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1

달은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은 여자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용서해 줘. 절망적으로 거대한 달 앞에서 여자는 수화기에 입술을 붙인 채 다급하게 속삭였다. 나를 용서해 줘.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가해한 빛과도 같은 침묵이 번져들고 있었다.

누구시죠?

난 네 친구야.

내겐 친구가 없어요. 난 당신을 몰라요.

나를 용서해 줘.

뭘요?

나를 용서해 줘. 여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그런 통증조차 없었다면 난 살아있지 못했을 거야. 난 살아있지 않았을 거야. 난 나를 죽였을 거야. 혈관이 터질 때까지 질주하는 어린 말처럼 천국까지 내달렸을 거야.

누구시죠?

전화를 끊지 마! 여자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전화를 끊으면 난 죽어버릴 거야. 네게 전화를 걸기 위해 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어. 이건 마지막 전화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약하고 가느다란, 당황한 듯한 숨소리가 여자의 귓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여자는 그 애가 듣고 있음을 알았다.

네게 편지를 보내려고도 했어. 난 정말 많은 편지들을 썼어. 하루에 다섯 장씩 난 네게 보낼 편지를 썼는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보니 그 많은 편지들은 보이지 않았어. 단 한 장도. 그래 난 사실 단 한 장도 쓰지 않았던 거야. 믿어지니? 그러니까 편지는 안 돼. 편지를 쓴 순간들은 모두 꿈이 되어버리니까. 편지들을 잃어버린 이후로 난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않았고 그래서 한 순간도 잠들지 못했으며 꿈도 꾸지 못했지.

누구세요?

난 너를 보던 시선이야. 난 너와 함께한,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너와 함께한 시간이야. 깨진 거울처럼, 거울의 파편 틈에서 피어난 푸른 꽃처럼 나는 너를 보고 있었어. 그리고 너도 나를 보고 있었지.

너는 내게 말을 걸었어. 너는 운동장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었지. 네 손은 언제나 지저분했어. 흙과 먼지가 묻은 네 작고 두툼한 손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지만 난 네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 어째서일까?

너는 네가 천사라고 했어. 벌을 받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라고. 하지만 난 너를 믿지 않았어. 네게는 날개도 없었고 넌 그다지 희지 않았으며 네게 남은 유일한 흰빛은 네 입속에 감추어져 있었으니까. 희게 이를 드러내며 웃지 않으면 너는 조금도 희지 않았어. 게다가 너는 금발도 아니었고 하늘처럼 새파란 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 네 눈도 머리칼도 가장 깊고 외로운 밤처럼 검었어.

넌 보여주겠다고 했어. 넌 울고 있었어. 네가 떨어지는 것을 나는 잡지 않았어. 왜냐하면 난 사실 네가 천사라는 것을 아주 조금은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사라졌어. 영원히 사라졌어. 그 누구도 너를 기억하지 못해. 우리의 담임 교사도 너를 기억하지 못했어.

우리는 네 책상에 흰 국화 한 송이를 올려놓았고 국화는 순식간에 시들어버렸으며 천사처럼 투명한 날개들을 가진 파리들이 그 위에 들끓었지.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국화를 내다 버렸어. 그리고 그 책상에는 다른 아이가 앉았고.

그 누구도 너를 다시 기억하지 못했어. 그 해에는 너무 많은 아이들이 옥상에서 투신하거나 화장실에서 신발끈으로 목을 매고 죽었고 그 아이들의 이름은 전부 잊혔지. 하지만 너는 그런 방식으로 사라진 게 아니었어.

너는 정말 잊혔어.

국화를 버리고 난 뒤부터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했어. 너의 존재를 흐릿하게 아는 사람들조차도 네 이름을 알지 못했어. 나도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그제야 나는 네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 넌 아무에게도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너를 부를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은 네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야. 나를 용서해 줘. 너는 떠내려오는 사물들의 그림자 같았어. 너는 사물들의 시체처럼 검었어.

지상에 짐승들을 도축하고 처형하는 칼날들이 있듯 천국에는 천사들을 도축하고 처형하는 공간이 있다고 네가 말했어.

