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25

그 애가 암캐이고 내가 그 애의 무관심한 학대자이던 시절에 그 애는 내게 한 마리의 작은 새를 선물했어. 연분홍빛의 입술 사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새의 날개가 물려 있었지. 새는 내 손바닥 위에서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어. 믿을 수 없이 작은 심장, 믿을 수 없이 뜨거운,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것 같은 투명한 살. 새는 내 위에서 살아 있었어. 내 위에서 죽어가고 있었어. 나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암캐는 나를 위로하듯 내 종아리를 부드럽게 핥아 주었지. 새는 검고 반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새는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리면서 노래했어. 나는 나이팅게일처럼 노랗게 질린 채로 새의 작은 부리가 움직이는 모양을 바라보았어. 새는 살아 있었어. 그토록 작고 열렬한 심장으로. 새는 피 흘리며 살아 있었어.

이제는 아무 가망도 없어. 얘들아, 다리가 무너지고 나면 사실 그것으로 다리의 환상은 깨어진 것이고 다리는 다리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암소는 제 우유 속에 잠겨 미쳐버리며 작은 새는 비명을 지르고 나는 작은 새의 몸 속에서 하품하는 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거지. 하지만 다리를 믿고, 믿고, 다시 믿어야 해. 무너져가는 논고를 다시 작성하고 오직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시를 써야 해. 신을 죽이기 위해 신을 믿어야 해. 유리, 너는 미치지 않기 위해 신을 믿을 것이고 결국에는 미쳐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신들은 부활한 몸으로 어리고 순진한 창녀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너는 다시 신을 믿고, 신에게 기도하고, 신을 살해할 수 있을 거야. 신은 피에 젖은 투명한 제단 위에서 하얗거나 검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푸른 몸을 어린 새처럼 바즈락거리며 웃을 거야. 신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어떤 신이든 기꺼이 네게 살해될 것이고 오직 너를 위해 부활할 거야.

너는 수천의 신들을 동시에 믿을 수도 있어. 신은 죽음만큼이나, 그리고 생명만큼이나 많으니까. 너는 신의 작고 가벼운 날개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신을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신의 고기를 목 아래로 넘기며 신을 숭배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하나의 꿈과 다른 꿈을 혼동해서는 안 돼. 신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제단 위에서 죽어가는 신의 미소를 떠올려서는 안 돼. 신을 믿는 동안에는 네가 신을 죽이리라는 사실, 신이 너를 살해하였으며 너 역시 신을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려서는 안 돼. 여자아이의 목을 조르는 동안에는, 여자아이의 얼굴에 메타포를 박아넣는 동안에는 네가 살해당한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서는 안 돼. 네가 암캐인 동안에는 너를 암캐로 만든 여자가 암캐라는 사실을 기억해서는 안 돼. 네가 다리인 동안에는 네가 두 개의, 움직일 수 있는 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서는 안 돼.

유리, 이게 우리의 규칙이란다. 두 개의 현실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어. 나는 책상에 앉아 담임의 희고 부드러운 가면 같은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우리의 시를 상상하고 있는 어린 암캐지만 지금은 그것을 과거로 믿거나 혹은 믿으려 노력하고 있지. 왜냐하면 다리인 동안 우리는 다리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야. 설령 다리가 아닌 것으로 무너져내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까지는 다리를 믿어야 하기 때문이야. 울렁거림과 치밀어오르는 구역감을 참고 미치지 않은 것처럼, 마치 우리가 비현실이 아닌 것처럼, 마치 우리가 한 번도 죽지 않은 것처럼 굴기 위해 우리는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상상해야 해. 제단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짐승처럼 부드럽게 웃어보이는 신의 미소를 떠올려야 해. 도취와 혼절 속에서도 불완전한 회전을 수행해야 해. 회전을 무너뜨리는 회전 속에서도. 공업 제품 같은 견고함으로 버텨야 해.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죽음밖에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생명밖에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꿈만을 미치지 않고 온전히 기억할 수 있으니까.

