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레몬캔디의 물방울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너희는 종종 잊는다. 하메른의 강에 빠진 쥐떼들은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수구에서 바글거리는 쥐들은 그때의 우수를 공유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반복한다고 믿는 생들은, 또다시 출몰했다고 믿는 사자들은 이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너희 자신조차도. 너희는 하나의 생을 반복하지 않는다. 어제의 네가 가졌던 고독을 오늘의 너는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어제의 쥐떼들은 오늘의 쥐떼들이 아니다. 가만히 고여 썩어가는 물조차도 동일한 생명이 아니다. 너희들은 왜 그것을 그렇게도 자주 잊고 사는지. 너희는 물에 빠져 죽은 추악한 쥐들의 고통을 연민할 수 없다. 너희는 결코 그들의 고독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쥐들이 너희의 절망을 앓을 수 없듯. 쥐들이 너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듯. 어쩌면 너희들은 쥐들의 집단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구의 우화도 될 수 없는데. 어째서 너희는 그토록 잔인하게 타인의 속을 파헤쳐야, 그들의 무덤 속에서 너희의 유령을 발견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어제의 기억을, 더 이상 네 것이 아닌 비극을 헤집듯.

이야기를 계속 해, 하고 여자가 속삭이는 소리. 레몬캔디는 그녀의 노래를 떠올렸다. 공연장의 비좁은 공간 속에서 에어컨의 찬 바람을 자꾸만 침잠시키며 밀려들던 소리의 물질. 쥐처럼 까맣고 반들거리는 눈동자, 반쯤 덮인 눈꺼풀 속에서 결연한 듯 제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응시하던 눈빛. 그녀가 네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너는 하나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네게 무엇을 캐묻고 있는 것인가? 너는 누구인가? 한때는 네가 그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네게서 이야기를 캐묻고 있는 그녀는 너와는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로부터 화답받는 일이, 팔을 내밀면 마주 끌어안기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소리를 지르면 누군가 대답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 막 태어난 어린 짐승처럼 끊임없이 울부짖는 사람. 시선과 돌봄에 익숙한 사람. 그녀가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넌 자지러지며 우는 갓난아이를 보듯 다소 낯설고 어려워하는 눈짓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기억하는 네 유년에, 너는 한 번도 그렇게 맘놓고 울어본 적이 없으므로, 솔직하게 울어보았자, 목구멍에서 피가 나올때까지 흐느껴봤자 돌아오는 것은 추락 뿐이었으므로, 세계의 정상으로부터의 추락뿐이었으므로. 너는 머리 뒤부터 떨어지는 감각이 무서워서 그저 입을 다물고 물기에 젖은 눈동자를 천장을 향해 가만히 고정시키고만 있었다. 너는 그다지 울지도 않았다. 태어났을 때에도.

당신은 레몬캔디가 아니에요, 하고 여자가 속삭이는 소리.

어째서? 난 그 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애는 사방이 흰 타일과 붉은 피로 뒤덮인 병원의 분만실이 아니라 강가에서 태어났어요. 밀랍으로 봉해진 비좁은 바구니 속에 담겨 떠내려온 그 애를 산책을 하던 연금술사가 주워들었죠. 그 애는 연금술사를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지만 연금술사는 그 애가 제 아이라고 믿었을지도 몰라요. 마리나 칼도 그런 식으로 데려왔으니까요. 노랗게 흐드러진 꽃밭에서 맨몸으로 쓰러져 있던 마리를 데려와 부드러운 린넨 드레스를 입힌 것도,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초인종 구멍, 그 너머에 있는 삶에 대해 골몰하던 칼에게 다락을 마련해 준 것도 연금술사였으니까요.

모르겠어. 그 애의 탄생에 대해 난 아직 할 말이 없어.

정확히 말하면 그게 최초의 순간은 아니겠죠. 누군가에게 언급된 순간, 누군가에게 관찰된 순간, 그 이전의 무언가는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이 더 이야기하기 어렵다면 내가 할게요. 이야기는 혼자 쓰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자책할 필요 없어요. 당신의 기억이 불완전한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 애의 가족이 그런 식으로 구성되었다는 걸, 레몬캔디는 끝내 몰랐으니까. 그 애는 성기와 성기, 피와 자궁과 탯줄, 살의 참혹한 역사가 반복되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그 애는 유독 자책하기도 했는데, 자신만이 모든 생명들이 서로를 범하고 먹어치우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살의 역사에서 배제되었다는 점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수컷 빈대는 제 몸에 달린 살의 칼로 암컷을 난자하고 한 절지동물은 같은 수컷을 겁탈하죠. 생물학자들은 그런 행동이 수컷의 고환에 자신의 정액을 삽입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해요. 파트너를 해쳐가며 제 성기를 찔러놓는 행동은 보다 확실하게 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절지동물들의 잔혹한 성행위들이 쾌락이나 저 자신의 도착적인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생존과 생식을 위한 경쟁심리에서 나온 지극히 효율적인 행동이라는 설명들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절지동물을 바라보듯 인간을 관찰하는 누군가는 구두를 핥으며 자위하고 목을 조르며 서로를 겁간하며 페니스에 리본을 묶고 서로의 사지를 구속한 채, 배설하며 서로의 성기를 때리며 하는 인간의 도착적인 성행위 역시 생식을 위한 필요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까요. 프로이트의 설명처럼 그들의 내면에 억압된 충동이 여러 방식으로 분화되는 것이라면, 절지동물들에게는 어째서 그러한 리비도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일까요?

그건 알 수 없지. 레몬캔디는 한 번도 살의 역사에 참여한 적이 없으니까. 절지동물들처럼 수컷과 암컷의 얼굴과 배를 찢고 생식세포들을 주입한 적이 없으니까.

수컷 빈대들은 모두 정신병자들인지도 몰라요.

응.

그들에게는 법이 없을 뿐, 그들의 욕망은 뒤틀려 있는지도 몰라요. 그들을 모두 이상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을 존중해주는 것일까요? 인간만큼이나 빈대도 똑같이 자연에 속해 있으므로 인간에게 이상함이라는 개념을 부과할 작정이라면 빈대에게도 똑같이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왜 모두가 이 이상한 규칙에 속아넘어가는 걸까요? 빈대와 당신이 다른 만큼이나 당신과 당신은 다른데, 어째서 당신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람을 살해하고 겁탈할 수 없는 걸까요? 사회와 법에 대해 배운적이 없다면 인간들도 서로를 찔러 죽이며 출산을 강요했을까요?

난 모든 것이 같은 만큼 모든 것이 다르다고 생각해. 종의 개념만큼 이상한 개념은 없어. 서로 다른 우주만큼이나 상이한 심연에게 같은 기준을 강요하는 것. 서로 다른 우주만큼이나 유사한 생들에게 다른 기준을 강요하는 것. 우리는 있지도 않은 자연을 믿는 체하며 사는 거야.

그건 모든 어휘들이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무엇도 같은 어휘로 불러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것들은 서로 다른 우주만큼이나 다르니까.

죽음도?

자살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살하는 생물들에 대한 깊고 은밀한 경외를 가지고 있으니까.

난 자살하는 빈대를 본 적이 없어.

빈대는 서로를 죽일 뿐 자살하지 않아요.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생명, 구더기처럼 들끓는 생명, 그 생명 하나하나에 자신의 눈이, 귀가, 입이, 항문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지, 빈대는 상상하지 못한 게 아닐까요.

난 더 이상 빈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

Series Navigation<< 자살자 쥐들의 물방울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