네가 그렇게 하얗게 웃을 때면 나는 너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하지만 얼굴이, 눈 안쪽이, 귓속이, 심장이,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곳들이 너무 욱신거려서 너를 어떻게 죽여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너를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밤을 일그러뜨리는 새벽의 희멀건한 빛처럼 서서히 흐릿하게 사라져갔어. 그리고 난 널 잃어버렸어. 용서해줘.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버려진 공중전화 부스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깊은 밤이었고, 조명에 반사된 흐릿한 유리의 내부에서 시체처럼 창백한 여자의 얼굴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여자는 떠오르지 않는 별들을 별들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멍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한 번도 별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는 별들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별들이 어떠한 형상으로 비추어지는지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었다. 종이를 표백하는 화학 약품속에 잠긴 것처럼 그녀의 육신에 마지막으로 덮여 있던 지층들과 언어들은 휘발되어 사라지고 가장 깊이 침잠되어 있는, 이미 그녀의 고유한 살이 되어버린 흉터만이, 어린시절만이 그녀의 내부에 선명하게 떠올렸다.

용서해줘,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시체처럼 흰 허벅지 위로 작은 거미가 기어갔다.

너는 너를 죽여달라고 말했어. 너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고 했어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고 너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했어. 그리고 곧, 죽여달라고 말했어. 하지만 네가 너를 죽여달라고 말하는 순간 난 더 이상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했어. 너는 괜찮다고 말했어. 너는 울었어. 부모를 잃어버린 유원지의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어. 하지만 나는 정말, 더 이상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사라짐을 원하는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나는 너와 함께 죽고 싶었어. 나는 네가 먼저 나를 죽여주기를 원했어. 내가 너의 죽음을 내 죽음 뒤에 이어질 너의 죽음을 상상할 수 있도록. 나는 네가 나를 죽이고 떠나가길 바랐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는 우주에 나가고 싶다고 했지. 천국보다도 더 먼 곳에 우주가 있다고 우리는 믿었어. 그곳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도 공간도 아닌 신비로운 방식으로 운행하고 있겠지. 우리는 그곳을 상상하며 놀았어. 하지만 우리는 끝내 그곳을 발견하지 못했어. 우리에게 알려진 곳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장소들은 그곳이 아니었어.

네가 천사라면, 여자는 뼛속으로 틈입하는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 속삭였다. 우주로 날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나는 물었어.

너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 신이 네 두 날개들을 잘라버려서. 닭을 도축하는 커다란 칼로 네 날개를 뜯어내 버려서 더는 날 수 없다고.

검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거미는 여자의 흰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 연한 베이지색 원피스 자락 아래로 들어갔다. 여자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사타구니는 늙은 여자처럼 검었다.

너는 신을 욕하는 버릇을 고칠 수 없었어. 난 신을 원망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너는 신을 원망하고 동시에 사랑했지. 그는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아갔고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네게 주었어. 하지만 난 신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

넌 신에게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할 거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어. 너와 같은 곳으로 가고 싶었으니까.

너는 수업 중간에 갑자기 일어나서 큰 소리로 기도를 했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 애들은 너를 조롱하듯이 거대한 낮의 목소리로 웃어댔고 난 네가 신에게 너를 용서해달라고 비는 소리를 들었어.

넌 돌아가고 싶었던 거야. 넌 나를 두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거야. 신이 너를 듣고 벼락을 쏘아서, 창문을 깨뜨려 네 목을 잘라서 너를 무너뜨리고 가장 지독한 독으로 너를 부패시켜서 죽여버릴까봐 겁이 났어. 너를 말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없는 슬픔에 얼어붙었고 네가 모든 모멸과 조롱 끝에 자리에 앉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빗물이 공중전화박스 바깥으로 삐져나온 여자의 흰 발을 적시고 있었다.

급식실 뒤편 화단에서 우리는 희고 작은 토끼들을 길렀지. 반 아이들이 우리의 토끼들을 빼앗아 길들일 때마다 우리는 비밀스럽게 화단으로 돌아가서 다시 토끼들을 훔쳐냈어. 우리는 몇 번이고 은밀하게 토끼들을 훔쳤고 그곳에서 토끼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각인시켰어. 토끼들은 우리의 손 아래에서 유동성의 액체처럼 부드럽게 풀어졌지.

넌 토끼들을 좋아했어. 29번 채널에 토끼가 나오면 어떨지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토끼들의 놀랍도록 부드러운 귀를 어루만졌어. 넌 29번 채널에서 토끼를 낳는 여자를 본 적이 있다고 했어. 내가 보지 않는 심야 시간에 더러운 농민의 옷을 입은 여자는 변을 보듯 마당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가랑이 사이에서 검붉은 피가 엉겨붙어 있는 작은 토끼를 끄집어낸다고 했어.

