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26

점심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우글거리며 복도로 밀려나왔고 남자아이는 군중 속에 파묻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여자는 남자아이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떨어뜨린 마론인형이 여자의 발치에 있었다. 여자는 벌거벗은 마론인형을 주워들었다. 마론인형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붉은 글씨는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 여자는 마론인형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붉은 글씨는 립스틱으로 쓰인 것 같았다. 여자는 붉은 립스틱이 묻은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여자의 입술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아이들의 물결이 여자를 왁자지껄하게 밀고 갔다. 여자는 물결에 순순히 끌려갔다. 여자는 생각했다. 변두리의 주민들은 왕정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왕을 믿고 죽은 왕의 아래에서 유령처럼 살아간다. 꿈의 모서리에서 살고 있던 초대받지 못한 객들은 꿈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꿈의 그림자 위에서 옹송그리며 살아간다. 꿈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창백한 꿈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마치 여전히 꿈의 심장이 박동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꿈이 한 번도 죽지 않은 것처럼. 꿈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발가벗겨진 몸도, 사형 집행인도, 꿈의 육각형의 일그러진 테두리와 죽음이 없는 것처럼.

여자는 아이들을 따라 교실로 들어섰다. 그 교실이 처음의 교실과 같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교실은 다른 모든 교실들이 그러하듯 검고 긴 칠판과 새의 눈처럼 빽빽하고 흐린 창문들, 스무 개 남짓한 책상과 의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그 모든 사물들이 교실을. 여자는 가운데 줄의 가장 앞 자리에 앉았다. 교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여자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가 여자의 어깨를 손으로 건드렸다.

여자가 뒤돌자 소녀는 키득거리며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었다.

여자는 사람을, 그것도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대답했고 소녀는 그래, 하고 대꾸했다.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소녀는 여자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실은 너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29번 채널에서?

어떻게 알았어? 소녀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여자는 사실 29번 채널의 프로그램들에는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으며 그녀가 출연한 프로그램들은 어린이 프로가 아니라 대개 연극이나 전위적 퍼포먼스를 라이브 촬영한 프로그램들, 혹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소녀는 여자에게 정말 배우가 맞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난 고민하고 있었어. 소녀는 말했다. 네가 정말 여배우라면 어떻게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배우일 수 있는 건지.

여자는 이상하냐고 물었다.

소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간수들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간수? 여자는 되물었다.

그래, 간수. 소녀는 다시 대답했다.

여자는 학교에 간수가 있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고 물었고 소녀는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 유리. 여긴 감옥이야.

여자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몸을 떨었다. 감옥이라고?

여자는 의자를 완전히 돌려 소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그래. 여기는 감옥이야. 하지만 모든 죄수들이 여기가 감옥임을 아는 건 아니야. 너처럼 깨닫지 못하는 죄수들도 있어. 심지어 어떤 간수들은 자신이 감옥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해.

소녀는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이건 상징이나 메타포가 아니야. 알겠어? 여긴 감옥이야. 너는 죄를 지었고 판결이 내려졌으며 그래서 감옥에 와 있는 거야.

여자는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난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어.

그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야. 너는 다른 재판을 받아야 해. 하나의 재판은 다른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시작종에 불과하니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 내게 말해 주었어. 다음 재판을, 진짜 재판을 준비해야 한다고.

소녀는 작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준비해야 한다고? 유리, 너는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어. 재판이 예정되는 순간, 그러니까 재판의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판결은 이미 내려진 거야. 아무리 멀리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자도 결코 재판의 향방을 바꿀 만큼 긴 시간을 갖지는 못해. 재판의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판결은 내려졌고 그렇기 때문에 너는 이곳에 온 거야.

여자는 새의 부리처럼 움직이는 소녀의 입술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여자는 야릇하게 웃었다. 난 내가 무슨 판결을 받았는지도 몰라.

소녀는 여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웃어젖혔다. 이 애는 자기가 무슨 판결을 받았는지 모른대!

소녀는 큰 소리로 세 번 반복해서 외쳤다.

