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2

여자의 입술이 야릇하게 벌어졌다. 그녀는 유리 너머의 불투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평선은 그곳에 없었다. 최초의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땅이 없었던 것처럼. 여자의 몸 위에 천사들의 분진처럼 투명하고 무한한 날개들이 내려앉았다.

교실 문 앞에서 마주친 너는 사탕을 줬어. 레몬맛 노란 사탕을 너는 입 속에서 꺼내 내게 건네 줬어. 난 조금 줄어든, 끈적한 둥근 달과도 같은 구체를 입 속에 넣었고 사탕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있었어.

사실 난 사탕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 하지만 네 입에서 꺼내주는 사탕은 조금 미지근하고 끈적해서 난 네가 건네주는 사탕을 거절한 적이 없어.

책상 위에 걸터앉아 허공을 휘젓는 네 장난스러운 길고 검은 종아리. 네 맨발들.

이곳이 어느 세계의 밤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비가 어디에서부터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낡은 유선 전화기의 전화줄은 돼지의 내장처럼 흘러내린 채였다. 여자가 투입한 시간은 이미 지나가 있었다. 지금 전화기를 들고 있는 이는, 너는 대체 누구일까?

용서해줘, 여자는 흐느꼈다. 네가 앉던 책상을 난 지키지 못했어. 그곳엔 다른 아이가 앉았어. 너보다 희고 부드러운 얼굴을 가지고 있던 작은 남자아이였어. 그 애는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어. 너는 마치 악몽인 것 같았어. 너는 꿈에서만 발생하는 비밀 같았어. 오직 나만이 너를 기억하고 있었어.

국화꽃은 더 이상 희지 않았고 축축하게 젖어서 썩어 버렸고 그 위에는 작고 더러운 날파리들이 들끓었어. 그래도 너는 있었어. 그렇지? 그러니 나를 용서해줘. 너를 죽여주지 못한 나를, 너를 데리고 다른 세상으로 가지 못한 나를, 너를 믿지 못한 나를,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너를 죽이고 싶었던 나를, 그리고 나를 죽이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줘.

여자는 검은 파리들이 달라붙은 얇은 손가락을 들어 피아노를 연주하듯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의식을 붙잡기 위해서는 촉지적이며 물리적인 접촉이 필요하다는 듯. 그렇게 손가락을 움직여 움켜쥐지 않으면 미칠 듯한 정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는 듯. 그렇게 물질화시킨 기억 없이 그녀는 홀로이며 그녀의 존재마자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는 듯.

그녀는 삶보다 많은 것을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삶보다 많은 것을 죽을 수는 없다. 죽음은 삶을 초과할 수 없다.

용서해줘, 여자는 그녀의 입속에서 떨어져 나간 거짓말을 음미하며 입술을 벌렸다. 네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어. 너는 돼지처럼 벌거벗었고 네 음부는 늙은 여자처럼 검었고 네 작고 검은 발이 공중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듯 나는 네가 건네주는 노란 레몬 사탕을 받아 먹었고 네 침에 녹은 사탕은 축축하고 끈적였고 너는 웃었고 마치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는 듯이 죽지 않았다는 듯이 갈기갈기 찢겨지지 않았다는 듯이 그렇게 웃었고 우리는 야광별을 허공에 매다는 것만으로도 별을 가진 것처럼 기뻤어.

어째서 사물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어 있는 것일까? 어째서 아무도 사물들이 가진 생명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 것일까? 너는 박수를 치며 설탕물이 묻어 끈적이는 너와 내 손가락에 달라붙는 날파리들을 쫓아냈고 난 웃으면서 네 손이 악기처럼 경쾌한 소리를 내는 모습을 지켜봤어.

용서해줘. 네게 편지를 부치지 못한 나를. 난 다시 편지를 써야 했어. 하지만 난 다시는 편지를 쓰지 못하겠지. 난 너무 많은 편지를 썼고 이제는 단 한 글자도. 네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이름도 주소도 없이 편지를 부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난 너무 늦게 깨달았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전화는 이미 끊겼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전화를 걸기 전부터, 젖은 숨소리가 들려오기 전부터, 밤이 검게 썩어버리기 전부터, 꽃이 저물기 전부터, 빈자리가 메워지기 전부터, 그녀가 수화기를 들기 전부터, 그녀가 전화 부스에 들어오기 전부터, 빗물에 젖어 별처럼 번득이는 고요한 도로가 생겨나기 전부터, 여자가 존재하기 전부터.

