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의 물방울

눅눅한 옷장과 그 틈새는 너희와 분리할 수 없는 너희의 살이었다. 너는 옷장을 두고 나갈 수 없었다. 옷장 속에 남자를 밀어넣었다.

난 거울 앞에서 태어났어요. 끊임없이 복제되던 표정들을 기억해요. 막과 막 사이에서 비어져나오던 살들을 기억해요. 무수하게 증폭되던 빛이 내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놓던 아픔을 기억해요. 잠깐, 너무 서두르진 말아요. 우리가 타인보다 많이 가진 건 시간뿐이니까. 그동안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너희의 거울 속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노래를 부르듯. 소스라치듯. 하얗게 일렁이는 구더기의 형상. 항상 네 곁에 있어 줄게. 걱정하지 마. 너를 향해 털이 부숭부숭한 손을, 흉측한 돌기를 비비적거리는 벌레, 역겹고 달콤한 생, 너는 완강하게 그와의 접촉을 거부한다. 그는 너의 눈꺼풀을 야릇하게 핥고, 벌레의 부글거리는 음성이 소름끼치도록 역겨워 너는 구역질을 한다. 타자와의 합일을 바라지 않았던가? 네가 아닌 것과 병을 섞고 감염되기를, 누군가 너를 더럽혀 주기를 기도하지 않았던가? 혹시 너는

당신을 전염시키는 것만을 바랐던 것이 아닌가? 누군가 너의 병을 나누어 가져가기만을, 너의 병을 훔쳐가는 입맞춤만을 기도했던 것이 아닌가?

너는 옷장을 통째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디로?

이미 정한 거 아니었어요. 그야, 바깥으로요.

그래. 바깥으로. 가능하면 네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네 예감이 위치한 곳으로. 개의 살을 파내듯이. 너를 두고 홀로 자라는 그 자연을 미워하듯이. 너를 두고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을 증오하듯이. 가엾은 벌레들을 은밀히 사랑하듯이. 네게 구걸하는 이들이 너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듯이. 네가 구걸하는 이들이 너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듯이. 옷장 틈에서 사내의 짙은 체취가 비어져나오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향기도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그는 갈수록 희박해져가고 있었다. 너는 그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었다.

난 남자를 안아 본 적이 없어.

나도 옷장을 안아 본 적은 없어요.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옷장 틈 사이에서 길쭉하게 비어져나왔다.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의 죽음을, 그의 결핍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은 떨어져 죽은 소년들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소년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들의 목에 색색의 풍선을 달아준 채 세련된 트렁크, 70년대 미국 영화 프레임 속의 향기로운 전유물이었던 네모나고 반들거리는 트렁크에-흑백 영화였기에 달처럼 황홀한 은빛으로 반짝거리던-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머리를 넣고 그들의 둔부를 애무하고 그들의 목을 애무하고 그들의 혈류를 자르고 그들을 조그맣게 오려 지하실에 장식하던 사내는 썩어가는 머리들을 어떻게 기억했을까? 아득한 번개가 내리치던 날 사각의 TV 프레임 속에서 그의 아름다운 유령들이 돌연히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그 거짓처럼 허황된 공백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가 사랑한 소년들은 칼, 요제프, 리들, 톰, 레이몬드, 그들의 이름을 가지고 떠나가버렸고 그에게 남은 입술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사실 그의 비좁은 단칸방에는 지하실을 만들 만한 깊이조차 없다는 것을. 크지 않은 키임에도 종종 현관에 머리를 짓찧는 그의 비참한 공간 안에 더 이상 내려갈 곳은 없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가 수만 번 몽상하고 몽정하며 살해하고 사랑한 소년들은 한 번도 그의 곁에 머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는 끔찍스러울 정도로 상냥하고 무해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마 그의 일생 내내 그는 벌레조차 해치지 못하고 벌레처럼 죽어가리라는 것을. 지하실에 장식해둔 소년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는 기름때가 반들거리는 빈 접시에 코를 박고 울었다. 아무도 그를 훔쳐보지 않았음에도 그는 수치를 느꼈다. 꽉 다물린 천장 위쪽, 위층집, 그보다 위쪽, 위층집, 그보다 위쪽, 위층집, 그보다 아득한 위쪽, 그의 삶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는 무수한 경계들의 너머, 이제는 몽상처럼 느껴지는 높은 곳에 있을 밤하늘에 텅 빈 자궁처럼 벌어진 구멍들, 빛이 새어나오는 별들이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불가능한 일임에도. 별도 신도 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너무나 비참한 구석자리에 숨어있었기에, 학교 관리인이 나무 바닥 아래 들어찬 붉은 먼지를 찾아내지 못하듯, 그를 찾아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영원히 들키지 않을 이름을 알고 살아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가장 완고한 비밀이 될 것이다. 결코 누설되지 않을 비밀이.

내게는 지하실이 있어요.

그가 여가수를 만난 것은 난생 처음 펍에 들어가 보았을 때였다. 그는 어떠한 예감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했다. 젊은이들이 서성거리는 동네는 그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술에 취해 낄낄거리는 남자들이 그의 굽은 등일 수상스러운 눈으로 흘겨보며 지나쳤다. 펍에서도 늙수그레한 그를 환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입장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을 때, 그의 초라한 몰골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이들은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가게의 종업원들마저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구석자리의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할까 망설이는 그를 위해 찾아오는 종업원은 없었다. 그는 체념한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낯선 공기를 무시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여가수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은.