유령처럼 앉아 있던 아이들은 소녀 쪽을 힐끔 보며 의례적으로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소녀는 여자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아무도 자신의 판결을 알지 못해, 유리. 판결은 극비 사항이야. 우연치 않게 다른 짐승들의 판결 내용을 알 수는 있겠지. 하지만 결코 자신의 판결을 알 수는 없어. 오직 사형당한 죄수들만이 예외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들조차도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지. 물론 간수들은 그들에게 솔직히 이야기해. 그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갈 거라고. 그래서 죄수는 자신이 사형수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지. 그들은 사형장으로 끌려갈 날만을 오래도록 기다려. 독방을 쓰는 경우에는 벽면 한쪽에 그가 기억하는 날의 수를 표시하기도 하지.

사형수는 벽면을 빼곡이 채워놓은 무수한 날들을 보고 구역질을 해. 건 그 이전에 자신의 존재를 표시하려고 발버둥쳤던 사형수들의 흔적이야. 독방이 아닌 일반 감실에 갇힌 사형수들은 다른 죄수들과 어울려 지내지. 하지만 그들 자신을 사형수라고 믿는 죄수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표징이 나타나. 죄수들은 기민하게 그 이중의 암시를 알아차리고 사형수를 신봉하거나 기피해. 혹은 그 두 개의 행동을 동시에 취하기도 해. 그들은 사형수를 머리 위에 이고 다님으로써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하는 거지.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그 어떤 죄수들에게도 자신의 운명을 털어놓지 않아. 사형수가 사형수임을 고백하는 순간 죄수들이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사실 죄수들은 어느 쪽이든 똑같은 행동만을 반복할 테지. 그들은 하루가 삶의 전부라고 믿고 하루의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기 마련이니까. 지구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긴 그림자를 억지로 주워 담아 다른 방향으로 보낼 수 없는 것처럼.

죽을 때까지 사형장으로 끌려가지 않는 사형수도 있어. 그는 결핵이나 매독에 걸려 갑작스럽게 썩은 고기가 되어버리거나 오랫동안 사형장으로 가게 될 날만을 기다리다가 노환으로 죽고 말아. 죽기 전에 그들은 사법당국을 비웃고 그 자신이 승리했다고 느끼며 최종적으로는 잃어버린 연인만큼이나, 혹은 천국만큼이나 사형장을 그리워하게 되지.

고해성사를 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신의 얼굴을 사형장의 깊고 아득한 구석자리로 떠올려. 그들은 죽기 직전에 사형장으로 가기를, 그래서 그들이 일생 기다려왔던 사형장을 직접 보고 그곳에서 생을 마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하지만 사형장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지. 임종 직전에 천국의 모순성을 깨닫는 신실한 교인처럼 그는 감옥의 구조상 사형장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어디에도 없음을 알아차리는 거야.

하지만 사형장은 분명히 있어. 따라서 어떠한 사형수들은 실제로 사형장에 들어가게 되지. 사형장에 들어서지 못하고 죽은 사형수들의 경우는 사실 사법당국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니야. 판결은 결코 실수일 수 없으니까. 사법당국은 실수를 할 수 있고 개개의 판사들과 검사들, 간수들과 관리들은 실수할 수 있지만 판결만큼은 언제나 완벽하지. 왜냐하면 판결은 이미 오래전에 예정되었으니까. 판결은 꿈을 무한히 되풀이하면서 이미 드러난 삶의 비밀을 서술한 내용이니까. 사형당한 죄수의 경우 사형당한 것이고 그것이 곧 판결이야. 죽음이 판결이라면 판결은 결코 실수일 수 없지. 모두가 죽으니까. 모든 판결들은 그런 식이야. 십 년의 감옥생활이 결정된 상태에서 십 년의 판결이 내려진다면 죄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판결의 내용을 사는 거지. 판결은 사실상 어떠한 명령이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틀릴 수 없는 예언에 가까워. 사형장에 들어서지 못하고 죽은 사형수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판결의 내용은 사실 그가 사형수가 아니라는 정언명령이었던 거지.

