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6

판사는 이번 안건과는 무관한 내용을 들먹이지 말라고 권위적으로 말했고 검사와 변호사는 더 이상 그녀가 피해자였던 다른 사건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검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준비해온 대사를 잊은 듯 종종 말을 더듬고 버벅거렸다. 이미 그가 준비한 서류의 내용을 알고 있는 판사나 변호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여자와 청중들은 검사의 백치같은 말더듬증을 경악하며 듣고 있었다.

그녀는 최,악의. 최악의 살인자, 살인자입니다. 밤은, 그러니까 비가 내리는 밤은 그녀의 공범이었습니다. 밤의 비는 그녀의 공범이었습니다.

검사는 갑작스럽게 재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은유적인, 심지어는 시적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말을 내뱉었고 판사는 화를 내며 요점만 정리하여 발언하라고 소리쳤다. 심지어, 그날 밤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변호사는 그 사실을 지적했고 청중들은 와아하며 웃었으며 판사는 엄숙하게 판사봉을 몇 번 두드렸다.

보호소에는 간혹 그녀 앞으로 저주나 찬사가 담긴 편지와 선물이 도착했다. 작은 폭탄이나 칼날이나 가위에 갈기갈기 찢기고 얼굴이 케이크 반죽으로 더러워진 인형이 들어 있는, 리본에 묶인 선물상자가 여자에게까지 도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피나 잉크나 흑연으로 쓰인 편지를 여자는 종종 읽어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여자를 죽이고 싶거나 여자에게 죽고 싶다고 적었다. 여자는 편지와 마찬가지로 편지를 쓴 동물, 혹은 사람 역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여자의 침대 베개맡에는 구겨진 편지들이 수북이 쌓였다.

그중에는 여자를 방송사로 섭외하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 수신인은 여자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고 발신인은 29번 채널 PD로 되어 있었다. 편지에는 정중한 어투로 여자를 인터뷰쇼에 초대하여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편지지 한가운데에는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돼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폴라로이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여자는 그 편지가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답장을 쓰지는 않았는데 그건 단순히 여자가 그 편지를 너무나 늦게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보호소의 원장과 교사들이 한 차례씩 검열한 뒤 여자에게 편지가 도착한 것은 발신 날짜보다 육 개월이 더 지난 뒤였다. 여자는 다른 편지들과 함께 그 편지를 하얀 시트의 무덤 위에 얹어 놓았고 삼 개월이 더 지나서야 편지를 읽게 되었다.

여자는 상담사에게 29번 채널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상담사는 잘 모른다고, 그녀는 TV를 좋아하지만 그 채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난 영화를 좋아해. 특히 검고 긴 머리의 창백한 소녀들이 등장하는 일본의 공포영화를 좋아한단다. 상담사는 TV에 취미를 붙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날의 세션에서 여자는 거의 침묵했기 때문에 상담사는 마치 그녀 자신이 환자라도 되는 양 수다를 늘어놓았다.

영화는 매력적이야.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도 텔레비전으로, 무엇보다도 구식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최고지. 집에서 혹은 개인의 방에서 하다못해 화장실에서라도 우리는 기도를 하듯 영화를 볼 수 있어. 불을 끄고 TV 화면의 불빛만을 유일한 광원으로 삼은 채 명멸하는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앞에서 부유하는 환한 이미지들이 마치 계시와 같다는 걸 깨닫게 돼. 마술요지경을 보는 것과 같아. 암실은 텅 빈 우주의, 이미지들은 언어의 유비지. 심지어는 감옥에도 TV가 있단다. 얘야, 하지만 밀실에서의 영화 관람이 가장 좋아. 우리는 신과 독대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단다. 영화관이나 여러 명이 함께 쓰는 감옥에서는 반드시 다른 짐승들의, 지상에서 나고 자란 생물들의 웃음이나 울음소리 한숨과 하품소리를 듣게 돼. 결국 하나의 반응은 집단적이 되고 다리가 부러진 여자아이의 울음소리는 영화관에 앉은 관중들의 특성에 따라 폭소를 유발하거나 비명과 경악을 불러일으키지. 집단적인 환각이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신과 독대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 그들이 독대한 건 신의 계시와 같은 이미지들이 아닌, 집단적인 망상과 발작의 전염성뿐이지. 그러므로 영화는 혼자 보는 게 가장 좋단다, 얘야. 내용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미지를 독점한다는 환상이야. 불도 반드시 꺼야 하고 휴대폰 전원도 꺼야 한단다. 다른 이미지들이 틈입하지 않도록.