교사는 낫에 베인 듯 갑작스럽게 무너져 울었다. 아이들은 의자에 앉은 채로 유령처럼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는 신을 위한 등불처럼 오렌지빛인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남교사는 그녀의 시체를 찾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여자는 홀로 생각했다. 남교사는 옥상 아래로 그녀를 던져버린다. 곧 그는 그녀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운동장 어디에도 소녀의 시체는 없다. 운동장을 샅샅이 뒤져도 사람의 시체는 나오지 않는다. 남자는 맨손으로 운동장 모래를 파내려가기 시작한다. 소녀는 없다. 소녀의 시체는 없다. 소녀의 죽음 혹은 삶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운동장을 기어다닌다.

그는 소녀의 시체를 찾고 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분명 그녀를 옥상에서 내던졌는데,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남자의 손톱은 갈라져 피를 흘린다.

남자는 손톱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흐느낀다. 이럴 수는 없어, 그는 생각한다. 운동장 바깥에 있을 수는 없어. 어디에도 없을 수는 없어. 이곳이 아니면 어디에? 다른 곳조차 아니면 어디에? 그는 좌절에 늘어진 발을 질질 끌며 교실로 돌아간다.

다음날 그의 손톱은 상처조차 없이 나았고 아무도 소녀의 실종 혹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 교사들은 그에게 그런 아이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혹은 그 애는 이미 죽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남자는 묻지 않는다.

우리는 적과 영원히 조우하지 못할 것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남자는 떠올린다. 하지만 그녀는 적이 아니다. 그는 그녀의 적이 아니며 그녀 역시.

남교사는 그가 맡은 교실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가운데 줄 가장 앞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본다. 여자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한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수업을 진행한다. 그는 칠판에 자를 대고 오각형과 육각형, 칠각형을 그려보인다. 칠각형을 그리는 것은 육각형을 그리는 것보다 쉽다. 그러나 육각형을 그리는 것은 다른 어떤 도형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는 원을 의도한 벌집 구멍이 시간이 지나면 육각형으로 변하는 것을 안다. 원형의 세계는 결국 정육각형이다.

남자는 원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제외하고 벌집의 육각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여자는 검고 고심하는 눈으로 육각형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는 고통과 슬픔, 운동장의 부드러운 모래들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남자는 기침을 하고 여자는 놀란 듯 남자를 바라본다. 여자의 목은 붉게 부풀어올라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목. 여자는 남자를 모방하듯 기침한다. 기침하고 기침하고 계속해서 기침한다.

남교사는 참지 못하고 여자에게 보건실에 가 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한다.

누구요? 선생님? 누구요?

남교사는 더듬거리며 고개를 수그린다. 그는 여자, 유리, 운동장, 목, 기침 같은 단어들을 저주처럼 중얼거린다. 어째서 하나의 완벽한 원은 육각형이 되어버리는 걸까, 남자는 생각한다. 육각형을 되감는 세계에서는 완벽한 원형의 구멍들이 부유하고 있을까.

여자는 남교사를 위로하듯 슬며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창문으로 다가가 곧장 그 밑으로 뛰어내린다. 남교사는 비명을 지르며 창가로 달려간다. 그는 백조의 깃털처럼 희게 빛나는 정오의 운동장을 내려다본다.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체도, 피 얼룩도 없다. 남자는 울부짖는다.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이 웅얼거리는 소리, 페이드아웃.

여자는 생각한다. 그는 울었을 거야. 어린아이처럼 혹은 짐승처럼 울부짖었을 거야. 그는 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를 찾아 올 수 없었던 거야. 여자는 매일 그의 교실에 나타났겠지. 여자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그의 도형들을 열렬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겠지. 여자는 간혹 기침을 하면서 목 졸린 상처를 드러내었을 거야. 그녀의 목은 거북이처럼 두껍고 붉게 부풀어올랐을 거야. 그를 만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텐데. 헤이, 당신은 오래 전의 죽음과 지금의 죽음을 혼동하고 있어요. 당신이 죽인 여자아이는 카메라 렌즈에 맺힌 얼룩처럼 당신의 시야를 떠돌고 있지만 착각이에요, 유령은 착각이에요. 알겠나요?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여자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좀 전에 여교사가 말을 걸었던 반장이었다. 반장은 여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점심시간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교실은 어느덧 텅 비어 있었다. 교단에 쭈그리고 앉아 흐느끼는 여교사도 유령처럼 흔들리는 아이들도 없었다.

여자는 괜찮다고,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래? 반장은 말했다. 그럼 신들의 샘플을 알려줄까?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반장은 여자의 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만하게 굴고 있어.