판결은 언제나 절대적이야. 루비콘 강의 밑면을 흐르고 있던 검은 피의 철퇴처럼. 사형수가 스스로를 사형수가 아닌 자로 믿든 사형수가 아닌 자가 자신을 사형수라고 철석같이 믿든 그래서 스스로 사형수의 삶을 지어 살아가든 마찬가지야. 사형수가 아닌 자들은 죽는 순간 자신이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음을 깨닫거나 혹은 깨닫지 못한 채 마치 사형의 명령을, 운명을 피해갔다는 황홀한 승리감에 젖어 잠들지.

심지어는 그의 판결을 직접 내린 판사들조차도 어떤 사형수들은 사형당하지 않았다고 착각하기도 해. 사실 판결의 언어는 불가해하고 어렴풋한 문자여서 그것을 직접 작성한 판사들조차도 판결의 언어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판사들은 점성술사처럼 목성과 붉은 행성들의 움직임에 따라 언어를 채워넣는 것뿐이야. 판사들은 대부분 귀머거리고 어떤 판사들은 변호사와 증인, 검사의 말을 귀기울여 듣거나 서기의 재판 기록 내용을 며칠 날밤을 새워가며 검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러한 행위들은 판결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아.

그토록 세밀하고 무의미한 과업들은 판사 개인의 학문적 호기심으로 이루어지는 연구에 불과해. 고서들과 사례들에 대한 연구 행위 자체가 결코 사례 자체를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없듯, 고대의 예언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듯 판사의 연구 역시 사형수 혹은 사형수가 아닌 자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어. 마지막 순간에 판사들은 그들이 법복을 이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비밀스러운 해석 행위에 따라 천체 망원경에 눈을 붙이고 별들의 배열과 위치, 각도와 순서에 따라 판결문을 작성해나가.

판결문을 작성하는 순간은 얼핏 판사의 자율적인 의지에 따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판사들이 판결문을 작성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천체들이고 판사들은 미쳐버린 점성술사처럼 별들의 의지에 따라 판결문을 작성할 뿐이지.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천체들이며 천체들의 언어는 시간에 다름아니므로 결국 판결을 내리는 당사자는 천체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천체들의 언어를 해석하는 시간은 판사의 눈과 관념 속에서 일렁이는 치밀한 격자망에 다름아니므로 판사 본인이 판결문을 작성하며 천체들은 오직 그의 판결문에 우주적인 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천체들의 움직임과 비밀스러운 우주의 언어는 모두 판사 자신의 언어를 외부세계에 투영한 상징물, 혹은 망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판사는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비의지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언제나 정확한 판결을 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그러나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판사가 자신의 판결 내용에 대해 언제나 의지적인 앎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건 불가능해.

판사가 판결문을 작성하고 나면 판결문은 바티칸의 사제들이 가슴 속에 두 번째 피부처럼 품고 사막을 건너갔던 신과 자연의 속삭임처럼 오직 두 개의 사본만으로 복사되어 대법원의 보관소와 교도소장에게 전달되고 원본은 판사의 서랍장에 보관되지. 판사의 서랍장은 무수한 짐승들의 운명으로 가득 차 있어. 판사는 그 자신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없는 운명의 흐느낌들 속에서 잠들고 타자들의 운명 속에서 죽는 거야. 남들의 운명 속에서 죽는 것이 판사의 유일한 운명이지.

교도소장에게 전달된 판결문의 사본은 간수들에게 무작위로 재전달돼. 금요일이 되면 간수들은 주급이나 상장을 받듯이 교도소장의 사무실 앞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교도소장은 간수들의 볼이나 머리를 어린 아들에게 그러하듯 부드럽고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면서 그에게 죄수 한 명의 판결문 사본을 전달하지.

사본을 전달받은 간수는 신의 운명을 움켜쥔 예언자처럼 감동으로 떨리는 눈을 들어 교도소장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어. 교도소장은 간수들의 얼굴을 손으로 직접 어루만지지만 간수들은 교도소장의 얼굴을 오직 눈짓으로만 쓰다듬을 수 있어. 환희와 열정을 억누를 수 없는 몇몇 간수들은 교도소장의 손등에 기사처럼 입을 맞추기도 해.