지상 가까이 내려온 달은 물을 먹어 젖은 거대한 눈동자로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여자보다 먼 곳을. 여자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이 달을 마주보았다. 그녀의 흰 눈꺼풀이 말려올라가고 검고 선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우리는 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걸리지 않은 전화, 이어지기 전에 발생하기 전에 사라져버린 사건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마치 그녀의 목소리를 누군가 듣고 있는 것처럼. 마치 그녀의 악몽을 누군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시선도 들음도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달은 별이 아니니까 그리 뜨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달에 가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얘기했고 너는 들었어. 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어. 너는 달에 갈 거라고 그리고 나 역시 너와 함께 갈 거라고 했어.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니까.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거울의 두 면과도 같았으니까.

레몬 사탕의 단맛이 입 속에 끈적하게 감돌았어. 네가 토끼들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난 끝까지 밝히지 않았어. 난 더 이상 누구에게도 네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엄마가 너를 아느냐고 물어보았을 때도,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작고 검은 아이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고개를 저었어. 거짓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니야.

난 정말 그 아이를 몰랐어.

나는 그 아이가 너라고 생각할 수 없었어. 너는 너무도 순식간에 떨어졌고 그대로 달로 갔으니까. 지상에 남은 부서진 너는 네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너였던 거야. 그렇지? 달에 간 너도, 달에 가지 못하고 남겨진 너도.

너는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너를 버렸고 내게 남겨진 것은 산산조각난 채 유달리 긴 목이 부러진 너뿐이었어. 싱싱한 생선의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어. 난 달에 가지 못한 너를 두고 달에 갈 수는 없었어.

나를 용서해 줘. 나는 달에 간 너를 따라갈 수 없었어. 달에서 너는 혼자일 거야.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달로 부치는 편지들의 수취인 자리를 메우지 못해서 달로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달로 가지 못해서 나는 네게 편지를 부칠 수 없었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를 따라서 난 그곳으로 갈 수 없었어. 왜냐하면 이제 사라져버린 썩은 흰 꽃의 흔적들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으니까. 나는 나를 두고 너를 두고 사라진 너를 따라서 달에 갈 수 없었어. 약속했는데. 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하지만 네가 달에 너를 남겨두고 또다시 홀로일 너를 버려두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아. 혼자 남겨지는 건 너무 두렵고 외로운 일이니까. 몇 번씩 너를 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아. 나는 네가 죽기를.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숨을 골랐다. 비순차적인 밤의 공기가 여자의 내부로 틈입하고 있었다.

천사들은 달에서 처형되었다. 달은 죽은 천사들의 야광성 날개로 은은하게 번득인다. 여자는 끔찍하게 거대한 달을 멍하니 마주보았다. 달을 살해하기 위해 몸을 내던진 테러범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달이 무서워 도망친 미치광이들은? 테러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달을 향해 던진 사제 폭탄들은 달이 아닌 인근의 높은 유리 건물들에 처박혔다. 정부는 테러범들이 볼셰비키, 맑스주의 노인들이라고 발표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테러범들은 볼셰비키 노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정부에서 그들의 온상지에 뿌린 검은 폭탄들을 맞고 죽었고 달을 향해 테러를 감행한 자들은 유령들이 아니었다.

테러범들은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집을 갖지 못한 아이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어둠 속에서 멀쩡한 눈을 뜨고 흐릿한 글자들을 노려보던 비-맹아 아이들이었다.

최후의 열매처럼 벌어진 입들은 웃고 있었다.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아이들, 늙은 여자의 검은 음부를 가진 아이들은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몸에는 한 방울의 눈물도 남지 않았으니까.

꽃은 썩은 채 말라붙었고 미친 여자로 자라난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한밤의 가장 악독한 마녀들처럼 웃었다. 늙어버린 아이들은 빨갱이들이 아니었다. 그 애들의 피는 붉었지만 혀는 검었고 유적 인간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재산의 분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정의와 사회에도 정의로운 사회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 애들은 그저 살아있고 싶을 뿐이었다. 살아 있기 위해서, 그들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집요하게 비추어 그들을 목 매달게 만드는 달을 죽여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늙은 아이들, 점자 말고는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눈 멀지 않은 아이들은 달이 그들의 벌어진 다리와 흘러내리는 붉은 생명을 음험한 노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므로, 아이들은 달을 터뜨리지 않고는 살아 있을 수 없었다.