내가 오만하다고? 여자는 웃었다.

그래. 반장은 말했다. 넌 우리가 죽음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살해당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게 우리가 겁쟁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맞지 않아? 여자는 물었다.

반장은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첫 번째 죽음은 지하실에서였어. 남자는 하루에 두세 번씩 내가 있는 지하실로 내려왔고 나를 볼 때면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지. 그는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말만 아니면 내 소원을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애썼어. 그는 나를 위해 수백 개의 거울들을 지하실에 가져다 주었고 나는 물방울처럼 증폭된 얼굴과 공간과 구석자리들을 보았어.

남자는 나를 스노우화이트라고 불렀어. 그는 나를 공주처럼 아껴주겠다고 했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지. 그의 말처럼 나는 무수히 증폭되는 물방울들을 건드릴 수 없었고 그가 목을 매고 죽었을 때 나는 끔찍하게 무력했어. 지하실 계단에서 1층으로 향하는 문은 잠겨 있지 않았는데도 난 위로 올라갈 수 없었어.

그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나를 데리고 위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 물을 배수하던 장치에서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지고 지하실 바닥이 배설물로 가득찬 뒤에야 나는 그가 더 이상 나를 보러 내려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어. 배설물의 악취와는 다른 이상한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 그의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였을 거야. 썩어가는 고기를 향해 달겨든 새와 파리들이 위층에 우글거렸겠지. 새들은 창문에 머리를 처박았을 테고 결국 창문은 무력하게 깨졌을 테고 그 열린 구멍 속으로 무수한 날짐승들이 침입해 들어왔겠지.

물론 죽어가는 당시에는 그 모든 것들을 상상할 수 없었어. 나는 그가 나를 두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거나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했지. 혹은 그가 결혼을 해서 여자의 집으로 옮겨갔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나중에야 나는 그가 목을 매고 죽었다는 걸 알았지. 아마 그는 그의 죽음이 나의 자유를 열어주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몰라. 그는 지하실 계단으로 연결되는 문을 활짝 열어두었고 그 속으로 무수한 파리와 마지막 햇빛이 쏟겨들었으나 나는 나가지 못했어.

두 번째 죽음은 배에서였어. 나는 아직 한 번도 죽지 않은 아이들과 같이 학교에 다녔고 우리는 배를 타고 다른 섬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었어. 여자아이들은 선실에서 베개를 던지며 놀았지. 투명한 깃털들이 사방으로 쏟겼어. 나는 베개의 내부에 그토록 많은 깃털들이, 수십 개의 날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깃털들이 있는줄 몰랐어. 우리는 웃었고 깃털 때문에 기침을 하기도 했어.

배가 기울었고 컨테이너들이 바다로 쏟겨내렸어. 나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혼자 떨고 있었어. 대학이 점령당했을 때 군인들을 피해 화장실 칸에 숨어 살던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계신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절대 움직이지 마시라고 안내방송에서 그렇게 말했어. 나는 변기물과 함께 넘쳐 흐르면서 눈을 감았어. 비명소리가 들렸고 아이들은 울고 있었어.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울고 있었지. 나는 울 수 없었어. 나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어둠이나 절망이 나를 발견하고 잡아갈까봐 두려워서 입을 다물고 있었어. 기울어져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지만 나는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리려 애썼어. 비명을 지르면서 복도 바깥으로 뛰어나갔다면 나는 살았을지도 몰라.

여자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반장은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난 네 방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반장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꿈만 사는 건 지긋지긋한 일이야. 선생님도 사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 너도 느꼈을 거야.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은 이어 말했다. 여기는 낙원도 지옥도 아니야. 우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다만 변화할 뿐이야. 끝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원치 않게 변해버리는 것들도 있지. 그래도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다음 번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걸, 그리고 그 죽음을 우리는 이미 죽어 보았다는 걸 알고 있어. 우리는 모두 어느정도 너의 방식대로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어. 여러 개의 꿈을 동시에 꾸는 것, 여러 개의 가면들을 동시에 보는 것, 하지만 유리, 세상은 연극무대가 아니야. 세상은 배우들로 들끓지만 연극무대는 어디에도 없어. 넌 그걸 알아야 해.

어째서? 여자는 물었다.

물기 어린 구멍 같은 두 개의 눈이 여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나중에라도 네가 우리를 원망하지 않도록.