그 토끼는 죽어있다고도 했어.

토끼를 처음으로 낳던 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랐지. 모두가 그녀와 그녀의 죽은 기형아를 확인하고 싶어 했어. 도시의 저명한 의학박사까지도 그녀를 확인하고 그녀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정도였다고 너는 말했어. 하지만 그녀에 대한 관심은 곧 시들해졌지. 세상에는 토끼를 낳는 여자보다 진귀한 것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토끼보다는 알을 낳는 여자에게, 알 속에서 태어난 소년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어.

아무도 여자를 지켜보지 않는 동안에도 여자는 계속해서 토끼를 낳았어. 단 한 마리의 토끼도 살아 있지 않았어.

여자는 마침내 마당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듯이 토끼를 낳기에 이르렀어. 굶주린 사냥개들이 여자의 신비로운, 저주받은 자식을 잡아채 여자가 보는 앞에서 물어뜯었지.

여자는 울지 않았으며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고 너는 말했어.

우리가 돌보는 희고 부드러운 토끼들이 그녀의 저주받은 자식들이라고 상상하면서 우리는 놀았어. 우리는 교실에서 배운 내용들을 토끼들에게 가르쳤지. 한가롭게 풀을 뜯으면서 우리를 올려다보는 음험한 물기로 젖은, 노출된 심장과도 같은 붉은 눈들을 우리는 함께 내려다보았어. 토끼들과 함께 놀고 난 뒤 우리는 함께 교실로 돌아갔어. 우리는 교실 천장에 야광 별들을 오려붙였어. 별들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지. 우리가 정말 이름을 붙였는지 끝내 이름을 붙이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때 붙인 이름을 잊어버린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아. 난 다른 모든 이름과 마찬가지로 별들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난 별들을 보면서 불가해한 향수에 시달렸지.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지상에서 태어나기 전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 이전에 다른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측정할 수 없는 먼 우주에서 지구로 떨어진 이름 없는 작은 돌덩어리의 먼지 조각이 나일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나를 낳기 전에 별의 꿈을 꾸었다고 했어. 그 별은 타들어가는 얼음처럼 뜨거웠다고.

여자는 절망적으로 발작적인 기침을 해댔다. 여자의 검은 입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작은 날벌레가 튀어나왔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고 수화기 너머에서 나지막하고 정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으로 젖어 있는 목소리.

여자는 속삭였다. 이건 우리의 추억이야.

그건 당신의 추억이 아니에요, 하고 목소리는 속삭였다. 그리고 내 추억도 아니고요. 어린시절도 야광별도 천사도 사냥개도 29번 채널도 모두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망상에서 벗어나야 해요. 당신은 도망치고 있어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흐느끼면서 속삭였다. 나를 용서해 줘. 네가 토끼들의 목을 졸라 죽이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어. 죽은 토끼들을 보고 난 비명을 질렀지. 토끼들은 더 이상 희지 않았어. 탐욕스러운 검은 빛으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파리들이 토끼들의 위를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어. 루비처럼 반짝이던, 튀어나온 심장의 붉은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어. 토끼들은 검었어.

여자는 덜덜 떨면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은, 우리가 토끼들을 훔쳤다는 것을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 아직 토끼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믿었던 반 애들도 나처럼 울었어. 한여름의 검은 사체는 우리가 겪기에 너무 과도한 죽음이었어. 그것은 끔찍하게 과열되어 살아 있었지. 우리는 얼굴과 눈이 가려지지 않은, 그토록 많은 생명들에 뒤덮인 시체를 처음 보았어. 복지원의 부랑자들이 토끼 위를 뒤덮은 파리들처럼 검게 바랜 얼굴을 하고 토끼와 반죽처럼 진득하게 엉겨붙은 여름의 파리들을 동시에 삽으로 파냈어.

선생님은 우리와 함께 흐느꼈어.

누군가, 여자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너를 보았다고 소리쳤어. 네가 토끼 목을 졸라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고.

나는 끔찍하게 놀라 그럴 리 없다고 비명을 질렀지. 너는 착한 아이라고 너는 다른 아이들처럼 문장들을 쉽게 이해하고 외우지는 못하지만, 재빠르게 움직이거나 줄에 맞추어 서지는 못하지만 착한 아이라고.