판결문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간수들은 신이 된 것처럼 달뜨고 심지어 메슥거리기까지 하는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들은 판결문의 어떠한 내용도 해석할 수 없어. 판사들이 그러하듯 판결문을 어렴풋하게 해석할 수도 없고 판사들이 그러하듯 판결문을 완벽하게 해석해냈다고 착각할 수도 없어. 간수들은 퇴근한 후나 죄수들이 감옥에서 잠을 자거나 섹스를 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기도를 하는 동안 판결문을 누렇고 흐릿한 등불 아래에 가져다대고 그것을 해석하려 애쓰지만 그들은 단 하나의 글자조차 해석할 수 없어. 사실상 판결문 전체가 하나의 기묘한 글자이며 선들은 끊어지지 않은 채 구불거리는 미로처럼 분기하고 합류하며 이어져 있으므로 하나의 글자를 해석할 수 있다면 판결문 전체를 해석하는 것과 같지.

여러 판결문을 가지고 있는 고참 간수들은 판결문을 해석하기 위한 나름의 언어적 규칙을 정립해 보려 애쓰기도 하지만 그들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아. 감옥의 불빛은 너무나 희미하기 때문에 판결문의 미묘하고 섬세한 곡선들을 해석하기에는 부적당하지. 그래도 간수들은 판결문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결코 멈추지 않고 판결문을 자신의 피투성이 어린 아이처럼 애틋하게 여기지.

이것 봐. 소녀는 비밀스럽게 손짓하며 원피스 가슴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낡고 연한 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는 원형의 구불구불한 문장이 푸른 잉크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지나치게 정교하게도, 혹은 어린아이가 마구잡이로 그린 것처럼 엉성하게도 보였다.

여자는 이게 판결문이냐고 물었다.

소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 이게 판결문이야.

소녀는 들킬까 두려워하듯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더니 곧바로 그녀의 원피스 가슴 안쪽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나는 간수들처럼, 아니, 판사들처럼 판결문을 연구하려 애썼어. 첫 번째 가설은 원의 전체 직경은 문장의 길이이며 원의 안쪽으로 구부러진 곡선들의 기울기는 형용사의 강렬도를 나타낸다는 거야. 죄수들에 대한 판결을 형법 내용으로 한정시키면 강렬도를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삶의 정도-결코 시간이나 양이 아니야 이 경우에는 정도지. 단 일 분이라도 끔찍하게 거센 무언가가 될 수 있으니까-로, 곡선들이 겹쳐지는 접점들의 개수를 수형 기간으로 해석할 수 있어.

혹은 접점 없이 끊긴 곡선 가지들의 개수나 한 접점에서 수렴하는 곡선들의 최대 개수를 수형 기간으로 볼 수도 있지.

혹은 이 판결문은 오직 곡선만큼이나 무수한 형용형 어구들로 이루어진 긴 형용사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예컨대, 암울한, 마침내 바깥으로 나간 고양이가 죽음을 기다리듯 천재성도 연주도 관중도 없는 적나라한 혼자 위에 홀로 걸려 있는 빛의 반점과도 같은, 육중한 암호랑이가 등을 짓누르는, 경계의 급진적인 변동과 죽음 아래에서 꺼져가는 곤충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과 같은 식이지.

물론 모든 판결문들이 같은 식의 문장구조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어. 어떤 판결문들은 명사들로만 이루어지거나 혹은 명사와 형사, 동사형 어미가 자유롭게 뒤섞인 시적인 문장구조로 구성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지. 물론 형사법 판결문에 걸맞는 문장구조는 다른 무엇보다도 명사지만 명사만으로 불가해하고 어렴풋한 운명의 판결 내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나는 형법의 명사들만으로 판결문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아예 포기했어.

여자는 소녀가 법에 대해 지껄이기 시작할 때부터 느꼈던, 거의 필연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질문을 던졌다. 넌 그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지?

그건, 소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오래전부터 법에 대해 공부해왔기 때문이야.

