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과 아이의 물방울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믿지도 않는 꿈을 더 꿀 수는 없었다. 울먹이며 종이를 찢듯 날카롭게 옮겨적었던 어휘들을 기억할 수도 없었다. 너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현관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잠금장치가 망가져 있는 문은 쉽게 속을 들여다보였다.

탐정 행세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떠한 음성을 들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현관문 앞, 자그마한 낚시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가 네게 물었다.

이제 들어가려고요?

응.

저기 안에 이상한 게 있어요.

뭐?

유리구슬이요. 유리구슬. 유리구슬이 혼자 뛰어다니고 있어요.

너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서웠냐고.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있잖아요. 당신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나요. 예를 들어 지금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이에요.

그야, 유리구슬이 튀어오르겠지. 네가 거짓말 한 것이 아니라면.

거짓말은 아니에요.

그래.

너는 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대신 낚시의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형광불빛에 그을린 투명한 눈은 불구가 되어버린 빛처럼 아름다웠다.

사실 나도 예감하고 있는 것이 있어.

아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칠이 벗겨진 의자는 군데군데 상처가 난 늙은 피부처럼 조용했다.

누군가 나를 쫓아 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야. 이 안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없을 거야. 내 손으로 도축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남이 잡아 죽인 짐승의 고기만 먹으면서 죽어갈 거야. 누군가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인사를 나누는 일은 없을 거야. 확신할 수 있어. 난 한 번도 고독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늘 혼자였어. 확실한 결말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없어. 불안하지 않다면 무서울 것도 없는 거야. 살아 있는 만큼 아픈 거라고 그 애가 이야기했는데. 아픈 만큼 죽어가는 거라고 대답해주지 못했어.

너는 길게 뻗은 목 앞에서, 일그러진 그림자 앞에서 밤이 새도록 중얼거렸다. 아침까지 문은 열두어 번 여닫혔다. 너는 홀로 여닫히는 문 안에서 피처럼 새어나오는 붉은 치마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주황색 등이 매끄러운 얼굴 위로 번지며 검은 눈과 짙푸른 입술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너를 보고 흠칫 놀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곧 너를 등지고 깊은 복도 속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너는 현관문이라고 생각했던 문이 엘리베이터 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유리구슬은 없었다. 장롱문은 언제나 그랬듯 한 줄의 희미한 빈틈만을 남기고 닫혀 있었다.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 텐데. 많은 울음을 지켜보고 많은 증언을 훔쳐오고 많은 모순을 이어맞추어야 할 텐데. 갈수록 너는 무디어져 간다. 네 얼굴을 감싸던 끈적한 초록 물방울, 콧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거북한 미풍과 뱃속의 응어리를 더는 느낄 수 없다. 다만 꿈 속에 가두어둔 몇 종류의 어휘들로 그곳의 아픔을 기억할 뿐이다. 이젠 당신이 그리 밉지도 않다. 네게 속해 있는 하나의 언어 속에 파묻혀 죽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네 소원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지만 네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주머니에서 한 귀퉁이가 뭉개진 유리구슬을 꺼내었다. 어릴 적에 너는 이 유리구슬을 콧속에 집어넣은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그걸 끄집어내기까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의사가 핀셋으로 집어올린 유리구슬이 생각보다 컸다는 것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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