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9

여자는 어항처럼 검고 축축한 경찰차에 담겨 보호소로 돌아갔다. 쥐의 얼굴에 창녀의 화장은 잘 어울릴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쥐 경찰의 집에는 실제로 창녀의 가면들이 있을지 몰랐다. 그는 창녀를 연기하는 것을 즐겼으므로. 첫 번째 인터뷰 이후 여자에게 접근하는 매체는 더 많아졌다.

첫 번째 방송출연, 다섯 명의 남자 패널들이 여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트장 내부에는 남자들뿐이었다. 조명이 비추어지는 반원 형태의 무대 바깥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녹음 장치를 조작하고 있는 쥐들과 닭들이 있었으나 무대 위에는, 마치 온 세상이 인간의 것인 것처럼 인간밖에 없었다. 남자 패널들은 여자의 앞에서 의도적인 욕설을 하며 그녀의 반응을 관찰했다. 털복숭이의 남자가 얼굴이 긴 남자를 말리며 실실거렸다. 그만해, 그러다 우리도 죽일지 몰라.

창녀, 식물 같은 여자, 보호해야 하는 여자, 성기를 두툼하게 둘러싸고 있는 신경의 다발, 젖가슴과 허벅다리와 발과 음부와 오나홀 목구멍이 정육점의 고깃덩이처럼 조각조각 잘려나간 여자 남자들은 고기를 구매하고-너무 늙은 고기에서는 쉰내가 나지, 웃음소리-그걸 먹는 거야 창녀야 고기는 천사가 아니라 창녀야 창녀는 천사가 아니야 천사는 음부를 젖가슴을 자궁을 가지고 있지 않아 천사는 모두 남자아이들이야 호수 속 물고기들에게 잡아먹히는 오필리어의 하얀 시신과 그 시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물 바깥의 정신, 그 정신이 바로 천사야 천사에게는 심장이 없어 천사는 자궁도 음부도 없어 천사는 자지가 하나 달린 어린 남자아이야 넌 결코 천사를 맛본 적 없어 너는 네 아이를 죽인 창녀야 빌어먹을 년 너는 끔찍해 끔찍해 끔찍해 빌어먹을 년 천벌받을 년 천사는 네 음부를 찢고 잘려나간 네 조각들을 게걸스럽게 삼킬 거야 창녀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해야 하는 것 아이러니와 해학은 창녀에게 어울리지 않아 창녀는 진지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해야 하는 것 너는 최악의 방식으로 규칙을 위반했어 아이를, 그것도 너를 닮은 여자아이를 살해하는 것 그러한 살해는 가당치도 않아 악마 같은 년 너는 아직도 웃고 있구나 개 같은 년 철면피 같은 년 쥐새끼들은 너의 병든 뇌를 주무르며 웃지 네 기사를 봤어 너는 웃고 있더군 불가능한 고기를 짓씹어 붉게 변색된 역겨운 이들로.

남자들은 여자를 향한 비난의 글들을 읽어내렸고 그녀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여자는 그들이 여자를 다시 부를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랑스러움도 절망감도 모욕도 증오도 없이, 여자는 눈부시게 빛나는 세트장을 죽 둘러보았다. 그들은 여자에게 무언가 말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여자는 금발의 사회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금발은 여리고 희미한 색으로,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투명했다.

난 식물이 아니에요. 그 애도 식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리고 그 애가 식물이라면 우리는 육식식물이에요. 식물도 피를 흘리며 식물도 작은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식물도 피를 마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해요. 하지만 쥐들은 알고 있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규칙에 과잉 복종하기, 여자는 생각했다. 규칙이 농담이 되어버릴 정도로. 중력을 가하는 어휘들, 가변곡률의 나선, 비대칭적 궤도, 서서히 중심을 옮겨가는 천체들, 여자는 말했다.

쥐들은 매립된 어린시절에서 피어올라오는 강한 비린내를 알아요. 어린아이들은 낙엽들의 소굴에 묻힌 채 그대로 살아 있고 심지어는 죽은 뒤에도 살아 있고 해갈되지 못한 울음은 유령의 침묵처럼 불길하게 피어오르죠. 소년병들은 가장 역겨운 살해자가 되었고 무덤 속의 창녀들을 끄집어내어 겁간하기 시작했고 창녀들은 기하학적인 표본처럼 비틀어진 다리뼈로 이상한 도형을 만들어내요.

이곳은, 사회자는 침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무대가 아니에요. 우리는 당신이 무슨 말이든 다 하도록 놔둘 수 없어요.

당신은 오각형이 얼마나 검은지 아나요? 여자는 물었고 사회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미쳐버린 울음으로 대꾸했다.

최초의 항없이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지며 번져가는 무한한 변이, 물고기들은 검은 어항 속을 떠다니고 우리는 가끔 새파란 틈과 눈을 마주쳐요. 음험한 유머로 웃는 물고기들, 뻐끔거리는 입 밖으로 치밀어오르는 나선형의 물방울들, 물의 운동은 물고기의 운동과 다르고 물고기는 최초의 검은 물 속에 익사하여 죽어버리고 운동은 추상도 관념도 아닌 물질이에요.