난,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 나를 살해한 남자조차 나는 원망하지 않아. 악몽의 그림자는 창백하고 쓸쓸한 빛깔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게 눈물이 날 정도로 싫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꿈꾸는 건, 반장은 물기 어린 눈으로 말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죽음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직 겪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들을 통과할 유일한 미지가 죽음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죽음을 갈구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녀들은 텅 빈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여자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반장은 손을 흔들며 여자를 배웅해 주었다.

문 안쪽에는 익숙한 법정이 있었다. 재판장 소년은 고개를 흔들면서 여자를 맞이했다.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 라이브 카메라의 화면 앞, 증인석에 서서 소리쳤다. 재판장님, 내가 죽는 순간 솜털처럼 부드러운 깃을 가진 천사들이 내 몸을 감싸고 웃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나를 죽인 건 신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나를 죽였으므로 나는 신을 숭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을 숭배하지 않으면 죽음은 봄의 눈처럼 녹아 사라지고 그 속에서 나는 알몸으로 깨어나 끔찍한 햇빛을 견뎌야 한다고 했습니다.

남자아이는 허리까지 오는 마론인형을 질질 끌며 여자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인형은 벌거벗겨졌으며 그녀의 이마에는 나의 변호사라는 붉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남자아이는 인형의 오른팔을 붙든 채로 계속해서 인형을 향해 속삭였다. 왜 변호를 하지 않는 거예요? 왜 숨을 쉬지 않는 거예요? 왜 아무말도 하지 않아요? 왜 심장이 뛰지 않는 거예요? 왜 움직이지 않아요? 왜 일어나서 직접 걷지 않는 거예요? 왜 계속해서 걸어다니는 거예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정난 고양이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왜 주인을 잃은 그림자처럼 혼자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아, 나는 쓰러질 것 같아. 난 열이 나서 죽어버릴 것 같아. 더는 못하겠어. 하지만 우리가 우리이기를 그만두면 우리는 무엇으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줘요.

인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증언을 이어갔다. 서기는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손가락의 움직임은 타자기의 알파벳들을 날인시킬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타자기 안에는 종이가 들어 있지 않았다. 서기는 그녀의 증언을 모두 그의 시간 속에 기록하고 있었다. 재판장이 서기에게 법정 기록을 요구하면 서기는 즉석에서 그가 듣고 그가 인식하고 그가 기억하는 내용을 증언할 터였다. 여자는 법정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이는 재판장이나 검사, 사형집행인이 아니라 서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기는 재판의 내용을 자유롭게 상상하고 왜곡하며 변형시켜 창작할 수 있다. 그가 여자를 정확하게 듣고 있을까? 결국 그는 그가 믿고 그가 들은 대로 여자를 기록할 것이다.

여자는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증언을 마쳐야 하므로 간단하게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녀는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으므로 그녀는 그저 침묵하고 있어도 되는 것이었다.

나를 살해한 남자들을 나는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신을 연민하거나 고소할 정도로 순진한 여자아이는 아니에요. 난 저 애를 고소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신을 용서하지 않았고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재판이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 증언은 판결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겠죠.

황제는 칙사를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은밀하게 전령을 속삭이고 칙사는 단호하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품에서 벗어나 바깥을 향해, 황제의 칙령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은둔한 신하가 살고 있는 숲을 향해 나아가지만 황제의 성과 황제의 품과 황제의 수도와 황제의 빛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어서 칙사는 결코 황제가 다다를 수 없는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칙사가 황제의 품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황제는 숨을 거두고 황제의 발치에서 그의 죽음을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 어린 황제가 죽은 아비의 무거운 왕관을 이어 씁니다. 왕관은 어린아이의 목을 짓누르고 아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머리를 수그린 채로 그의 칙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이제 죽은 황제가 보냈던 칙사는 곧장 새 황제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칙사가 돌아오는 동안 어린 황제는 나이가 들었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황제는 칙사의 귀에 또다시 은밀한 전령을 속삭입니다. 늙은 황제의 발치에 누워 있던 어린 황제가 또 다시 죽은 황제의 왕관을 이어받습니다.