아이들은 내 말에 동의했어. 난 순간 토끼의 끔찍한 죽음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열에 들떠 아이들이 내게 동조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어. 그래, 그래 그럴 리가 없어 하는 소리는 숨이 멎을 것처럼 황홀하게 증폭되었어. 그것은 내가 차지한 최초의 승리였어. 이후로 단 한 번도 타인을 설득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순간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행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환희에 들떠 가슴이 아팠지.

아이들은 너를, 그리고 나를 믿고 있었어! 그때 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어? 여자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여자의 무릎은 풀잎에 물들어 짙은 녹빛이었다. 헐벗은 채 쓰러진 젖은 풀잎들, 신이 자신을 풀잎이라고 믿던 날 여자는 풀잎들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에게 기도했고 신은 여자의 무릎 아래에서 뭉그러졌고 여자는 신을 살해한 채, 신의 녹빛 피를 무릎에 묻힌 채로 살해자의 음험한 검음으로 그녀가 죽인 신에게 삶을 애원했다.

네가 토끼를 죽였다고 말했을 때 난 너를 믿지 않았어. 왜냐하면 너는 저능아였고 그래서 착한 아이였으니까 착한 아이는 곤충보다 거대한 짐승들을 죽이지 않으니까. 우리는 토끼들을 사랑했잖아? 토끼들을 쓰다듬어주고 토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잖아. 토끼들은 귀엽고 희었잖아.

하지만 너는 토끼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토끼들을 죽였다고 말했어.

너는 몸 앞으로 검게 그을린 가느다란 팔을 뻗은 채 마비된 것처럼 팔을 경직시키면서 몸을 떨었지. 네 눈은 죽지 않은 토끼처럼 희었어. 너는 토끼들의 목을 졸라서 죽였다고 말했어. 네가 한 마리의 토끼를 죽이는 동안 다른 토끼들은 도망가지도 않고 반항하지도 않고 죽어가는 토끼 옆에 둘러앉아서 너를 천사의 심장처럼 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어. 나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나는 너를 고발한 아이에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어. 너를 믿지 못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용서해줘. 난 네가 토끼를 죽일 수 없다고 믿고 있었어. 하지만 네가 토끼처럼 살아 있다는 사실을, 토끼보다도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어.

여자의 음부에서 떠돌던 작은 거미가 여자의 허벅지 사이에 투명한 선들을 잇대기 시작했다.

교실 쓰레기통에서 모서리가 남은 야광지들을 발견해 별을 그리고 천장에 야광 별들을 오려 붙이고 난 뒤 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너는 교실에 남았어. 네게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너를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지는 않았어. 너는 검었고 검은 것들은 병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가 우리 집에 병을 옮겨 놓을까 봐 두려웠던 거야. 엄마와 아빠가, 흰 말티즈가 검은 독에 감염되어 죽어갈까 봐, 밤처럼 새까맣게 썩어서 너처럼 이상한 냄새를 풍길까 봐 무서웠어. 그리고 내가 너 외에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 네가 말을 더듬는 모습을, 웃어서는 안 되는 순간에 천사처럼 흰 이를 드러내면서 환하게 웃고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돌발적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

수업 시간에 가장 엄숙한 침묵 속에서 너는 갑자기 일어나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는 했지. 다른 애들은 너를 보면서 웃었지만 난 웃을 수 없었어. 웃을 수 없는 내가 웃지 않는 네가 부끄러웠어. 난 너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네가 더 이상 이상한 노래를 부르지 않도록, 너를 보면서 슬픔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너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그리고 너를 부끄러워하는 나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여자의 눈꺼풀은 달처럼 희었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여자의 흰 눈꺼풀 위로 나방이 달겨들었다. 여자의 감은 눈은 리본을 매단 것처럼 거대한 검은 날개로 너풀거렸다.

교실을 가로지르는 직각의 날카로운 기하학 속에서 너는 유일한 곡선이었어. 너는 열대 과일로 만들어진 건축물처럼 축축하고 끈적했어. 과일의 내피에 들어 있는 것이 붉은 속살이라는 사실을, 심장처럼 새빨간 고기라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너는 그 이후로도 동물들을 자주 죽였지. 길고양이의 유연하고 가느다란 목을 졸라 죽인 것도, 새들의 목을 두 개의 손가락으로 꺾어서 죽인 것도 모두 너야.

