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혹성의 물방울

같은 몸에 거주하는 두 개의 인격은 그 정의상 서로를 모르고 있다.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두 개의 인격은 그 정의상 하나이다.

초록 혹성이 불타 사라지는 동안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너희의 사랑스러운 패잔병들은 뭉근한 머리를 꺼떡거리면서 잔해로 변해가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꿈의 최후는 그리 낭만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았다. 소년의 귓바퀴에 모래를 흘려넣던 사내는 소년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소년은 끝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붉은 귓바퀴는 붉은 그대로 사라졌다. 선생은 끝내,

들리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소년에게는 더 이상 손목이 없었으므로 사내는 소년의 손목을 잡고 달아날 수 없었고, 소년에게는 더 이상 어깨가 없었으므로 사내는 소년을 끌어안을 수 없었다. 소년에게는 더 이상 가슴이 없었으므로 가쁜 숨소리를 훔쳐 들을 수도 없었다. 더 이상의 일상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일상은 불가능했다.

초록혹성에서의 결말이 더 극적이었다면 너는 결말 이후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만약 혹성이 무너지기 전에 너희가 모두 탈출했더라면. 사실 그곳에 살 때 탈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비정원의 위, 어슴푸레한 밤의 꼭대기에 걸려 있는 달의 그림자는 언제나 푸르스름한 색이었다. 지저분한 얼룩처럼 매달린 달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혁명가 여자는 그것이 너희의 탈출을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누군가 발견할 때를 대비해 그 정확한 태, 세부적인 기계장치를 그림자 속에 숨기고 잠자코 결말을 기다리고 있는 UFO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너는 그녀의 말에 큰 관심조차 없었다. 연극에 등장하는 총이 반드시 발사되리라고 믿는 것도 아니었고, 너의 삶이 대단한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혁명가 여자는 마치 꿈을 꾸듯 달을 바라보았다. 너희에게 어떠한 기적도 고통도 주지 못할, 영원히 닿지 못할 단순한 얼룩을. 제 빛을 오롯이 채우지도 못해 갈수록 희박해지는 어스름이 너희에게 대단한 폭발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도 믿는 것 마냥.

연아, 내가 죽고 나면 넌 저걸 타고 도망가.

저게 뭔데요?

알잖아. UFO.

저건 그냥 달인 것 같은데.

아니야. 알잖아. 난 여기 오기 전에 연극을 공부했었다고. 탈출구가 없는 무대는 없어.

너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자살하지 않은 작가의 글을 너는 신뢰하지 않았다. 현이 두고 사라진 이야기 속 소년은 현을 끌어안지도 겁간하지도 사랑하지도 상처 입히지도 않았다. 그 애는 이름도 없이 네가 끝내 이해하지 못할 지독한 향기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현의 소설에 네가 등장한 적은 없지만, 너는 초록 혹성에서 현의 최후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흐느꼈다. 네가 울 때마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던 녹색 진물은 언제나 너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너는 오고 있었다.

불을 던지며 노는 애들의 손이 다 타버렸으면 좋겠어. 다시는 불을 만질 수 없게. 불을 볼 수 없게.

여자는 시뻘건 배를 부여잡고 울었다.

코코펠리 여왕은 너희를 구출하러 오지 않았다. 전쟁을 선포한 뒤, 형광 빛깔의 미사일 몇 개를 쏘아 보냈을 뿐이다.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불덩이에 맞아 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판이 길어지는 동안 재판의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너는 단지 상상했을 뿐이다.

달에 세운 기지에서 여왕은 십 년 가까이 보냈다. 측근들은 코코펠리 혹성이 이전처럼 하나뿐인 태양을 잃고 멸망할 위기에 대비하여 작은 별들을 여럿 만들어두기를 원했다. 사제는 여왕에게 아홉 개의 작은 별들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였고 천문학자는 돌아오는 아홉 개의 새로운 달들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머지않아 궤도에 보일 것이라고 그는 수천 개의 숫자들을 들이밀며 장담하였다. 한때 여자가 처음 알려주었던 숫자들의 의미를 그녀는 더 이상 읽어낼 수 없게 되었다. 코코펠리 여왕이 정복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또한 전파재킹을 위해 건설된 기지를 관리하기 위해 달로 향하였을 때, 신하들은 은밀하게 그녀의 뒤를 쫓을 아홉 명의 어미들을 사주하였다. 밤마다 천막으로 찾아드는 얼굴들을 여왕은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노란 혹성에서 매일같이 낯선 외계와 조우하는 꿈을 꾸며 공터를 탐사하던 소녀가 형광색 비행물체를 보고 손을 뻗던 순간, 그녀는 하나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비행물체가 소녀의 머리 위로 날아드는 순간, 소녀가 알려지지 않은 하루와 마주하는 순간, 초록 혹성의 소수 부족들이 전시 암호로 전유된 그들의 모어를 듣고, 익숙한 어휘들의 낯선 배열에 어리둥절해 하던 순간, 그녀는 하나의 얼굴을, 하나의 가슴을, 하나의 뒷모습을 끌어안았다. 얼굴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동정하지도 위로하지도 원망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름 모를 얼굴들과 함께 잠들 뿐이었다.

십 년 동안 그녀는 아홉 명의 자식들을 낳았다. 첫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두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아이에게 입맞추었다. 세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아이를 배 위에 올리고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밤새도록 듣고 있었다. 여섯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일곱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을 수 없었다. 여덟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아이에게 입맞출 수 없었다. 아홉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여왕은 울지 않는 아이의 검은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 보았다.

아이는 여자에게 소곤대며 이야기했다.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당신에게는 죄가 없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탄생의 순간이 기적도 축복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여자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아마 아이가 범한 최초의 죄라는 것을, 아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만큼 여자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미안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이미 범해진 탄생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아이는 여자에게 죄가 없다고 했으므로, 그녀를 원망하지도 않는다고 했으므로, 여자는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조차 갖지 못한 것이었다. 여왕은 아홉 명의 아이들을 냉동실에 얼려 두었다. 본래 종교를 가진 각 혹성에서 모시던 신의 사체를 보관해 두기 위한 용도의 장치였다. 불만을 표하는 신하들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반짝이는 별들이란 그 크기에 관계없이 모두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아홉 별이 깨어날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 그저 상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별들의 신성한 미래는 그들의 전설이 지켜줄 것이었다. 아무도 익어가는 이야기의 근처에서 함부로 서성이지 않았다. 냉동실에 얼려둔 별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천천히 배가 곯아 굶어 죽어버릴 때까지 아무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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