그럼 넌 죄수가 아니라고? 여자는 키득거리며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죄수야. 하지만 죄수가 아니기도 하지. 물론 내게도 판결은 내려졌지만 아직 내 판결 내용을 아무도 추측해내지 못했어. 대부분의 죄수들은 그에게 부과되었을 판결을 통례적으로라도 추측하고는 하지. 그들과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했던 죄수들, 그러니까 그들과 유사하거나 거의 같은 죄를 저질렀던 죄수들의 판례를 검토해서 그들에게 적용하는 거야. 물론 그러한 해석 방식이 언제나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표면적이며 공식적인 법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어. 형식적이고 추상적이더라도 자신의 죄와 처벌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들은 생의 범위와 작동 방식, 운명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맞추어 감옥에서의 생활 방식을 정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런 방식이 유익하거나 유용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그래도 그들은 표면적인 법령에 순응하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안도감을 느끼고 있지. 하지만 내 경우,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을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나와 같은 경우를 아무도 찾지 못했거든. 판결이 먼저 내려지고 죄가 사후적으로 잇다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어.

내 경우가 특히 힘들었던 건 내 엄마의 죄는 알려져 있지만 내 죄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는 거야. 엄마는 감옥에서 나를 낳았는데 감옥에 수감된 지 한 달이나 두 달 혹은 여섯 달이 지나서 낳은 게 아니라 이 년이나 지난 뒤에 나를 낳았어. 하지만 엄마는 독방에 갇혀 있었고 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독방 바깥으로, 그러니까 운동장 바깥으로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처럼 여러 죄수들과 간수가 비교적 자유롭게 오고가는 감실로도 이동한 적이 없었다는 거야.

간수들은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서 엄마에게 그녀를 강간한 간수나 죄수의 이름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엄마는 끝까지 말하기를 거부했어. 그녀는 그녀의 감옥 안에는 그녀의 그림자와 그녀밖에, 그녀의 생명과 그녀밖에 없었다고 말했어. 심지어 그녀가 갇힌 이후로 모든 간수들이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그녀에게 물과 음식을 주는 자도 없었다고 했어. 그녀는 갇힌 채로 철저히 혼자였고 죽어가고 있었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그녀는 죽지 않았지.

그렇게 그녀는 이 년을 살아남았고 아이를 낳고 난 뒤에야 간수들이 그녀를 발견했다고 그녀는 흐느끼면서 털어놓았어.

물론 간수들은 믿지 않았지. 그건 그녀가 신을 잉태했다는 말과 다름없는 이야기였어. 그것은 그녀가 성모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어. 간수들은 불온한 환희와 경악에 휩싸여 엄마가 독방에서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허락했어.

엄마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어. 간수들과 죄수들 사이에서 엄마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짐승들은 엄마를 조롱하고 모욕하기 위해, 혹은 신처럼 받들고 기도를 올리기 위해 엄마와 나의 독방 앞에 몰려들었어. 엄마와 나의 독방 문은 거의 언제나 열려 있었고 짐승들은 우리에게 유리조각과 휴지뭉치, 음식물 찌꺼기 같은 쓰레기와 성수, 장미 꽃잎을 함께 던졌어. 어쨌든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는 않았지.

엄마가 독방의 세 벽면을 가느다란 쐐기 표시로 가득 채웠을 때 엄마는 내게 법과 감옥의 시스템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 주었어. 엄마는 신처럼, 새의 시선으로 세계를 투시하는 전능자처럼 모든 것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어.

사형장에 도달한 죄수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사형 집행인을 기다리는지, 마치 그 소굴에서 사형수를 훔쳐본 그림자처럼 이야기해 준 것도 엄마였어. 엄마는 사형장에 도달한 죄수가 처음에는 사형 집행인을 두려워한다고 말했어. 막 사형장에 도착한 죄수는 사형 집행인이 영원히 도착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그리고 어떤 죄수들의 경우 그 기도는 실제로 이루어져. 사형 집행인은 결코 사형장으로 들어서지 않아. 사형장으로 그를 안내했던 간수도, 그곳이 사형장임을 알려주었던 간수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 사형장의 문은 잠겼고 사형수는 온전히 혼자야.