그래서, 여자는 물었다. 당신은 신을 만났나요?

상담사는 웃으며 말했다. 신이 아니라 신의 이미지야, 유리, 그게 중요하단다.

여자는 상담사와의 대화가 꿈과 같다고 생각했다. 상담사는 광신적이며 신비적인 여사제처럼 보였으며 솔직히 말해서 미치광이처럼 느껴졌다.

상담사는 보호소에 TV가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두꺼운 금속성의 회색 프레임이 둘러진 두꺼운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떠올릴 수 있었으나 그 이미지가 상상인지 기억의 정확한 재현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담사는 아마 있을 거라고, 없다면 보호소 원장에게 직접 말을 전하겠다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열렬하게 말했고 여자는 아마 있을 거라고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보호소의 소녀들 방에는 여자가 기억했던 대로 두꺼운 금속성의 회색 프레임이 둘러진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다른 소녀들은 치료를 받는 중인 듯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파랑은 이층 침대에 앉아 정수리를 천장에 붙인 채로 여자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옷장 바로 옆 선반에 놓인 텔레비전에는 두터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여자는 파랑에게 텔레비전 리모콘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파랑은 마치 여자가 같은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백 미터 너머에 떨어져 있다는 듯이 모른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약을 한 것처럼 달뜬 목소리였다.

여자는 텔레비전 옆면에 있는 전원 버튼을 직접 눌러 TV를 켰다. 음량이 최대로 설정되어 끔찍하게 커다란 소리가 방 안을 찢어발길 듯 터져나왔다. 여자는 침착하게 음량 소거 버튼을 누른 뒤 무료 채널 열댓 개를 천천히 돌려 보았다.

몇 개의 입술들이 여자의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물을 뒤집어쓰고 수영하는 흉내를 내는 여자를 가리키며 남자 패널들이 낄낄거리고 있었다. 왼손에 인형을 끼운 남자가 이를 드러낸 채 마네킹처럼 웃으며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은 계속해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분홍색 죄수복을 입은 죄수들이 난동을 부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얼굴이 유달리 파리한 남자의 벌어진 입을 여자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여자는 그의 입을 우악스럽게 벌려놓은 비명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음량 버튼을 눌렀고 클라이막스에 진입한 노래와도 같은 노트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여자는 아래쪽을 향한 화살표 버튼을 애무하듯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눌렀다. 남자의 비명은 점점 줄어들었고 다음 채널에서 분홍색 클레이를 뒤집어쓴 세 마리 돼지들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들은 한낮의 언덕 위에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는데 카메라 해상도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카메라가 돼지들의 어깨 위로 가까이, 너무나도 느닷없이 클로즈업 되는 탓에 그들의 어깨 위를 두껍게 덮으며 흘러내리는 굵직한 물방울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여자는 그들이 진짜 돼지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어린 돼지 한 마리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돼지처럼 둥글지 않은 사람의 작은 코와 둥근 귓바퀴가 드러났다. 여자는 그들이 클레이를 바른 채 돼지로 분장하고 있는 사람 배우들임을 깨달았다. 잔잔한 팝 음악이 흘러나왔고 간간이 얕은 바람소리가 들렸지만 특별한 내용과 의미를 담은 언어는 들려오지 않았다.

여자는 그 채널이 29번임을 확인하고는 십여 분을 더 그 채널에 머물렀다. 상담사의 조언과는 달리 불은 켠 채였고 그녀는 홀로 있지도 않았다. 이후로도 여자는 종종 생각이 날 때마다 무심코 TV를 켜고 29번 채널을 살펴 보았지만 화면은 정지된 것처럼 같은 이미지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돼지들은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듯 멀거니 서 있었고 그런 그들의 등과 간혹 클로즈업된 어깨, 주름이 진 목 위로 드러나는 얼굴이 보일 뿐이었다.