남자들은 여자를 경계하듯 힐금거리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는 곧 침묵하였고 남자들은 그녀가 그들 다섯을 해칠 수는 없음을, 그녀는 기껏해야 작은 아이 한 명을 유혹해 잡아먹는 창녀에 불과함을 상기했고 방송은 끝까지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사회자는 여자와 악수했고 여자는 스테이크 CF까지 찍게 되었다. 여자는 진열된 상품들의 음험한 조롱 속으로 기꺼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쥐 경찰은 마치 그녀의 경호원처럼 그녀를 여러 전파의 송신장소로 운반했다. 차량 안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은 TV 화면에 얼굴을 내비칠 그녀가 아니라 쥐 경찰이었다. 남자는 보란 듯 꿋꿋이 여자의 앞에서 연기를 했다. 영원히 본 무대를 갖지 못할 리허설들. 여자는 남자의 연기가 편협하고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격정적으로, 앎으로부터 배제된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진지함을 잃어버린 배우들을 연기했다. 그가 호레이쇼에게 강간당하는 햄릿 연기자를 연기하는 동안 여자는 그가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하면 TV 단막극에라도 출연할 수 있을지 자문했다. 그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실패를 목도하고 돌아온 예언자처럼 체념한 투로 연기했다. 백미러에 비추어진 그의 검은 눈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여자는 붉은 장미꽃들로 둘러싸인 흰 무대 위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여자는 마네킹처럼 흰 상반을 일으킨 뒤 그녀 옆에 쓰러져 있는 장미꽃들을 하나 하나 꺾었다. 날카롭게 잘려나간 장미꽃 줄기의 단면으로 그녀는 공중에서 그녀를 향해 던져진 작은 아이 인형의 심장을 꿰뚫었다. 고무로 만들어진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거세게, 그녀는 날카로운 끝을 수직으로 찍어 넣었다.

그리고, 여자는 말했다. 그녀의 오른쪽 볼에는 투명 테이프로 초소형 마이크가 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애는 웃었어요. 웃기 전에 그 애는 사막에도 천사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난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어요. 사막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천사를 잡아 천사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향기로운 붉은 피를 들이마셨고 상처 입은 사막의 구덩이에서는 달콤한 출혈이 새어나왔으며 그 뒤로도 사막은 오래도록 목말랐다고. 그 애는 처음이라고 했어요. 처음 죽는 것이라고.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그 애는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했어요. 어릴 때 죽으면 천사가 되는 것이 사실이냐고 그 애는 물었어요. 난 천사들을 몇 알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대답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어요. 천사들이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니야. 그 애는 그래도 괜찮다고 했어요.

나는 그 애에게 사과를 깎아 주었고 우리는 얼굴에 가위가 꽂힌 채 웃는 벌어진 틈을 보았어요. 우리는 틈과 틈 너머로 마주보았어요그 애는 웃고 있었고 그 애의 틈에 비추어진 나 역시 웃고 있었어요. 우리는 늙은 여자의 울음처럼 웃었어요.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분명 서로가 울고 있다고 믿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웃고 있었어요. 우리는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인형을 연기하는 어린아이처럼 비열하고 즐겁게 웃었어요. 죽음이 아니라 삶을 바라는, 맹목적인 쾌활함만으로 살아가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웃었어요. 삶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종류의 짐승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삶을 즐겁게 여겨 본 적은 없었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였죠. 남자들이 나를 죽일 때 나는 내가 창녀가 아니라고 믿었어요. 그러므로 내 죽음은 부당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내가 창녀라는 것을, 창녀는 나를 부르는 말 이외에, 벌어진, 상처입은, 죽어가는, 연약한 여자를 부르는 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그래서 나는 몇 개의 형용사를 더했어요. 음험한, 불길한, 즐기는, 능동적인, 육식의. 나는 가끔 창녀들의 꿈을 꾸어요.

조명은 여자의 눈을 멀게 만들 듯이 가까이 내려왔다. 여자는 하얗게 번져가는 빛 속으로 뛰어들 듯이 광폭하게 벌어진 눈으로 말했다.

옆 방에서 창녀가 관엽 식물처럼 찢겨나가는 것을 나는 어지러진 침대 시트에 누운 채로 느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수사관은 말했죠. 아마 그건 내 첫 번째 죽음 직후에 일어난 일일 거예요. 내게는 교살의 흔적이 남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목을 조르는 거친 손뿐만은 아니었어요. 난 갈비뼈 밑으로 깊이 틈입하는 칼날의 끔찍한 소음을 들었어요. 나이프는 내 속에서 울고 있었어요. 난 그렇게 소름끼치는 흐느낌은 들어본 적이 없어. 하지만 시체 검시관은 내 갈비뼈에 그런 상처가 없다고 말했죠. 그리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어요. 어쨌든 나는 창녀짓을 하다가 죽었고 창녀는 언제나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며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나는 그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난 검시관이 나를 강간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검시관은 퇴근했고 나는 악몽처럼 잠든 다른 시체들과 함께 냉동고에 갇혀서 밤을 보냈어요. 밤 동안 나는 눈을 뜬 채로 내 죽음 이후의 일을 꿈꾸었어요.

난 침대 시트에 버려진 채 있었고 살해자는 내게 창녀, 미친년, 죽일년, 빌어먹을년, 망할년 하고 욕을 했어요. 그는 내 입가에 소변을 누었고 나는 죽음으로 마비되어가는 몸으로 뜨뜻하고 역겨운 액체를 느꼈어요. 꿈 속에서, 그는 내가 그의 신세를 망치러 찾아온 악마 같은 년이라고 했어요. 나는 죽음을 부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내게 홀려서 나를 망가뜨린 것뿐이라고 했어요.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목을 졸랐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게 입맞추었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강간한 것뿐이라고 했어요.

나는 그가 맞다고 대답했어요. 네가 한 건 하나도 없어,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봉사했을 뿐이야.