검은 그을음과 흉터 자국을 매단 집요한 노란 눈동자는 끔찍하게 오만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지날수록 달은 감당할 수 없이 커져갔다.

달이 날 죽일 거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에게 목소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달은 아무도 죽이지 않아요. 당신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달의 인력이 은밀하게 끌어당기는 물들의 검음에 당신은 속해 있지 않아요. 당신이 달을 믿지 않으면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달을 믿지 않을 수 있어? 하고 여자는 소리쳤다. 달을 믿지 않는 아이들은 없어. 우리는 모두 달에서 왔으니까. 우리는 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너도 달로 간다고 했잖아. 달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마지막 남은 폭탄을 던진 것은 여자였다. 화약과 유리조각들 쇳조각과 모래를 채워넣은 폭탄에 불을 붙이고 음험하고 역겨운 달의 희고 노란 눈을 향해 던져버린 늙은 아이는.

하지만 이렇게, 달은 살아 있었다. 살아서 여자를 마주보고 있었다. 집요하게 여자를 바라보는 거대한 살을 여자는 이상스러운 희열로 바라보았다.

그날도 이른 달이 떴다. 창문 밖에서 당장 추락할 듯 지상 가까이 내려온 달을 보고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세계의 멸망을 가슴 깊이 소망했어. 여자는 속삭였다. 끝을 목도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은 그 무엇도 없었어. 우리는 달로 갈 거였어. 우리를 마중하러 나온 달의 온순하고 부드러운 등의 곡률 위에 올라타 하늘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갈 거였어. 우리가 원하는 건 전부 달에 있었으니까. 약간의 후회와 외로움, 슬픔만을 남겨둔 채 우리는 달로 갈 거였어.

달은 너무 가까이 내려왔어. 우리는, 너를 잊은 다른 아이들과 너를 잊지 못한 나는 달을 잊을 수 없었어. 우리는 달을 원망하기 시작했어. 달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은은하고 노란 불빛으로 비추고 있었어.

남교사는 너를 찾지 않았어. 너와 내가 함께 나누어 먹던 노란 레몬캔디를 주었던 그는 감옥에 갔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그랬어. 네가 옥상에서 떨어진 건 그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너는 나와 약속했기 때문에 달에 간 거야. 너는 나와 달에서 만나기 위해서 떨어진 거야. 지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었어.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어.

네 음부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났어. 갓 잡아서 내장을 빼낸, 붉은 피에 물든 생산의 싱싱한 악취가 네 치마 위로 확 풍겨왔어. 책상에 앉아서 네가 발을 저을 때마다 속옷을 입지 않은 네 검은 음부가 언뜻언뜻 드러났고 너는 야광 별이 매달린 하늘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고 속삭였지.

우리는 달에 대해 이야기했어. 달이 그날의 너를 보고 있었다고 너는 말했어. 하지만 네가 말하기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어. 돼지처럼 헐벗은 너를, 천사들에게 날개를 맡긴 채 드러누운 네 검은 몸을, 노인처럼 검게 짓무른 네 음부를 달이 집요한 젖음으로 비추고 있었다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 복지원의 원장과 교사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이므로, 그들 역시 어릴 적에 가난을 앓았던 슬픈 아이들이었으므로, 그렇게 악독한 범죄를 저질렀을 리 없다고. 그건 모두 내 망상에 불과하다고 그랬어. 거대한 쥐처럼 불그죽죽한 잿빛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경찰들은 화를 내며 나를 쫓아냈고 엄마나 아빠도 마찬가지였어. 그건 가장 악독하고 비열한 종류의 망상이라고 했어.

하지만 나와 같은 꿈을 꾼 아이들이 몇 명 있었어. 아이들은 자라서 테러범이 되었고 불가능한 테러를 모의하는 미치광이들이 되었고 미친년들은 속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미친 음부로 검게 닳아버린 창녀의 음부로 전화부스들을 쏘다니면서 비밀스러운, 존재하지도 않는 통화를 하면서 서로에게 무한한 실패를 전하고 있어.