여자는 상담사에게 TV를 보았다고 말했고 29번 채널을 아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상담사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여자와 상담사는 꿈 이야기를 하거나 TV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했다. 상담사가 말해주는 것은 대개 영화 이야기였고 여자는 대개 무료 TV 채널에서 방영해준 이미지들, 그녀의 머릿속에서 혼탁하게 뒤섞여 모호하게 변질되어 버린 이미지들에 대해 말했다. 상담사는 영화 이야기를 할 때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편파적이고 격정적인, 심리상담사로서는 부적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여자는 TV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꿈 이야기보다 더 내밀하고 부끄럽게 느꼈으나 상담사는 내색없이 그녀를 들어 주었다. 그러나 어떤 날 여자는 무척이나 대담해졌고 상담사가 들려준 영화 이야기를 즉석에서 거침없이 변용하여 상담사에게 되돌려 주었다.

예컨대, 상담사는 끔찍한 전화벨 소리에 사로잡힌 어린 여자아이에 대해 말한다. 여자아이는 교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치마 주머니를 뒤진다.

교사는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교사의 흰 손은 여자아이의 어깨 위에 얹혀 있다.

여자아이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교사는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휴대폰을 숨겼느냐고 묻는다. 여자아이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인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난 휴대폰을 숨긴 적이 없다고 흐느끼며 속삭인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야 해요, 선생님. 난 전화를 받아야 해요.

상담사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되게 재현하며 연기한다. 그러나 상담사는 여자아이를 조롱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담사는 영매처럼 이미지들에 침잠하여 속삭이고 그녀의 입술은 이미지들의 예측할 수 없는 파동과 함께 떨린다.

상담사는 여자아이가 전화벨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고 말한다. 관객은, 그러니까 상담사는 여자아이가 듣는 전화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교사와 다른 학생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교사는 여자아이에게 양호실에 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여자아이는 시뻘개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여자아이는 괜찮다고 말한다. 전화를 받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교사는 다시 교단으로 올라가 수업을 하고 여자아이는 책상에 엎드려 흐느낀다. 교사의 흰 손이 올려져 있던 여자아이의 어깨는 형편없이 떨린다. 교사는 다항 방정식의 풀이를 가르친다. 아이들은 매혹적인 곡선으로 휘어진 알파벳 문자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여자아이는 교실 뒷문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여자아이의 허벅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여자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달팽이의 경로처럼 끈적한 점액질이 남아 있다.

여자아이는 양호실의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는다. 또다시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여자아이는 발작하듯 흐느낀다.

양호교사는 여자아이의 어깨 위에 하얀 손을 올리고는 반드시 전화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서글프게 말한다.

여자아이는,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없어요, 하고 울부짖는다.

여자아이의 허벅지 밑으로는 아직도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여자아이는 완전히 미쳐버린다. 양호교사는 여자아이를 품 안에 끌어안지만 여자아이는 가슴이 찢어질 듯 숨을 헐떡이며 울부짖는다.

다음 시퀀스에서 여자아이는 다시 교실에 앉아 있다. 그녀의 의자 밑에는 둥근 피 웅덩이가 고여 있다. 교실 천장에서 유백색의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책상 아래로 숨는다. 여자아이도 책상 밑으로 숨기 위해 비척거리며 일어나지만 곧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여자아이는 전화를 찾아 옷을 풀어헤치며 발광한다. 흰 비가 여자아이의 어깨 위에 내려앉고 여자아이는 전화를 받는다. 그녀의 손에는 은색의 휴대폰이 들려 있다. 수화기에 입술을 붙인 채 여자아이는 전화벨의 멜로디를 노래 부른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없다. 오직 화면 바깥의 상담사만이 여자아이를 응시하고 있다.

상담사는 어떠한 해석이나 평가도 덧붙이지 않고 영화의 이미지들을 이야기한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짓궂게도 상담사의 이야기를 곧바로 변용하여 내뱉는다.