그러자 그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나를 찢어발겼어요. 그는 내 속에 서늘한 나이프를 밀어넣었고 칼날은 미쳐버린 흐느낌으로 출혈하고 있었어요. 침대 위에 죽어 있는 채로 나는 그가 나를 두고 달아나는 소리를 들었어요.

옆 방에서는 다른 창녀가 살해당하고 있었어요. 모텔 침실의 사면은 거울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삶은 고기처럼 희게 부풀어오른 내 몸이 수십 개의 평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았어요. 증폭하며 멀어지는, 향기 없는 살들. 손톱만 한 파리들이 내게 달려들었고 난 그것들을 밀쳐낼 수 없이 그것들이 내게 부과하는 새로운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어요. 파리들은 내 속으로 밀려들었고 나를 탐욕스럽게 물어뜯었고 내 안에 산란했어요.

옆 방에서는 창녀가 부드러운 식물처럼 찢겨 죽고 있었어요. 하지만 식물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아요. 식물은 질긴 섬유 조직을 가지고 있어요. 그 속은 생으로 축축한 피로 가득 차 있어요. 시체 안치소의 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춥고 서글펐어요. 난 그곳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그것이 규칙이었어요. 육각형의 균형으로 돌아가기, 법칙을 넘어서는 자연을 구겨넣기, 하지만 나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었어요. 빌어먹을, 불가능한 것. 난 검시관의 충고와는 달리 창녀짓을 계속 했고, 그러니까 계속해서 연약하고 슬프고 아프고 음험하고 불길한 여자로 남았고 다음으로 내가 죽었을 때 검시관은 정말로 나를 강간했죠. 그는 내가 빌어먹을 년이라고 했어요. 그는 내 안에 삽입하지는 않았지만 내 위에 정액을 뿌렸고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그도 살해당할 기회가 있을지 궁금했어요. 평생을 살면서,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살해당할지. 그의 논리대로라면 그는 영원히 살해당하지 않겠죠. 그는 창녀가 아니니까. 함부로 헐벗고 함부로 대낮을 돌아다니는 부드러운 식물성의 짐승이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겁간당한다면, 그리고 살해당한다면, 그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창녀가 되겠죠. 그러면 그의 유령은 그에게 창녀짓을 해서 죽은 거라고 앞으로는 창녀처럼 굴지 말라고 충고할까요?

라이브 카메라는 여자의 얼굴을 따라 움직였다. 여자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어둠 속의 외부적인 시선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경찰 쥐가 어떤 식으로 대사할지 떠올렸다. 그녀는 창녀를 연기하는 경찰 쥐를 연기하는 창녀처럼 연기했다. 그녀는 다리를 벌렸고 털복숭이, 어린 짐승의 하복부를 드러내었다. 관객들은 공연 중간에 그녀에게 문구용 가위나 쥐의 배설물, 썩은 과일 껍질 같은 것을 던지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오로지 그녀를 야유하고 모욕하기 위해 그녀의 라이브 방송에 찾아왔으나 어쨌거나 그녀의 방송은 잘나갔고 잘 팔렸다. 그녀의 무대는 쓰레기-선물들로 가득찼다. 경찰차에서는 여자의 몸에 묻은 더러운 오물들의 악취가 진동했다. 쥐 경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여자는 그가 여자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그녀의 지독한 악취와 악명마저도 질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쥐들은 방송에 출연할 수 없었다. TV에서 벌거벗은 채 혹은 제복이나 드레스를 입은 채 연기를 하는 쥐들을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는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었다. 그런 이들은 쥐들을 직접 잡아 스너프 필름을 찍는 쪽을 더 선호했고 그러한 행위는 특별한 제지조차 받지 않았다. 설령 그 유명한 요제피네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사육사 없이는 TV 쇼에 나가 노래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무대에 서기 위해, 남자는 그 자신을 가장 비천한 서커스의 짐승으로 팔아넘겨야 했다. 그렇다면 그는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었다. 서글프게 달아오른 불의 링을 무표정하게 통과하는 북국의 불곰들처럼. 절룩거리며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검은 사자들처럼. 그는 창녀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주둥이를 붉게 칠한 뒤 무대에 올라 창녀의 몸짓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오물에 젖은 몸을 자동차 시트 깊이 묻은 채 여자는 그에게 제안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그가 결국 승낙하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살해자의 연극에 그를 데리고 출연했고 그녀를 찍는 라이브 카메라들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여자는 흰 반원의 무대 위로 올라온 남자의 벌거벗은, 털복숭이의 잿빛 몸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저주받은 검은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객들은 야유했고 그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거울이 있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카메라는 그의 정면에서 수컷 쥐의 비루한 앞얼굴을 촬영했다. 여자는 그의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그의 얼굴에 하얀 밀가루 반죽을 발라 주었다. 그는 미친 듯이 기침했고 관객들은 야유와 함께 자지러질 듯 웃어댔다. 여자는 그의 주둥이에 새빨간 립스틱을 발라 주었다. 그녀는 그의 입에 매혹적이고 완벽한 미소를 그려넣었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여자는 그의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의자를 뒤로 돌려 관객들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쳤지만 그에게는 마이크가 부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쥐의 울부짖음은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만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쥐는 속삭였다.