황제들의 인장과도 같은 두툼한 목과 내려앉은 무거운 머리, 칙사는 결코 황성을 빠져나가지 못하며 금빛의 영원한 둘레에 갇혀 황제를 떠나고 다시 황제에게 돌아가기만을 반복합니다. 황제가 죽는 순간 황제의 명령은 효력을 잃어버리며 칙사는 새로운 전언을 듣기 위해 다시 황제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칙사는 성의 끝으로 나아가고 또 성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절름발이 시계처럼, 원의 둘레를 빠져나가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돌아가기만을 반복합니다.

아주 우연히 황성을 벗어나게 된 칙사가 있더라도, 기적적으로 은둔한 신하를 찾아 그에게 황제의 전언을 전해줄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것은 원칙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극악스러운 실패에 가깝죠. 왜냐하면 그가 전한 것은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망자의 읊조림일 따름이며 결코 황제의 전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므로, 이끼가 늘러붙은 신하의 더러운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이는 순간, 칙사와 신하는 동시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길고 서글픈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황제는 신하에게 황성으로 돌아와 황제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그러한 명령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칙령을 내리는 순간, 황제 역시 그 칙령이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사그라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가장 빛나는 별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이 보고 사랑하는 것이 유령에 불과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칙사는 기어코 은둔한 신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칙령을 속삭이고 신하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존재하지도 않는 황명을 받들겠다고 흐느끼며 대답합니다.

그들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거나 돌아가는 길에 늙어 죽거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숲에서 헤어집니다. 어느 쪽이든 그리 다를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시나 추상적인 상징과 같은 명령을 허공에 묻고 황제처럼 창백하고 단단하게 굳어 부패해갑니다.

작고 영원한 천사들이 그들의 살을 물어뜯고 그들의 혈관 근처에 알들을 심어 넣습니다. 천사들은 그들의 늙은 피와 살을 갉아먹고 자라납니다. 아, 황제는 정말 많은 칙령들을 내렸습니다. 그 모든 칙령들은 하나의 반짝이는, 닳고 닳은 조약돌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칙령들에는 미래에 대한 약속, 낙원에 대한 기도와 신에 대한 아름다운 숭배의 말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들은 하나의 왕조와 시대 속에서도 무수히 죽고 또 태어나 황제가 됩니다. 황제들은 피와 살을 가진 자 중 가장 추상적이며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축복 속에서 태어나 저주로 자라난 황제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암시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고개를 수그립니다. 그들의 머리는 환희와 공허에 짓눌려 멍들었고 가느다란 목뼈는 꿈과 영광의 허무한 그림자들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습니다.

숲 속에 버려진 황제의 모든 신하들은 간절히 황제의 칙령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사실, 황제는 황제의 옷을 벗고 입으며 시체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체의 길을 기다리며 자라나는 것, 황제의 왕관을 벗고 쓰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이 바빠서 그가 우리에게 칙령을 내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황제의 칙령을 받은 신하의 전설을 혀가 닳도록 외우고 있고 우리가 그의 선택받은 신하가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년 판사는 판사석에서 일어나 법복을 벗었다. 서기는 그녀에게 다가서서 점심시간이 끝나간다고 속삭였다.

자, 법과 황제는 점심식사보다 못한 것이군요! 여자는 과장되게 손짓하며 소리쳤고 방청석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서기는 여자의 등을 은근하게 쓰다듬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아가씨, 점심식사는 법에 있어 중요한 거요. 황제나 황제의 칙령보다도 훨씬 중요하죠.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예심판사들이 점심식사 직전의 예심판사보다 훨씬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 않나요. 게다가 우리 판사는 귀머거리니까 어차피 내가 작성한 기록을 보지 않으면 재판을 할 수 없을 거예요.

귀머거리라고요? 여자가 묻자 서기는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렇다고 말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요? 대부분의 판사들은 다 귀머거리죠. 그래서 나 같은 서기들이 필요한 거고요. 그들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어째서 법정에서 오간 목소리들을 전부 기록할 필요가 있겠어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판사는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는 내 말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거나 교수형 당하는 사람처럼 저 비좁은 틈 밖으로 머리를 내밀기도 했어요.

서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모두 당신이 착각한 거요. 판사는 우연치 않게 당신이 기대하는 그 순간에 당신이 기대하는 제스쳐를 취한 것뿐이지 그건 사실 당신의 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행동이었을 거요. 그는 진짜배기 귀머거리니까. 귀머거리가 아닌 판사는 극히 드물죠. 아니, 거의 없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건 당신이 제시한 모호한 증거보다도 확실한 명제요. 판사들은 황제들처럼 귀 먹었다니까.