여자아이는 심장 모양의 검은 초콜릿을 잇새로 깨문 채 전화벨 소리를 기다린다. 여자아이는 초콜릿을 두 개의 희고 날카로운 앞니로 절단하고 그녀의 이 끝에는 잉크처럼 검은 진액이 남는다. 남은 초콜릿은 바닥에 떨어진다. 초콜릿 위로 백아흔다섯 마리의 하얀 개미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개미들은 현기증을 앓는 병자의 편지지 위를 기어다니는 글자들처럼 메스껍게 경련한다.

여자아이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부적절한 상상을 떠올린다. 초콜릿 안쪽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피에 젖은 게걸스러운 개미들은 여자아이의 가느다란 발목을 타고 올라온다. 개미들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검은 글자들의 클로즈업. 여자아이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흐느낀다.

교사는 깜짝 놀라 여자아이에게 다가오고 여자아이의 어깨에 흰 손을 얹는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개미들의 클로즈업. 개미는 여자아이의 골반 위에서 다이빙을 해 교사의 바짓단 아래에 들러붙는다. 여자아이는 폭소를 참을 수 없다. 개미는 계속해서 올라오고 마침내는 여자아이의 턱 위를 뒤덮는다. 여자아이의 입 속으로 밀려든 개미들은 여자아이의 설대와 연구개를 물어뜯는다. 여자아이는 구역질을 하며 흐느낀다. 여자아이는 기침을 하고 그 때마다 가슴에 수북이 쌓인 흰 가루가 연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몇몇 개미들은 놀랍게도 날아오른다. 여자아이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비명을 지른다.

양호실 침대 위에 앉아서 여자아이는 전화번호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에게 걸려올 수 있는 모든 전화들에 대해. 그러나 여자아이는 하나의 전화번호도 완전히 기억해내지 못한다. 여자아이는 교복 셔츠를 풀어헤치는데 그 안에는 상처투성이 달이 누렇게 빛나고 있는 흰 티셔츠가 있다. 여자아이는 달 위에 엉겨붙은 개미의 조각들을 거칠게 털어낸다. 양호교사는 여자아이를 위로하고 여자아이는 양호교사의 혀 위에 검게 내려앉은 개미들을 본다. 여자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곧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상담사는 불쾌한 기색 없이 여자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여자가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난 뒤에 상담사는 묻는다. 그건 사실이니?

여자는 상담사를 도전적으로 바라보며 되묻는다. 어떤 것 같은데요?

상담사는, 그건 네게 달린 거야, 하고 말한다.

여자는 사실이라고 대답한다. 이야기는 당신만큼 사실이에요.

상담사는 짐승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었고 여자는 상담사와 함께 미소지었다. 이런 식으로 사실을 상상할 때 여자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녀는 당당하고 오만한 여사제처럼 그녀에게 흘러들어온 이미지들을 여과없이 쏟아낼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취합한 이미지들에 대해, 그녀가 직접 본 TV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는 꿈이나 살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내장의 밑면을 빼내어 은밀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녀는 깊은 공포를 느꼈다. 노란 셔츠를 입은 여자의 신발마저 노랬다고 이야기할 때, 여자는 상담사의 손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불그죽죽한 내장이 터져버릴까봐 두려웠다. 상담을 시작할 때마다 여자는 버릇처럼 29번 채널을 아느냐고 물어보았고 상담사는 언제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돼지들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에게 영화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상담사는 여섯 개의 거울들 속에 갇혀 있는 꿈을 꾸었다. 여섯 개의 거울들 뒷면에는 여섯 개의 수면을 두드리는 주먹들이 있었다. 거울들에 비추어진 여러 각도의 상담사들은 상담사의 흰 얼굴을 빗겨 모호한 점을, 합류하지 않는 시선을 거치며 응시하고 있었다. 상담사는 거울들의 기이한 기하학 속에 서서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세었다. 그녀는 일부터 천천히 세며 초를 기록하려 했지만 곧 그녀가 일이 아닌 삼십오부터 숫자를 세고 있으며 삼 또는 이 또는 오의 간격으로 숫자를 벌리며 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상담사는 그녀의 아들이 그녀의 배에 나이프를 박아넣던 순간을 떠올렸다. 잭나이프는 아들의 부드러운 손바닥과 상담사의 뱃가죽을 동시에 찢어내었다. 나이프는 상담사의 가슴뼈까지 놀랍도록 매끄럽게 올라갔고 상담사는 그녀가 찢기는 것을 외과의처럼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통의 선명도를 일부터 칠까지의 척도로 측정하였다. 고통의 지속기간과 고통의 강렬도와 고통의 슬픔, 고통의 배신과 고통의 분노와 고통의 증오와 고통의 애틋함을 그녀는 모두 일부터 칠까지의 척도로 기록하였으나 곧 전부 잊어버렸다.