사형수는 목이 잘린 암탉과 여름의 햇볕 아래 우유처럼 흰 피를 쏟아내는 가느다란 목과 흰 날개를 떠올려. 사형수는 긴 악몽에 시달리고 햇볕이 들지 않는 감옥에는 낮과 밤이 없으므로 악몽은 끔찍하게 증폭되어 감옥을 전부 뒤덮고 말아. 사형수는 장미 꽃잎 한 장의 꿈을 꾸고 그 꿈은 두 개의 거울 속에 갇힌 장미의 무한한 그림자처럼 무수하게 증폭되어 어느 순간 사형수는 장미 꽃잎으로 그득찬 사형장 안에서 허덕이며 질식해가게 되는 거야. 그의 코와 귀와 입 속으로 부드럽고 또 고통스러울 정도로 축축한 붉은 장미 꽃잎들이 밀려들고 그는 어느 순간 장미 꽃잎들이 인간의 심장으로 변해 있는 것을 느껴. 인간의 심장 혹은 돼지의 심장 혹은 천사의 심장. 그는 심장을 베어 물어. 굵은 혈관이 찢겨지고 그의 입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피로 물들어. 그는 구역질을 해대면서도 꿋꿋이 심장을 베어물고 마침내는 사형장을 가득 메운 현기증 나는 심장들을 전부 씹어 삼켜. 그의 피부는 불그죽죽하게 변해서 물에 부푼 거대한 장미처럼 보여.

그리고 그는 다시 장미 꽃잎 한 장의 꿈을 꾸는 거야.

사형수는 미쳐가고 그의 꿈을 끝내줄 사형 집행인의 자비로운 도끼 한 자루만을 간절히 기다려. 하지만 어떤 사형수에게는 결코 사형 집행인이 찾아가지 않아. 어떤 사형수는 영원히 목과 몸의 결별을 가질 수 없어. 인간과 개과 돼지와 천사의 심장들이 익사한 장미처럼 부풀어오른 붉은 살점으로 사형장을 뒤덮고 그는 마침내 장미들의 피투성이 육체 속에서 질식하여 죽고 말아. 그는 사형장에 가도록 판결 받았지만 사형장에서 사형되도록 판결 받은 것은 아니었던 거야.

엄마는 사형수가 사형 집행인과 만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사형 집행인은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한 건 아니야. 엄마는 새, 혹은 천사의 눈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사형수는 한 시간 혹은 사흘만에 사형 집행인과 마주하게 돼. 장미와 심장에 파묻힌 채로 마지막 구원처럼 사형 집행인과 조우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형장 진입 이후 초기에 사형 집행인을 만나게 되고 사형장에 오래 있을수록 사형 집행인과 만나게 될 가능성은 급격하게 줄어들어.

사형 집행인은 대개 사형수보다 키가 작고 왜소하며 병자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도 사형수는 사형 집행인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해. 사형 집행인의 가느다란 손목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도끼를 빼앗는 일은 어린아이의 손에서 총을 빼앗는 일과 같아. 어린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아이의 손에서 가련하게 바르작거리는 금속이 얼마나 큰 상처를, 거대한 구멍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 피투성이 구멍에 빠져 주저앉게 되고 말지.

사형 집행인은 피와 검은 얼룩이 엉겨붙은 더러운 도끼를 과시하듯 매만지며 사형수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네. 사형수는 사형 집행인의 인사를 받고 사형 집행인이 결정적인 행동 혹은 신적 암시를 그에게 내려주기를 기다리지만 사형 집행인은 도끼를 매만지면서 선 채로 머뭇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

오랜 시간 동안 사형 집행인은 아무런 결정적인 행위도 없이 가만히 서 있어. 사형수가 솜털처럼 부드러운 깃으로 덮여 있는 사형 집행인의 앙상한 다리를 붙들고 애원할 때까지 사형 집행인은 침묵해. 사형 집행인은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여. 그는 확신 없는 태도로 도끼를 어색하게 어루만질 뿐이야. 서툴고 집요한 어루만짐이 도끼를 과시하지만 그것은 의도된 연출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어느 순간 사형수는 사형 집행인이 그와 같은 죄수라는 것을, 그리고 사형 집행인은 죽음과 목 잘림, 절개와 피투성이에 익숙한 경력자가 아니라 최초로 죄를 범하기 직전의 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사형 집행인은 최초의 죄를 앞두고 망설이고 있어. 살인을 저지를 사형 집행인은 이미 예정된 그의 직분으로 인하여 최초의 살인 이전에도 이미 살인죄에 걸맞는 형벌을 받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형 집행의 도살 작업인 거야.