정부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어. 정부는 네가 사실이 아니라고 결정했어. 복지원의 선한 노인들은 아직도 돼지처럼 벌거벗은 여자아이들의 맨어깨를 고깃덩이처럼 주무르고 추락한 천사들은 부러진 날개에서 피를 흘리면서 추락하고 달은 아직도 거대하고 음험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어.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이 아니야. 왜냐하면 사실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사실을 확증하는 입들, 증인의 자격을 갖춘 이들의 눈들과 펜들이 그렇게 확언했으니까. 달은 절망적으로 지상 가까이 내려와 우리를 짓누를 듯이 육중한 몸으로 침잠하고 있는데 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달의 사실이 사실이 아닌 망상이라고 말해. 너는 달로 갔는데 그들은 네가 달로 가지 않았다고 그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고, 이곳에 떨어져 남은 너의 작고 미세한 뼛가루만이 전부라고 말해.

우리가 날려보낸 폭탄에 무너져버린 유리 빌딩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들이 살고 있었어. 그 사실들의 이름을 우리는 알지 못해. 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달을 터뜨리고 싶었어. 너의 기다림을 사실 이전의 것으로 취소해버리고 싶었어.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 달은 너무 가까이 다가왔고 날이 갈수록 점점 아래로 점점 거대하게 침잠해왔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달에서 네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검고 냄새나는 음부가 눈 앞에 보일 것 같아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아. 난 슬픔도 두려움도 없이 달을 바라봐.

여자는 대사를 읊듯 긴 말들을 중얼거렸다. 늙어버린 아이들이 천사들이 모두 같은 곳에서 오지 않았음을, 그리고 같은 곳으로 가지 않을 것임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앉은 모래사장 위에는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축축하고 음험하고, 서글픈 냄새가 났다. 그러나 모든 천사들이 슬프고 축축하고 음험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달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는 달을 사실로 만들고 싶었다. 달을 테러해서 달을 폭발시키고 팽창하여 터져버린 달의 살갗으로 세계를 물들여서 지상에 달의 붉게 젖은 혈흔을 퍼뜨리고 싶었다. 그 핏방울만큼의 사실들을 심어내고 싶었다. 달의 육신으로 젖어든 땅에는 달을 닮은 야광별이 피어날 것이다. 달의 탯줄을 매단 여자아이들은 모두 달을 제 부모처럼 증오했다. 달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배꼽들은 달의 아이들의 잃어버린 흔적들이었다.

달을 믿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아요. 목소리는 속삭였다. 달은 당신들을 사랑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요. 달은 해변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와 교수대처럼 고요하게 머물 뿐이에요. 달의 시선은 누구도 해치지 않고 달의 구멍은 그 누구에 대한 저주의 말도 내뱉지 않아요. 달을 사랑하고 달을 미워하고 달을 그리워하고 달을 기다리고 달을 죽이고 싶어 하는 건 당신들뿐이에요 달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달에 생명이 없다고 했다. 달은 황무지이며 오래전에 버려진 실패한 땅이고 달에 가겠다는 약속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여자아이는 자살했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옥상에서 떨어진 아이는 다시는 살아날 수 없고 남교사는 감옥에 갔고 남겨진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이 아닌 잘못들은 용서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숙면과 운동, 일정량의 햇빛뿐이라고 했다.

목소리는 여자에게 취미를 가지라고 했다.

여자는 이미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무슨 취미요?

여자는 테러라고 대답했고 목소리는 웃지도 않고 침묵했다.

난 곧 감옥에 가게 될까? 유리 건물에 살고 있던 이름 모를 사실들을 무너뜨린 나는 감옥에 가서 남교사와 만나게 될까? 그 사람은 네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여자는 흐느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감옥에 가지 않았다. 불가능한 테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테러는 늙은 아이들이 아닌 맑스주의자 빨갱이들이 저지른 것이었고 그러니 여자는 영원히 감옥에 잡혀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여자의 죄는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여자의 악행과 테러와 삶은 모두 악몽 속에 있었으며 여자의 악몽을 바라보는 유일한 눈동자인 달을 감옥과 죄와 벌과 유효한 증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믿지 않으니까.