아들은 태어난 뒤 한 번도 그녀를 벗어난 적 없이 그녀의 곁에서 잠들었다. 아들은 유달리 키가 작았고 아이처럼 머리가 컸으며 눈은 검었고 코는 정직한 사람처럼 두툼하고 커다랬다. 아들은 대입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공장에서도 해고당했다. 편의점이나 카페에서는 기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백치처럼 보이는 남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담사는 아들이 면접을 볼 때마다 그와 동행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들은 면접을 보지 않고 놀이터의 동굴 모양 놀이기구 구석에서 시간을 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담사가 함께 면접을 보러 가도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아들은 독이 있는 개구리처럼 매끄러운 입술을 발작적으로 훔치면서 그는 더 견딜 수 없다고 애처롭게 속삭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아들은 상담사의 배에 잭나이프를 박아넣었고 그것을 여자의 가슴뼈를 넘겨 목까지, 턱의 끝에 닿을 때까지 끔찍하게 천천히 베어올렸다.

죽고 난 이후로 십 년이 넘도록 상담사는 낯선 질병이 틈입하는 듯한 메스꺼움에 시달렸다. 살인 이후 아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전기 의자에서 사형된 이후 계속해서 상담사를 찾아왔다. 죽음 이후 상담사는 곧바로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지만 아들은 알 수 없는 경로로 상담사의 주소를 찾아 집요하게 여자의 집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 벨소리와 병적으로 반복되는 문 두드림 소리를 들으며 상담사는 비척대며 일어나 현관 CCTV 화면을 살펴보았다. 아들은 전기 충격과 죽음의 고통으로 더 움츠러든 상태였다. 그의 검은 눈은 금붕어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상담사와 아들은 완전히 다른 종처럼 보일 정도였기 때문에 그녀의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는 괴이한 외모의 남자를 이웃들은 아들이 아니라 헤어진 연인 정도로 여겼다.

상담사는 더 이상 아들의 방문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미 사형당한 범죄자를 다시 붙들어둘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들이 다시 여자를 살해하거나 겁간하거나 폭행하거나 상담사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기 전까지 상담사는 무력하게 아들의 방문-의실패-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상담사는 악몽의 한복판에서 여섯 개의 거울들을 두드리는 여섯 개의 집요한 노크 소리를 들었다.

보호소에서 여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잠들었다. 불을 끈 방에서 희미하게 출렁거리는 TV 화면의 불빛이 여자의 얼굴 위로 아른거렸다. 음소거를 해 놓은 TV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수술대 위에 앉아 여자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옆으로 누운 채 의사의 앙상한 가슴을 마주보았다. 의사의 입술은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여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새벽 시간까지 여자는 잠들지 못했고 화면 조종의 부스럭거리는,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일그러진 노이즈 이미지가 어지러이 흔들리는 동안에도 여자는 오래도록 어둠 속에서 TV 화면을 깜빡임도 없이 응시한 탓에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해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위에서 보라가 뒤척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보라는 꿈과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꿈이 길어질수록 그림자는 짧아진다고. 주문처럼 계속되는 중얼거림을 들으며 여자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주말에는 상담 치료가 없었으므로 소녀들은 멍하니 앉아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교차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보라는 여자의 침대 옆에 앉아 여자의 편지들을 읽었다. 소녀는 편지로 학을 접어도 괜찮느냐고 물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TV는 밤새도록 켜진 상태였으며 29번에 고정되어 있었다. 세 마리 돼지들의 불그죽죽한 등과 들판의 푸른빛 이외의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초록은 침대에 알몸으로 엎드린 채 잠을 자고 있었고 파랑은 바닥에 주저앉아 돼지들의 멍청하고 황망한 등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일어나 채널을 바꾸었다. 그녀는 음소거를 해제하고 복화술사가 나오는 토크쇼로 채널을 돌렸다.

