된 대사니까. 너는 늪 속에서 질식해가는 물고기처럼 헐떡이고 있구나. 아니야. 늪 속에서 질식해가는 물고기는 나야. 내 아가미 속에 진흙이 밀려들어오고 있어. 늪 속에서 밀랍화된 벌레들의 사체들이 아직 살아 있는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와.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어. 너는 나를 충분히 강간했어. 이제 그만해. 대사를 멈추고 컷을 기다려. 네가 그만두기 전에는 아무도 이 장면을 그만둘 수 없을 거야.

사라짐은 점점 내 중심을 향해 밀려들고 있어. 내 손끝과 손목, 발목과 종아리, 무릎과 얼굴, 목과 가슴이 사라져가고 있어. 비어감이 심장으로 밀려들고 있어. 나는 사라지고 오직 절망적인 구멍만이 남을 거야. 너는 구멍에 좆질을 해댈 테고 구멍만 남은, 나의 사라짐마저 강간하겠지.

너는 멈추지 않겠지.

이제 알겠어. 너는 나를 강간하고 있어. 너는 우리를 강간하고 있어. 내가 여기서 일어나 컷을 외쳐도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을 거야. 내 병든 몸뚱이는, 내 끔찍한 구멍은 여전히 이 바닥에 늘러붙은 채로 강간당하고 있을 거야.)

여러분 모두 보셨다시피 그 장면들은 영화에 삽입되지 않았죠. 어쩌면 모든 것은 제 악몽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남자아이는 실제로 나를 강간하지 않았고 늙은 여자도 강간하지 않았으며 현실과 영화 내용을 착각하는 어리숙한 남자배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나의 강간과 나의 고통조차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악몽은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실제로 강간당했고 나는 실제로 울었고 나는 실제로 미칠 듯한 절망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미 패배해버린 싸움을. 나는 울부짖었고 내 울음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악몽 속에서 나는 손가락을 뒤로 꺾을 수 없었고 현실과 꿈의 징표를 갖지도 못했습니다. 악몽은 가위를 눌리고 있는 현실과 같았고 현실은 악몽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악몽은 또 하나의 현실이며 현실은 또 하나의 악몽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 꿈의 영상들을 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들이 전부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대 위의 하얀 암사슴 가죽 마스크와 검은 수캐 마스크는 전부 악몽의 편린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카메라에는 행위와 목소리와 울부짖음이 담겼고 여러분은 그것이 망상과 같은 사실 혹은 사실과 같은 망상이라고 증명해주셨습니다. 물론 나는 이 교실 역시 꿈이라는 것을, 또 다른 세트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나는 하나의 꿈이 다른 꿈의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음을 발견한 셈입니다. 어쩌면 나는 곧 이곳에서의 대화를 잊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의 생명과 홀로 남게 되겠죠. 나의 생명과 나의 유리 제단과 나의 문과, 나의 것이 아닌 법, 나의 것이 아닌 유리 제단. 그래도 생명만은 내 것입니다. 희생당하거나 희생시키거나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생명은, 피투성이의 생명은 나입니다.

어떤 꿈에서 남자아이는 내게 사과했지만 어떤 꿈에서는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꿈에서든 나는 그의 사과를 받아줄 수 없었습니다. 악몽을 현실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늙고 비참한 할머니 혹은 여동생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열네 번째 아이는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자는 남동생 역할의 남자아이를 남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자신을 여동생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 속 여자는 남자배우가 자신의 남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열네 번째 아이는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여자는 자리에 선 채로 비틀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여자는 낫에 베인 듯 비틀거리며 흐느꼈다. 아냐가 아닌가요? 오빠는 내 목을 조르고 나를 죽이지 않았나요?

유리, 너는, 교사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또 혼동하고 있구나. 몇 개의 영화들과 몇 개의 꿈들과 몇 개의 현실들이 너를 뒤섞고 있구나. 친구들의 말을 들으렴. 하나의 현실과 다른 현실을 혼동하는 짐승들은 정신분열증자란다. 절대 현실에 다른 현실을 뒤섞어서는 안돼. 알겠니? 처음의 죽음까지가 하나의 현실이며 처음 죽음 이후부터 다음 죽음까지가 다음의 현실이란다. 현실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으며 결코 뒤섞이지 않아. 알겠니?

하지만, 하고 여자는 어린아이처럼 소리쳤다. 죽음들은 뒤섞여 있어요. 나는 세 번째 죽음을 죽듯이 첫 번째 죽음을 죽었고 두 번째 죽음을 생각하며 첫 번째 죽음을 죽었고 첫 번째 죽음과 동시에 세 번째 죽음을 죽었어요.

교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너는 아직 세 번째 죽음을 맞지 않았어. 어쩌면 너는 영원히 세 번째 죽음을 맞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건 그저 악몽일 뿐이야. 알겠니?

여자는 악을 썼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봤고 분명히 느꼈어요. 나는 죽었어요. 세 번 죽었다고요. 처음 죽는 순간 나는 세 번째 죽음을 함께 죽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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