나는 오랫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쥐는 흐느꼈지만 그의 찢어진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난 당신이 내게 오줌을 누길 원해요, 발몽, 여기서 나는 메르테유를 연기하는 발몽입니다, 하고 쥐는 덧붙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 채 관객들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우스꽝스럽게 씰룩거리는 창녀의 미소를 보고 낄낄거릴 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발몽이었고 또 메르테유였습니다. 내 어머니는 내가 연극 배우가 되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내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모는 모두 창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 역시 창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어머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지만 그녀는 가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밤의 거리에서, 혹은 낮의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창녀일 뿐이었습니다. 수컷 쥐들은 그녀에게 값도 치르지 않고 단지 그녀의 노래를 들어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소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누설할 것을 요구하였고 어머니는 잊지 못할 소리로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들은 쥐는 사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뱃속에서 듣던 서글픈 울음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임에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속살거리던 이상스러운 멜로디는 나의 가장 오랜 기억입니다. 나는 내 주둥이 바로 앞까지 들이닥치던 수컷 쥐의 검붉은 성기 끝마저도 기억합니다. 의사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뱃속의 아이에게는 시력이 없으며 성기는 아이가 착상되어 있는 자리 바로 앞까지 들이밀어질 수 없다고요. 성기는 질을 넘어 자궁구까지 침입할 수 없으며 따라서 내 악몽은 싸구려 망상에 불과하다고요. 하지만 나는 나를 찢어발길 듯 위협적으로 들이밀어지던 검붉은 살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끔찍한 울음소리. 어머니는 살해당하는 여자처럼 슬프게 울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난 그 순간 내가 착상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내 기억의 첫 순간은 내 존재의 첫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은 아니었지만 난 아직도 종종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찢어지던 순간, 자궁의 내부까지 역겨운 성기가 침입하던 그 순간 존재하게 되었고 영원히 그 첫 순간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고요.

난 환청을 자주 듣습니다. 목소리들은 내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모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녀들이 모두 강간당했으며 강간당해 낳은 자식들이 모두 강간당했으며 따라서 나 역시 강간당하고 강간당해 무언가를 낳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벌어짐과 찢어짐이 내 운명이라는 것을 생의 초기부터 알아차렸습니다. 나는 내가 아닌 것, 그리고 내가 되어가는 것을 낳았습니다. 나는 창녀를 낳았고 내 피부에서 움트는 창녀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고. 내가 알지 못하는 눈들에게 노출하고 발각되어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배우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요제피네가 아니며 나의 어머니도 할머니도 증조모도 요제피네일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요제피네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대에 서서 내가 소유한 삶의 비밀스러운 성분을 폭로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불가능한 얼굴들을 꿈꾸었습니다. 사라져버린 미래, 금지된 악몽, 그리고 불가능한 얼굴들. 폐기되어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창녀를 연기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창녀를 꿈꾸었습니다. 목소리는 내가 끝까지 연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면 위에 가면을 그 위에 또 다른 가면을 겹겹이 뒤집어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면의 속을 다른 가면들로 무수한 가면들로 메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여러 창녀들의 얼굴가죽으로 가면들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그는 붉은 미소를 앞발로 더듬으며 말했다. 나는 가면들로 질식해가고 있습니다. 고매한 철학자는 가면의 속은 언제나 텅 빈 진공이며 가면들은 서로를 옮겨가는 자유로운 도약과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 속은 진공이 아닙니다. 가면의 밑은 수백 수천의 얼굴 가죽들로 찢어질 듯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질식해가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어둠 속에서 남자의 미소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지루해하고 있었으나 남자의 머리 위로 띄워진 거대한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보며 시간을 적당한 리듬으로 소모하고 있었다. 광고 속에서는 눈부시게 하얀 이를 가진 소녀들이 활짝 웃으며 들리지 않는 문구를 속삭였다. 제초제는 파릇파릇하게 솟아나온 잡초를 순식간에 쪼그라들게 만들었고 갈빛으로 말라버린 잡초는 아름다운 푸른 잔디 앞에서 재로 변해 사라졌다. 검은 남자들이 검은 쥐들을 밟아 죽이는 광고 영상이 나오자 관객들은 와아아 웃으며 남자를 조롱하듯 손가락질 했으나 남자는 그것이 자신의 고백에 대한 대답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남자는 놀란 듯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웃음은 도약보다도 병리적인 것입니다. 목소리들은 내 속에서 끔찍하게 활기찬 웃음으로 찢어지고 있고 나는 목소리들이 치료할 수 없는 절망적인 병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간혹 나는 내 연기가 하이너 뮐러의 고매한 희곡에 대한 재해석이 아니라, 내 안에서 들끓고 있는 빌어먹을 병증을 그대로 옮긴 것뿐이지 않은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친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는 대체로 홀로 연기했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혼자였지요. 목소리들은 내게 저주 이외에 그 어떠한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들은 한결같은 저주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목소리 없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목소리들에 속해 있었고 목소리들은 나를 파멸시키며 동시에 구원하는 유일한 시선이었습니다. 목소리들은 내 심장 안쪽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가장 열렬한 관객이었습니다. 나는 혼자였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가면을 구해다 준 것도 어쩌면 목소리들일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의 가면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 쥐가 아님을 알려준 것도 목소리들입니다. 나는 너무 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가면으로 가볍게 도약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가면을 내비치기 위해 나는 가장 바깥쪽에 드러난 가면을 찢어내야 합니다. 풍선의 속에 겹겹이 들어찬 풍선을 하나씩 찢어내는 나이프를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 겹을 동시에 관통하는 음험한 칼날을 하나. 난 한 번도 여러 겹의 얼굴들을 동시에 찢어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그리고 목소리들이 허락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작정입니다.

남자는 말을 멈추었다.

광고 스크린에서는 엉덩이를 뒤로 내민 채 춤을 추는 하와이안 여자들이 나왔고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깔깔거렸다. 남자는 지워지지 않은 붉은 미소를 매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머릿가죽을 잡아당기며 흐느꼈다.