복화술사는 흰 머리를 늘어뜨린 무척 늙은 인형을 들고 있었다. 인형의 입속은 검고 텅 비어 있었다. 복화술사는 흰 이를 드러내며 입술을 당겨 길쭉한 미소를 보인 채로 인형의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한강에 빠졌을 때 나는 119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구급대원은 어떻게 물에 빠진 채로 전화를 걸었느냐고 웃었고 나는 따라 웃었습니다. 구급대원은 혹시 벌써 죽은 게 아니냐고 물었고 나는 그제야 내가 이미 죽었다는 걸 깨달았죠. 구급대원은 앰뷸런스 대신 장례차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고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두 시간을 물 속에서 더 기다리자 장례차가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내 휴대폰의 위치추적서비스를 이용해 왔는데 내게 개인정보수집동의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 서명이 아무런 효력도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직원은 당황스러워하며 내게 법적 대리인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이 남자의 전화번호를 늘어놓았습니다.

인형은, 혹은 남자는 장난스럽게 인형의 입을 벌리며 머리로 남자의 볼을 툭툭 쳤다.

직원은 당황하더군요.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같은 손과 같은 발성기관과 같은 뇌와 같은 신경조직을 공유하고 있군요. 이런 경우 우리들은 당신들이 같은 개체이며 같은 사망자라고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원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혹시 다른 보호자는 없나요? 하고 물었죠.

난 그 자리에서 직원을 울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죠. 그래서 실제로 난 아무 말 없이 납덩이 같은 구명조끼를 걸치고-오, 그건 내 파트너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강물 속으로 잠겨들었죠. 그렇게 장례 직원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장례차를 끌고 회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마지막에 그는 분명 울었을 겁니다. 운전대를 잡고서, 혹은 아무런 소득도 없었음을 상사에게 보고하면서 분명 어린애처럼 질질 울어댔겠죠. 사실 난 물 속 깊은 곳에서 아득하게 떨리는 울음소리를 들었고 그게 분명 그 꼴 보기 싫은 장례 직원의 울음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인형, 혹은 남자는 다시 장난스럽게 남자의 볼을 머리로 짓누르며 말했다-이 작자의 울음소리더군요. 이 사람은 나보고 절대로 그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죽더라도 언제든지 그가 나를 박제사에게 데려갈 수 있도록 멀쩡한 상태로 그의 주변에서 죽으라고 닦달하더군요.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인위적인 웃음 삽입음과 방청객의 진짜 웃음소리가 오디오에 동시에 맞물리는 바람에 웃음소리는 무척 기이하게 들렸다.

파랑은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나도 저렇게 기깔나는 인형을 하나 가지고 있었어. 그년이 말도 없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 난 죽을 때도 그년과 함께 묻힐 거라고 생각했지.

넌, 여자가 물었다. 인형술사와 인형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

파랑은 그래, 하고 대답했다. 적어도 우리는 전부 다른 몸들이야. 그렇지? 목소리가 간혹 섞이더라도 믿고 있는 동안 우리는 다른 존재야.

파랑의 얼굴은 여자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인형의 벌어진 구멍이 들썩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형은 끔찍하게 수다스러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쉴 때마다 매혹적인 긴 머리칼이 그녀의 이마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광고 후 오늘의 초대손님을 모실게요, 하고 인형은 교태스럽게 속삭였고 방청객들은 빗소리처럼 들리는 박수를 쳤다.