하지만 나는 네가 죽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동물들의 죽음은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린 소문처럼 희미했어. 어쩌면 우리는 꿈을 꿨을지도 몰라. 죽음은 모두 꿈 속에 있으며 삶은 꿈 바깥에 있는 것일지도 몰라. 혹은 그 반대일지도. 하지만 꿈은 죽음만큼이나 유독한 거야.

네게 부치지 못했던 편지들은 내게 있어 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어. 난 그토록 많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면 그 편지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까 봐 겁이 나. 애써 들어간 꿈 속에 편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그래서 나는 꿈을 꿀 수도 없어. 여자가 눈을 뜨자 소스라치게 놀란 검은 나방이 여자의 이마 위로 날아올라 공중 전화박스의 유리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죽었거나 기절했거나 꿈을 꾸고 있는 검은 나방은 유리 벽 아래로 희고 묽은 흔적을 남기며 떨어졌다. 나방의 추락은 눈물의 하혈처럼 보였다.

저기요, 난 정말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위장된 정중함을 상실한 목소리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발 전화를 끊지 마, 하고 여자는 목소리와 함께 울부짖었다. 젖어 있는 목소리들이 혼선된 라디오처럼 뒤얽혔다. 나를 들어줘. 그리고 제발 나를 용서해 줘. 내가 너를 잃어버리기 전에.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전에. 목소리는 흐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가진 적조차 없어요.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이 나를 모르는 만큼 나는 당신을 몰라.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제발, 하고 목소리는 여자를 따라하듯 속삭였다. 제발 나를 당신의 망상에 끌어들이지 말아요.

여자의 찢어진 입술 밑으로 묽은 침이 흘러내렸다.

여자는 전화를 끊지 말라고 소리쳤다.

목소리는 애원하면서도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목소리가 그녀로부터 도망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전화기와 육체, 그리고 밤의 영원한 전원이 끊어지기 전에는. 병든 새들은 독처럼 무성한 검은 숲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유년과 교실, 삶과 꿈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아니에요, 그것은 오히려, 목소리가 슬프게 속삭였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환상과 같아요. 거울의 수면 밖으로 빠져나온 유령은 두 번 다시 거울 밑의 깊고 아득한 입체를 상상할 수 없어요. 거울 바깥에서 들여다본 거울은 단단하고 차가운 평면일 뿐이에요.

그것은 목소리가 건넨 말이 아니었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는 끔찍한 침묵뿐이었으며 드문드문 당황과 고통으로 떨리는 숨소리만 이어질 뿐이었다.

반투명한 유리 벽면에서 비밀처럼 새어나온 음성의 이름을 여자는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어 하지만,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네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었어.

너는 네가 천국에서 왔다고 했지. 천국의 다른 이름은 복지원이었어. 네가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너는 학교 옆 동산에 있는 복지원의 어린 천사였어. 그리고 돼지였어.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는 복지원 근처의 초록 평원으로 소풍을 나갔고 나는 뛰어노는 아이들 틈에 돌 사이의 이끼처럼 가만히 앉아서 너를 바라보았지.

너는 거미처럼 검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그보다도 더 검은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어. 비쩍 마른 선한 인상의 노인이 네 가슴을 고깃덩이처럼 주무르고 있었어.

너는 돼지처럼 벌거벗었고 돼지처럼 더러웠기 때문에 아무도 너를 구하지 않았어. 하지만 너를 본 순간 나는 네가 거울 너머에 있는 나라는 것을 알았어. 네 검은 눈은 탐욕스러운 거울의 반영처럼 나를 빨아들였고 나는 빼앗긴 응시로 너를 느꼈어.

넌 눈이 멀지도 않았는데 맹아들의 교육을 받았지. 너는 어둠 속에서 점자 읽는 법을 배웠어. 요철이 없는 편평한 문자를 원하는 네 날개깃을 교사들은 잔혹하고 정성스럽게 도려내었어. 너는 눈이 멀지 않았다고 소리쳤지만 사실 눈이 멀지 않은 건 너만이 아니었어. 교사들은 웃으면서 모두가 너와 같이 인위적인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했어.

너는 목이 잘린 닭처럼 비참하게 출혈하면서, 부러진 발목으로 절룩거리며 학교로 왔지. 벌을 받기 싫어 억지로 눈을 감고 있던 눈 멀지 않은 아이들, 이미 날개가 잘렸거나 아직 잘리지 않은 아이들, 진짜 눈이 먼 아이들과 눈이 먼 척 하는 아이들 눈이 멀어야 하는 아이들이 영원한 밤처럼 어두운 천국에 남아 있었어.