하지만 머릿가죽은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두피 깊이 박힌 손톱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무대를 꿈꾸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로드킬당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창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벌거벗은 창녀와 나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창녀의 가면과 창녀의 몸짓과 창녀의 얼굴이 창녀의 운명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쥐는 창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소리들은 내게 창녀를 즐기라고 창녀가 되어가라고 짐승의 머리를 무너뜨리고 가장 붉은, 음험한 심장을 끄집어내라고 속삭였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붉게, 웃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속눈썹을 빼곡이 메운 검은 마스카라가 출혈처럼 흘러내렸다. 남자는 머릿가죽을 당기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는 끔찍하게 피로한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에게는 마이크가 없었으므로 그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여자뿐이었다.

발몽, 나는 강간당한 여자들의 배를 꿈꾸어요 어떤 살인자는 여자의 음부와 항문을 강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옆구리에 새로운 구멍을 만들었고 그녀의 창자를 헤집어 놓았죠 그녀는 찢겨진 심장으로 절개된 내장으로 웃고 있었어요 믿을 수 있나요? 그녀는 창녀의 역할을 맡은 살인자의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리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최초의 순간부터 그녀는 창녀였어요. 남자는 독을 마시는 시늉을 하며 곧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창녀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내가 마시는 것이 독임을 알고 있었어요. 메르세유, 당신은 허락 없이 당신의 얼굴을 훔쳐쓴 나를 처벌하려 했죠. 그리고 메르세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에요 발몽, 내 아름다운 창녀여. 나는 그 누구도 처벌하지 않아요. 독을 들이킨 것은 당신이고 당신의 창녀 아님을 불태운 것도 당신이에요. 당신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어요. 창녀는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발몽, 당신은 그걸 알고 있어요. 남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들은 남자가 직접 출산한 남자들이며 진짜 메두사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이 웃고 있다는 것을. 오, 나는 접착성의 피부와도 같아요. 피부들은 피로 엉겨붙었어요. 다른 가면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가면을 찢어내야 하며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하지요. 한 번의 죽음과 한 번의 탈피, 하지만 죽음은 삶의 등가물이 아니에요. 삶은 죽음의 깨진 외피에서 넘쳐흐르고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살아가게 될 거예요.

쥐는 자리에서 비척거리며 일어나 꿈 속을 헤매듯 허우적거렸다. 프롬프터는 백색으로 점멸한 채, 어떠한 지시도 속삭이지 않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쥐는 젖은 털을 억지로 제복에 밀어넣은 채, 여자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했다. 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악몽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깊은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여자는 그가 그녀에게 수갑조차 채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그는 정차했고 여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뒷좌석 문은 잠겨있지도 않았다. 쥐는 여자가 빠져나간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듯 가만히 있었다. 여자는 골목을 향해 천천히, 마치 그녀가 합법적인 산책을 나온 것처럼 유유히 걸어갔다.

그곳은 여자가 알지 못하는 도시였다. 여자는 그곳에서 영원히 길을 잃어버리기를 바랐다. 차량 전조등의 점멸하는 흰빛에 웃으면서 뛰어들며, 마치 생을 기쁘게 맞이하는 어린 백치처럼 끝을 낼 수 있기를. 가로등이 없는 골목에는 부랑자 아이들 몇이 무리 지어 놀고 있었다.

눈이 파란 남자아이 하나가 여자에게 다가오더니 어디 갔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 먼 아이처럼 창백한 푸른 눈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늦게까지, 하고 남자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냐, 널 오래 기다렸어.

여자는 아냐가 남자아이의 여동생쯤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여자보다 어려 보였다. 열 살 혹은 아홉 살. 여자는 지쳤고 달리 갈 곳이 없었으므로 남자아이가 내민, 젖은 오른손을 잡고 남자아이를 따라갔다. 남자아이는 원피스 형태의 긴 잠옷 차림이었다. 그 애는 짙고 어두운 금발을 목까지 길게 기르고 있었다. 어쩌면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아이야, 분명 남자아이야, 여자는 아이의 단단하고 축축한 손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아이는 대지 속 깊이 침잠한 푸른 정맥처럼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헤매며 앞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는 확고했고 막힘이 없었다. 아무런 목표 없이 즉흥적으로 음표들을 선택해나가는 주사위 놀이자의 작곡법처럼. 골목은 거의 삼십 미터마다 두 갈래, 혹은 셋, 심지어는 네 갈래까지도 갈라졌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가 가장 왼쪽의 골목, 왼쪽에서 세 번째 골목, 왼쪽의 두 번째 골목, 다시 가장 왼쪽의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규칙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연 자체를 규칙으로 믿는 것처럼 남자아이는 확고하게 걸어나갔다. 남자아이는 간혹 여자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여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애의, 차갑고 희미한 푸른 눈. 여자는 그의 눈 먼 동공 속에서 흘러내리는 희끄무레한 인영을 바라보았다.

아냐, 널 정말 오래 기다렸어, 하고 남자아이는 종종 말했다.

골목들과 골목들의 합류점에서 남자아이는 마침내 완전히 멈추었다. 작고 초라한 판잣집 앞에서 남자아이는 들어가자고 속삭였다. 남자아이는 희고 깨끗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 애에게서는 악취가 나지 않았으므로, 판잣집을 보고 여자는 조금 놀랐다. 남자아이는 검게 썩어가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에는 잠금장치조차 없었다. 어린 쥐의 멱을 따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여자는 집의 내부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판잣집의 내부에는 거대한 궁륭 같은 거실과 몇 개의 방으로 향하는 문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지하실로 이어진 검은 계단까지 보였다.