그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몇 년 전에 은퇴한 여가수였다. 파격적이며 음울한 음색으로 몇몇 매니아층으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지만 그리 대중적인 인기는 얻지 못한 채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라진 여가수였다. 그녀의 눈, 절망적으로 시꺼먼 두 눈이 은퇴의 전조라면 전조였다. 그녀의 미니홈피에는 알음알음 그녀를 찾아오는 팬들이 있었으나 그녀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미니홈피에도 더이상 글을 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독백하듯 써내려간 그녀의 넋두리들마저도 사랑하던 팬들은 그녀에게 비밀스러운 답장을 써 보냈지만, 그녀가 공개적으로 답을 한 적은 없었다. 사실 그 역시도 그녀를 남몰래 사랑하던, 그래서 그녀의 복귀를 염원하던 팬이었다. 그녀가 비좁고 습한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도 그는 그녀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가느스름하게 찢어진 눈을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맞추었다. 그는 도취된 청춘들 사이에 이물질처럼 끼어 어쩔 줄을 모르고 몸을 잔뜩 굳히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며 발을 구르는 청년들, 손을 높이 치켜세우고 그녀의 노래를 따라하는 청년들 사이에서 그는 어물쩍거리며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따라 손을 올렸다가 그들의 손 모양이 그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그들의 손 모양을 뚫어지게 훔쳐볼만한 용기도 없어서, 이내 다시 손을 내렸다. 그는 빛에 물든 날파리의 하얀 그림자처럼, 역겹지만 희박한 이물처럼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마다의 우수와 절망에 취한 젊은이들은 그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너무 많고 짙은 그림자들이 있었고, 그의 진득하고 역겨운 그림자에는 그들과는 달리 향기조차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의 이질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평소처럼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몸에 힘을 풀고 여가수의 매혹적인 노래에 잠겨들었다. 그녀의 검은 눈과 가느다란 손가락, 보랏빛 조명을 받아 몽환적인 색깔로 물든 피아노 건반과 발 밑에서 퍼져나오는 유령처럼 어스름한 냉기. 어깨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시꺼먼 열기. 여자의 풀어헤친 머리칼과 별을 묻어 놓은 무덤처럼 빛나는, 안개 낀 조명. 유리처럼 반짝이는 멜로디와 목을 찢듯 날카로운 소리의 파편들. 그때였다. 그녀가 그와 눈을 맞춘 것은.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반들거리는, 얇은 거울이 수백 겹 겹쳐져 푸른 잉크처럼 응축된 빛을 속에 비밀스레 품고 있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난생 처음으로 인지한 타인의 응시였다. 그는 거미줄에 사로잡힌 나비처럼 꼼짝도 못한 채 그녀의 검은 눈을 마주보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 그의 곁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아니, 펍에 들어온 그녀를 알아보았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녀는 개인적인 일로 펍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녀는 몽롱하고 세련된 펍의 음악과 눈부실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는 감히 그녀의 앞에 나서 그녀의 노래에 대해, 그날 공연에서 보았던 그녀의 절망적인 눈빛에 대해 언급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법처럼, 마치 거대한 비극의 서사처럼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녀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떤 이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떤 종업원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의 짙고 어슴푸레한 안개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그와 같은 유령의 세계를 공유하는 듯했다. 그만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만이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각으로 인하여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현상들 사이에서, 아무에게도 보여지지 않은 사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빛과 시간의 이론 속에 사내의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홀로 적어내려간 긴 시 역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아온 그만이 읽고 앓았던 그만의 글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부재를 투명하게 되비추고 있는 그녀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부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비밀스러운 결속이 그들의 눈 속에서 섞여들고 있었다. 그만이 알아차린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속해 있는 모든 결속은 거짓이었다. 절망으로 엮인 그들의 비밀스러운 결속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만이 오롯이 앓다 버릴 글을 계속해서 써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의미도 없는 글을, 존재할 수조차 없는 글을 계속해서 써내려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숱한 밤을 대하듯, 그는 그녀의 부재를 바라보았다. 자리를 갖지 못한 그의 장소에, 면도 선도 없는 그의 희미한 점 위에 그녀가 함께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명을 머금고 붉은빛으로 물든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서 그녀의 신비로운 노랫말처럼 수천 겹의 날개로 겹쳐진 거울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속에서 수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겨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타인의 눈 속에서 왜곡된 그의 상, 시꺼멓게 젖어든 그의 이목구비는 놀랄 정도로 매혹적이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당신 눈이 참 예쁘네요, 아무래도 좋을 말을 하는 대신 그는 홀린 듯 그녀를 따라 펍을 나섰다. 그녀가 오솔길처럼 향기로운 골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인적도 불빛도 없는 어둑한 골목에서 그의 목을 조를 때까지, 시꺼먼 비닐봉지가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감겨올 때까지, 그는 계속 그녀의 거울들 속에서 경악하고 있는, 그의 황홀한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갈망하듯, 그리하여 포기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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