용서해줘, 여자는 속삭였다. 네가 나를 용서하면 더는 네게 전화를 걸지 않을게.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작은 숨소리뿐이었다. 어쩌면 여자 자신의 숨소리일지도 모를.

어쩌면 너는 달에 가지 못했을지도 몰라,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네 책상에 올려진 썩어가는 흰 꽃을 보면서 너는 우두커니 서 있었을지도 몰라. 너는 나를 부르려고 사라진 투명한 입술을 벌렸고 끝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을지도,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네 자리에 앉은 이름 모를 아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이곳에 남지 않은 네 자리를 찾아 먼 곳으로 떠났을지도, 달조차 비추지 못하는 네 투명하고 불가능한 사실을 질질 끌며 계단을 올라갔을지도, 계단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남교사는 네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네 더러운 원피스 자락을 끄집어올리지도 네 검게 으물러 썩어가는 음부에 손바닥을 대고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은 채 너를 지나쳐 그의 교실로 들어갔을지도,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너는 알 수 없는 슬픔에 젖은 채 바라보았을지도, 너는 고기반죽을 주무르듯 너를 거칠게 쥐어뜯으며 흐느끼던 미치고 선량한 남자들을 떠올렸을지도, 언제나 네게 유일한 자리였던 그 아픈 몸들을 기억했을지도, 네게 글을 가르쳐주고 글을 뺏어갔던 네게 최초의 공간을 열어주고 그 공간을 어둠으로 물들였던 너를 천사로 만들고 네 날개를 잘라내었던 그 거칠고 따뜻했던 역겨운 손들을 떠올렸을지도, 계단 위에 내려앉은 희고 부드러운 먼지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럽게 느껴졌을지도, 계단의 끝에 다시 올라선 뒤 나와의 약속을 다시 떠올렸을지도, 그리고 어쩌면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을지도,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빗겨간 약속을 통해서 만나고는 했으니까 홀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나는 네 곁에서 네가 받아온 커다랗고 탐스러운 노란 사탕을 나누어 먹고는 했으니까 내 검고 둥근 눈을 들여다보면서 너는 처음으로 다른 생을 상상했으니까 내가 초대한 적이 없는 네가 뒷문을 열고 뛰어들었을 때 나는 네 안에 남겨진 끈적한 설탕물과도 같은 내 슬픔을 발견했으니까 너는 달이 아닌 이곳에 남기 위해 뛰어내렸던 건지도 몰라. 하지만 용서해줘. 난 너를 찾지 못했어. 투명하게 사라진, 사실이 아닌 너를 나는 그 어디에도 옮겨적지 못했어. 너는 너무도 희박하고 너무도 불가능한 존재여서 아무도 너를 번져 흐르지 않았어. 너를 기억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너는 소문조차 되지 못했어. 한순간 안개처럼 부풀어 올랐던 너의 희미하고 추상적인 소문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어.

남교사는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했어. 신발끈으로 목을 매고 죽었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사람도 이제는 사실이 아니야. 감옥에서 그를 만난다고 해도 그는 유령일 뿐이야 유령은 사실이 아니므로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떤 사실도 발생시키지 못한 채 서로의 투명한 부재를 응시하며 슬픔에 몸을 떨 수밖에 없겠지. 어쩌면, 슬픔조차 없을지도 몰라. 투명함도 분노도 없을지 몰라. 왜냐하면 너는 그와 약속한 적이 없으니까. 달에서 만나겠다는 약속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었으니까.

살인자는 그가 죽인 생물의 생명과 존재를 분유하게 된대. 하지만 너는 너무 많은 곳으로 흘러넘쳤지. 너는 마치 지상을 다 뒤덮을 것처럼 얇고 투명한 빛의 분말로 퍼졌어. 그 빛은 너무 희미해서 아무도 우리가 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어. 너는 실패했어. 너는 사실이 되기에는 너무 투명하고 가벼웠어.