남자아이는 여자를 끌어안으며 미안하다고 흐느꼈다.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마.

여자는 남자아이에게 부모님이 있느냐고 물었고 남자아이는 여자를 슬프게 올려다보며 부모님은 감옥에 갔다고 말했다.

어째서?

널 죽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건 누명이야. 그렇지? 넌 이렇게 살아 있고 널 죽인 건 엄마 아빠가 아니야.

남자아이는 여자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고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네가 널 죽여달라고 내게 부탁한 걸 아직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여자는 목이 마르다고 했고 남자아이는 곧 유리잔에 물을 가득 담아 건네주었다. 유리잔 끝에서 물이 조금 넘쳐흘렀다. 여자는 순식간에 물을 전부 들이켰고 남은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여자의 맨발이 검녹빛의 두툼한 카페트 위로 미끄러졌다. 카페트는 마치 걸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자를 은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남자아이는 여자를 말리지 않았다. 그 애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금 초조하게 여자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여자는 목재로 만들어진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들을 가리키며 그 그림의 주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남자아이는 여자를 이상스럽게 바라보며 그건 너야, 아냐, 하고 말했다.

그림 속 여자들은 가슴이 두툼하게 불거져 나온, 긴 턱을 가진 성인 여자들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아이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그럼 그건 죽은 여자들이야, 하고 대답했다.

죽은 여자들?

그래, 죽은 여자들. 삼촌은 언제나 죽은 여자들만 그렸으니까.

네 삼촌은, 여자는 초상화 속 여자들의 유달리 긴 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살인자였니?

남자아이는 아니라고 했다. 분노도 슬픔도 없는 읊조림으로. 삼촌은 살인자가 아니었어, 아냐, 우리 엄마 아빠가 살인자가 아닌 것처럼.

여자들의 긴 목 끝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가느다란 쇄골뼈의 흔적이 들여다보였다. 여자는 여자들의 입술과 인중, 볼의 미세한 혈관이 놀랍도록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그녀들이 죽은 뒤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고 남자아이는 아마 감옥에 갔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들은 그녀들 서로를 죽였으므로 결국 감옥에 갔을 거라고. 여자들의 눈은 카페트와 같은 암녹색이었다. 여자는 그녀들의 눈이 살아 있는 것처럼 축축하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초상화들 위에는 박제된 순록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순록은 유리로 만들어진 검은 안구를 동그랗게 뜨고 허공의 보이지 않는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록은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순록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고 속삭였고 남자아이는 지진이 나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땅의 끔찍한 뒤섞임으로 벽에 걸린 죽은 여자들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발치에 도끼처럼 내려앉은 순록의 죽은 아가리에 입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웃었고 남자아이는 네가 웃는 걸 보아서 기쁘다고 말했다. 남자아이는 웃었고, 토끼처럼 툭 불거져나온 큼지막한 앞니 두 개가 드러났다. 여자는 쥐의 축축한 등과 창녀의 미소 속에서 절망적으로 자라나고 있을 앞니를 떠올렸다. 갉아내지 못한 앞니는 남자의 기도를 파고들고 관통하여 남자를 살해하고 말 것이다.

남자아이는 새들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며 초상화들 사이에 놓인 방문의 금빛 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여자는 방안을 빼곡이 채운 은빛의 새장들을 보았다. 그러나 새들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여자는 새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남자아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들이 어디 있어?

아냐, 우리는 새들을 아이처럼 돌보았고 새들은 우리를 사랑했어.

새들이 어디 있어?

아냐, 새들은 우리를 사랑했어. 우리는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말했어. 엄마는 언어가, 아니, 오직 시의 언어만이 새처럼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모든 시의 언어가 새처럼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도 말했어.

새들이 어디 있어?

아냐, 우리는 검은 숲 속에서 새들을 발견했어. 새들은 우리를 보고 노래했고 우리는 꽁지가 푸르고 긴 물새를 쫓아서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어.

새들이 어디 있어?

아냐,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새들의 무덤을 보았어. 물새는 자기가 그 무덤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어. 죽은 새들이 돌아오고 있다고도 말했어.

새들이 어디 있어?

푸른 깃을 가진 새는 분명히 숲 깊은 곳에 있었어. 푸른 새의 심장이 과열된 과육처럼 폭발하는 모습을 우리는 같이 보았어. 새들은 돌아오고 있다고 했어. 우리는 맨발이었고 풀밭은 차가웠어. 네 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풀잎들은 드러누운 채로 너를 베어내고 있었어. 너는 발이 아프다고 울었고 난 네 입술과 목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보았어. 넌, 아냐,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어. 넌 천사가 되겠다고 했어. 그래서 우리를 구해 주겠다고. 아니, 새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몰라. 넌 천사와 새를 구분하지 못했어. 넌 새들이 심장과 고기를 가진 천사들이라고 믿었어. 넌 천사의 고기를 먹고 싶어 했어. 죽은 새들은 어디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고 난 천사들의 날개를 가지고 천사들의 도시로 돌아간다고 말했어. 새들은 돌아오고 있다고 난 말했어. 너는 고개를 끄덕였고 천사가 되고 싶다고 했어. 우리는 새들의 목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넣고 부러뜨렸고 너는 미친 여자처럼 음험하게 웃었어. 난 네가 행복하다는 걸 알았어. 우리는 과자를 쪼아먹는 비둘기들처럼 리드미컬하게 새들의 목들을 부러뜨렸어. 죽음을 앞둔 새들은 미친 듯이 발광하고 우리의 목을 물어뜯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우리를 할퀴다가 곧 경악스러울 정도로 잠잠해졌어. 새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죽음의 무기력과 마비 상태에 사로잡혀 우리가 그들의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목을 부러뜨리길 기다렸어. 우리는 악몽처럼 많은 새들의 목들을 부러뜨렸어. 그 많은 죽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는 날갯짓 소리를 우리는 들었어.