천국을 견디지 못한 불온한 천사들은 너와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천국을 사랑하는 선량한 천사들은 그곳에 남았지. 남은 천사들은 너희들이 배은망덕한 배신자라고 울면서 속삭였어. 하지만 큰 소리로 너희들을 고발하지는 않았어.

벌거벗은 네 음부는 늙은 여자처럼 검었어. 털도 없이, 검게 주름진 네 검은 음부를 나는 홀린 듯 바라보았어. 네 안에 남겨진 나 역시 나를 무력하고 서글프게 응시하고 있었어.

다리가 부러진 네가 괴한처럼 교실로 뛰어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어. 네 벌거벗은 검은 몸을 보고 아이들이 깔깔거릴 때도 나는 웃지 않았어. 거울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고요하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어.

네가 내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굴욕적이었지만 별을 보고 익사할 미래를 점치는 선원처럼 순순히 너와의 접촉을 받아들였어. 너의 더러운 손과 검은 얼굴, 그보다 더 검은 눈을.

하지만 용서해줘. 난 너를 집으로 데리고갈 수 없었어. 너와 함께 집으로 갈 수 없었어. 왜냐하면 너는 너무 검었으니까. 네가 역병과도 같은 검은 악몽으로 우리를 적실까 봐, 내가 돌이킬 수 없이 네가 되어버릴까 봐 무서웠어. 네 검은 음부를 들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어. 나는 너를 죽이고 묻어버리고 싶었어. 보육원 앞에 얕게 흙을 파고 봉분조차 없이 너를 묻은 뒤 돌아서고 싶었어. 비가 내리면 흙에서 쓸려나간 네 창백한 검은 몸을 누구든 발견할 수 있도록. 하지만 너는 최초의 낭떠러지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고, 잃어버린 천국에, 동산보다도 너의 기억보다도 더 먼 곳에 있는, 심지어는 최초보다도 더 이전의 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나는 너를 붙잡지 못했어.

네가 천사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언젠가 네가 천사가 될 것이라는 예감을 믿고 싶지 않았어. 복지원에 붙잡혀 가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제나 가장 깨끗하고 비싼 옷을 입고 학교에 갔어. 엄마는 내 블라우스의 분홍빛이 어둠과 먼지에 닳아 지워지지 않도록 자주 옷을 빨아줬어.

달 아래서 나는 그늘에 숨어 쥐새끼처럼 집까지 달려갔어. 아무도 나를 붙잡아 돼지처럼 벌거벗길 수 없도록 미친 듯이, 심장이 찢어질 때까지 달음박질쳤지. 나는 늦은 시간에 홀로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끌려가는 천국을, 눈 멀고 황폐해진 잔혹한 칼날들의 공간을 알고 있었어. 너와 함께 도망쳐온 천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알려주지 않았어. 우리 교실에 침입한, 유리창을 박살내고 들어온 작은 새와도 같은 여자아이는 너뿐이었어. 너는 처음부터 너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비어 있던 의자에 앉았고 책상 위에 적혀 있던 더러운 낙서들을 침으로 문질러 닦았어. 너는 교실에 먼지처럼, 죽어가는 작은 쥐처럼 숨어 살았지.

옆 반의 남교사는 유독 네게 친절했어. 그는 네 어깨를 끌어안았고 고깃덩이처럼 주물렀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불투명한 창문 너머에 번져가는 네 검붉은 어깨를 올려다봤어. 그는 너를 산 채로 잡아먹고 있었어.

너는 눈 먼 짐승처럼 허우적거리면서 쓰러졌고 너의 음부는 늙은 여자처럼 검었어. 난 마치 바로 앞에서 너를 들여다보듯이 상세하게 너의 울음을, 네가 발을 젓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뻣뻣하게 경직된 팔을 토끼의 가느다란 목을 조르듯이 기괴하게 비틀어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 난 무수히 많은 천사들을 원하는 탐욕스러운 신의 추적을 피해 어둠 속을 질주했고 초조하게 현관의 열쇠를 꽂아넣었어.

집 안은 텅 비어 있었어. 어둠으로 채색된 거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희었어. 네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썩어가는 꽃처럼 죽기 직전의 창백한 토끼처럼 그렇게 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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