사형수는 시간의 선후와 인과 관계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죄와 벌의 불가해한 얽힘이 부조리하다고 느끼지만 대부분은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않아. 사형수는 사형 집행인이 살인 이전의 망설임을 끝내고 그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기를, 그래서 사형 집행인이 벌에 걸맞는 죄를 차지하고 그 자신 역시 죄에 걸맞는 벌을 소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 무엇보다도 피투성이, 장미의 심장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어떤 사형 집행인은 끝까지 망설이지. 사형수는 사형 집행인 앞에서 공포와 불안으로 질식사하고 사형 집행인은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그의 과업을 마쳐. 어떤 사형 집행인은 대담하게도 사형수의 목을 단칼에 잘라내고-사실상 부러뜨린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거야-두 개로 나뉜 생과 두 개로 나뉜 죽음과 두 개로 나뉜 몸을 수거해. 시체를 치우지 않는 사형 집행인도 있어.

어쨌든 사형 집행인은 두 번째 사형 집행인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결코 열리지 않을 사형장에 갇힌 채로 죽음을 기다릴 거야. 두 번째 사형 집행인이 사형장에 도착할 확률은 첫 번째 사형 집행인이 도착할 확률보다도 더 적어. 대부분의 사형 집행인들은 그가 죽인 사형수의 시체 옆에서 핏방울이나 장미 꽃잎, 혹은 모래알의 이미지들을 무한히 증폭시켜가면서 그 속에서 숨이 막혀 죽고 말아.

엄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모든 이미지들을 천천히,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내게 설명해줄 수 있었어. 간수들 일부는 내게 독방에 갇힌 사형수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간수들은 나를 엄마 곁에 두는 데에 동의했어. 엄마는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잘 돌보고 있었고 나는 최초로 발견한 언어와 세계에 특별한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

내가 어렸을 때 감옥에서 나가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면 간수들은 못 이긴 채 나를 내보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감옥 바깥에 대해 무지했고 감옥 바깥의 세계에 대해 듣고 난 뒤에도 특별히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느끼지는 않았어. 감옥 바깥은 먼 우주, 아득한 외계 은하처럼 여겨졌어. 지상에서 태어난 짐승들은 대부분 지상에서 만족하며 살아가지. 지옥에서 태어난 지옥의 원주민들 역시 지상보다는 더 나은 지옥을 꿈꾸는 거야.

엄마는 내게 긴 유언을 들려주었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엄마가 감옥에 관해 속삭이던 소리뿐이야. 엄마는 감옥을 넘어서는 시를 쓰려 했는데 나는 그런 시행은 단 한 행도 기억하지 못했어.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시를 썼을 거야. 감옥의 어떤 죄수들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만 엄마는 그렇게 되지 못했어. 엄마는 아무런 희망도 낙관도 없이 희망과 낙관에 관한 시를 읊었어. 대체 무엇 때문에 엄마는 그렇게 시를 쓴 걸까? 엄마는 미친 여자 같았어. 저주 같은 중얼거림을 끝내고 잠들 때 엄마는 지친 어린 아이처럼 보였어. 나는 혼자 생각했어. 대체 몇 행의 시를 읊고 나야 우리는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까? 몇 행의 시를 읊고 나야 감옥은 우리를 잊을까?

엄마는 그녀가 읊는 시의 양이나 질이 그녀를 잘 팔리는 창녀로 만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으며 상상할 수 있는 기적 역시 마찬가지였지. 여자는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안다고 말했다. 내가 아는 남자아이의 엄마도 시인이었다고 했어. 부엌에서, 구석자리에서 혼자 시를 읊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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