여자의 얇고 흰 손가락뼈가 공중에서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의 손톱 끝에 희고 은은한 달빛이 묻어났다. 여자는 미치지 않은 것처럼 조용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너와 같은 배꼽을 가진 아이들도 너를 기억하지 못했어,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네가 없는 곳에서, 네가 너무 많은 곳에서 우리는 죽지 않고 늙어갔어. 하지만 난 달을 잊지 않았어. 달은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나를 감시하듯 나를 비난하듯 그러나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 투명한 곡률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달이 미워서 죽어버리고 싶었어. 달을 오래 바라봤기 때문에 미쳐버린 거라고 목소리는 말했어.

나는 그 목소리를 찢어버리고 싶었어. 하지만 목소리는 찢겨진 채로 더 많은 목소리가 되어서 내게 속삭였어. 달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어. 달을 사랑하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했어. 검은 물을 오래 바라보는 아이들이 슬픔을 닮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물에 뛰어드는 것처럼 나는 달 때문에 파멸할 것이라고 했어. 목소리들은 네가 달에 가지 않았다고 했어. 지상에 남지도 않았다고 했어. 네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했어. 네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어. 복지원의 아이들은 건강하고 튼튼한 어른으로 자라나 복지원의 교사들이 되었다고 했어. 복지원에는 절망적으로 고깃덩이를 더듬고 깨무는 미친 노인도 없고 벌거벗은 여자아이들도 없다고 했어.

우리의 학교 뒤편 동산에는 복지원이 없다고 했어.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학교는 바다에 있을 거라고 했어. 내 출생지는 바닷가로 되어 있으니까 나는 분명히 그 고장의 유일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을 것이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바다를 기억하지 못했어. 나는 바다에서 태어난 것이 확실하므로 그것이 나를 구성하는 가장 거대하고 명료한 사실이므로 바다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미쳐버린 것이라고 했어.

달을 너무 많이 오래도록 들여다보아서, 달이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려서 나는 미쳐버린 것이라고 했어. 일정량의 햇볕과 일주일에 세 번의 아침 산책과 규칙적인 식사와 웃음이 없으면 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미쳐버릴 거라고 했어. 미치면 달에 갈 수 있냐고 내가 물었을 때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어.

목소리는 울고 있었어. 찢겨진 채로 너덜거리는 그 많은 목소리들이 전부 울고 있었어.

여자의 이마 위에 내려앉는 작고 투명한 날파리들은 비밀스러운 음률을 따라 춤을 추듯 경련하고 있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희고 비린 물에 젖어든 여자의 볼과 입술에서는 배를 가른 여름철의 생선처럼 비릿한 악취가 풍겼다.

여자의 입술은 지나치게 익은 과일처럼 천천히, 음험하게 벌어졌다.

달은 너무도 거대하고 노란, 불멸의 사실이었다. 여자는 영원히 달의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기울어진 미친 중력으로부터.

여자의 흰 무릎 위를 부산스럽게 기어다니는 검은 거미의 이름을 여자는 몰랐다. 벌레들의 탐욕스러운 이빨에 깨물린 살결의 이름 역시. 여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사실들은 여자의 피와 살로, 여자가 모르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여자가 이름 모를 고기와 수액을 삼키며 살아온 것처럼.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를 레몬 맛 사탕의 둥글고 끈적한 성분이 여자를 살찌우고 여자의 입 속에 영원한 슬픈 냄새로 남아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슬프지 않을지도 몰랐다.

여자는 부드럽고 야릇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그렇게 슬프지 않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너는 슬픔도 절망도 불행도 아니니까 달은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으니까 사실은 행복하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으니까.

용서해줘. 나는 네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긴 삶을 가지기를 바라. 죽음보다도 긴 삶을. 마치 달처럼, 집요하고 끈질긴 음험한 사실을 네가 가지기를 바라. 네가 나와 함께 미치기를 바라. 네가 여전히 달을 믿기를 바라. 너를 찾아가지 않는 나를 네가 아직도 기다리길 바라. 나를 기다리는 너를 견디지 못한 내가 달을 테러해서 산산조각 내는 데 성공한 뒤에도 네가 여전히 달의 끔찍한 잔해들 위에서 나를 기다리길 바라. 용서해줘. 나는 차라리 네가 영원히 외롭기를 바라. 네가 홀로, 나와 함께이길 바라. 사실보다 긴 삶을 네가 살고 있기를 바라. 달에서. 그리고 달이 아닌 모든 곳에서. 불가능한 모든 곳에서. 아직 내게 알려지지 않은 모든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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