새들이 어디 있어?

새들은 오고 있어, 아냐. 새들은 죽은 새들을 향해 돌아오고 있어. 새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어. 우리는 무수한 침묵들을 견뎌내었어. 아냐, 새들의 목을 부러뜨렸던 것처럼 네 목을 부러뜨려 달라고 너는 말했어. 하지만 네 목은 새들의 목보다 훨씬 두껍고 질겨서 두 개의 손가락 사이에 끼울 수는 없었어. 우리는 네 목을 우리가 가진 모든 손으로 감쌌고 너는 곧 돌아오겠다고 속삭였어. 우리는 더 세게, 네가 어떠한 암시도 말할 수 없도록 더 세게 네 목을 졸랐고 너는 새처럼 크고 검은 눈으로 새들의 날갯짓을 올려다봤어. 네가 흘린 침과 오줌을 정리한 건 나야, 아냐. 너는 게으르게도 손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지.

새들은 어디 있어?

새들은, 남자아이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모두 돌아가고 있어. 하지만 새들은 여전히 여기에 있어.

여자는 텅 빈 새장들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보았다. 새장의 은빛 창살 위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여자의 손가락에 잿빛의 먼지가 묻어났다. 남자아이는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물었고 여자는 그렇다고, 배가 고프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새장의 방문을 연 채 밖으로 나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푸른 방수 커튼 안쪽의 주방은 거실보다는 비좁았으나 여섯 개의 의자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과 싱크대, 오븐과 조리대, 냉장고가 갖추어져 있었다. 남자아이는 조리대의 커다란 붉은 솥 안에서 두 개의 삶은 감자를 꺼냈다. 솥은 푸른빛을 띠는 미지근한 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속은 퉁퉁하게 불어터진 삶은 감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아이는 하얀 접시에 감자 하나씩을 담아 은제 포크와 나이프, 스푼과 함께 테이블 양쪽 끝에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남자아이는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마치 스테이크를 썰 듯 감자를 썰어 먹었다. 여자는 남자아이를 따라 감자를 자르려 하다가 포기하고 결국 감자를 양손으로 들고 베어먹었다. 감자는 약간의 온기조차 없이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여자는 고기를 먹고 싶다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고 남자아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여자를 바라보며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여자는 짜증스럽게 되뇌었고 남자아이는 백치처럼 투명한 푸른 눈으로 여자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마치 그가 아니라 여자가 백치처럼 보인다는 듯. 여자의 눈이 그의 것처럼 희박하고 투명한 푸른 빛으로 산화되고 있다는 듯. 남자아이는 무슨 고기가 먹고 싶느냐고 물었고 여자는 새의 고기라고 대답했다.

그건, 남자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먼 것처럼 투명한 색채로 여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뭐가? 여자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넌 이미 새 고기를 먹고 있잖아.

여자는 그녀의 입 속이 질긴 깃털로 가득 차 있는 느낌에 구역질을 해댔다. 그러나 접시 위에 여자가 뱉어낸 것은 희고 눅눅한 전분밖에 없었다. 목구멍을 옥죄어오는 역겨운 끈적임 때문에 여자는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했다. 비릿한 철의 냄새가 여자의 내부에서 감돌았다. 남자아이는 식탁에서 일어나 여자 쪽으로 다가와서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여자의 젖은 턱을 손으로 훔쳐내었다.

넌 어릴 적부터 비위가 약했어, 하고 남자아이는 다정스럽게 속삭였다. 새를 죽이는 일과 새를 먹는 일이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인 것처럼, 너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새들을 죽였고 끔찍하게 괴로워하면서 새들을 토했어. 하지만 너는 새를 죽이는 일도 새를 먹는 일도 그리고 새를 토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어. 새의 가슴팍에 입을 맞춘 채로, 너는 새가 절망적으로 헐떡이는 소리를 들었어. 너는, 아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게 웃었어. 넌 자라서 새가 되고 싶다고 했고 그때부터 난 네가 언젠가 천사가 될 것을 알았지. 그리고 네가 돌아오리라는 것도. 왜냐하면 푸른 새는 새들이 그들이 태어난 무덤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으니까. 천사들은 날개를 갖지 못한 슬픈 익사자의 유령들에게 돌아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어. 난 엄마 아빠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지. 그건 사실이었어. 천사를, 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변호사조차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 판사는 엄마와 아빠에게 그들의 삶을 초과하는 형을 선고했어. 엄마 아빠는 사형을 바랐지만 판사는 엄마 아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지. 변호사조차도 사형을 포기하라고 냉담하게 충고했어. 결국 엄마 아빠는 항소도 하지 못하고 감옥에 들어갔어.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엄마 아빠는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어. 난 주말마다 수용소에 면회하러 가지만 그때마다 엄마 아빠는 그곳이 마치 버려진 천국처럼 쓸쓸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뿐이지. 물론 엄마와 아빠를 같은 날에 볼 수는 없었어. 부모님은 다른 감옥에 갇혔어, 아냐. 당연한 일이지. 엄마는 A구역의 48번 교도소에, 아빠는 C 구역의 32번 교도소에 갇혔어.