여자는 물었다. 그건 상징인가요?

서기는 미친 여자처럼 웃으며 헐떡였다. 상징도 뭣도 아니야. 정말 귀머거리라니까! 게다가 나는 이미 당신에게 똑같은 말을 해 준 것 같은데.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자아이는 여자의 왼손을 끌어당기며 어린아이처럼 웅얼거렸다. 아냐, 변호사가 말을 하지 않아. 아무래도 죽은 것 같아.

남자아이는 마론인형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졌다.

여자는 서기에게 판결은 언제쯤 나느냐고 물었다. 서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판결은 벌써 났소. 그녀는 사형이에요. 사형 집행인은 벌써 그녀의 목을 잘랐고 피 묻은 도끼를 기록할만한 언어를 나는 지금 고심하는 중이죠.

남자아이는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아냐, 왜 오지 않았던 거야? 엄마는 네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어. 엄마는 눈을 감고 성모처럼 잔인하게 웃었고 사형 집행인은 단칼에 엄마의 목을 내려쳤어. 엄마는 목이 잘린 채로도 일 분 정도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어. 엄마의 입은 쥐새끼처럼 움직였고 쉭쉭거리는 소리가 났어. 나는 엄마를 끌어안았고 엄마에게 더 이상 시를 쓸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했어.

남자아이는 인형과 여자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작스럽게 울부짖었다. 아니야, 아냐. 난 엄마의 머리를 끌어안아야 할지 피가, 너무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엄마의 몸을 끌어안아야 할지 몰랐어. 엄마의 냄새와 엄마의 유방들은 몸쪽에 있었는데, 나를 밀어내고 나를 끌어안던 자궁과 음부와 가슴과 두 팔과 다리는 몸쪽에 있었는데 웃고 있는 건, 벌어진 채로 성모처럼 미소짓고 있는 건, 끊임없이 쉭쉭거리는 언어를 지껄이고 있는 건 머리 쪽이었어. 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 누가 내 엄마인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고 결국 무엇도 끌어안지 못했어.

아냐. 남자아이는 흐느끼고 있었다. 아빠는 항소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는 두 번 다시 증언하지 않아도 돼. 너는 두 번 다시 죽음을 기억하지 않아도 돼. 두 번 다시 죽지 않아도 돼. 신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고 신에게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점심을 먹고 나면, 여자는 서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판사가 자비로워질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서기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판결은 이미 이루어졌고 사형도 집행되었다고요.

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말에는 모순이 있군요.

서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얼굴만 움직이는 인형처럼 계속해서 미세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가씨도 빨리 점심을 먹으러 가요. 서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면 교실로 돌아가든지. 당신들이 나가고 나면 난 법정을 정리하고 혼자 앉아서 기록을 마칠 생각이요. 당신들이 계속 떠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 무수한 언어들을 놓치고 있소. 알겠소? 기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오래 전에는 반대라고 생각했지. 소음 혹은 잡음 속에서만 기록할 수 있고 침묵의 불가해한 명령들, 이유 없이 솟아오르는 유령 같은 흐느낌 속에서는 아무것도 적어내릴 수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지금 나는 침묵은 침묵일 뿐이라는 걸 알지. 자, 유령들도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갔소. 아가씨도 점심을 먹으러 나가요. 빨리.

여자는 남자아이의 손을 붙잡고 법정의 복도를 따라 나가면서 바닥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암쥐가 흘렸을 핏자국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도가 어두웠기 때문에, 혹은 핏자국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사형도 집행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꿈의 긴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여자는 핏자국을 찾을 수 없었다.

여자가 교실 문을 열고 나가자 종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남자아이를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재판은 대체 언제 시작되는 거지? 난 언제나 남의 재판에만 기웃거리고 있군.

남자아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속삭였다. 이건 네 재판이야, 아냐.

여자는 웃었다. 남자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여자를 따라 미소지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에게 물었다. 아냐, 돌아갈 거야?

어디로?

우리 집에.

여자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죽었어, 오빠. 엄마는 벽에 걸린 액자 뒤의 희고 슬픈 그림자처럼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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