오 분 가량 광고들이 흘러나왔다. 젖소의 얼룩을 피부에 문신한 벌거벗은 여자가 나와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쥐고는 승리자처럼 커다랗게 웃어보였고 그녀의 배 위로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번호가 떠올랐다. 곧 우주복을 입은 연한 푸른 얼굴의 남자들이 하얀 미로 속으로 들어섰고 그들은 서로 접촉하지 않은 채 미로를 바쁘게 떠돌았다. 그들은 미궁 끝에 설계된 둥근 방으로 모여들었고 서로의 푸른 피부를 게걸스럽게 들여다보며 서글프게 소리쳤다. 이곳은 우주선의 냄새가 나는군. 신의 냄새, 신의 분비물, 상처 투성이 달을 떠도는 참회자. 남자들은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그들의 위로 어린아이의 달처럼 노랗고 둥근 눈이 떠올랐다.

그들은 흰 연기와 함께 바스라져 사라졌고 아이는 천국에서 길을 잃은 짐승들처럼 음울하게 뛰어다니던 남자들의 흰 잔해가 남은 미로를 들어보이며 카메라 렌즈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이의 엄마는 짧게 자른 금발 머리를 아이의 볼에 가져다대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유해 동식물 박멸, 특허받은 장치라는 문구가 여자와 아이의 눈을 가리며 흘러내렸고 거대한 분홍색 사탕 위로 날아오르는 작은 천사들의 모습이 화면 가득 비추어졌다. 천사들은 웃으며 흰 구름 위로 올라가 사라지고 있었다. 화면은 갑작스럽게 뒤집어졌고 구름은 변기의 배수구로 변했다. 천사들은 지옥에서 둥글게 춤을 추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살기 전에 죽여 주어서 고맙다고 사람과 쥐들과 닭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변기에 머리를 들이댄 아이들은 그들이 더 나은 몸으로 태어날 수 있을 거라고 착한 너희들이 도착한 곳은 천국처럼 평화로울 거라고 새처럼 지저귀었고 곧 복화술사의 토크쇼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초대 손님은 달걀처럼 희고 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복화술사는 그녀가 죽은 아이들로 이루어진 학교의 교사라고 소개했다. 천사의 학교를 여러분도 익히 들어 보셨을 겁니다.

교사는 유달리 붉고 얇은 입술을 열며 인사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많이 망설였다고 여자는 말했다. 복화술사의 인형은 그녀가 몇 번이나 초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는지 과장되고 장황한 희극조로 늘어놓았다.

하지만 난, 하고 인형은 교태롭게 속삭였다. 그녀가 우리 프로그램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어요. 교사는 틈이 벌어진 계란의 웃음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일은 어떤가요? 하고 복화술사의 인형이 묻자 교사는 괜찮아요, 하고 수줍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좋아요. 아이들은 마치 한 번도 죽지 않은 것처럼 난도질 당하지도 갈기갈기 찢기지도 않은 것처럼 밝게 생활하고 우리는 종종 행복합니다.

여자는 화면 속 교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교사는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감사하지 않는 거예요.

감사하지 않아야 한다고요?

그래요. 난 그걸 내 학생에게서 배웠죠. 윤리교육 시간에 난 아이들에게 감사할만한 점을 세 개씩 적어 발표하게 만들고는 했는데 어떤 여자아이는 일어서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난 감사할 게 없어요. 단지 감사해야만 한다면 감사할 수 없음에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었고 나는 당황해서 그 애를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설명해주겠니? 하고 내가 물었고 그 애는 감사는 체념의 감정이라고 대답했죠. 감사는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 감사하면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게 되며 찢겨진 틈을 벌리고 나아갈 수 없다고. 감사는 무척 폐쇄적이며 보수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죠.

방청석에서 와아 하는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퍼져나왔다.

그렇군요, 하고 인형은 뻐끔거렷다. 그래도 당신은 그 달갑지 않은 말을 받아들였군요?

교사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저 여자를 아는 것 같아, 하고 여자가 말했다. 보라는 눈을 둥글게 뜨고 여자를 올려다 보았으나 곧 흥미를 잃고 여자의 편지로 학을 접는 일을 계속했다. 파랑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오래도록 뜬 채로 방치되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커다란 검은 눈으로 화면 속 교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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