토요일과 일요일에 난 좁고 긴 터널을 향해 들어가야 해. 터널은 성인 남자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 터널 속에서 표류하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난 내가 길을 잃은 것인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져. 길은 단 한 갈래밖에 없으니 불안해할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난 걸음과 걸음 사이의 리듬이나 호흡의 빠르기, 심장 박동의 세기 같은 것이 내가 도달하는 목적지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시달려. 결국 내가 숨을 너무 많이 들이쉬었기 때문에, 너무 빠르게 걸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장소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불안감에. 그런 생각을 할수록 호흡은 더 빨라지고 심장은 가슴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며 난 눈을 감고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 무엇보다도 앞에서, 혹은 내 뒤에서 누군가와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미쳐버릴 것처럼 두려워. 뒤에서 걸어오는, 혹은 뛰어오는 누군가와 맞닥뜨리는 건 차라리 나은 경우야. 그러면 나는 그보다 더 빨리 달음박질쳐서 앞으로 나아가면 되겠지. 그럼 언젠가는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그곳이 내가 원하던 장소, 그러니까 아빠 혹은 엄마, 토요일 혹은 일요일이 나를 기다리면서 투명한 면회실 유리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그런 시선의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면 난 내 뒤에서 걷거나 뛰어오던 짐승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거나 혹은 인사하지 않고 그와 헤어진 뒤 다시 터널을 타고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되겠지. 그런 경우 면회는 불가능하더라도 네가 살아서 돌아오고 있을 집으로 다시 회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내 앞에서 다가오는 누군가와 마주치는 건 전혀 다른 경우야. 그 경우 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뒷걸음질 쳐서 뒤로 돌아가야겠지. 뒤돌아서 뛰어갈 수도 있지만 아마 난 그의 검은 얼굴과 응시에 사냥감처럼 얽매어서 천천히 뒷걸음질치고 말 거야. 뒷걸음질쳐서 돌아가는 곳이 내가 왔던 곳과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뒷걸음으로 돌아간 곳은 내가 왔던 곳과, 언제나처럼 너를 기다릴 수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겠지. 그곳은 전혀 다른 대기와 토양을 가지고 있는 이방일 거야. 난 검은 이방인을 붙잡고 그곳이 어디인지 묻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방인은 나를 두고 그의 목적지로 그의 수형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면회실로 들어갈 것이고 나는 터널로 다시 들어가보았자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희망을 잃은 채로 낯설고 우중충한 거리를 떠돌아야 할 거야. 그의 검은 뒷모습은 아직도 보이겠지만 난 그가 나의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끝내 그를 부를 수 없을 거야. 다행히도 아직 내 뒤에서 혹은 내 앞에서 다가오는 누군가와 맞닥뜨린 적은 없어. 하지만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너무나도 가능한 일이야. 축축하게 젖어든 장미가 완전히 썩어버리기 전에 소유하는 일처럼. 생명을 갖는 일만큼이나 그건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난 터널 속에서 언제나 숨이 막힐 듯이 괴로워. 아마 이번이 끝일 거라고, 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난 내 집의 이름조차도 이 도시와 골목의 주소조차도 모르니까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거라고. 너는 텅 빈 집으로 되돌아와서 나를 찾지 못하고 새들의 유적지로 떠나가고 말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괴롭지 않을 거야. 나와 함께 가 줄 거지, 아냐?

여자는 남자아이의 기대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내 뒤에서 날 따라오는 거야. 손을 뒤로 뻗을 테니까 절대로 내 손을 놓으면 안 돼. 손을 놓치면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곳으로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다른 곳에서도, 여자는 말했다. 난 널 잊지 않을 거야.

남자아이는 여자의 오른쪽 볼에 입 맞추며 울었다. 미지근한 눈물이 여자의 볼과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면회는, 남자아이는 여자의 귓바퀴에 눈물을 흘려넣으며 속삭였다. 여자의 귓속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야. 면회하기 위해 여행하는 시간에 비하면 눈 깜짝할 시간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회가 쉬운 건 아니야.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는 상처도 없었고 부모님은 눈에 띄게 수척해지지도 않았어 하지만 난 엄마 아빠의 몸짓으로부터,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미세하게 흔드는 모양과 입술을 바르르 떠는 방식으로부터 참을 수 없이 거북스러운 슬픔을 느껴. 엄마와 아빠가 관처럼 깊고 투명한 면회실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어. 아마 엄마 아빠에게는 내가 유리관 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우리는 서로가 유리의 밀폐된 공간 바깥에 놓인 것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어.

남자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얼마나 불안한지, 통로는 얼마나 습하고 답답한지 반복적으로 이야기했고 여자는 그렇다고, 터널을 상상하는 일과 건너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답했다. 남자아이는 이곳까지 돌아오는 길이 힘들었냐고 물었고 여자는 조금 생각한 뒤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우연히 이곳에 들렀을 뿐이고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건 남자아이라고.

하지만, 남자아이는 집요하게 물었다. 힘들었지, 그렇지? 넌 내 손을 놓고 싶었을 거야 네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들이 너를 살해하지 않을지 의문스러웠을 거야 그리고 두려웠을 거야 네가 잡은 손이 네 목을 다시 조를까 봐.

여자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러한 두려움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남자아이는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조각들을 바라보듯 초점이 맞지 않는 멍한 눈으로 여자의 주변을, 여자의 눈이나 코나 입에 도달하지 못한 시선을 흩뿌렸다.

날 데리러 오는 길이 힘들었어? 하고 여자는 물었고 남자아이는 잘 모르겠다고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착각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어? 여자는 되물었다.

남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인지 부정의 의미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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